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얼마 전에 서예가 중리 선생으로부터 부채를 선물 받았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부채를 펼쳐 드니, 부채에는 중리 선생의 특유의 휘날리는 필체로 ‘妙用時 水流花開’라고 쓰였습니다. 추사가 초의선사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구절이라고 합니다. 앞 구절까지 하면 이렇습니다. 靜坐處 茶半香初 정좌처 다반향초 妙用時 水流花開 묘용시 수류화개 고요히 앉은 자리 찻잔을 반을 비웠어도 향기는 처음과 같고 미묘히 흐르는 시간 속에도 물은 흐르고 꽃은 피는구나 초의선사에게 써 준 글씨인 줄은 몰라도,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추사가 쓴 위 글귀가 나옵니다. 이 글귀는 많이 보던 추사의 다른 글씨와 또 다른 맛입니다. 추사는 참 다양한 서체의 글씨를 남겼습니다. 그런 다양한 서체가 바탕이 되어 마침내 자신만의 독특한 추사체가 완성된 것이라고 하겠지요. ‘水流花開’라는 문구는 원래 송나라 시인 황정견의 시에 나오는 시구입니다. 원문은 이렇습니다. 萬里長天(만리장천) 구만리 긴 하늘 雲起來雨(운기래우) 구름 일고 비 내리네 空山無人(공산무인) 빈 산에는 아무도 없는데 水流花開(수류화개) 물은 흐르고 꽃은 피네 그런데 ‘空山無人 水流花開’ 시구는 소동파의 시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조선팔도의 7-8할은 쓸쓸한 황무지로 변하여 농사짓는 사람은 한명도 없고, 숲속을 숨어 헤매며 굶어 죽는 사람은 헤아릴 수 없었다. 또는 들판, 산, 숲속으로 숨지 못하고 적에게 살해당한 시체, 또는 굶어 죽은 시체가 널부러져 있는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안타까운 것은 두세 살 되는 아기가 엉금엉금 기면서 죽은 어미의 젖을 빠는 모습이었으니, 그 누가 이를 연민하지 않으랴. 그 누가 이를 한탄하지 않으랴. 조선의 승상(丞相) 류성룡은 도저히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솔잎과 나무껍질을 가루로 만들고 쌀가루를 섞어서 굶주린 백성들에게 주었다. 그러나 식량에는 한도가 있고 굶주린 사람은 한이 없어서 마침내 이들을 구할 수가 없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생을 그린 일본의 대하소설 《에혼 다이코기(絵本太閤記)》 7권에 나오는 한 장면입니다. 임진왜란 때 조선 백성들의 참상을 그렸네요. 특히 두 세 살 되는 아기가 죽은 어미의 젖을 빠는 모습은 이를 읽는 저로서도 가슴이 저립니다. 위 소설에 류성룡이 나오지요? 이 소설의 장면은 작가가 서애 류서룡의 《징비록》에 나오는 장면을 인용한 것입니다.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이런 생각을 하며 적벽을 쳐다보는데, 이 교수님이 오른쪽 약간 체구가 작은 절벽 위에서 내려오는 검은 줄이 무엇인지 알겠냐고 물어보신다. 나는 순간 전깃줄인가 하였으나, 이 교수님은 저 절벽 뒤 샘물에서 물을 받아 내리는 것이란다. 그렇지. 아무것도 없는 저 절벽 위에서 전깃줄만 딸랑 내려올 리는 없겠지. 뒤를 돌아보니 가느다란 물 파이프는 어느 집으로 들어가고 있는데, 집 앞에는 평창강 힐링하우스라는 간판이 세워져 있다. 펜션이구나. 아름다운 매화마을에 펜션이 없을 리가 없지. 이 교수님은 주인장이 자기와 같은 천주교 교인이라고 들어가서 차 한 잔 마시자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니 마당 한쪽에 성모마리아가 합장하면서 우리를 환영하고 있는데, 주인장이 나오면서 이 교수님을 보고 반가워한다. 그러는 사이 주인장 아내는 굳이 차 한 잔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차를 내온다. 차를 마시기 전에 절벽 위에서부터 끌어온 생수를 먼저 마신다. 의외로 연약한 물 파이프에서 생수가 힘차게 나오고 있다. 물맛이 기가 막히다. 차를 마시며 주인장 내외와 담소를 나누는데, 딸이 이대 로스쿨을 나와 서울의 어느 법률사무소에서 일하고 있단다. 이 교수님이 내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능선을 넘어가니 금방 강가로 내려서고 둘레길은 강변을 따라간다. 아까 이정표에서 본 강변길이 지금부터 시작이구나. 길 왼쪽의 논에는 파종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써레질이 되어 있다. 그리고 써레질 자국이 보이도록 살짝 채워진 물 위로 절개산이 몸을 비추고 있다. 저 논에 써레질 하는 황소 한 마리 있다면 잠시 아스라한 어릴 때 추억에 잠기겠지만, 저 논은 트랙터로 써레질을 하였겠지? 몇 마지기 논밭 뒤로 마을이 보이는데, 저 마을이 매화마을이겠구나. 강변마을은 언제 보아도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리고 싶은 아름다운 풍경이다. 강변을 따라 걷는데 시비(詩碑)가 보인다. 바로 이 교수님이 말씀하시던 김삿갓 시비다. 김삿갓(1807~1863)이 고향인 영월군 하동면으로 가다가 이곳 평창강 경치에 발목을 잡혀 하룻밤 자고 떠났단다. 그때 쓴 ‘강가(江家)’라는 시가 지금 시비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船頭魚躍 銀三尺 선두어약 은삼척 門前峰高 玉萬層 문전봉고 옥만층 流水當窓 稚子潔 유수당창 치자결 洛花入室 老妻香 낙화입실 노처향 뱃머리에 물고기 뛰어오르니 은이 석자요 문 앞에 산봉우리 높으니 옥이 만 층이라 창 바로 앞에 물 흐르니 어린아이 늘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30여 분 동안 남쪽으로 달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성 필립보 생태마을이다. 성 필립보 생태마을은 생태계의 파괴를 막기 위한 환경운동의 전개, 자연 안에서 정신적, 육체적 치유 그리고 신앙 강화를 위하여 천주교 수원교구 환경센타에서 건립하였다고 한다. 생태마을이라고 하니 평화로운 어떤 마을 모습이 떠오르는데, 언덕 위에 성당과 거기에 딸린 몇 개 건물만 보인다. 그런데 절개산 간다면서 여긴 왜? 여기서부터 절개산 밑까지 절개 둘레길이 나 있어서, 둘레길을 걷는 것이다. 둘레길을 걷기 전에 언덕 위로 올라간다. 건물 옥상에서는 예수님께서 팔을 벌리고 서 있다. 예수님의 저런 모습을 보니 마태복음 11장 28절의 말씀이 떠오른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래서인가? 천주교인들이 피정을 하러 이곳에 많이 온다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 뒤에 보이는 둥그런 돔은 뭐지? 여기서 천문 관측도 한다고 한다. 오호! 그러다 보니 이번에는 찬송가 515장이 떠오른다. “눈을 들어 하늘 보라 ♬♫” 평상시 삶이 바빠 하늘을 볼 생각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한 번 하나님이 창조한 온 우주도 바라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얼마 전에 강원도 평창에서 반가운 전화가 걸려왔다. 수원대를 정년퇴임 한 뒤 평창에서 전원생활을 즐기시고 있는 이상훈 교수님이 전화를 주신 것이다. 평창 마지리에 있는 절개산에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가 있으니 한 번 답사하러 오라는 것이다. 이교수님은 나와 같이 ‘얼레빗’ 회원이신데, 평소 내가 <우리문화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를 즐겨 보신다고 한다. 내가 주로 우리 역사에 대해 연재하고 있기에, 이교수님은 절개산의 숨은 역사 이야기를 알게 되시자 나에게 전화를 주신 것이다. 2020. 5. 16. 아침 11시 35분에 배재흠, 김현기 두 분 교수님과 함께 평창역에서 내린다. 두 분도 같은 얼레빗 회원인 데다가 이 교수님과 함께 수원대를 정년퇴임한 교수님들이기에 동행한 것이다. 사실 나야 얼레빗 회원이라는 인연밖에 없지만 세 분 교수님들은 같은 수원대에 봉직하였으니 더욱 유대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 분은 단지 수원대 동료 교수였다는 동류감을 뛰어넘는 끈끈한 동지애가 있다. 세 분은 수원대를 올바른 학교로 이끌려고 교수협의회를 조직하여 재단 쪽과 싸우면서 많은 고초를 겪으며 더욱 끈끈한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祭罷原頭日已斜(제파원두일이사) 제사 마친 들판에 해는 이미 기울고 紙錢翻處有鳴鴉(지전번처유명아) 지전 태워 흩날리는 곳에 갈가마귀만 운다 山蹊寂寂人歸去(산혜적적인귀거) 적막한 산골짝에 사람들은 돌아가고 雨打棠梨一樹花(우타당리일수화) 팥배나무 꽃잎 위로 비는 치누나 석주 권필(1569~1612)의 ‘한식’이란 시입니다. 한식날 제사를 마치니 이미 해는 기울고, 지전 태워 흩날리니 갈가마귀들은 벌써 알고 제사음식에 침을 흘리는군요. 이제 사람들이 돌아가니 산골짝에는 적막만 감도는데 비는 왜 오는지... 비는 시인의 심정도 모르고 팥배나무 꽃잎을 두들기네요. 쓸쓸한 풍경이지요? 시인의 쓸쓸한 심정이 그대로 풍경에 젖어 든 것 같네요. 권필은 어디 구속되기를 싫어하는 자유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벼슬도 마다하고 평생 야인으로 떠나고 싶으면 언제든지 떠나는 자유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자유로운 사람이니 그 시대 속물 같은 양반들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도 썼습니다. 이런 권필이기에 조선의 양반들을 프롤레타리아를 착취하는 부르주아로 보는 북한에서도 석주는 인정을 받고 있다고 하네요. 결국 이런 석주의 성격 때문에 석주는 제 명을 다하지 못합니다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우리나라 역대 임금 가운데 가장 훌륭하고 존경할만한 임금을 꼽으라면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 사람마다 꼽는 임금이 다르겠지만, 나는 세종대왕을 꼽고 싶다. 과학, 농업, 아악 등 다방면에 걸쳐 훌륭한 업적을 이룬 임금이지만, 다른 것 다 아니더라도 한글 창제 하나만으로도 나는 세종대왕을 꼽겠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의 언어생활은 어떻게 되었을까? 한글이 없는 세상? 생각만 하여도 끔찍하다. 세종대왕에 대해 알면 알수록, 이런 임금이 우리에게 있었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큰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세종대왕에 대해 또 하나 존경할만한 것을 알게 되었다. 세종대왕은 학문을 연구하고 정책을 토론하는 경연을 중요시하였다. 그리하여 그전까지 형식적으로 열던 경연을 재위 기간 무려 1,898회나 열었다. 달로 따지면 매달 5회 정도 경연을 연 것이라고 한다. 당대에 신하들 가운데 인품이나 경륜, 학식 등에 있어 세종대왕에 필적할 만한 인물이 얼마나 될까? 그런데 경연 석상에서 세종은 자기와 견해를 달리하는 신하의 말이나, 사리에 맞지 않는 주장, 못마땅한 발언에 대해서도 이를 곧바로 공박하지 않았다. 그 대신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환향녀가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여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끌려간 여자들도 많지만 끌려가기 전에 죽은 여자들은 또 얼마나 많겠습니까? 우리가 ‘병자호란’이라고 간단하게 말하지만, 그 전쟁사를 미시적(微視的)으로 들여다보면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장면들이 너무 많습니다. 사서에 보면 ‘포개진 시신들 사이로 젖먹이들이 어미를 찾아 기어다니며 울고 있다’라는 처참한 표현도 나옵니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는 많은 왕족들과 고위관료 가족들이 피난 가 있었습니다. 인종은 이렇게 피난시켜놓고 뒤따라 강화도로 들어가려다가 청군에 의해 길이 막히는 바람에 남한산성으로 들어갔었지요. 청군이 강화도에 들어왔을 때, 강화도는 그야말로 패닉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때 성리학의 허황된 이데올로기에 세뇌된 사대부 여인들은 죽음을 택했습니다.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에 보면 유인립의 아내는 끝까지 버티다가 청군이 총을 난사해 몸의 살이 다 뜯겨나갔지만 꼿꼿하게 선 채 넘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호선의 아내는 토굴 안에 숨어 있다가 적병이 불을 질렀는데도 나오지 않고 그대로 타죽었답니다. 소론의 영수였던 윤증의 어머니 얘기도 나옵니다. 청군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세종문화회관 뒷길에서 경복궁역 쪽으로 가다 보면 ‘종교교회’라고 있습니다. 종교교회는 캠벨 선교사가 1900년 부활절에 배화학당 기도실에서 처음 예배를 드리며 시작되었는데, 교인이 늘어나면서 1908년 지금 자리에 예배당을 세웠습니다. 역사 오랜 교회지요. 저는 대학 다닐 때 제 고교, 대학 선배가 이 교회에 다닌다고 하여 처음 ‘종교교회’라는 이름을 접하였습니다. 처음에 종교교회라고 하니, 당연히 ‘종교(宗敎)’가 먼저 떠올랐겠지요? 그래서 “굳이 교회 이름에 ‘宗敎’라는 이름을 쓸 필요가 있나?” 하며, 피식 웃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宗敎’교회가 아니라 ‘琮橋’교회였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종다리교회’가 될 텐데, 교회 이름에 다리 ‘橋’자가 들어가는 것도 여전히 특이하지 않습니까? 조선시대 여기에 ‘종침교(琮琛橋)’라는 다리가 있었습니다. 청계천의 상류 부분인 백운동천과 백운동천에 합류하는 사직동천이 여기에 있어서 이를 건너가는 종침교라는 다리가 있었던 거지요. 백운동천과 사직동천은 지금은 복개되어, 그곳을 지나다녀도 여기에 시내가 있었다는 것을 전혀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종교교회가 들어설 무렵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