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음력 9월 9일로 중양절입니다. 예로부터 이날을 중양절(重陽節), 또는 중구일(重九日)이라 했지요. 여기서 중양이란 음양사상에 따라 양수(홀수)가 겹쳤다는 뜻이며, 중구란 숫자 ‘9’가 겹쳤다는 뜻으로 설날ㆍ삼짇날ㆍ단오ㆍ칠석과 함께 명절로 지내는 것입니다. 신라 때에는 중구날에 임금과 신하들이 함께 모여 시를 짓고 품평을 하는 일종의 백일장을 열었습니다. 이후 고려 때에 와서 설날ㆍ대보름ㆍ삼짇날 등과 함께 9대 명절로 지냈지요. 이 중양절에는 붉은 수유 열매를 머리에 꽂고 산에 올라 시를 지으며 하루를 즐기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를 ‘등고(登高)’라고 하지요. 붉은 수유 열매는 귀신을 쫓는 것입니다. 또 중양절에는 국화를 감상하거나 국화잎을 따다가 술을 담그고, 화전을 부쳐 먹기도 했습니다. 국화술은 그 향기가 매우 좋아 많은 사람이 즐겼는데, 가난한 사람들은 막걸리에 노란 국화를 띄워 마셨지요. 이밖에 추석 때 햇곡식으로 차례를 드리지 못한 집에서는 이 날 차례를 지내기도 합니다. 제주도에서는 마마에 걸려 죽은 어린 여자 아이 귀신인 명두의 생일이라 하여 큰 굿판을 벌였고, 경남 지방에서는 가을걷이가 끝난 논둑에 불을 놓았습니다. 또 봄에 담근 멸치
“해주 인민들이 흙을 파서 먹는 자가 무릇 30명이나 되었으며, 장연현에서는 두 사람이 흙을 파서 먹다가 흙이 무너져 깔려 죽었다.” 위는 세종실록 26년(1444) 4월 26일 기록입니다. 얼마나 먹거리가 없으면 흙을 먹었을까요? 조선시대 일부 사대부가는 호화롭게 음식을 장만하여 먹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가난한 백성은 이렇게 가뭄과 큰비로 흉년이 들면 먹을 것이 없어 흙까지 먹을 정도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런 백성의 굶주림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합니다. 가장이 먹고살 것이 없자 자살하거나 식구를 버리고 도망간 것은 물론 자식을 팔아 끼니를 이었다는 기록도 보입니다. 또 먹거리 대신 목화씨를 먹고 죽었다는 기록도 있으며, 심지어 사람을 죽여서 그 고기를 먹었다는 이야기기도 있습니다. 영조실록에 보면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는 기관인 경상도 진휼장(賑恤場)에는 굶은 백성이 17만 9천8백 65명, 떠도는 거지가 1만 1천6백 85명, 사망자가 1천3백 26명이었다.”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굶는 백성의 숫자가 많았습니다. 이때 먹을 수 있는 먹거리를 구황식물이라고 했지요.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구황식물은 무려 851종이고, 농가에서 평소에 먹는 것만도 304
요즘 대형뷔페에서는 돌잔치 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 돌잔치는 어김없이 돌상이 차려지고 아이가 맨 처음 잡는 물건에 부모들은 물론이고, 잔치에 참석한 사람 모두의 눈이 쏠려 있지요. 보통 돌잡이라고 하는 것으로 먹, 벼루, 책, 실, 종이, 돈, 활, 화살 등을 놓습니다. 그러면 이런 돌잡이가 조선시대에도 있었을까요? 조선시대 화가 김홍도의 그림 가운데는 “돌잔치”라는 것이 있지요. 그 그림은 모당 홍이당 8첩 평생도 가운데 하나입니다. 물론 이 그림에는 선명치 않지만 조선시대에도 돌잡이를 했습니다. 대신 조선시대에는 사내아이냐 계집아이냐에 따라 돌상에 올려지는 물건이 조금 차이가 납니다. 먼저 책ㆍ붓ㆍ벼루ㆍ먹ㆍ흰실타래ㆍ대추 등은 함께 오르지만, 활과 장도는 사내아이 돌상에, 바늘 가위 인두 따위는 계집아이의 돌상에 올랐습니다. 이때 사내아이가 활과 장도를 먼저 잡으면 무관이 되리라 예측하고, 계집아이가 바늘이나 가위를 먼저 잡으면 바느질 솜씨가 좋으리라 여겼지요. 그런데 이 그림 속 돌잔치에 참석한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아이 돌잔치를 좀 더 많은 사람이 와서 축하해줘야 체면이 선다고 생각하는 요즘 정서에 비추면 아이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만파식적을 음반으로 공연으로 들려준 이삼스님 대금정악 전곡 음반 출시 기념 이삼스님 대금독주회 열려 ▲ 외팔로 대금 연주를 하는 이삼스님 남지우 “만 가지 근심이 출렁이고 있어요. 속 깊이 바람을 넣어 내 몸을 덥혀 주어요. 내려앉은 어둠을 밀어내 주어요.” 위는 김인숙 시인의 “만파식적”이란 시 일부이다. 신라시대 적병도 물리쳤다는 이 “만파식적”은 이 시대에도 저 시인의 소망처럼 내려앉은 어둠을 밀어내 줄 수 있을까? 어쩌면 그것이 가능한 소리를 들려준 이가 있으니 바로 이삼스님이다. 스님은 두 팔로도 소리를 내기가 어려운 대금을 외팔로 연주하는 음악인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20호 예능보유자 녹성 김성진 선생으로부터 대금을 배우고, 궁중 정악의 대가들에게 두루 공부했으며, 85년 국악경연대회에 출전해 금상을 타기도 하는 등 활발한 연주활동을 통한 포교를 하던 중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이 탓에 오른팔은 마비되고, 대금 연주의 희망은 사라졌지만 이 비극적 삶에 마침표를 찍고, 스님은 외팔로 연주할 수 있는 대금과 그 연주법을 개발해낸 것이다. 대금은 이름하여 “여음적”. 여음적은 서양 관악기처럼 외팔의 다섯 개 손가락만으로 연주할 수 있도록 대금에
'조선 최고 작가'의 세계 최고 여행기 [서평]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고미숙 외 옮김) 08.04.26 22:36 ▲ 열하일기 고미숙, 길진숙, 김풍기가 옮기고 그린비가 펴낸 "세계 최고의여행기 열하일기"(상하권) ⓒ 그린비 연암 박지원. 그는 <열하일기> <연암집> <허생전> 등을 쓴 조선후기 실학자 겸 소설가이다. 이용후생의 실학을 강조했으며, 자유롭고 기발한 문체를 구사해 여러 편의 한문소설을 발표했다. 그중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청나라 고종의 칠순연에 사신단으로 가는 팔촌형 박명원을 따라가 열하(熱河)의 문인들, 연경(燕京)의 명사들과 사귀며 그 곳 문물제도를 보고 배운 것을 기록한 여행기다. 그 열하일기를 본격적으로 국역한 책이 나왔다 해서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다.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상·하)>는 '연구공간 수유+너머' 선후배 사이인 고미숙·길진숙·김풍기가 옮기고 그린비가 상하권으로 펴냈다. 정조가 임금 자리에 오른 지 5년째 되는 해인 1780년 5월 25일부터 10월 27일까지 장장 6달 동안 '당대의 천재'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대장정이 있었다. 애초 목적
“步上白雲寺(보상백운사) 걸어서 백운사에 오르니 寺在白雲間(사재백운간) 절이 흰 구름 사이에 있네 白雲僧莫掃(백운승막소) 스님이여 흰 구름을 쓸지 마소 心與白雲閑(심여백운한) 마음은 흰 구름과 함께 한가롭소.” 위 시는 황진이,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 3대 여류시인의 하나인 매창(李梅窓, 조선 선조 때의 여류시인 본명은 李香今. 1573-1610)이 지은 백운사(白雲寺)라는 시입니다. 흰 구름 사이에 있는 절의 스님에게 흰 구름을 쓸지 말라고 하는 구절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매창이 열 살 되던 해 백운사에서 시 짓기 대회가 열려 부안의 내로라 하는 시인 묵객이 모두 모였는데 구경삼아 절에 간 매창이 실로 절묘하기 이를 데 없는 시를 지어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매창은 전북 부안의 명기(名妓)로 한시 70여 수와 시조 1수를 남겼으며 시와 가무에도 능했을 뿐 아니라 정절의 여인으로 부안 지방에서 400여 년 동안 사랑을 받아오고 있지요. 매창은 천민 출신으로 뛰어난 시인이었던 유희경과의 가슴 시린 사랑,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과의 우정으로 유명합니다. 전북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에 매창 묘(전북 기념물 제65호)와 매창공원이 있습니다. 이 가을 매창공원
“이 샴푸는 천연 원료로 만들어서 모발이 상하지 않습니다.” 흔히 샴푸 광고나 설명문에서 볼 수 있는 글귀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모발이 무슨 뜻일까요? “모발(毛髮)”은 사람의 몸에 난 온갖 털을 뜻하기도 하고, 그냥 사람의 머리털을 말하기도 해서 엄격하게 말하면 온몸에 난 모든 털을 가리킵니다. “털”을 뜻하는 “髮(발)”이란 한자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쉬운 토박이말 “머리카락”을 놔두고 광고를 따라 ”모발”이라고 씁니다. 머리털을 뜻하는 한자말 “두발(頭髮)”이란 말도 쉽게 쓸 수 있는 한자가 아니지요. “모발” "두발"은 멋있는 말이고, “머리카락”은 천한 말인가요? 심지어 한 샴푸 설명에 보면 아예 영어로 표기한 SPECIPIQUE, THE RISK OF HAIR LOSS, Exrea Rich, Upgrade 등이 있는가 하면 데일리, 케라스타즈, 스페시픽, 스티뮬레이팅, 리유얼, 스타일링, 볼류마이징, 바이오터치라인, 엑스트라이치 등의 한글로 표기한 외국어의 남용도 두드러집니다. 좋은 말글살이는 한자말이나 외국어 대신 명확하고 아름다운 토박이말을 쓰는 일입니다.
“중국인의 캉이나 서양인의 침대나 일본인의 다다미(疊)에서 거처를 하야보앗스나 우리 조선의 온돌처럼 땃뜻하고도 경제적이요 위생적인 것은 업슴니다. 일본 가티 비습하고 중국 가티(특히 北方) 치운 지방에 잇서서 이른 봄과 느진 가을-아즉도 난로, 화로가튼 것을 설비치 안이할 때에는 학생 기숙사 가튼데에서는 참으로 치워서 견듸기 어렵슴니다. 그런 때에 우리 조선 사람은 누구나 온돌을 생각할 것입니다마는 특히 우리 가튼 여자로서는 더욱 간절히 생각이 남니다.” 위 글은 일제강점기 때 잡지 별건곤 제12·13호(발행일 1928. 05. 01.)에 실린 북한 정치가 류영준의 “외국에 가서 생각나든 조선 것-온돌과 김치”라는 글 일부입니다. 그는 중국에서 약 6년 동안, 일본에서 약 8, 9년 있는 동안에 많은 고생을 하면서 특히 달 밝고 꽃 필 때에 친척과 동무의 생각도 간절했고 속이 헛헛하고 입맛이 없을 때에는 평양냉면과 닭찜 같은 것도 생각이 났지만 더욱 생각나는 것은 온돌과 김치였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나라의 온돌은 고조선 때부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될 정도로 오래 세월 써온 것입니다. 하지만,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온돌을 잊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온돌의 과학성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 그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글자라는데 이의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글이 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글자인지, 한글의 특징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한국인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제564돌 한글날을 맞아 한국인으로서 알아야 한글의 특징 몇 가지를 알아볼까요? 한글의 특징을 두 가지 고른다면 하나는 그 구성원리를 들 수 있습니다. 한글의 닿소리(자음)는 소리를 낼 때 발음기관의 생긴 모양을 본뜨고, 홀소리(모음)는 하늘(·)과 땅(ㅡ)과 사람(ㅣ)을 본떠서, 글자가 질서 정연하고 체계적인 파생법으로 만들어져 매우 과학적이고 철학적이라는 말을 듣지요. 또한,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 지구상에 있는 대부분 글자는 오랜 세월에 걸쳐 현재의 글자로 완성된 것이지만 한글은 글자를 만든 목적(백성사랑)과 만든 사람(세종대왕), 만든 때(1443)가 분명한 글자라는 점을 큰 특징으로 들 수 있습니다. 한글은 글자 하나하나가 낱소리를 표기하는 가장 발달한 음소로 이뤄져 있으며 홀소리와 닿소리 음을 합치면 하나의 글자가 되고, 여기에 받침을 더해 사용하기도 하는 음절 글자의 특징도 아울러 가지고 있습니다. 또 한글은 그 구성 원리가
오늘은 24절기의 열일곱 번째로 추분과 상강 사이에 드는 한로(寒露)입니다. 한로는 찬이슬이 맺히는 때인데 서리가 내리기 전에 거둬들여야 할 곡식들로 농부들은 눈코 뜰 새가 없습니다. 바쁜 일손을 잠시 멈추고 새참 시각에 마시는 막걸리 한 사발 맛은 농부들에게 있어 행복한 시간이며 지나가는 길손을 불러 함께 하는 것은 마음의 여유에서 비롯되는 풍요로움일 것입니다. 한로와 상강에는 시절음식으로 추어탕(鰍魚湯)을 즐겼습니다 <본초강목>에는 미꾸라지가 양기(陽氣)를 돋우는데 좋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자를 보면 ‘가을(秋)'자 앞에 고기 ‘어(魚)'를 붙인 것을 보아 미꾸라지가 가을에 맛이 나는 고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국화전을 지져 먹고 국화술을 담그기도 하지요. 이 무렵엔 단풍이 곱게 물들기 시작하여 바쁜 농촌과는 달리 도회지에서는 크고 작은 모임으로 단풍관광 길에 오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예전 우리 겨레는 24절기에 맞추어 그 철에 맞는 삶을 살아왔지만 현대인들은 24절기를 잊고 그와는 무관한 일상을 살고 있지요. 그러나 구부러진 허리 한번 펴지 못하고 논밭에서 가을걷이로 바쁜 농촌의 이웃이 있고 부모님이 계시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