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일취스님] “내가 허약한 가설 위에 지어 올렸던 환상의 성은 눈 깜짝할 사이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그 후에는 무감각하고 밋밋한 평면이 덩그렇게 남아있을 뿐이었다.” - 무라카미 하루키, 장편소설 《상실의 시대》 가운데서- 어느 날 내가 기대했던 어느 것 하나가 환상이었음을 깨닫곤 한다. 복권을 사놓고 긴장된 마음으로 추첨 일을 기다렸다가 추첨이 끝나자, 주먹 안에 무참하게 뭉개진 종잇장처럼 그 시간까지 기대했던 꿈도 처절하게 뭉개진 것을 여러 번 경험했다. 꿈이 어느 때는 그저 생각만으로 지어 올린 가설과 논리들의 군상들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가 다가설 수 없는 여러 색깔의 꿈의 반란을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꿈이 없는 삶이란 망막한 사막과 같다. 한 여자가 양계장에서 하루 일을 해주고 그 대가로 달걀 한 판을 받았다. 달걀판을 머리에 이고 부픈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그녀는 큰 부자가 될 거라는 꿈을 꾸며 길을 걸었다. “이 달걀을 부화시키면 병아리 30마리가 된다. 30마리 병아리를 다섯 달 동안 잘 키우게 되면 그 닭들이 수많은 알을 낳게 되고, 그 알로 또다시 병아리를 부화시키면 닭은 엄청나게 늘어나게
[우리문화신문=일취 스님] 대개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일상의 대부분을 선과 악의 숲을 들락거리게 마련이다. 그런가 하면 때로는 자신이 선인이 되거나, 악인이 되기도 한다. 그래 악인이 선인인 척하는가 하면, 선인이 악인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무릇 모두가 원하는 선인으로 살아가기는 무척이나 어려운가 보다. 아무리 자신이 선인이라 하지만 마음은 항상 악의 숲을 들락거리기 때문이다. 다만 악을 좀 더 적게 지을 따름이지 자신도 모르게 죄를 짓고 살아가고 있어서다. 그렇기에 악에 물들어 버린 자는 선을 뒤로한 채 악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거소습불이여구(渠所習不以與狗)” 이는 “제 버릇 개 못 준다.”라는 말이다. 이처럼 자신의 못된 습성은 죽어서도 고치기 어렵다고 함이겠다. 어쩌다 악인이 뜬금없이 개과천선(改過遷善)했다고 하자. 이런 경우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어려운 일이다. 얼마 전 부산에서 ‘묻지 마’ 살인사건이 있었다. 텔레비전에 비친 화면에 외양으로는 우리네와 별반 다르지 않은 양순한 사람 같아 보이건만 어찌 인간의 탈을 썼는가 싶을 만큼 극악무도한 살인을 저질러 세간을 경악게 했다. “저렇게 곱게 생긴 여성이 어떻게 저런 살인을 저질렀는가
[우리문화신문=일취 스님] 초봄부터 산과 들에는 갖가지 꽃들이 피고 진다. 시기에 따라 전국 곳곳에서는 꽃 잔치가 요란하다. 도심 길가에도 어느 한 곳 빈 데 없이 깔끔하게 다듬어진 꽃길이 행인들의 눈을 즐겁게 하고 있다. 꽃과 사람! 꽃과 사람의 관계는 깊은 것임을 말해주는 것일까? 꽃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인지, 사람이 꽃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물음에 답을 내리기가 묘연(杳然)할 지경이다. 하지만, 분명 사람이 꽃이 좋아 꽃을 탐하는 마음은 숨길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본다면 꽃의 처지에서는 꽃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사실 꽃이 아름답게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환심을 사고, 사랑을 얻기 위해서 아름답게 핀다고 보기보다는, 꽃들은 그들만의 꿈을 가지고 독특한 세계를 꾸미며 생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생각과 관계없이 그들만의 자유로운 세계에서 어느 곳 가리지 않고 다채로운 형상과 향기 그리고 아름다움을 뽐내며, 자연과 순응하며, 생명의 생존법칙에 따라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사람이 보고 안 보고 상관없이 ‘아름답다’, ‘추하다’라는 분별과 차별에도 휘말리지 않고 그 어느 곳에서나 다소곳이 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