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林亭秋己晩(임정추기만) 숲 속 정자엔 가을이 이미 깊이 드니 騷客意無窮(소객의무궁) 시인의 시상(詩想)이 끝이 없구나 遠水連天碧(원수연천벽) 멀리 보이는 물은 하늘에 잇닿아 푸르고 霜楓向日紅(상풍향일홍) 서리맞은 단풍은 햇볕를 향해 붉구나 山吐孤輪月(산토고륜월) 산 위에는 둥근 달이 떠오르고 江含萬里風(강함만리풍) 강은 만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머금었네 塞鴻何處去(새홍하처거) 변방의 기러기는 어느 곳으로 날아가는고 聲斷暮雲中(성단모운중) 울고 가는 소리 저녁 구름 속으로 사라지네 위 시는 경기도 파주 화석정에 걸린 것으로 율곡 이이가 8살 때 지었다는 <팔세부시(八歲賦詩)>입니다. 화석정은 임진강가 벼랑 위에 자리 잡은 경치가 빼어난 곳이지만 최근에 이 앞쪽으로 새로이 길이 생겨 예전의 절경은 구경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유서 깊은 곳이 선조 임금과 관련이 있는데 물밀듯이 쳐들어오는 왜놈들을 피신하다 다다른 곳이 바로 여기 화석정입니다. 선조는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 가던 중 칠흑같이 어두운 한밤중에 다다른 곳인데 앞에는 벼랑 끝 물길이요 뒤에는 왜놈 병사들이 벌떼 같이 몰려옵니다. 그때 한 신하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날마다 일찍 일어나 이부자리를 네 손으로 개어 깨끗한 곳에 두어라. 이어 비를 가지고 자리를 깨끗하게 쓸고 머리는 얼레빗으로 빗고, 빗을 빗통에 넣어 두어라. 이따금 거울을 보며 눈썹과 살쩍을 족집게로 뽑고 빗에 묻은 때를 씻어 깨끗하게 해라. 세수하고 양치하며 다시 이마와 살쩍을 빗질로 매만지고, 빗통을 정리하고 세수한 수건은 늘 제자리에 두어라.” 윗글은 안평대군, 한석봉, 김정희와 더불어 조선 4대 명필의 하나인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유배지에서 딸에게 절절히 쓴 편지 일부입니다. 자신은 유배를 떠나고 아내는 목을 매 죽어 부모 없이 홀로 남은 딸에게 이광사는 사랑을 담아 편지로 가르침을 주었지요. 여기에 두 번이나 나오는 살쩍은 관자놀이와 귀 사이에 난 머리털을 말합니다. 그런데 상투를 틀고 망건을 쓰던 선비들도 망건 바깥으로 빠져나온 살쩍을 망건 안으로 밀어 넣으려 “살쩍밀이”라는 빗을 썼지요. 살쩍밀이는 대나무나 뿔로 얇고 갸름하게 만듭니다. 깔끔한 선비들은 살쩍밀이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수시로 머리를 가지런히 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단정한 차림을 중시하여 매일 아침 첫 일과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금으로부터 102년 전인 1919년 오늘(5월 26일) 양한묵 애국지사가 서대문 감옥에서 향년 56살로 순국하였습니다. 양 지사는 3.1만세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분으로 체포당한 뒤 심문하는 담당검사에게 '독립을 계획하는 것은 조선인의 의무'라고 당당히 밝히며 항일독립의지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양 지사는 이렇게 당당하였기에 가혹한 고문이 집중되었고,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유일하게 옥중순국 한 분이 된 것입니다. 양 지사는 1904년 일본에서 귀국한 뒤 일본의 황무지개척권 요구에 반대하여 보안회를 설립하고 일진회를 타도하기 위해 설립된 공진회에 힘을 보태기도 했습니다. 또 1905년에는 헌정연구회를 창립하고, 호남의 교육발달을 목표로 1908년에 창립된 호남학회에서는 임시회장과 평의원으로 선임되는 등 애국계몽운동에 힘을 쏟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1909년 12월 22일 이재명 등이 이완용을 암살하려다가 성공하지 못한 사건에 연루되어 약 4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지요. 양 지사는 또 천도교의 원로로서 천도교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천도교대헌을 기초하였으며, 《도경(道經)》ㆍ《무체법경(武體法經)》을 비롯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조선 선비들이 차지하는 사랑방에는 선비의 특징을 보여주는 가구들이 있습니다. ‘사방탁자(四方卓子)’도 그 가운데 하나인데 다과(茶菓), 책, 가벼운 꽃병 등을 올려놓는 네모반듯한 탁자를 말합니다. 선반이 너덧 층으로 되었으며 널빤지로 판을 짜서 가는 기둥만으로 연결하여 사방이 트이게 했지요. 사방이 터졌기 때문에 사방탁자라고 하는데 제일 아래층은 장(欌)형식으로 짜인 것도 있습니다. 골격이 가느다란 각목으로 이루어지는 이 가구는 강도에 있어서나 역학적인 면에서 짜임새가 단단해야 하므로 골조(骨組)로는 참죽나무ㆍ소나무ㆍ배나무를, 널빤지 재료로는 오동나무 ㆍ소나무를 쓰고, 앞면은 먹감나무나 느티나무의 결을 그대로 살려줍니다. 조선후기 실학자 서유구가 쓴 《임원경제지》는 사방탁자가 시렁 위에 책, 꽃대, 꽃병, 취우(翠羽, 비취 깃으로 만든 귀한 물건), 병, 향로, 찻잔 등 문방가구를 늘어놓는 문방구를 거느리는 것이자 서실의 사치스러운 구경물이라며 이를 극찬한 바 있습니다. 간결한 구성과 쾌적한 비례로 좁은 한옥 공간을 시원하게 보이는 효과를 주고 있는데, 이러한 단순함이 주는 아름다움 때문에 현대적 감각에 가장 가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 위 시는 김광섭 시인의 대표작 <성북동 비둘기> 일부입니다. 1960년대 초반 이 시의 배경이 되는 성북동 산 일대는 막 주택 단지로 개발되던 때였기에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었는데 시는 이 시기 상황을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자연이 파괴되면서 거기에 깃들여 살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도 오갈 데 없이 쫓기는 새가 되고 가슴에 금이 가고 말았지요. 이 시는 삶의 터전인 자연의 품을 잃어버린 아픔을 일상어로 노래했기에 오래도록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김광섭 시인은 모교인 중동학교에서 10년 동안 교단에 섰는데, 이때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의 하나로 내선일체ㆍ황국신민화 등을 강요하면서 일본제국주의가 암송을 강요한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 일왕이 있는 동쪽을 향하여 절하는 ‘궁성요배(宮城遙拜)’와 ‘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엄마의 사랑법 - 박 혜 성 나만 보면 하시는 말씀 치매에 걸렸어도 요양원에서도 만날 때마다 하시는 말씀 밥 먹었나? 듣기만 해도 눈물 나는 사랑입니다. 농부 전희식 선생은 《똥꽃: 농부 전희식이 치매 어머니와 함께한 자연치유의 기록》을 펴냈다. 선생은 언제나 어머니의 건강보다도 '존엄'을 더 귀하게 생각한다. 매일 집을 나설 때와 집에 들어올 때, 어머니에게 큰절을 올린다. 대소변을 못 가린다고 음식을 적게 주지도 않고, 거동이 불편하다고 마냥 누워만 계시라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치매에 걸린 어머니 자신이 할 수 있는 소일거리를 주고, 어머니를 바보로 만드는 도시를 떠나, 어머니 원래의 영역인 산과 들로 모시고 갔다. 그도 그럴 것이 극력 노동운동가였던 전희식 선생은 자신이 수배당해 숨어다닐 때 어머니를 그렇게 만든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어머니 치매 치료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귀농했다고 하는데 이후 어머니는 의사가 놀랄 정도로 회복되었단다. 그러면서 선생은 그런 치매 노인들이 꿈을 현실로 착각한다고 믿는다. 여기 박혜성 시인이 노래하는 것을 보면 치매 노인들이 꿈을 현실로 착각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치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사월이라 한여름이니 입하 소만 절기로다 / 비 온 끝에 볕이나니 날씨도 좋구나 / 떡갈잎 퍼질 때에 뻐꾹새 자주 울고 / 보리 이삭 패어 나니 꾀꼬리 소리 한다 / 농사도 한창이요 누에치기 바쁘구나 / 남녀노소 일이 바빠 집에 있을 틈이 없어 / 적막한 대사립을 녹음에 닫았도다” ‘농가월령가’ 4월령에 나오는 대목으로 이즈음 정경을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여덟째로 ‘소만(小滿)’입니다. 소만이라고 한 것은 이 무렵에 햇볕이 풍부하고 만물이 점차 자라 가득 차기[滿] 때문이지요. 또 이때는 이른 모내기를 하며, 여러 가지 밭작물을 심습니다. 소만에는 씀바귀 잎을 뜯어 나물을 해 먹고 죽순을 따다 고추장이나 양념에 살짝 묻혀 먹는 것도 별미지요. 이때 온 천지가 푸르름으로 뒤덮이는 대신 대나무만큼은 ‘죽추(竹秋)’라 하여 푸른빛을 잃고 누렇게 변합니다. “죽추(竹秋)”란 대나무가 새롭게 생기는 죽순에 영양분을 공급해 주느라 푸른빛을 잃고 누렇게 변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는 마치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어린 자식을 정성 들여 키우는 어미의 모습을 보는 듯하지요. 소만 때는 겉으로 보기엔 온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문화재청은 지난 2월 18일 실물과 관련 기록이 완전하게 남아있고 24m에 달하는 큰 규모를 갖춘 조선왕실의 문서인 <이십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二十功臣會盟軸-保社功臣錄勳後)>를 국보 제335호로 지정했다고 밝혔습니다. 이 <이십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는 1680년(숙종 6) 8월 30일 열린 왕실의 의식인 ‘회맹제(會盟祭)’를 를 기리기 위해 1694년(숙종 20) 녹훈도감(復勳都監)에서 제작한 왕실 문서지요. ‘회맹제’는 임금이 공신들과 함께 천지신명에게 지내는 제사를 지내는 행사입니다. 이 의식에는 왕실에서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내린 이름인 ‘공신(功臣)’ 가운데 개국공신(開國功臣)부터 보사공신(保社功臣, 1680년 4월 경신환국 때 공을 세운 이들에게 내린 칭호)에 이르는 역대 20종의 공신이 된 인물들과 그 자손들이 참석해 임금에게 충성을 맹세하였습니다. <이십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는 1680년 회맹제 거행 당시의 회맹문(會盟文) 곧 종묘사직에 고하는 제문과 보사공신을 비롯한 역대 공신들, 그 후손들을 포함해 모두 489명의 명단을 기록한 회맹록(會盟錄)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우리 겨레에게는 곡식을 갈아서 가루로 만들 때나 물에 불린 곡식을 갈 때 사용하는 기구인 맷돌이 있습니다. 흔히 한 사람이 손잡이를 돌리고 다른 한 사람은 아가리(구멍)에 곡식을 넣는데 맷돌이 크고 갈아야 할 곡물이 많을 때는 맷손잡이(매손)에 가위다리 모양으로 벌어진 맷손을 걸고 두세 사람이 노를 젓듯이 앞뒤로 밀어가며 갈기도 하지요. 우리나라 맷돌은 중부와 남부 두 지방의 것이 다릅니다. 중부지방의 것은 위쪽 곧 암맷돌과 아래쪽 숫맷돌이 같고, 둥글넓적하여 맷돌을 앉히기가 좋은 매함지나 멍석을 깔고 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남부의 것은 숫맷돌이 암맷돌보다 넓고 크며 한쪽에 주둥이까지 길게 달려서 매함지나 매판을 쓰지 않지요. 맷돌의 크기는 매우 다양하여 작은 것은 지름 20㎝에서 큰 것은 1m가 넘는 것도 있습니다. 일반 맷돌보다 곱게 갈 수 있는 맷돌은 풀매라고 부릅니다. 맷돌에도 우리 겨레의 슬기로움이 담겨 있습니다. 아래 숫맷돌은 고정하고 위의 암맷돌을 돌리는데 이때 원심력이 생기며, 이 원심력과 함께 달팽이 모양의 홈이 파인 암맷돌 밑 부분을 통해서 곡물이 바깥으로 쉽게 밀려 나가게 했지요. 또 둥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에는 숙종임금의 장인인 김주신(1661~1721)의 무덤이 있습니다. 김주신의 딸은 숙종의 셋째 왕비인 인원왕후로 그가 한글로 쓴 《션균유사》에 "아버님은 궁궐을 출입할 때마다 근신하여 나막신의 앞부분만 보고 다녀 10년이나 아버지를 모신 나인도 얼굴을 잘 알아보지 못했다."라고 할 정도로 김주신은 겸손한 선비였습니다. 왕비가 된 딸에게 그렇게 부담을 지우지 않게 했을 뿐 아니라 김주신은 홀어머니에게 극진한 효자로도 소문난 사람이었습니다. 김주신은 다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사랑 속에서 자라면서 아버지가 없는 것을 한으로 여겨 글공부에 전념하였지요. 어머니가 밤늦도록 글 읽는 것을 안쓰럽게 여기자 김주신은 밤늦은 시간에는 목소리를 낮추어 어머니의 걱정을 덜었을 만큼 어머니를 효성으로 모셨습니다. 김주신은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비석을 실어 나르던 소가 숨이 차서 혀를 빼물고 헐떡이는 것을 보고는 너무 측은하여 그 뒤로부터는 소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할 만큼 인정이 넘치는 선비였지요. 또 김주신은 대자동에 모신 아버지 산소를 갈 때마다 멀리 십리(4km) 정도 떨어진 송강고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