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창빈 안씨 무덤을 얘기하자니 창빈 안씨의 아들인 덕흥대원군의 무덤도 생각이 납니다. 덕흥대원군의 무덤은 경기도 기념물 제55호로 상계동에서 덕릉고개를 넘어 남양주시 별내동으로 내려가다가 왼편에 있습니다. 고개 이름은 고개 근처에 덕릉이 있다고 하여 덕릉고개라고 합니다. 고개 밑에 3호선 종점인 당고개역이 있으니까, 이를 당고개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는데, 당고개는 당고개역이 있는 마을에서 수락산역쪽으로 넘어가던 고개를 말합니다. 당집이 많아서 당고개라고 한 것이지요. ‘덕릉’이라고 하면 왕릉을 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근처에 ‘덕릉’이라는 왕릉은 없습니다. 덕릉은 덕흥대원군의 무덤을 말합니다. 그런데 ‘릉’이라는 이름은 임금과 왕비의 무덤에만 붙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덕릉은 정식 이름은 아닐 것인데, 어떻게 하여 덕흥대원군의 무덤을 덕릉(德陵)이라고 부르고, 또 고개 이름에 ‘덕릉고개’라는 이름이 붙었을까요? 여기에는 재미있는 야담이 스며있습니다. 추존왕이라고 있지 않습니까? 생전에 임금이 되지는 못했지만, 아들이 임금이 되는 바람에 사후에 임금으로 추존되면 추존왕이라고 하지요. 이를테면 성종의 아버지 덕종, 인조의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우리나라 사람치고 동작동 국립묘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6.25 전쟁 때 전몰한 국군장병들을 한 곳에 안장하기 위하여 1955년에 국군묘지로 설치되었지요. 그러다가 1965년 국립묘지로 격을 높이면서 독립유공자, 순직 경찰관, 대통령 등도 이곳에 묻혔습니다. 그러니까 대한민국을 위해 공이 큰 사람들이 묻혀 있는 곳이지요. 그런데 이곳에 이런 것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무덤이 있습니다. 바로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의 무덤도 이곳에 있습니다. 그러면 언뜻 “왜 창빈 안씨의 무덤도 이곳에 모셨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건 아닙니다. 원래 창빈안씨의 무덤이 먼저 이곳에 있었습니다. 처음 이곳에 국립묘지를 설치하던 당국자는 국립묘지와 상관없는 창빈안씨의 무덤을 다른 곳으로 쫓아내고픈 생각을 하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오랜 세월 이곳에 먼저 터를 잡고 있던 임금의 후궁을 쫓아낼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창빈 안씨는 중종의 후궁일 뿐만 아니라 선조의 할머니이기도 합니다. 곧 1567년 명종이 자식이 없이 죽자 후계 왕의 결정권을 쥐고 있던 명종비 인순왕후는 창빈 안씨의 손자인 하성군을 임금으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얼마 전에 사무실로 여성잡지 《노블레스(Noblesse)》가 배달됐습니다. “어? 잘못 배달된 것 아닌가?” 제가 평소에 여성잡지를 보는 일이 없거든요. 미용실에서 머리 깎으며 가끔 여성잡지를 뒤적이는 일 외에는... 그래서 발신인란을 보니 ‘윤경식’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윤경식 씨는 저와 같은 이비엠(EBM) 포럼회원인 건축가입니다. 포럼의 등산셀인 <이산저산>의 등산대장을 맡고 있어, 평소 ‘윤 대장’이라고 부르지요. 그래서 앞으로 윤 대장이라 부르겠습니다. “그런데 윤 대장이 왠 여성잡지를 나에게?” 갸우뚱하면서 포스트잇 인덱스로 표시해놓은 쪽을 펼치니 금방 의문이 풀렸습니다. 바로 윤 대장이 전남 함평에 철학자 최진석 교수를 위해 지은 호접몽가(蝴蝶夢家)에 관한 기사가 실렸더군요. 함평이 고향인 최 교수가 고향집 마당에 ‘새말 새몸짓 기본학교’ 강의동을 지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누구에게 건축을 의뢰할까 하다가, 평소 건축에 철학적 사유를 덧입히던 윤 대장이 생각나서 윤 대장에게 부탁을 한 것이지요. 최 교수는 우리 사회가 이젠 뭔가 새로운 철학,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할 때라 봅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이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사람들에게 늘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지혜를 알려주는 언론인 배연국님은 자신의 책 《소소하지만 단단하게》에서 28개의 소확행을 4개의 상자에 담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 가운데 ‘내려놓기’에 담긴 소확행이 내 눈길을 끈다. 욕망으로 눈이 이글거리는 인간의 정글 속에 살다보니 우선 제목 ‘내려놓기’부터 내 마음을 잡는 것이다. 배연국님이 들려주는 사하라 사막의 잿빛모래쥐는 묘한 습관이 있다. 건기가 다가오면 잿빛모래쥐는 궁핍할 때를 대비하여 온종일 열심히 풀뿌리를 모은다. 잿빛모래쥐가 무사히 건기를 지내려면 2kg 정도의 풀뿌리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잿빛모래쥐는 이렇게 필요한 양이 다 차도 계속하여 풀뿌리를 모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풀뿌리를 모으는 데에 열중할 때 누가 방해라도 놓으면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불안해한단다. 이렇게 모으다 보니 심지어는 너무 많이 모은 풀뿌리가 썩어버릴 정도인데도 잿빛모래쥐의 풀뿌리 모으기는 멈추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런 식으로 잿빛모래쥐가 모은 풀뿌리의 양은 10kg이 넘게 된다. 이게 비단 잿빛모래쥐에만 해당하는 것이겠는가? 오늘날 인간사회에서도 잿빛모래쥐 같은 인간들을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제가 책을 좋아하니까 심심찮게 책 선물을 받게 됩니다. 선물 받는 책 가운데는 평소 제가 관심이 있는 분야의 책도 많지만, 선물을 받지 못했다면 결코 읽어보지 못할 책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책들 가운데 뜻하지 않은 보석을 발견할 때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 강 대표를 모시고 법률상담을 하러온 구미꼬가 선물해준 책도 그런 보석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바로 《엄니는 102살》이라는 책입니다. 《엄니는 102살》은 논현동에 있는 일식접 어도의 배정철 대표가 쓴 책입니다. 배대표는 2009년부터 2016년까지 어머니에게 쓴 2,554통의 편지를 모아 책으로 냈습니다. 원래부터 책으로 내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어도의 단골인 영동고등학교 - 어도 근처에 영동고가 있습니다 - 이진훈 선생이 배 대표 집무실인 어도 1호실에서 배 대표와 대작(對酌)을 하다가, 배 대표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포스트잇에 써 내려간 사모곡의 편지들을 보고 출판을 강권한 것이지요. 배 대표는 3남 3녀의 막내로 태어났는데, 어머니는 48살에 배 대표를 낳았습니다. 요즘 시대 같으면 배 대표는 세상 빛을 보지 못했겠네요.^^ 배 대표는 4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최영묵 박사와 김창남 교수가 같이 쓴 《신영복 평전》을 읽었습니다. 신영복 선생은 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20년 동안 수감 생활을 하던 중 1988년 광복절 특별가석방을 받아 출소했으며, 저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작가로 널리 알려진 전 성공회대 석좌교수로 2016년 76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습니다. 《신영복 평전》은 그야말로 신영복 선생님의 삶을 샅샅이 찾아내어 분석하고 쓴 평전이지요. 2019. 12. 16. 처음 이 책이 나왔을 때부터 사본다 사본다고 하던 것이 이제야 읽게 되었네요. 사실 그동안 신영복 선생의 책은 대부분 읽었고, 또 신영복 선생이 원장으로 있던 성공회대 인문학습원에서 개설한 CEO와 함께 하는 인문공부 11기 과정도 들으면서 직접 신영복 선생의 강의도 들었기에, 굳이 《신영복 평전》까지 읽어볼 필요가 있겠느냐 하는 생각을 안 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신영복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그의 삶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평전인데 한번은 읽어보아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계속 들면서, 마침내 책을 찾은 것입니다. 역시 책을 사보길 잘했다는 생각입니다. 평전을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얼마 전에 제 대학 30년 후배인 손상민 만화스토리작가가 《권기옥, 꿈의 날개》라는 만화책을 보내왔습니다. 한국 최초의 여류비행사 권기옥 선생의 일생을 그린 만화책이지요. 스토리작가이니 만화그림은 협업한 홍혜림 작가가 그렸습니다. 이 책은 성남시와 성남문화재단이 광복회를 지원하여 독립운동가 100인 만화 프로젝트의 하나로 출판되었습니다. 책을 내면서 광복회는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목숨을 바쳤지만, 분단 이후 정쟁과 이념의 그늘 속에서 그들은 잊혔습니다. 당시 이천만 국민 가운데 독립을 위해 생을 바친 이들의 수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지만, 현재까지 국가보훈처에 서훈이 된 독립운동가는 2만 명이 채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나요? 알려지지 않은 독립투사들을 찾아내고, 잊히고 지워진 선열들의 피땀이 서린 노력과 뜻을 찾아 새기는 일은 너나없이 나서서 이 땅에 다시 드러내야 할 마땅한 도리입니다. 이것이 나라를 바로 세우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그들의 희생으로 세워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가슴 속에 하나씩 빛나는 자긍심이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아 수덕사에 쇠북이 운다 ‘수덕사의 여승’ 노래 가사입니다. 노래를 작사한 김문응씨는 어느 여승을 생각하고 작사한 것일까요? 수덕사가 비구니 절이니 많은 여승이 있었겠지만, 그중에서 제일 유명한 스님으로 일엽스님을 꼽을 수 있습니다. 《김상아의 음악편지》에는 일엽스님에 대한 글도 나옵니다. 일엽스님! 속세에서의 이름은 김원주! 그녀는 참 굴곡진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기에 마지막에는 불가에 귀의한 것일까요? 그녀는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23살에 마흔을 넘긴 연희전문교수 이노익과 결혼합니다. 이노익은 막대한 돈을 퍼부어 꽃과 같은 아내를 출판계의 꽃으로 만들었으나, 현실에 만족할 수 없었던 김원주는 이혼하고 일본으로 유학 갑니다. 그런데 동경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동석한 한 청년 오다 세이조가 김원주에게 한눈에 반하고 맙니다. 그러나 세이조는 일본 최고 명문가의 종손인지라 집에서 혼인을 허락해줄 리가 만무합니다. 그렇지만 세이조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김원주를 계속 만나면서 둘 사이에는 사랑의 결실인 사내아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매번 도서출판 <얼레빗>에서 책이 나올 때마다, 저에게 책을 보내주던 이윤옥 시인이 책을 하나 보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보내 준 책은 그 동안 보내주던 책과는 다른 종류의 책이네요. 《김상아의 음악편지》 - 오랫동안 디스크쟈키를 하였던 김상아씨가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 가사를 올리고, 그 노래 앞부분에는 그 노래에 얽힌 자신의 추억이나, 그 노래를 들으며 떠오른 느낌이나 단상을 썼습니다. 그리고 노래 뒷부분에는 그 노래나 그 노래의 작곡가, 가수에 관해 쓰고요. 하나하나의 노래가 저의 감성에 들어맞는 노래입니다. 작가가 저랑 같은 세대의 사람이라 그렇겠네요. 저는 ‘김상아’라고 하여 여자분을 떠올렸으나, 사진을 보니 남자네요. 김상아 씨도 저처럼 <우리문화신문>이라는 인터넷 신문(http://www.koya-culture.com/)에 글을 기고하고 있습니다. ⌜김상아 ∙ 김민서의 음악편지⌟, ⌜시 마을 나들이⌟라는 꼭지에 글을 쓰고 있는 것이지요. 이번 글도 <우리문화신문>에 기고했던 글들을 모아 책으로 낸 것이네요. 저는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라는 꼭지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지금 &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2000년 7월 전근 발령을 받고 수원지방법원으로 왔다. 그때까지 나에게 ‘수원’이라고 하면 대학 다닐 때 친구들과 딸기 먹으러 왔던 곳이고, 1982년 수원지방검찰청에서 4달 동안 검사 시보를 하던 곳으로 기억되던 곳이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나에게 수원이란 단지 그 정도의 피상적인 도시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2000. 7. 정말 오래간만에 수원으로 다시 오니, 수원은 예전에 내가 기억하던 그런 도시가 아니었다. 우선 법원ㆍ검찰은 화성 성곽을 빠져 나와 원천동으로 옮겨와 있었다. 예전에 내가 검사 시보를 할 때, 이곳은 그냥 한가로운 농촌의 모습이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화성 성곽은 대부분 복원되어 있었고, 그것도 단순히 복원만 된 것이 아니라,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까지 되어 있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라니?” 그 전까지 내 고정관념으로는 문화유산이란 오래된 유산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딸기 먹으러 올 때만 하더라도 수원 화성은 여기 저기 성곽이 허물어 있었지 않은가? 내 기억에는 허물어져 있던 구간이 더 많았던 것 같다. 그런데 18세기 말에 축조한 성곽이, 그것도 현대에 와서 복원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