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최미현 기자] 조선 중기의 문신인 신경행(1547∼?) 선생은 1577년 문과에 급제하여 한산군수, 충청도순찰사 종사관 등의 벼슬을 하였다. 종사관으로 있을 때 이몽학의 난이 일어나자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다. 그가 죽은 후 예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청난공신으로 영산군에 봉해졌고, 시호는 ‘충익’이다. 이 초상화는 선생이 선조 37년(1604) 공신이 된 것을 기념하여 왕명으로 그렸던 공신상을 후에 다시 옮겨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얼굴은 약간 오른쪽으로 향한 채 두 손은 옷소매 안에서 마주잡고 있는 관복 차림의 전신좌상이다. 옮겨 그린 이모본이기는 하나, 오른쪽으로 살짝 돌린 얼굴 표현이나 양 어깨의 경사각이 심한 차이를 보이는 점 등은 조선 중기 초상화 기법을 잘 보여준다. 특히 집무복의 트임새로 내비치는 속옷 자락이나 발 받침대 밑에 깔린 화문석 돗자리 등은 공신상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다만, 신경행이 벼슬로 있던 당시에는 사모가 낮았던데 반하여 이 그림에서는 높게 표현되어 있어 조선 후기 즈음에 옮겨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자료: 문화재청>
[우리문화신문= 최미현 기자] 도기 서수형 명기(陶器 瑞獸形 明器)는 경주 미추왕릉 앞에 있는 무덤들 중 C지구 제3호 무덤에서 출토된, 거북 모양의 몸을 하고 있는 높이 15.1㎝, 길이 17.5㎝, 밑지름 5.5㎝의 토기이다. 머리와 꼬리는 용 모양이고, 토기의 받침대 부분은 나팔형인데, 사각형으로 구멍을 뚫어 놓았다. 등뼈에는 2개의 뾰족한 뿔이 달려 있고, 몸체 부분에는 전후에 하나씩과 좌우에 2개씩의 장식을 길게 늘어뜨렸다. 머리는 S자형으로 높이 들고 있고 목덜미에는 등에서와 같은 뿔이 5개 붙어 있다. 눈은 크게 뜨고 아래·위의 입술이 밖으로 말려 있으며, 혀를 길게 내밀고 있다. 꼬리는 물결모양을 이루면서 T자로 꺽여 끝을 향하여 거의 수평으로 뻗었는데, 여기에도 뿔이 붙어 있다. 가슴에는 물을 따르는 주구(注口)가 길게 붙어 있고, 엉덩이에는 밥그릇 모양의 완이 붙어 있다. 그릇 표면은 진한 흑회색을 띠었고, 받침·주구에서 신라의 다양한 동·식물 모양을 본떠서 만든 상형토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을 갖추고 있으나, 기본적인 착상은 아주 새롭다. <자료: 문화재청>
[우리문화신문=최미현 기자] 연자마는 연자방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연자매·돌매방아라고도 한다. 말이나 소가 방아틀에 연결된 돌을 끌어돌림으로써 곡물껍데기를 제거하거나 밀을 빻았던 전통적인 농기구로, 이러한 일 외에도 연자매계를 통한 계원간의 강력한 협동의 기능을 하기도 하여 단순한 농기구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상사창동연자마는 굴리는 돌인 동그란 숫돌과 받치는 돌인 암돌로 되어있다. 숫돌에는 나무로 만든 사각형 방아틀이 숫돌을 감싸듯 부착되어 있어서, 소나 말이 이 틀을 끌어 돌리면서 방아를 찧도록 되어 있다. 방앗간은 원래 여덟 개의 기둥 위로 볏집으로 짠 지붕을 올린 팔각정자 모양의 건물이었으나 현재는 새로 보수해 놓은 모습이다. 마을에서 공동으로 사용해온 것으로 거의 원형상태로 잘 보존되어 있으며 제작연대는 1930년대로 짐작된다. <자료: 문화재청>
[우리문화신문= 최미현 기자] 경남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의 밀성박씨 묘역의 능선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는 밀양 고법리 박익 벽화묘는 석인상, 갑석, 호석을 갖춘 방형분으로서, 봉분은 가로 6m, 세로 4.8m, 높이 2.3m이며, 내부 석실(길이 .5m, 폭 1m, 높이 0.8m)의 사방벽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 묘의 축조수법에서 주목되는 것은 수도(隧道)를 갖춘 방형묘라는 점이다. 방형묘는 고려후기에서 조선전기까지 일정 계층에서 유행한 묘제 중 하나이나, 남쪽으로 수도를 설치한 것과 병풍석이 경사지게 설치된 것은 특이한 경우이다. 조선전기의 횡구식 석실 중 수도가 확인된 것은 아직 없으며, 묘도와 구(溝)의 역할을 겸하는 것으로 추정되어 양식상의 원류에 대한 검토 자료가 된다. 벽화는 화강암 판석 위에 석회를 바르고 그 위에 먼저 검정선으로 벽화내용을 소묘한 뒤 마르기 전에 주요부위를 적·남·흑색으로 채색하는 프레스코기법으로 그려져 있으며, 부분적으로 퇴락되어 있으나 잔존부분에는 인물, 말, 도구 등 당시의 생활 풍속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송은(松隱)박익(朴翊)선생(1332∼1398)의 휘는 익(翊), 초명은 천익(天翊), 자는 태시(太始), 호는 송
[우리문화신문= 최미현 기자] 화암사는 불명산 시루봉 남쪽에 있는 절로 본사인 금산사에 딸린 절이다. 절을 지을 당시의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원효와 의상이 유학하고 돌아와 수도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신라 문무왕 이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극락전은 1981년 해체·수리 때 발견한 기록에 따르면, 조선 선조 38년(1605)에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앞면 3칸·옆면 3칸 크기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며 소박하고 작은 규모를 보이고 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건물 안쪽 가운데칸 뒤쪽에는 관세음보살상을 모셨으며, 그 위에 지붕 모형의 닫집을 만들어 용을 조각하였다. 화암사 극락전은 우리나라에 단 하나뿐인 하앙식(下昻式) 구조이다. 하앙식 구조란 바깥에서 처마 무게를 받치는 부재를 하나 더 설치하여 지렛대의 원리로 일반 구조보다 처마를 훨씬 길게 내밀 수 있게 한 구조이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근세까지도 많이 볼 수 있는 구조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것으로 목조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자료:
[우리문화신문= 최미현 기자] 금강이 서해를 만나 어우러지고, 매서운 바닷바람이 솔숲에서 한결 순해지는 서천 장항은 바다를 만나고, 누리고, 배우는 여행지다. 장항 앞바다가 기벌포해전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항스카이워크와 장항송림산림욕장 곁에 둥지를 튼 국립해양생물자원관 덕분이다. 국립해양생물자원관의 씨큐리움은 우리 바다에 서식하는 다양하고 풍요로운 해양 생물에 대해 전시·교육하는 공간이다. 해양 생물 표본 7000여 점과 인터랙티브 미디어 월, 벽면과 천장까지 스크린 삼아 펼쳐지는 혹등고래의 영상, 입체적인 4D 영상, 아이들이 신나게 즐기는 레고기획전까지 보고 즐길 거리가 가득하다. 여기에 서천의 명품 한산모시를 감상하고, 전 세계 5대 기후대를 한자리에서 만나는 국립생태원, 동백꽃 위로 붉은 노을이 내려앉는 마량리 동백나무 숲까지 더하면 바다를 테마로 한 서천 여행길이 한층 풍성해진다. 문의 : 서천군청 문화관광과 041)950-4470
[우리문화신문= 최미현기자] 쌍계사팔상전팔상탱 (雙磎寺八相殿八相幀)은 쌍계사팔상전(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87호)에 모셔져 있는 불화로, 석가의 생애를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묘사한 팔상탱이다. 팔상탱의 여덟 장면은 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코끼리를 타고 사바세계로 내려오는 장면인 도솔래의상, 석가모니가 룸비니공원에서 마야부인의 옆구리를 통해 출생하는 모습을 그린 비람강생상, 태자가 성문 밖의 중생들의 고통을 관찰하고 인생무상을 느끼는 장면의 사문유관상, 부모의 반대를 무릎쓰고 출가하는 장면을 묘사한 유성출가상, 설산(雪山)에서 신선들과 수행하는 모습을 그린 설산수도상, 태자가 수행 중 온갖 유혹과 위협을 물리치는 수하항마상, 부처가 녹야원에서 최초로 설법하는 모습을 나타낸 녹원전법상, 부처가 쌍림수 아래에서 죽음에 이르는 모습을 표현한 쌍림열반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팔상탱은 모두 8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폭의 장면은 건물과 구름·나무·산을 이용하여 구분짓고, 각 장면마다 이에 따른 내용을 적어 놓고 있어 그림을 이해하기에 쉽다는 특징이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각 상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수목의 표현은 도식적이지 않고, 일반회
[우리문화신문= 최미현 기자] 제천 덕주사 마애여래입상 (堤川 德周寺 磨崖如來立像) 은 마의태자의 누이인 덕주공주가 세운 절이라고 전해지는 월악산 덕주사의 동쪽 암벽에 새겨진 불상이다. 거대한 화강암벽의 남쪽면에 조각한 불상은 전체 높이가 13m나 되는데, 얼굴부분은 도드라지게 튀어나오게 조각하였고 신체는 선으로만 새겼다. 민머리 위에는 반원형의 큼직한 머리(육계)가 솟아 있으며, 살찐 얼굴에는 눈·코·턱 등이 강조되어 있다. 이와 같이 얼굴을 과장되게 표현하는 것은 고려시대의 거대한 불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법이다. 목에 있어야 할 3줄의 삼도(三道)는 가슴 위에 선으로 조각하였다. 선으로 조각한 살찐 신체는 인체의 조형적 특징이 무시되었다.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축 늘어져 힘이 없으며 선으로 된 옷주름 역시 생동감이 떨어진다. 오른손은 가슴까지 들어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었고, 왼손은 손등을 보이고 있다. 좌우로 벌린 발은 지나치게 크고 발가락도 굵고 길게 표현되었으며 양 발 아래에는 연꽃잎을 새겨 대좌(臺座)로 삼았다. 고려 초기의 거대한 불상 조성 추세에 힘입어 만든 것으로, 살찐 얼굴과 하체로 내려갈수록 간
[우리문화신문= 최미현 기자] 괘불탱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을 말한다. 축서사에 있는 이 괘불탱은 모시바탕에 채색을 사용하여 그린 그림으로, 정면을 향한 입불상을 화면에 가득 차도록 그린 다음 광배 주위로 화불과 보살상을 배치한 독존도형식이다. 원래는 보광전에 걸어두고 예배용으로 사용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대웅전에 보관 중이다. 주불은 얼굴 형태가 원만하고 사용된 색채 또한 선명하고 화려하여 전반적으로 밝고 명랑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한편 괘불탱에 걸려 있던 복장주머니에서 후령통(1구)을 비롯하여 사리(2과)와 씨앗류, 다라니(4종 4매), 괘불원문(1매) 등이 발견되었다. 그림의 아래쪽 부분에 있는 기록과 조성내용을 밝혀주는 ‘괘불원문(掛佛願文)’에 의하면, 이 괘불탱은 조선 영조 44년(1768)에 정일(定一)스님 등 10명이 참여하여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축서사 괘불탱화는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한 편이며, 인물과 문양의 세련된 표현 및 화려하면서도 조화로운 색채의 사용 등이 돋보이는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복장주머니에서 사리를 비롯한 복장품과 함께 다른 불화에서는 쉽게 찾
[우리문화신문=최미현 기자] 이만유 장군(1684∼1750)은 이색의 15대 자손으로, 숙종45년(1719)에 무과에 급제하여, 영조 4년(1728)에 경상도좌수사를 지냈으며,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면서 이등공신에 올라 한원군에 봉해졌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 84호 로 지정된 이만유 장군이 남긴 유물로는장검 129.5㎝, 활통 98㎝, 교지 1지, 영정첩 및 영정 3점, 기타 3점이 전해진다. 장검은 손잡이 끝에 무늬가 있고 칼집은 나무로 되어 있으며, 그 위에 고리가 달려 있다. 활통은 동(銅)으로 만든 6각형 모양으로 뚜껑부분에 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영정은 사모와 관복차림의 초상화이다. 자료: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