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며칠 전 우리나라 성인들이 너무 책을 보지 않는다는 통계 뉴스를 보고 한 마디 썼었는데 그 글을 보고 제 고교동창 친구가 아래와 같이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독서량은 삶의 깊이를 가늠하는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자신과 주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며 사는가에 대한 척도입니다. 과거 10 여 년 전 부터 책을 대체하고 있는 것이 디지털 매체입니다. 요즘 전철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슬기전화에 머리를 파묻고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상당수가 게임 아니면 동영상 입니다. 그런 영상 신호는 선악과 가치를 판단하는 두뇌의 전두엽을 우회해서 바로 시각 신호에 감각적으로 반사하는 곳을 자극한다고 합니다. 생각할 겨를이 없는 것이지요. 결국 현재의 문화적 추세는 생각하기를 기피하고, 감각적이고, 성급한 세대를 양산할 것 입니다. 문화적 후퇴는 물론이고 범죄 증가도 가능성이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에서 총으로 쏘아 적을 쓰러뜨리는 게임에 몰두한 10대가 게임을 못하게 하는 어머니 이마를 정조준해서 살해하고, 아버지까지 추격해서 살해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가치 판단을 못하게 되니까 그냥 영상에 나오는 쓰러뜨려야 하는 적과 동일시 한 것이지요.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등산을 하다 잠시 쉬는 시간이면 산꾼들이 배낭에서 먹을 것을 하나, 둘 꺼내지 않겠습니까? 제일 먼저 꺼내드는 것이 물일 것이고, 이것저것 간식으로 먹을 것도 많이 꺼내듭니다. 그 중 많이 꺼내드는 것 중의 하나가 귤입니다. 지난 토요일 대학동기들과 같이 2018년 새해 첫 산행을 하면서도 어김없이 한 친구가 귤을 꺼내들어 친구들에게 나눠줍니다. 저도 친구가 주는 귤을 먹으면서, 문득 지금은 이렇게 흔하게 귤을 먹고 있지만, 이 귤이 조선 시대에는 참 귀한 과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제주에서만 귤이 재배되고, 또 그 귤이 거친 바다를 넘어 육지로 들어오는 것이므로 일반 백성들은 감히 먹을 생각도 못했지요. 아니 백성만이 아닙니다. 육지로 건너온 귤은 곧바로 궁궐로 진상되는 것이므로 양반들도 먹기 어려운 귀한 과일이었습니다. 다만 임금이 신하들에게 귤을 나눠주면 ‘성은이 감읍하오이다’ 하면서 받아먹었을 것입니다. 그 시대에는 요즈음 여름에도 흔하게 먹을 수 있는 얼음도 마찬가지로 귀한 것이었습니다. 당시는 요즘 같은 냉동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때라, 겨울에 얼어붙은 한강에서 잘라와 서빙고에 보관한 소량의 얼음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이 13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며 성리학의 핵심 개념인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사단칠정 논쟁은 8년간)을 벌인 것은 우리나라 철학사에 유명한 논쟁이라, 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테지요? 이 두 대유학자 사이에 오간 편지를 김영두 선생이 뒤친(번역)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도서출판 소나무》를 읽었습니다. 퇴계와 고봉은 오고 간 편지 속에서 딱딱한 철학 논쟁만 펼친 것이 아니라, 진실로 서로를 아끼고, 존경하고 그리워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단칠정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태극, 상례(喪禮)나 제례(祭禮), 왕실의 전례(典禮) 등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누었더군요. 퇴계가 우리나라 최고의 성리학자라는 것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겠지만,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퇴계가 학문적으로만 최고의 성리학자가 아니라, 진정으로 존경받을 만한 스승이라는 것을 다시금 느꼈습니다. 퇴계는 고봉보다 26살이나 연장자로, 고봉은 퇴계의 아들뻘, 그것도 일찍 결혼하던 조선에서는 몇 째 아들뻘에 불과합니다. 뿐만 아니라, 처음 이들이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할 때 퇴계는 이미 조선에서 성리학의 거봉으로 인정받고 있었으나, 고봉은 32살의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이순신이 조정을 기망한 것은 임금을 무시한 죄고, 적을 놓아 주고 공격하지 않은 것은 나라를 저버린 죄며, 심지어 남의 공을 가로채고 모함까지 한 것 또한 엄중한 죄다. 이렇게 죄상이 허다하므로 용서할 수 없으니 법률로 다스려 죽여야 함이 마땅하다. 신하로서 임금을 속인 자는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줘야 할 것이다. 선조가 우부승지 김홍미에게 내린 전교(傳敎)입니다. 선조는 이순신이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의 부대를 공격하라는 자신의 명령에 불복종 하였다고 이순신을 잡아들여, 고문으로 초죽음으로 만들어놓은 것도 모자라, 이순신을 아예 죽이려고 이런 전교를 내렸습니다. 사실 선조의 명령은 잘못된 첩보에 따른 것입니다. 일본이 교묘하게 이순신을 제거하려고 허위정보를 흘린 것이지요. 당시 대마도 출신으로 요시라(본명 : 가케하시 시치다이후)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이중간첩이었습니다. 일본은 요시라에게 가등청정이 모월 모일에 바다를 건너 쳐들어 올 것이라는 허위정보를 흘리라고 지령을 내립니다. 요시라는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이 허위정보를 흘렸고, 이 허위정보는 당연히 선조에게까지 보고됩니다. 임진왜란 때 도망가기에 바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이윤옥 시인이 여성독립운동가의 삶을 시로서 조명하는 《서간도에 들꽃 피다》 7권을 냈습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벌써 7권째를 낸다고 하니 이윤옥 시인의 노고에 고개가 숙여지네요. 이번 책에서 이 시인은 탑골공원에서 독립을 외친 가파도 소녀 고수선으로부터 조국 광복의 어머니, 하와이 황마리아에 이르기까지 모두 20분의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해 썼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처럼 우선 그 독립운동가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시를 먼저 실은 후, 독립운동가에 대해 글을 쓰고, 필요한 것이 더 있으면 마지막에 ‘더보기’라는 제목으로 관련 글을 실었네요. 이번 7권에서 눈에 띄는 것은 하와이 여성독립운동가 박신애, 심영신, 전수산, 황마리아에 대해 조명을 한 것입니다. 하와이 교민들 가운데 남자들은 1902년부터 몇 차례에 걸쳐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로 간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여자들은 이들과 사진만 보고 결혼한 소위 ‘사진신부’인 경우가 많았구요. 사진신부들은 사진 속의 젊은 총각만 보고 하와이에 갔다가 늙은 총각이 나타나 깜짝 놀라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어찌합니까? 이미 고국으로 돌아가기는 불가능한 상황, 한국의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KBS 임병걸 해설위원이 KBS 아침뉴스에서 <시로 읽는 경제이야기>라는 마당을 진행하였지요. 시인이기도 한 임 위원이 언뜻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경제 이야기를 시와 접목하여 차분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조곤조곤 들려주곤 했는데, 이제 그렇게 풀어낸 이야기가 같은 이름의 책으로 묶여서 우리에게 선을 보였습니다. 임시인이 친필로 사인하여 직접 저에게 손으로 건네 준 책을 펼쳐듭니다. ‘전월세 오디세이아, 지상의 방 한 칸을 찾아서’, ‘비정규직, 그들이 우주로 떠나기 전에’, ‘가난, 벗어던져야 하는 숙명의 굴레’... 글의 제목만 보아도 임 시인이 애정 어린 시선으로 서민들을 바라보는 따스한 마음을 느낄 수 있겠습니다. 임시인은 ‘시 속의 경제, 경제 속의 시’라는 제목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시와 경제, 얼핏 생각하면 전혀 무관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거의 대척점에 있는 분야가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시인 하면..... 세상 물정을 모르거나 애써 외면하고 인간의 삶이 행복과 기쁨으로 점철된 유토피아라고 생각하는 몽상가로 취급되기 일쑵니다...... 반면 경제는 이런 낭만과는 거리가 먼 냉정하고 이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강치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바다사자의 하나입니다. 한 때 그런 강치가 독도에 넘실거려 조선시대에는 독도를 가지도 – 강치를 일명 가지라고도 하였지요– 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강치가 독도에 넘실거렸다? 독도에 강치가 넘실거렸다는 것을 처음 들어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 독도에 넘실거리던 그 강치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간 거야?”라며 고개를 갸우뚱 하시겠지요. 일본이 1905년 독도를 강제로 자기네 영토로 편입한 후, 일본 어부들이 독도의 강치를 무수히 학살하였습니다. 강치의 가죽이 돈이 되었거든요. 당시 강치 한 마리 값은 황소 열 마리 값에 필적하였다는군요. 1905년 이후 약 8년 동안 일본어부들이 학살하고 잡아간 강치는 무려 14,000여 마리나 된다고 합니다. 일본어부들은 강치가 줄어들자 강치를 확실히 잡기 위해 아기 강치를 먼저 잡기도 합니다. 상대적으로 동작이 굼뜬 아기 강치를 먼저 잡으면 아기를 구하러 어미가 올 테고, 그럼 손쉽게 어미 강치까지 잡는 것이지요. 쪽바리 아니랄까봐 그런 비열한 방법까지 쓰다니... 일제 강점기 이렇게 독도의 강치를 잡아대니 결국 독도의 강치는 멸종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남양주 마재마을은 다산 정약용의 생가로서 사람들이 많이 찾습니다. 요즈음 남양주시가 다산을 남양주를 대표하는 역사인물로 집중적으로 띄우고 있지요. 그래서 마재마을에 실학박물관도 만들고 다산에 관련된 학회, 축제 등 다양한 행사도 펼치고 있구요. 그런가 하면 둘레길이 유행하면서 다산길도 만들었네요. 요즈음은 마재마을에 다산생태공원도 들어서 주말에는 주차할 곳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몰리고 있습니다. 헉! 한확 이야기 한다면서 뚱딴지 같이 왜 다산 이야기 하냐고 하시겠군요. 마재마을 입구에 세조 때 좌의정 한확(1400 ~ 1456)의 무덤과 신도비가 있습니다. 저는 마재마을 가면서 여기에 한확의 무덤과 신도비가 있구나 하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았더니 한확에게는 누나 덕분에 출세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네요. 지금부터 그 얘기를 잠깐 풀어보겠습니다. 태종 때 명나라 영락제가 조선에 공녀를 요구합니다. 고려 때 원나라의 요구로 많은 고려의 처녀들이 원나라에 공녀로 바쳐졌는데, 명나라 때까지도 이런 요구가 이어지고 있었군요. 사실 영락제의 어머니는 원나라 때의 조선 공녀 출신입니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도 여진족이라는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얼마 전 우실하 항공대 교수의 <요하문명의 발견과 동북아 상고사의 재편>이라는 강좌가 있었습니다. ‘요하문명의 발견’이라는 제목에 눈이 번적 띄어 참석하였습니다. 전에 요하지역에서 황하문명보다 앞선 시대의 유물이 계속 출토되면서 중국학자들이 당황해하더니, 이를 중국문명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거든요. 강의를 들으니 이미 중국에서는 이를 황하문명보다 앞선 요하문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다만 이는 한족과는 상관이 없는 오랑캐의 - 동이족이 되겠지요 - 문명이 아니라 중화문명의 기원으로 보는 것입니다. 즉 요하문명의 건설자는 중국 한족들이 자신의 조상으로 생각하는 황제족의 문명이며, 이곳에서 일군의 사람들이 중원으로 들어와 하왕조를 정복하고 상왕조를 건설했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리고 동이족이나 몽고족을 포함한 동북아의 민족들이 모두 황제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므로 이들 민족들의 역사도 다 중국사에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역사도 중국사의 일부가 되는 것이고, 이게 바로 동북공정이지요. 얼마 전에 시진핑이 트럼프와 회견하면서 한국이 중국의 속국이라고 얘기한 것이 이런 시각에서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지난 7월 26일 문재인 정부 내각 1기가 본격적으로 출범하였지요? 이번에도 새 각료 인선을 위한 청문회에서 많은 후보자들이 크고 작은 흠으로 곤욕을 치렀고, 결국 안경환 법무부장관 후보자, 조대엽 고용노동부장관 후보자는 청문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사퇴하였네요. 아마 임명된 장관들 중에도 청문회에서 발가벗겨진 자신의 민낯에 마음이 편치 않을 분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청문회 때마다 자신의 개인 이력이 낱낱이 파헤쳐지는 부담 때문에, 능력 있는 사람들이 이를 원치 않아 후보로 제청되는 것을 한사코 거부하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 동안 대한민국이 짧은 기간 안에 압축 성장을 해오면서 도덕보다는 물질 만능의 사회가 되고, 심지어는 결과만 좋으면 과정은 어떠해도 좋다는 의식이 형성된 것은 부정할 수 없겠지요. 그러니 사회 지도층의 사람들도 노블리스 오블리제 보다는 자기 개인의 욕심 채우기가 우선이 되었기에, 청문회 때마다 이런 사태를 보게 되는 가 봅니다. 더구나 교육에 있어서도 올바른 사람이 되기 위한 교육보다는 1등주의 교육을 위주로 한 것이 그런 의식을 더욱 조장한 것이구요. 과거 조선에서는 어떠했을까요? 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