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가난한 이웃, 보잘 것 없는 우리 이웃들에 대한 애정, 이게 정말 소중한 우리 마음이다. 이 마음이 없는 사람은 자기보다 지위가 낮고 가진 게 적으면 깔보고 깔아뭉개고 업신여기게 된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이 마음을 길러 주지 않으면 평생 거만하게 자기 잘난 줄만 알고 살 것이다. 아이들과 시를 쓰고 글쓰기를 하는 것도 이 마음을 갖게 하는 과정이고 아이들 글은 이 마음에서 나온 열매다.” 아! 구자행 선생이 평생 교실에서 추구하는 것이 ‘가난한 이웃을 생각할 줄 아는 마음’이었구나. 기자는 구자행 선생의 책 《국어시간에 뭐하니?》를 읽어 내려가면서 좀처럼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를 하나 푼 듯 무릎을 쳤다. 왜냐하면 그가 이 책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고갱이가 거기 숨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난한 이웃(178쪽)은 이 책의 여러 주제 가운데서도 기자의 가슴에 와 닿는 대목이다. “우리가 그동안 글을 쓰면서 우리 자신의 문제를 벗어나지 못했잖아. 자라온 이야기도 그렇고, 식구들 이야기도 그렇고, 친구나 학교 이야기도 그렇고, 이제는 자신의 문제를 벗어나서 우리 이웃으로 눈을 돌려보자” 구 선생은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눈길을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홍주성 전투에서 일제에 항거하다 전사한 채광묵 채규대 부자(父子) 의병을 2016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채광묵은 충남 홍주 매평리(현 충남 청양)에서 당시 문장가로 활약하던 채동식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말 일제 하 홍주지역은 항일 민족운동이 활발했던 지역이다. 1896년 홍주의병은 김복한을 총수로 반개화, 반침략론을 실천에 옮기고자 홍주지역 유생들이 일으킨 반일투쟁이었다. 그러나 관찰사의 배반으로 실패로 돌아가자 채광묵은 상경하여 송수만 등과 도약소를 차리고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을 복수할 것을 청하고 외부대신 이완용 등의 탄핵을 상소하였다. 1901년 8월에는 조정에서 내린 내부주사 직을 국모의 복수를 할 기약도 없는데 영예를 받을 수 있느냐며 강하게 거절하였다. 1904년 일본인 나가모리가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김기우 등과 함께 반대 통문을 작성하고 일본 공사를 만나 이를 질타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채광묵은 안병찬 등과 의병을 일으키고 전 참판 민종식을 의병장에 추대하였다. 홍주의병은 홍주성을 점령하고 일본 경찰대를 물리쳤다. 참모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대동강물 흐르는 비옥한 땅 일제 침략 없었다면 구김살 없이 살아갈 터전 등지고 빼앗긴 나라 되찾고자 갓 태어난 핏덩이 남겨두고 뛰어든 항일의 험난한 가시밭길 어미 품 그리며 유치장 밖서 숨져간 어린 딸 눈에 밟혀 어찌 항일독립의 깃발 들었을까? - 핏덩이 남겨두고 독립의 깃발 높이든'박치은'- , 이윤옥 시 “네년의 남편이 곽치문이지? “그렇다.” “네 남편은 권총을 차고 다니며 왜경을 마구 쏘아 죽이는 악질분자다. 고얀 것들 ! 부부가 모두 독립운동을 하는 강도들, 너희가 그런다고 독립이 될 줄 아냐? 이년은 악질이니까 옷을 벗기고 쳐야해.” 박치은 애국지사를 취조하던 왜경은 옷을 모두 벗기면서 “그 나체 좀 구경하자.”며 실신하도록 팼다. 거의 초죽음 상태에서 박치은 애국지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갓 태어나 이제 한 달 밖에 안 된 어린 생명이 떠오른 것이었다. “아기에게 젖을 주어야하니 아기를 이리로 들여보내주시오.” 박치은 애국지사는 유치장 밖에서 자지러지게 울고 있는 아기를 떠 올리며 그렇게 애원했다. 왜경은 이내 “못된 짓만 하고 돌아다니는 년이 새끼 귀한 줄은 아느냐?”며 아기의 면회를 시켜주지 않았다. 유치장 창
[우리문화신문= 경북 상주 이윤옥 기자] “말은 사람과 사람의 뜻을 통하는 것이라. 한 말을 쓰는 사람끼리는 그 뜻을 통하여 살기를 서로 도와주므로 그 사람들이 절로 한 덩이가 지고, 그 덩이가 점점 늘어 큰 덩이를 이루나니 사람의 제일 큰 덩어리는 겨레라. 그러하므로 말은 겨레를 이루는 것인데 말이 오르면 겨레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겨레도 내리 나니라. 이러하므로 겨레마다 그 말을 힘쓰지 아니할 수 없는 바니라. 글은 말을 담는 그릇이니, 이지러짐이 없고 자리를 반듯하게 잡아 굳게 선 뒤에야 그 말을 잘 지키나니라. 글은 또한 말을 닦는 기계니, 기계를 먼저 닦은 뒤에야 말이 닦아지나니라” 이 말은 힌힌샘 주시경 선생의 보중 친목회보 창간호 1910년 6월호 ‘한겨레 말 ’가운데 일부이다. 오늘은 평생 겨레말을 올곧게 사랑하고 실천하신 주시경 선생의 102주기 날이다. 이 날을 맞아 경북 상주의 마음닦기 수련원인 푸른누리(대표 최한실)에서는 아침 8시 조촐한 추도식이 있었다. 오늘 모임은 겨레말 살리는 이들의 ‘배달 겨레말 여름 모임’을 위한 전국 모임이다. *주시경 (1876.12.22~1914.7.27) 선생은? 국어학자로서 우리말의 정리와 보급에 크게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기미년 마산 장터 삼천 명 선두에 선 의신학교 열다섯 소녀 태극기 물결 속 격문 뿌리며 일제의 만행에 저항하다 잡혔어도 모진 고문 이겨내고 조선인 투지를 빛낸 당찬 모습 광복의 밑거름 되었어라. -마산의 결사단을 이끈 “최봉선”, 이윤옥 시- 어제(21일) 최봉선(崔鳳善, 1904. 8.10~1996.3.8) 애국지사를 뵈러 대전국립현충원엘 찾았다. 칠월의 짙푸른 신록 속에 수많은 영령들이 잠든 무덤가에는 따가운 햇볕만 내리쬘 뿐 무덤을 찾는 이는 보이지 않았다. 애국지사 제2묘역 564. 무덤에도 번지수가 있다. 애국지사 묘역은 정문에서 걷기에는 다소 먼 느낌으로 현충원 위쪽 한가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최봉선 애국지사 무덤으로 가는 길에 만난 숱한 분들의 묘비 시구(詩句)가 가슴을 쓸어내린다. 바람타는 섬 제주의 아들 / 제 살 썩혀 진주되는 법 알았으니 /조국의 외외한 혼으로 남으리 - 애국지사 부두전의 묘 - 찬이슬 눈보라에 님 한 몸 가눔 없이/ 빼앗긴 나라 찾기 오직 한마음/ 수만리 만주벌판 말달리며 지새운 나날/ 풍진 스무해 / 못 다한 큰뜻 가슴에 묻고/ 오호라 님은 가시니../ 그 한 사무쳐
[우리문화신문= 이윤옥기자] 우리나라 근대화 시절의 물건들을 모아 작은 박물관을 꾸려 인천의 문화명소로 만든 사람, 최웅규 관장! 인천 차이나타운 입구에 작은 박물관인 ‘인천근대박물관’을 꾸며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정겨운 그 시절의 설명을 해주던 최웅규 관장(68살), 그가 어제(8일) 세상을 떴다. 그의 갑작스런 부음을 알려준 사람은 최웅규 관장의 인천근대박물관과 지척의 거리에 있는 인천관동갤러리 도다 이쿠코 관장이다. 작가이기도 한 도다 이쿠코 관장은 2016년 3월 16일 일본 민단신문(民団新聞)에 최웅규 관장을 소개했다. 사진과 함께 실린 최 관장의 온화한 얼굴이 인상 깊다. 기자도 여러 번 인천근대박물관을 찾아가 향수에 가득한 물건들을 바라다보며 근대화시기에 우리가 소중히 여기지 않던 물건을 하나둘 모으기 시작한 최 관장의 안목에 놀라곤 했다. 개업식 집에 선물로 들고 갔을 법한 엄마돼지와 아기돼지 십여 마리의 그림을 비롯하여 개항초의 인천 모습이라든가 70년대의 각종 교과서며 교복은 물론이고 집들이용 성냥갑 등 근대화 시절의 생활용품으로 최 관장의 박물관은 그야말로 발디딜틈이 없이 2층 까지 빼곡했다. 그 좁은 공간에서 최 관장은 온화한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항일독립 전쟁사(抗日獨立戰爭史)에 불멸의 공적을 남긴 오동진 장군님의 위대한 발자취를 어찌 몇 줄의 글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오동진 장군님의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이 혈맥으로 흐르던 서간도 일대, 무명 독립군들의 피와 땀이 서린 항일유적지에서 몇 마디 흠모의 외침만으로 선열들의 이름을 어찌 가벼이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동안 굴종의 침묵 보다 더 부끄러운 망각으로 항일독립전쟁의 역사와 유적, 애국선열의 업적을 올바로 기리지 못한 채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였고, 아직도 남북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오늘에 백절불굴의 항일명장(抗日名將) 오동진 장군님을 우러러 백년편지를 올립니다. “나는 조국의 독립과 세계평화(世界平和)를 완성하기 위하여 조선독립군(朝鮮獨立軍) 사령(司令)이 되었다.”1932년 3월 5일이었지요. 조선총독부 경찰에 의해 강제로 재판정에 서게 된 장군님이 왜놈 검사와 판사, 법정을 가득 메운 왜인 방청객들, 친일파들을 향해 일갈하신 말씀입니다. 교만무례하기 이를 데 없는 일제의 재판장을 압도한 장군님의 기개는 왜놈들의 간담을 송두리째 뭉개버리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일제의 간계와 교활함으로 재판정에 서게 되신 장군님께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 일본의 역사서 가운데 720년에 완성된 《일본서기(니혼쇼키, 日本書紀)》가 있는데 662년 4월 기록에 고구려승 도현(道顯)에 관한 아주 흥미로운 기사가 실려 있다. 기사 내용인즉 쥐 한마리가 말꼬리에 새끼를 낳는 사건이 발생하여 조정이 발칵 뒤집혔고 이 해괴한 일을 풀어낼 사람으로 고구려승 도현이 발탁 된 것이었다. 도현의 점괘는 “북국의 사람들이 장차 남국에 의지할 것이다. 아마 고구려가 망하고 일본에 속할 것인지 모른다.”는 것으로 나왔는데 도현의 점괘대로 고구려는 668년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승려이면서 용한 점쟁이였던 도현은 고구려 보장왕(660) 때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당대 권력의 실권자인 후지와라카마타리(614~669)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나라조(奈良朝)의 정치무대에서 활약하게 된다. 한편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였던 도현은 《일본서기》의 중요한 근거자료가 된 《일본세기》를 펴낸 인물이다. 도현은 7세기 백제의 멸망을 시작으로 조국인 고구려의 멸망을 포함한 요동치는 한반도 정세를 온몸으로 느낀 지식인이요, 승려 출신 사가(史家)이기도 하다. 《일본서기》에서 고구려승 도현의 책 《일본세기》를 인용하는 유형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조명하(趙明河,1905. 4. 8(음력)~1928. 10. 10) 의사는 1905년 4월 8일 황해도 송화(松禾)군 하리면 장천리에서 태어났다. 부친 조용우(趙鏞禹), 모친 배장연(裵長年) 사이의 차남. 본관은 함안(咸安). 조의사는 일찍이 총명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일제에 탄압 받는 민족의 쓰라림에 눈을 떴다. 조의사는 1926년 3월 신천군청의 직원으로 고용되어 일하면서 같은 황해도 출신의 김구 선생과 노백린 선생 등 독립운동 선각자들의 무용담을 전해 듣고 애국남아(愛國男兒)로서의 각오를 다졌다. 그 무렵 아들 혁래(赫來)를 낳고 친정에서 몸조리 하던 부인 오금전(吳金全)씨를 어머니와 함께 보러 가던 길에 조의사는 갑자기 어머니에게 큰 볼일이 있어 멀리 떠나야겠습니다라며 발걸음을 돌렸다. 여기까지 왔으니 처자를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극구 말리는 어머니의 손을 뿌리친 채 돌아섰다. 처자식을 만나 마음이 흔들릴 지도 모르는 자기자신을 채찍질했던 것이다. 그리고 여중구(呂仲九) 등 친구 6명이 마련해준 여비를 받아 웅지를 품고 고향을 떠났다. 항일을 위해서는 우선 일본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조의사는 현해탄을 건너 일본 땅에 상륙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 중국 훈춘(琿春)지역의 3.1운동지도자 황병길(黃炳吉)선생은 일반 국민에게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황병길 선생은 1885년 4월 15일(음) 함북 경원군 양하면에서 출생하여 20세까지 고향에서 생활했다. 소년시절에는 향학열이 높아 가세형편으로 서당에 다닐 수 없었으나 동료들의 글읽는 모습을 넘보면서, 또는 훈장이 읽는대로 따라 읽는 등으로 독학하였다. 그의 나이 20세가 되던 1904년에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제가 급격하게 그 세력을 팽창시켜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을 자행,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려워지자 노령 연추(露領 煙秋)지역으로 망명했다. 1905년 을사5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때를 전후하여 많은 애국청년들이 국권회복을 위해 만주, 연해주 등 해외로 망명하여 항일 무장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선생은 훈춘지역 일대에서 1908년 러일전쟁 전의 우리나라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인 이범윤(李範允)의 사포대(射砲隊)에 참가했으며 안중근 최재형이 지휘하는 의병대에 속해 두만강을 건너 회령, 온성, 경원지방을 여러차례 공략했다. 두만강건너 일군수비대 습격, 「훈춘(琿春)호랑이」라는 별명 얻어 특히 경원군 신아산(新阿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