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학생 동지들! 죽은 물고기는 물이 흐르는 대로 둥둥 떠내려갑니다. 그러나 산 물고기는 아무리 급류일지라도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물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죽은 물고기는 목적이 없고, 산 물고기는 목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목적을 갖고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살아 있는 물고기가 되기 바랍니다." 1949년 백범이 어느 청년 단체의 수양 강좌에서 한 연설입니다.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 역수어(逆水魚)! 짧은 연설문에서 광복 산하의 조국에서 청년들이 역수어가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백범은 1919년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나라가 살아나려면 교육밖에 없다며 오로지 교육에 매진하던 분입니다. 시대적 상황이 백범으로 하여금 독립운동으로 이끌었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백범은 교육계에서도 큰 빛을 발하셨을 것입니다. '역수어(逆水魚)’하니까 ‘등용문(登龍門)’도 생각이 나네요. 황하 상류에 있는 용문(龍門)은 물살이 빠른 급류라 웬만한 물고기는 이를 타고 넘지 못한다지요. 그런데 이런 험한 급류를 타고 넘으면 그 물고기는 용으로 승천할 수 있다고 하여 등용문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등용문’이라는 이름을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많이 들어본 가사지요? 예!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 가요이자, 한글로 기록된 가장 오래된 가요인 정읍사(井邑詞)입니다. 요즘에도 실려있는지 모르겠으나, 제가 학교 다닐 때는 교과서에 실려 달달 외우던 백제가요입니다. 왜 갑자기 백제가요 이야기를 하느냐고요? 얼마 전 집에 배달된 신세게 백화점 잡지 <SHINSEGAE> 9월호에 최정동 중앙일보 기자가 이에 대해 쓴 글이 실려 보았습니다. 제 아내가 신세계 백화점 회원이라 매달 이 잡지가 집에 옵니다. 그런데 대부분 자기네가 알리고픈 패션, 골프상품, 음식 등에 관한 내용이라, 보통 때는 화장실에서 한 번 휘~ 훑어보고 맙니다. 참! 화장실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저는 일반 독서와 화장실 독서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신문, 잡지류는 화장실 독서로 소화시키고 있는 것이지요. 최 기자가 쓴 글 제목은 <궁(宮)으로 간 남녀상열지사 수제천(壽齊川)>입니다. 정읍사가 조선시대에 궁중음악 수제천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녀상열지사’라니요?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는 ‘남녀 사이의 사랑을 읊은 노래’라는 말 아닙니까? 주로 조선의 유학자들이 고려가요가 남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화석정을 떠나 자유로로 올라타면서 ‘이젠 곧장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멀리 통일전망대가 보이면서 딴 생각을 가진 녀석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애초 너는 돌아가면서 파주 장릉도 보고 갈 생각이 아니었느냐? 그까짓 차 걱정 때문에 이 좋은 기회를 버린단 말이냐? 성동나들목에서 나가면 불과 6~7분밖에 안 걸리는데?” 햐아~ 이거 어쩐다? 결국 흔들리던 내 마음은 성동나들목이 보이자 끝내 제 손목으로 하여금 성동나들목으로 핸들을 돌리게 하였습니다. 장릉(長陵)에 도착하였습니다. 참! ‘장릉이 누구 무덤이지?’라고 하실 분이 있겠군요. 장릉은 인조와 인조의 첫 번째 왕비인 인열왕후 한 씨의 합장릉입니다. 한자는 틀리지만 김포에도 장릉(章陵)이 있는데, 이는 인조의 아버지 원종과 인종의 어머니인 인헌왕후 구씨의 쌍릉입니다. 그런데 인조의 아버지가 원종이라면 인조 아버지도 임금이었단 말인가요? 아닙니다. 선조의 5번째 아들이라 대군(大君)으로는 불리었지만 죽을 때(1619)까지도 임금으로 불린 적은 없습니다. 인조가 쿠데타(1623)에 성공하니까, 죽은 자기 아버지를 추존왕으로 모신 것이고, 따라서 원종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칠중성에서 후퇴하여 오면서 율곡이 오르곤 하였다는 화석정에 들렀습니다. 차가 기어가 들어가는 것이 영 빡빡한 것이 빨리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화석정을 빠뜨리고 갈 수는 없었습니다. 5년 전에 파주의 율곡 유적지를 돌면서 화석정만 빠뜨렸기에, 이번에도 그냥 지나치면 또 언제 보러 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좁은 길을 돌아 오르니, 임진강가의 언덕 위에 정자 하나가 서 있습니다. 율곡은 저 정자 위에서 바로 앞의 임진강을 내려다보며 편안한 휴식의 시간도 가졌을 것이고, 또 책을 보며 학문의 시간도 가졌었겠지요. 저도 율곡의 그러한 느낌을 가져보려는데, 그 때와 달라진 환경이 그런 느낌을 갖는 시간을 방해합니다. 임진강이 유유히 흐르는 것은 그대로이지만, 강변에는 4차선의 37번 국도 위로 연신 차들이 지나고 있는 것입니다. 정자 옆에는 선조의 피난길 이야기를 써놓았습니다. 율곡이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하인들에게 틈날 때마다 들기름에 젖은 걸레로 정자 마루와 기둥을 닦으라고 하였습니다. 율곡의 예견대로 1592년 임진왜란은 일어나고야 말았고, 율곡의 경고를 무시하던 선조는 허겁지겁 북으로 피난길을 떠납니다.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백범이 치하포 사건으로 인천 감옥에서 수감 중 탈옥하여 전국을 떠돌 때, 백범은 잠시 마곡사에서 승려로 출가하기도 합니다. 불교에 대한 뜻도 있었겠지만, 몸을 숨기기 좋다는 것도 계산에 넣었겠지요. 백범의 법명은 원종(圓宗)입니다. 백범에게 공손하게 출가를 권유하던 하은당 스님은 백범이 일단 머리를 깎자, 태도가 180도 돌변하여 백범을 구박하기 시작합니다. 백범이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욕을 하고, 장작 패고 물 길어오는 온갖 궂은일을 시킵니다. 백범은 6달 만에 마곡사를 떠납니다. 당장 환속한 것은 아니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좀 더 공부를 하겠다는 구실로 마곡사를 떠난 것이지요. 백범이 떠난 뒤 하은당 스님은 사고로 죽습니다. 석유통 속의 기름이 질이 좋은지 나쁜지 알아본다며 불붙인 막대를 석유통에 넣었는데, 아! 글쎄! 석유통이 폭발하는 바람에 곁에 있던 보경당 스님, 포봉담 스님과 함께 저 세상으로 간 것이지요. 저런! 그렇게 하더라도 부처님이 보호해주실 것으로 믿었나? 세 스님이 함께 저 세상으로 가자 마곡사는 총회를 열어 사찰 재산을 관리하고 법통을 이어갈 스님으로 원종 스님을 뽑습니다. 원종 스님이라고 하니까 금방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蓮花蓮葉覆紅欄(연화연엽복홍란) 연꽃잎은 붉은 난간 뒤엎고 綺閣依然泛木蘭(기각의연범목란) 단청 좋은 정자에 놀잇배 떠있네 潑潑游魚偏戱劇(발발유어편희극) 펄펄뛰는 고기는 연못이 놀이마당 有時跳上錄荷盤(유시도상녹하반) 때때로 연잎위로 솟구친다네. 천안 광덕산을 오르다가 발견한 시비(詩碑)에 적힌 시의 앞부분이다. 19세기 전반의 여류시인 운초(雲楚) 김부용(金芙蓉, 1813 ~ ?)의 시다. 시비를 지나 좀 더 오르다보면 운초의 무덤도 볼 수 있다. 평안남도 성천 기생의 무덤이 왜 광덕산에 있을까? 지금부터 그 궁금증을 풀어보자. 운초는 원래 양반집 딸로 태어났으나 어려서 부모를 잃고 퇴기(退妓)의 수양딸로 들어간다. 퇴기가 괜히 수양딸을 받겠는가? 퇴기는 운초가 방년(芳年)의 나이가 되자 운초를 성천 기적(妓籍)에 넣는다. 운초는 기생이 되자 금방 뭇사내들의 뜨거운 눈길을 받는 기생이 된다. 단순히 용모가 아름답다고 하여 뭇사내들이 찾고 싶은 기생이었던 것은 아니고, 운초의 매력은 가무음률은 물론 뛰어난 그녀의 시문(詩文)에 있었다. 어느 해에 유관준이 신관사또로 성천에 온다. 유관준은 운초라는 명기(名妓)를 자신의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이번 6월 EBM 조찬 포럼의 강사는 가수 윤형주 씨였습니다. 통기타를 들고 중간 중간 노래를 들려주며 자신의 삶을 얘기해주시는데, 다른 어느 때 강연보다도 회원들이 집중해서 듣더군요. 제 고교 10년 선배이시니 벌써 고희를 넘기신 것인데도, 어쩜 그리 젊으신지요. 복장도 청바지에 양복 윗도리로 격식에 구애받지 않는 젊음이 넘쳐나십니다. 가수 윤형주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의학도이던 윤형주는 대학시절 통기타 가수로 떠서 인생의 행로가 바뀌었습니다. 그 후 많은 히트곡을 작곡하고 노래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듣자마자 알 수 있는 수많은 인기 시엠송을 작곡하였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깊은 맛을 남들에게 보일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는 온누리교회의 장로가 되어 선교활동에도 열심이고, 또한 해비타트 이사장으로서 직접 망치를 들고 집 없는 사람들의 집을 지어주기도 합니다. 70년대에 윤형주, 조영남, 송창식, 이장희, 김세환, 양희은 등 통기타 포크송 가수들의 인기는 참 대단했지요. 저도 그 시대에 중ㆍ고ㆍ대학교를 다녔기에 그들과 그들의 노래를 사랑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들의 노래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세월의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서울에서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다 중부 제3터널을 통과하면 고속도로는 곧바로 경안천에 다리를 적신다. 그러면 바로 오른쪽으로 높이 140m의 야산이 바짝 다가서 있고, 고속도로는 이 야산의 발등을 타고 지나간다. 바로 이 야산 자락에 비운의 여류시인 허난설헌이 잠들어 있다. 난설헌의 무덤에서 고속도로까지 직선거리로 불과 100m!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쌔~앵~”하며 난설헌의 옆을 지나가지만, 과연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자신이 허난설헌 옆을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중부고속도로를 사이에 두고 무갑산이 난설헌의 묘를 내려다보고 있다. 태양이 뜨겁게 대지를 달구는 8월의 어느 날 무갑산에 올랐다가 난설헌의 묘를 찾았다. 고속도로 밑의 토끼굴을 지나 난설헌에게 다가가니 먼저 송덕비가 눈에 띈다. 중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난설헌의 남편 김성립이 속한 안동김씨 문중에서 흔쾌히 땅을 내놓은 것을 기리는 송덕비로, 2000년 1월에 시행자인 한국도로공사와 건설사인 쌍룡건설이 세운 송덕비이다. 묘역으로 다가가는데, 난설헌 무덤 왼쪽으로 아기 때 죽은 난설헌의 두 아이의 무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아기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이윤옥 시인이 《서간도에 들꽃 피다》 8권을 냈습니다. 이번에도 곽진근, 공백순 등 20명의 여성독립운동가들을 우리에게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늘 그렇듯이 소개글은 이 시인의 시로 시작하고 있구요. 이시인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그 여성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찾아 국내는 물론 만주, 하와이 등 나라밖까지 직접 발품을 팔며 뛰어다닙니다. 처음 1권을 시작할 때만 하여도 이 어렵고 힘든 작업을 언제까지 할까 하였는데, 벌써 8권까지 내셨네요. 이 시인은 10집까지는 내겠다고 각오를 다지고 있습니다. 참 대단하십니다. 그리고 이 시인이 재정적으로나 여러 가지로 힘든 상황을 헤치고 꿋꿋하게 이 작업을 계속 해오는 것을 보며 절로 존경의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동안 이 시인이 소개한 여성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제가 아는 분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제가 여성독립운동가들에 대해 무관심했다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저는 제 자신의 무지함으로 여성독립운동가들에게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8권에서 이 시인이 소개하고 있는 여성독립운동가들 가운데 몇 분만 말씀드리지요. 먼저 평생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그 동안 제가 작년 국제도서전시회 때 사두었던 책을 읽고 나 후의 느낌에 대해 몇 차례 썼었지요? 처음 《조선 선비의 산수기행》에 대해 썼고, 최근에는 《조선의 여성들, 부자유한 시대에 너무나 비범했던》을 읽은 느낌을 썼습니다. 오늘은 그 때 사두었던 책 가운데 마지막 책인 《한국 한시선》에 대해 써보려 합니다. 이 책은 정진권(1935 ~ )이란 분이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수많은 한시 가운데 156편을 엄선하여 한시 원문과 한글 번역시 그리고 자신의 독후감을 실은 책입니다. 번역시는 한시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 아닌 시의 맛이 나도록 많이 의역한 시입니다. ‘번역은 제2의 창작이다’라는 말은 시 번역에서 더욱 실감나는 말인데, 정진권씨는 자신의 상상력을 더하여 자유롭게 번역했습니다. 한국체대 교수를 역임한 정진권씨는 수필가로서 많은 수필집을 냈는데, 한시의 맛에 꽂혀,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한시를 섭렵하고 난 후, 이렇게 한시집도 냈습니다. 정진권씨는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한시를 가려 번역하고 또 주석을 달고 그 독후감을 쓰고 하는 것이 나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때는 한문도 시도 특별히 공부한 게 없는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