[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초여름[初夏] - 곽예(郭預) 天枝紅卷綠初均(천지홍권록초균) 가지마다 꽃이 지자 신록이 한창인데 試指靑梅感物新(시지청매감물신) 푸른 매실 맛을 보니 감흥이 새로워 困睡只應消晝永(곤수지응소주영) 긴 낮을 보내기는 곤한 잠이 제일인데 不堪黃鳥喚人頻(불감황조환인빈) 꾀꼬리가 수시로 날 찾으니 어찌하리오 평상(平床)은 솔바람을 맞으며, 책을 읽고 바둑을 둘 때 또는 낮잠을 잘 때 쓰는 것으로 대청이나 누(樓)마루에 놓여 있었다. 기다란 각목(角木)이 일정 간격으로 벌어져 있어 통풍이 잘되므로 여름철에 제격인데 두 짝이 쌍으로 된 평상은 올라서는 곳에 난간이 없는 것이 보통이다. 조선 전기 방랑의 천재 시인이면서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산중에 열 가지 경치를 말했는데, 그 가운데는 평상 위에서 글 읽는 것도 들어 있다. 조선 후기 선비 화가 윤두서(尹斗緖)가 그린〈수하오수도(樹下午睡圖)〉에는 여름철 시원한 나무 그늘에 평상을 놓고 낮잠을 즐기는 사람이 보인다. 또 단원 김홍도(金弘道, 1745~1806?)가 그린 〈삼공불환도(三公不換圖)〉에도 사랑채 대청마루에 평상을 놓고, 그 위에 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2022년 한 일간지는 “표구, 미술품 보존 기술 넘는 예술”이란 제목으로 《표구의 사회사》라는 책 서평을 실었습니다. 특히 기사에는 “표구(表具): 그림의 뒷면이나 테두리에 종이 또는 천을 발라서 꾸미는 일”이라는 내용이 있었지요. 그런데, 일제강점기 이후 일본으로부터 ‘표구(表具)’라는 말을 수입해서 쓰는 바람에 비록 한자말이기는 하지만 조선시대 때 쓰던 ‘장황(粧䌙)’이란 말은 그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심지어는 《조선왕조실록》 원본에 ‘장황(粧䌙)’이라 쓰인 것을 국역한답시고 ‘표구’라고 했으니, 기가 막힐 따름입니다. 한국어와 일본어 비교에 정통한 이윤옥 박사에 따르면 “자존심 하나로 먹고사는 100년 전통을 가진 교토 야마기타(山北光運堂) 표구점 누리집에 소개하는 표구역사(表具の歴史)를 보면 ‘표구는 먼 아스카시대의 불교 전래와 함께 건너온 두루마리용 경전에서 유래한다. 이어 불화(佛画)에도 표구가 쓰였다’라고 밝힙니다. 또 ”여기서 아스카시대란 서기 592년부터 710년까지 118년 동안을 말하며 552년에 백제 성명왕으로부터 불상, 경전 등이 전해졌는데, 이를 보면 표구 기술의 원조는 한반도라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문화재청은 지난 5월 27일 <순천 송광사 영산회상도 및 팔상도>를 국보로 지정했습니다. 200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가 이십여 년 만에 이번에 국보로 지정된 「순천 송광사 영산회상도 및 팔상도」는 송광사 영산전에 봉안하기 위해 한꺼번에 그린 불화로, 영산회상도 1폭과 팔상도 8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팔상도는 석가모니의 생애에서 역사적인 사건을 8개의 주제로 표현한 불화로, 팔상은 불교문화권에서 공통으로 공유되는 개념이지만 이를 구성하는 각 주제와 도상, 표현 방식은 나라마다 차이가 있지요. 우리나라의 경우 조선 초기에는 《월인석보(月印釋譜)》의 불교경전 내용이나 교리를 알기 쉽게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변상도를 빌린 팔상도를 그리다가 후기에 접어들면서 《석씨원류응화사적》에서 제시된 도상으로 새로운 형식의 팔상도가 유행하였는데, 후기 팔상도를 대표하는 작품이 바로 순천 송광사 팔상도입니다. 현재 송광사성보박물관에 보관 중인 「순천 송광사 영산회상도 및 팔상도」는 화기(그림의 제작과 관련하여 발원자, 작가 등의 내용을 담은 기록)를 통해 1725년(조선 영조 1)이라는 제작 연대와 의겸(義謙) 등 제작 화승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장장채승(長長彩繩:오색의 비단실로 꼰 긴 동아줄) 그넷줄 휘늘어진 벽도(碧桃, 선경[仙境]에 있다는 전설상의 복숭아)까지 휘휘 칭칭 감어 매고 섬섬옥수(纖纖玉手) 번듯 들어 양 그넷줄을 갈라 잡고 선뜻 올라 발 굴러 한 번을 툭 구르니 앞이 번 듯 높았네. 두 번을 구르니 뒤가 점점 멀었다. 머리 위에 푸른 버들은 올을 따라서 흔들 발밑에 나는 티끌은 바람을 쫓아서 일어나고 해당화 그늘 속의 이리 가고 저리 갈제” 이 구절은 판소리 <춘향가> 가운데서 춘향이가 그네 타는 장면인데, 그네뛰기는 단옷날의 대표적 민속놀이다. 우리 겨레는 예부터 설날, 한식, 한가위와 함께 단오를 4대 명절로 즐겼지만 이제 그 명맥이 끊길 위기에 놓였다. 단오의 이름들과 유래 단오는 단오절, 단옷날, 천중절(天中節), 포절(蒲節 : 창포의 날), 단양(端陽), 중오절(重午節, 重五節)이라 부르기도 하며, 우리말로는 수릿날이라 한다. 단오의 '단(端)'자는 첫 번째를, '오(午)'는 다섯으로 단오는 '초닷새'를 뜻한다. 중오는 오(五)의 수가 겹치는 음력 5월 5일을 말하는데, 우리 겨레는 이날을 양기가 왕성한 날이라 생각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문화체육관광부 국립한글박물관(관장 김일환)은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한글로 나라를 지키고 한글을 통해 세상을 일깨운 ‘한글보훈인물’을 기린다. 한글로 문화독립을 이루어 낸 수많은 위인 가운데 시대와 분야에 따라 안배하여 정리한 10여 명을 기린다. 새로운 문자문화 시대를 연 사람들 조선의 제4대 임금 세종(世宗, 1397-1450)의 훈민정음 창제는 말과 글이 하나 된 풍요로운 세상을 열었고, 정인지(1396-1478), 박팽년(1417-1456), 신숙주(1417-1475), 성삼문(1418-1456) 등의 집현전 학사는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의 해설서 《훈민정음 해례본》을 만들어, 새로 만든 문자인 한글을 사람들이 익히고 쓸 수 있도록 널리 퍼뜨리는 데 이바지했다. 이들은 조선은 물론 지금의 한국을 풍요로운 문자문화 사회로 이끈 주역들이다. 한문 중심 사회에 한글로 맞선 사람들 한글문학 확산에 이바지한 허균(1569~1618)과 한글로 외국어를 가르친 역관 최세진(1468~1542)은 당시 지식사회의 근본을 이루었던 한자나 중국어가 아닌 한글을 써서 한글의 대중화와 보편화에 이바지했다. 한자문화권인 동아시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가무형유산엔 없지만, 시도무형유산에는 ‘필장(筆匠)’이 있는데 필장은 문방사우(文房四友)의 하나인 붓을 만드는 사람 또는 기술을 말합니다. 붓은 털의 품질이 가장 중요한데, 붓끝이 뾰족해야 하는 첨(尖), 가지런해야 하는 제(濟), 털 윗부분이 끈으로 잘 묶여서 둥근 원(圓), 오래 써도 힘이 있어 한 획을 긋고 난 뒤에 붓털이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건(健)의 네 가지 덕을 갖추어야 한다고 하지요. 털의 재료로는 염소(백모)ㆍ여우ㆍ토끼ㆍ호랑이ㆍ사슴ㆍ이리ㆍ개ㆍ말ㆍ산돼지ㆍ족제비 등의 털을 쓰며, 특히 노루 앞가슴 털로 장식용 붓을 만들기도 하는데 이를 ‘장액붓’이라고 합니다. ‘제작과정은 우선 털을 고르게 한 뒤에 적당량을 잡아 말기를 한 다음 털끝을 가지런히 다듬는 ‘물끝보기’ 과정을 거친 뒤 대나무와 맞추고 마무리 작업을 하는 등 100여 번의 손이 가야만 하지요. ‘능서불택필(能書不擇筆)’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글씨를 잘 쓰는 이는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경지에 오른 사람은 도구나 재료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 실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고 하지요. 선무당이 장구 나무란다는 말도 있고, 훌륭한 목수는 연장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유성룡은 조정에 선 지 30여 년, 재상으로 있은 것이 10여 년이었는데, 임금이 특별히 사랑하여 귀를 기울여 그의 말을 들었다. 경악(신하들이 임금에게 유교의 경서와 역사를 가르치는 일)에서 선한 말을 올리고 임금의 잘못을 막을 적엔 겸손하고 뜻이 극진하니 이 때문에 상이 더욱 중히 여겨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유성룡의 학식과 기상을 보면 모르는 사이에 진심으로 기뻐하며 정성을 다하여 따를 때가 많다.’라고 하였다.” 위는 《선조실록》 211권, 선조 40년(1607) 5월 13일 기록으로 ‘전 의정부 영의정 풍원 부원군 유성룡의 졸기’ 부분으로 “임금이 유성룡의 학식과 기상에 진심으로 기뻐하며 정성을 다하여 따를 때가 많다.”라고 한 부분이 소개되어 있다. 백성을 버리고 의주를 건너 명으로 도망가려 했다가 유성룡의 간곡한 만류로 국경을 넘지 않았음을 물론 조선시대 최악의 임금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선조도 류성룡을 이렇게까지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나 보다. 그 서애 유성룡이 재상이었을 당시 그의 생가가 있었던 서울 중구 필동 서애길에서는 어제(6월 7일) 저녁 4시 ‘남촌문화포럼’(대표 김복규) 주최, ‘(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에는 ‘카멜리아힐’이 있습니다. ‘카멜리아힐’은 주로 동백꽃으로 많이 알려졌지만, 최근엔 수국꽃으로도 유명합니다. 우리의 토종 동백꽃은 모두 붉은 홑꽃잎이며, 분홍동백과 흰동백은 아주 드물게 만날 수 있습니다. 겹꽃잎에 여러 가지 색깔을 갖는 동백도 흔히 볼 수 있지만, 이는 자연산이 아니라 일본인들이 만든 고급 원예품종이 대부분입니다. 동백은 서남해안 지방은 물론 우리나라 섬 지방 어디서든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는데 한국과 대만, 일본, 중국 등에 분포하는 동아시아 원산 꽃입니다. 문헌 가운데 고려 말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는 오래전부터 동백을 좋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동백나무는 정부가 지정한 나라 밖 반출 승인 대상 생물자원으로 몇몇 자생지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을 정도로 우리 토종 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동백(冬柏)으로 부르는 것을 학명이 ‘Camellia japonica L.’이라 하여 ‘카멜리아힐’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히려 멋이 없어 보입니다. 물론 ‘카멜리아힐’에는 곳곳에 “동백 기념품은 여기”, “꽃 한 송이, 풀 하나가 모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5월 26일 서울남산국악당에서는 이애주한국전통춤회의 ‘법열곡(法悅曲)’ 공연이 열렸습니다. 특히 이날 본 승무는 그동안 많은 무대에서 보아온 모든 승무를 잊게 만든 거대한 춤이었지요. 승무가 느린 염불부터 빠른 당악까지 다양한 장단에 추는 춤과 북놀음까지 담고 있는 전통춤 중의 기본이자 법무이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한성준에서 한영숙으로, 한영숙에서 이애주로, 이애주에서 그의 제자들로 이어진 전 과장 춤사위를 모두 담은 완판 승무였기 때문만도 아니었습니다. 이날 승무는 삶의 온갖 몸짓이 함축적으로 표현된 춤일 뿐만이 아니라 하늘과 땅과 그 사이 인간이 추는 춤은 삼재(하늘ㆍ땅ㆍ사람) 사상의 토대 위에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삼세를 연결하는 힘이 있어 춤 자체가 단순히 어떤 행위를 표현하기 위한 몸짓이 아니라, 우주 만물의 원리를 몸소 깨닫는 과정이기 때문이어서 그랬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통의 승무에서는 짧은 시간 한 사람의 춤꾼이 한삼을 뿌리며, 북채를 들고 북을 두드리면서 무대를 사른다면 이번 무대는 7인의 춤꾼이 긴 시간 진리를 깨달아 마음속에 기쁨을 느끼며 법열을 뿜어내고 있었지요. 흔히 보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정오의 꽃 - 오시영 동자승이 부처님 귀에 대고 물었다 왜 항시 웃으세요 부처님이 대답했다 네가 내 귀를 간지럽히니 웃지 어렸을 적부터 종교에 뜻을 두는 아이는 예나 지금이나 드물어서, 동자승은 보통 자기 뜻과는 상관없이 되기도 한다. 곧, 부모에게 버림받거나 전쟁이나 돌림병 때문에 부모를 잃고 죽어가는 아이들을 스님이 거두어 동자승으로 키우는 경우도 많다. 전 근대 때도 고아원이 있었기는 했지만, 아이들을 무제한 보육할 여건이 안 되기에 동자승이 되는 경우도 흔했다. 과거 중세 유럽에서 갈 곳 없는 아이들이 수도원에 들어가 자라다가 수도자가 되는 것과 비슷한 경우다. 요즘은 부처님오신날 행사를 앞두고 일반 어린이들이 짧게는 며칠에서 길게는 1주일 정도 삭발하고 단기출가 체험을 해보는 사례로 동자승이 돼보기도 한다. 지난 2022년에는 어린이들에 희망과 용기를 선사했다는 어린이 영화 ‘액션동자’가 개봉되기도 했다. <불교신문> 2023년 5월 11일 자에는 “‘머리 깎으니까 어떠냐?’는 총무원장 스님 질문에 한 동자승이 ‘땀이 안 나서 좋다’고 해서 좌중에 폭소가 터지기도 했다.”라는 기사가 뜬 적이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