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친구가 서로 어울리되 너만을 임금이라 함은 / 고금의 문장을 너만으로 쓰기 때문이리라. / 출세하고 낙오함도 네 힘에 달렸고 / 영리하고 우둔함도 네 혀끝에 달렸도다.” 김삿갓이 지은 시입니다. 예전 선비의 벗이었던 붓은 보통 짐승 털로 만든 털붓(毛筆)이었지만 그 밖에도 대나무로 만든 대나무붓(竹筆), 볏짚으로 만든 볏짚붓(고필,藁筆), 닭 목의 털로 만드는 닭털붓 같은 것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족제비털로 만든 족제비털붓(黃毛筆, 황서붓/黃鼠筆)이 유명했으며, 중국 문헌에서는 이 붓을 낭미필(狼尾筆)·서랑모필(鼠狼毛筆) 또는 성성모필(猩猩毛筆)이라 했는데, 일찍부터 중국에 수출되었지요. 그밖에 붓을 만드는 털로는 노루 앞가슴 털로 만들어 붓 가운데 가장 부드럽다는 노루털붓(장액필,獐腋筆)을 비롯하여 여우·토끼·이리·사슴·호랑이·산돼지·살쾡이·담비·쥐수염·개·말 등이 다양하게 쓰였습니다. 하지만, 가장 많이 쓰는 것은 역시 양털로 만든 양털붓(羊毫筆)입니다. 옛말에 붓이 제 구실을 하려면 사덕(四德)을 갖추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덕이란 붓끝이 뾰족할 것(첨:尖), 가지런할 것(제:齊), 둥글게 정리되어 갈라지지 않을 것(원:圓), 튼튼할 것
서울 중랑구에는 독점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독을 만들려고 점토를 파낸 구덩이가 있어 이렇게 불렀으며 지금 중화초등학교 동쪽에는 독을 구어 내던 독점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또 신내동 지역에는 옹기 가마터가 8군데나 있었으며 여기서 일한 사람만도 200여 명으로 규모가 꽤 큰 것이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서울이지만 과거에는 경기도였던 중랑구에 옹기 터가 자리할 수 있었던 것은 양질의 흙과 땔감 조달이 가능했고 옹기 소비층인 서울이 바로 지척이었던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중랑의 옹기점과 옹기장, 중랑문화원에 따르면 40여 년 전만 해도 서울 사대문 안팎에는 옹기전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안쪽으로는 주로 마포나루를 끼고 염천교까지 옹기전이 줄지어 있었습니다. 이곳은 소금과 젓갈을 공급하는 길목으로 옹기는 새우젓 철과 김장철에 많이 팔렸지요. 2002년 9월 서울 무형문화재 30호로 지정된 배연식 씨를 비롯하여 80년대 말까지 중랑구 일대에는 옹기점과 가마터가 있었으나 지금은 작은 공방만 남겨놓고 남양주 수동 지역 등으로 이전하여 옹기의 명성은 찾아보기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나 플라스틱과 견줄 수 없는 옹기만이 지닌 천연의 특성이 몸에 좋다는 인식과 함께 옹기는 꾸준히 사랑
‘할머니 담뱃불이 날라와 내가 만든 소꿉놀이 초가집에 불을 놓았습니다. 후 후 입을 대고 불어도 안 꺼집니다. 조갑지에 물을 퍼다 끼얹어도 자꾸 탑니다. (중략) 불 끄는 꿈을 꾸다가 오줌을 쌌어요. 누가 옆에서 냉큼 일어나 키 쓰고 소금 받아오라고 소릴 꿱 지르기에 눈을 떠보니까 어유 엄마야...’ 참 재미난 글입니다. 위는 ‘퐁당퐁당’ ‘도리도리짝짜꿍’ ‘낮에 나온 반달’로 잘 알려진 윤석중님의 ‘오줌싸개 시간표’라는 글로 1932년 11월 5일 동아일보에 실린 글입니다. 어린시절 오줌을 싸본 경험이 있는 분들은 ‘맞아 맞아’ 하실 겁니다. 오줌 싼 날은 꼭 물 꿈을 꾸었던 기억이 웃음을 자아냅니다. 지금 아이들은 오줌도 덜 싸고 코 흘리는 아이도 없지만 예전에는 오줌싸개들도 많고 누렁코도 늘 달고 살았습니다. 1929년 11월 19일자 동아일보에 보면 ‘오줌싸개’ 치료법으로는 조기 같이 짠 생선류는 주지 말 것, 물은 오후부터 자기 전까지 주지 말며, 세끼 따뜻한 것을 먹일 것, 지방분이 많은 것을 먹이고 염분기가 많은 졸임 반찬은 먹이지 말라 등등 집에서 할 수 있는 조언을 해주고 있는데 그중에 ‘오후부터 물을 주지 마라.’라는 것은 좀 심한 일 같습
“이쁜 손녀 세상 나온 날 / 할배는 뒤란에 오동나무 심었다 / 곱게 키워 / 시집보내던 날 / 아버지는 / 오동나무 장 만들고 / 할매와 어머니는 / 서리서리 고운 꿈 실어 / 담아 보냈다.” 이고야 시인의 오동나무란 시입니다. 예전에는 오동나무 장롱을 비롯하여 만든 재료에 따라 지장(紙欌), 자개장, 비단장, 화각장, 삿자리장, 주칠장(朱漆欌), 죽장(竹欌), 용목장, 화초장, 먹감나무장 등 이름을 헤아리기도 어려울 만한 장롱이 있었고 용도에 따라 버선장, 반닫이, 머릿장, 의걸이장, 문갑, 경상, 궤안, 뒤주, 고비 등 집안에는 온갖 아름다운 가구들로 넘쳐났습니다. 그러다가 입식 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 침대가 놓이고 소파와 책상이 들어오면서 방안에 있던 아담한 전통가구들은 하나 둘 사라지고 그 자리엔 키 높은 텔레비전이나 서랍장 등이 자리를 잡았지요. 우리 겨레가 썼던 장 가운데 “의걸이장”이 있는데, 이는 위쪽 가운데에 횃대를 가로질러 놓고 도포·창의·두루마기 같은 긴 옷을 걸어서 구겨지지 않게 보관했으며, 아래는 여닫이 모양으로 되어 있어 옷을 개어 넣어두었지요. 의걸이장 재료는 나뭇결이 아름다운 오동나무를 쓰며, 앞면에는 산수·매화·대나무 그림 또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릉빈가무늬 수막새”라는 문화재가 있습니다. “가릉빈가”는 산스크리트어 “갈라빈카”를 한자를 빌려 쓴 차자(借字)로 극락정토 설산(雪山)에 살며, 머리와 윗몸은 사람 모양이고, 아랫몸과 날개·발·꼬리들은 새 모습을 하고 있지요. 아름다운 목소리로 울며, 춤을 잘 춘다고 하여 호성조(好聲鳥), 묘음조(妙音鳥), 미음조(美音鳥), 선조(仙鳥) 같은 별명이 있습니다. 가릉빈가무늬수막새[迦陵頻伽文圓瓦當]는 이 새의 무늬를 조각한 수막새 기와입니다. “막새”는 처마 끝에 나온 암키와(암막새)와 수키와(수막새)를 말하는 것으로 기와 한쪽 끝에 둥글게 모양을 낸 부분인데, 동그란 모양 ·반달 모양 ·세모꼴 모양이 있으며, 여러 가지 무늬로 장식되어 있지요. 이 가릉빈가무늬수막새는 통일신라 때에 흙으로 빚은 것인데 문무왕 19년(679)에 완성된 사천왕사(사적 제8호, 경주시 배반동 낭산기슭) 터에서도 최근 새롭게 발굴되었습니다. 출토되는 수막새는 연꽃무늬, 바람개비무늬, 넝쿨무늬, 보상화무늬, 인동초무늬, 얼굴무늬, 도깨비무늬, 용무늬, 봉황무늬 등 다양한 무늬가 새겨져 있어 당시의 뛰어난 예술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전통한옥에 보면 이처럼 지붕을 꾸미
미생물이 자신이 가진 효소를 이용해 유기물을 분해하는 과정을 발효라고 합니다. 그런데 분해된 결과, 우리의 삶에 좋은 물질이 만들어지면 발효(醱酵)이고 고약한 냄새가 나거나 나쁜 물질이 만들어지면 부패라고 하지요. 우리나라는 발효 천국인데 젓갈로 시작해서 김치, 된장·고추장·간장·청국장, 약주·청주 등의 술, 식혜가 우리 겨레의 발효식품입니다. 그 가운데 젓갈은 옛날엔 황새기젓을 많이 담갔으나 요즘에는 경상도나 전라도에서 많이 쓰던 멸치젓과 새우젓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동해의 명란젓, 명태의 창자로 만든 창란젓, 충청 서산의 어리굴젓과 오징어젓, 대구의 아가미젓 등도 있지요. 젓갈은 칼슘 함량이 높은 알카리성 식품으로 체액을 중화시키는 구실을 하고 아미노산을 보충해주는 것은 물론 핵산이 풍부하고 티아민, 비타민B 등도 들어 있습니다. 이 젓갈은 김치의 주재료로 새우젓, 멸치젓, 조기젓, 황새기젓은 김치를 담그는 데 많이 쓰고, 찌개나 국 간을 맞출 때에는 새우젓을 많이 쓰며 나물을 무칠 때는 멸치젓으로 만든 멸장을 넣지요. 이 가운데 많이 쓰던 새우젓의 종류는 잡는 시기에 따라 오젓, 육젓, 추젓, 세하젓, 자하젓, 동백하젓 등이 있습니다. 5월에 잡히는 오
담배는 우리나라에 17세기 초에 들어와 급격히 퍼졌습니다. 조선 후기 학자 한치윤이 “조정의 높은 벼슬아치부터 부녀자, 어린아이, 종들까지도 담배 피우기를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또 순조임금도 “요즘에는 담배 피우는 습관이 고질이 되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담배를 즐기지 않는 사람이 없고, 어린애티를 벗기만 하면 으레 담뱃대를 문다. 세상에서 하는 말인즉 ‘팔진미는 안 먹어도 담배만은 끊을 수 없다.”라고 했으니 당시의 담배 유행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담배가 크게 유행하다 보니 농가에서는 곡식을 심지 않고 너도나도 돈이 되는 담배를 재배했습니다. 심지어 서초(西草) 곧 평안도와 황해도 담배는 품질이 아주 좋아 값이 비쌌던 까닭에 그 지방의 좋은 땅이 거의 담배를 심는 부작용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영조임금은 경상ㆍ충청ㆍ전라도 관찰사에게 담배를 심지 못하도록 하라는 명을 내리기까지 했지요. 하지만, 2년 뒤인 영조 10년에 장령 윤지원이 담배의 해독은 술보다 더 심하니 시골에서는 심지 못하게 하고 가게에서 팔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 담배 심기를 금한 것은 실패했나 봅니다. 특히 학자 임금인 정조와 무려 549권의 책을 펴
“지난 경진년ㆍ신사년 겨울에 내 작은 초가가 너무 추워서 입김이 서려 성에가 되어 이불깃에서 와삭와삭 소리가 났다. 나의 게으른 성격으로도 밤중에 일어나서 창졸간에 《한서(漢書)》1질(帙)을 이불 위에 죽 덮어서 조금 추위를 막았으니, 이러지 아니하였다면 거의 후산(後山)의 귀신이 될 뻔하였다. 어젯밤에 집 서북 구석에서 독한 바람이 불어 들어와 등불이 몹시 흔들렸다. 한참을 생각하다가 《노론(魯論)》 1권을 뽑아서 바람을 막아 놓고 스스로 변통하는 수단을 자랑하였다.” 위 글은 조선 후기 학자 이덕무(1741∼1793)의 수필집 《청장관전서》에 실려 있는 “이목구심서 1(耳目口心書一)” 일부입니다. “이목구심서”는 귀와 눈으로 듣고 본 것, 입과 마음으로 말하고 생각한 것을 모은 것이라는 뜻이지요. 일정한 체제나 형식을 갖추지 않고, 책 읽고 연구하는 중에 뜻에 맞거나 중요하다고 생각한 부분을 수록한 것입니다. 이덕무는 말합니다. 옛사람이 금은 비단으로 이불 해 덮은 것보다 책으로 해 덮은 나의 이불이 낫다고 말입니다. 얼마나 추우면 책을 펴서 덧 덮었을까 실감이 가질 않습니다만 이제 점점 추워지는 계절입니다. 올겨울은 따스한 방에서 재미와 해학이 깃든 고
“아무해 아무달 아무날 ○○은 삼가 사뢰나이다. 어느덧 해가 바뀌어 ○○님 가신 날을 다시 맞으니 하늘 같은 가없는 은혜를 잊지 못하여, 삼가 맑은 술과 포과를 올리오니 드시옵소서!” 제사 지낼 때 쓸 수 있는 축문의 예입니다. 여기엔 “사뢰나이다”란 말이 나오지요. 여기에 나온 “사뢰다”는 무슨 뜻일까요? 또 웃어른께 드리는 편지에 올림과 드림, 아룀과 사룀이라는 말들을 붙이는데 어떻게 다를까요? 올림은 받는 분이 웃어른이어서 쓰는 말이고, 드림은 스스로 낮추어 드리는 것이 보잘 것 없음을 겸손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특히 올림과 드림은 물건을 전달한다는 뜻이 들어 있기 때문에 편지 글에는 쓰지 않고 봉투에만 쓰는 것이 좋습니다. 대신 봉투 속에 든 글에는 아룀과 사룀을 쓰는 것이 적절합니다. 사뢰는 것은 속살과 속내를 풀어서 말씀드리는 것이고, 아뢰는 것은 모르시는 것을 알려 드리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편지글이 “언제 무슨 모임이 있다.”라는 것처럼 그저 알리려는 것이라면 “아룀”이 좋고, 내 생각을 풀어내는 내용이라면 “사룀”이 맞습니다. 사람끼리도 서로 존중하고 제대로 알린다면 여러 문제가 풀린다고 하지요. 사과와 용서, 꾸짖음, 달램,
중요무형문화재 제58호 “줄타기”를 보셨나요? 줄타기는 줄 위에서 재주꾼이 걸어다니며 노래하고 춤추고 재담을 하는 재주놀이로 ‘줄어름타기’라고도 하고, 고환ㆍ무환ㆍ환희라고도 합니다. 줄타기 장치는 기다란 통나무 3개를 하나로 묶은 것을 양쪽에 세워 세 발 기둥을 삼고, 양쪽 기둥에 굵은 밧줄을 팽팽하게 공중으로 잡아매어 설치하지요. 《성호사설》에는 “세상에 광대가 줄타기 놀이를 하는 것이 있는데 곧 옛날 환희라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고, 조선 순조 때 문인 송만재(1788~1851)가 엮은 연희시(演戱詩)인 《관우희》에도 자세히 나와 있으며, 유득공의 《경도잡지》유가조(遊街條)에도 설명되어 있습니다. 재주가 매우 절묘하여 청(淸)나라 사신이 와서 보고 천하에 더 없는 재주라고 칭찬하였지요. 줄타기 재주에는 돗붙이기·발붙이기·외홍잡이·쌍홍잡이·양홍잡이·칠보단장·촛칠보·외칠보 ·배돛대·황새령넘기·쇠두렁넘기·접대서기·그네뛰기 등 다양한 종목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사당(寺黨)이라는 떠돌이 예능인이 여러 잔치에서 줄타기를 보였지요. 줄타기는 세계 곳곳에 고루 있는 놀이이지만 다른 나라 줄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