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避寇難吾土(피구난오토) 도적을 피하기 어려워 내 살던 땅을 떠나 攜家走異鄕(휴가주이향) 식구들을 이끌고 낯선 고장으로 옮겨가누나 荊榛行目蔽(형진행목폐) 가시넝쿨 앞길을 가로막고 눈앞을 가리니 桑梓耿難望(상재경난망) 상재(고향)는 눈에 선해 잊기 어렵네. 世險憐兒少(세험련아소) 세상이 이리 험난하니 어린아이들 가엽고 家貧仗友良(가빈장우량) 집마저 가난하니 어진 벗을 의지할 수밖에. 乾坤空自闊(건곤공자활) 천지는 부질없이 넓기만 하니 獨立興蒼茫(독립흥창망) 나 홀로 창망하게 섰노라. 정도전의 ‘도적을 피하다(避寇)’는 시입니다. 정도전은 나주로 유배되었다가, 3년이 지나 유배가 완화되어 고향에서 머물러도 좋다는 허락을 받습니다. 그리하여 고향 영주로 와서 4년을 지내는데, 이 때 왜구가 쳐들어와 왜구에 쫓겨 고향을 떠나면서 쓴 시입니다. 아니? 내륙지방인 영주까지 왜구가 쳐들어오다니요! 당시 고려의 국방과 치안은 엉망이라 왜구가 영주까지 쳐들어와도 속수무책이었던 것입니다. 이 무렵 충청, 호남, 영남 지방 중 왜구의 말발굽에 짓밟히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지요. 당연히 해안 지방은 멀리 평안도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이방원이 정도전을 죽인 까닭 가운데 하나는 정도전의 요동 정벌 추진입니다. 요동 정벌을 한다면 명나라와의 충돌은 불가피할 텐데, 정도전은 왜 요동 정벌을 추진하였을까요? 원나라가 명나라에 밀려 북쪽으로 쫓겨 간 후, 요동은 무주공산이 되었습니다. 명나라도 새로 나라를 세워 안팎으로 나라 기틀을 잡는데 힘을 쏟느라고 아직 요동을 실효적으로 지배하기에는 힘이 딸린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요동은 원래 우리의 선조 고구려와 발해가 차지하고 있던 땅이라서, 명나라로서는 고려나 뒤를 이은 조선이 이를 차지하려 할까봐 꽤나 신경이 쓰였나봅니다. 이미 공민왕 때인 1370년 이성계가 군대를 이끌고 요동을 정벌하고 돌아온 일도 있으니까요. 우왕 14년(1388)에도 명나라는 공민왕이 회복한 철령위의 반환을 요구하여, 이에 반발한 고려가 요동정벌에 나섰다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무산되기도 하였지요. 이제 친명정책을 추구하는 조선이 건국되었으니 국경 분쟁은 없을 줄 알았는데, 명나라는 아직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고 자꾸 시비를 겁니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자마자 명나라에 조선 건국의 승인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냈는데, 명 황제 주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인터넷이 발달하고 사회관계망(SNS)이 발달하면서 지구촌 어느 구석에서 일어난 사건 소식이라도 인터넷망을 타고 순식간에 지구를 한 바퀴 돕니다. 그야말로 지구촌 가족이라는 말이 실감납니다. 그러다보니 누가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 낸 가짜뉴스도 그 진위 여부를 가릴 새 없이 퍼져나갑니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이념 갈등이 심한 나라에서는 더 그렇습니다. 얼마 전에는 전진구 해병대 사령관이 군사합의서 불복선언을 하였다는 가짜뉴스가 급속히 퍼져나갔지요? 이럴 때일수록 언론이 중심을 잡고 가짜뉴스를 걸러내고 국민들에게 알려주어야 할 텐데, 오히려 언론이 가짜뉴스에 휘둘리기도 합니다. 지난해 11월 26일에는 한 신문이 가짜뉴스 제공자에게 속아 1면 머릿기사로 ‘한미동맹 균열 심각... 靑의 실토’라는 기사를 실었다가 망신살 톡톡히 당했지요. 아니, 그냥 휘둘리는 것에서 나아가 어느 정파적 입장에 서서 교묘하게 스스로 가짜뉴스를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지난 10월 조선일보의 문화부 차장이 쓴 한 칼럼에서 문재인 정부 출범이후 고용 참사가 이어지고, 취업자 증가폭이 급격히 추락하며 개인의 삶이 피폐해져서 우울증이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제가 전에 박정숙 박사가 쓴 책 《조선의 한글편지》를 읽고 독후감을 쓴 적이 있지요? https://blog.naver.com/yangaram1/221272726322 그 박정숙 박사도 이번 <다섯 손가락>의 필진 가운데 한 분입니다. 《조선의 한글편지》는 박 박사가 조선의 편지를 하나하나 찾아내어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정리하여 책으로 펴낸 것인데, 박 박사는 이번에 그 가운데 9개의 편지에 이야기를 덧입혀 정답고 따뜻한 글로 피어냈습니다. 아내의 죽음에 통곡하는 추사 김정희, 남편 첩질에 타는 속내를 드러내는 신천 강씨, 숙모에게 문안을 올리는 원손(元孫) 시절의 정조의 편지 등을 읽으면서 조선 시대의 선조들에게서 사람 사는 냄새를 맡을 수 있었네요. 그 중에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의 경우에는 편지가 아니라 그 유명한 ‘태산이 높다 하되...’의 시조와 허강이 한글로 지은 서호별곡을 양사언이 붓을 놀려 쓴 글이 나옵니다. 양사언의 경우에는 아들의 출세를 위하여 목숨을 끊은 어머니의 이야기가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박 박사님이 한 꼭지로 올린 모양입니다. 양사언의 위 시조는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만,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서예가, 철학자, 소설가, 건축가, 변호사 이렇게 5명이 모여 책을 냈습니다. 서로 살아온 삶이 다르고 현재도 각기 다른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같이 책을 내게 되었을까요?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지난 봄날이었습니다. 오래간만에 인사동 어느 한정식 집에 모인 5인이 그 동안의 삶을 풀어놓으며 이야기꽃을 피우던 중, 신작가가 불쑥 말을 꺼냅니다. “우리 같이 책을 낼까요?”그렇게 우리의 책 내기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10년 이래 유례가 없었다는 여름 불가마의 한 가운데를 지나오면서, 우리의 글은 곰삭을 대로 곰삭여지고, 황금빛 물결이 출렁이는 가을의 들판을 지나와 드디어 지금 이렇게 결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내는 책 제목은 <다섯 손가락>, 부제는 ‘5인 5색 인문에세이 五人五色’입니다. 책 제목이 ‘다섯 손가락’이라고 하니, “왜 다섯 손가락이지?”라고 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5인을 대표하여 책머리의 글을 쓴 신아연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섯 손가락은 생김새도 각각이고, 굵기와 길이도 다르고, 방향도 그 역할도 각기 다르다. 그럼에도 한 손바닥으로 인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지난 12월 6일부터 9일까지 코엑스에서 ‘2018 대한민국 지식재산 대전’을 했습니다. 점심을 먹고 소화시킬 겸 들어가 보았지요. 저는 ‘대한민국 지식재산 대전’이라 하여 국내의 지식재산에 대한 전시회인 줄 알았더니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중동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참가하였더군요. 관람객 중에는 미래의 지식재산 강국을 이끌어 갈 청소년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들을 이끌면서 설명을 해주는 해설사도 있네요. 다양한 전시물 중에서 제 눈길을 끈 것은 동화제약의 ‘부채표 활명수’입니다. 한국 사람치고 부채표 활명수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소화가 안 되고 체하거나 과식했을 때 먹는 약’정도로만 알지 활명수에 대한 깊이 있는 얘기는 모를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이번 전시물을 통해서 활명수에 대해 이모저모를 알게 되었습니다. 활명수는 폐지된 선전관청의 선전관 출신인 민병호가 1897년 궁중 비방에 서양의학을 접목해 개발한 최초의 국산약으로 당시 마땅한 치료제가 없어 급체와 토사곽란만으로도 목숨을 잃던 시대에 만병통치약과 같은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약 이름도 생명을 살리는 물이라고 하여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무소불위의 철권을 휘두르던 고대 제국의 임금들은 자기 마음먹은 대로 하지 않습니까? 고대 페르시아 대제국을 건설한 아케메네스 왕조의 캄뷔세스 임금의 행위 가운데 살벌한 일화 하나 소개할까 합니다. 캄뷔세스 임금의 신하 중 시삼네스라는 재판관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뇌물을 받고 부정한 판결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를 알게 된 캄뷔세스 임금은 그 재판관을 산 채로 가죽을 벗겨내도록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벗겨낸 가죽으로 가죽끈을 만들어 시삼네스가 판결할 때 앉던 의자에 두르게 합니다. 그리고 시삼네스의 아들을 후임 재판관으로 임명합니다. 잔인하군요. 재판할 때마다 자기 아버지의 가죽으로 만든 끈으로 두른 의자에 앉아 재판하는 아들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정신이 버쩍 들어 뇌물의 ‘뇌’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킬까요? 네덜란드 화가 제라드 다비드(1460?~1523)가 이를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다비드는 자신의 고향인 브뤼헤의 ‘정의의 홀’의 위촉을 받아 이 그림을 그렸답니다. 그림을 의뢰한 측에서는 당시 부패한 법관들이 많은 것을 탄식하여 이런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는군요. 아마 이렇게 그린 그림을 법정에 걸어놓으려고 하지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영화 <암살>에 보면 배우 전지현이 독립군 저격수 안윤옥으로 나오지요? 안윤옥의 실제 모델은 독립투사 남자현(1872~1933)입니다. 남자현 지사에 대해서는 제가 전에 한 번 누리편지를 보냈고, 제 블로그에도 올려놓았지요. https://blog.naver.com/yangaram1/80164059226 그러므로 여기서는 남자현 지사가 안윤옥의 모델로 나오게 된 활동상황에 대해서만 언급해보려 합니다. 남자현 지사는 3ㆍ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아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서로군정서에 가입합니다. 그리고 1925년에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암살하기 위해 국내에 잠입하였다가, 여의치 않아 돌아갑니다. 또한 1932년 9월 국제연맹조사단이 일본의 침략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일제의 만행을 조사단에 호소합니다. 단지 말로만 호소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왼손 무명지 2절을 잘라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쓰고, 자신이 자른 손가락 마디와 함께 조사단에 전달한 것이지요. 안중근 의사도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썼는데, 여자 독립군에서는 남자현 지사가 그렇게 했군요. 자신의 손가락을 자른다... 할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우리가 잘 알다시피 백범은 1949년 6월 26일 육군 소위 안두희의 총탄에 암살당하였지요? 안두희가 입을 열지 않고 저 세상으로 가 아쉽게도 암살의 배후는 끝내 미궁으로 남아있고요. 그런데 백범은 그 이전에도 암살범의 총에 맞았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적이 있습니다. 바로 1938년 5월 6일의 일이지요. 당시 3당(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이 호남성 장사의 남목청에 모여 3당의 통일 문제를 논의하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운환이 백범을 저격하였습니다. 백범이 총에 맞아 의식불명의 상태로 상아의원에 도착했을 때, 의사는 백범의 상태를 보고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의사는 백범을 입원시키지도 않고 문간에 방치해놓았는데, 세 시간이 넘도록 백범의 숨이 붙어있자 그때서야 부랴부랴 치료에 들어갑니다. 그때는 이미 백범이 숨이 넘어갔다고 알려져 백범의 맏아들 김인이 홍콩에서 전보를 받고 아버지 장례를 치르려고 장사로 달려오고 있을 때였지요. 뒤늦은 수술 끝에 백범은 살아납니다. 아직 민족을 위해 할 일이 많은 백범을 하느님께서는 다시 돌려보내신 모양입니다. 당시 같이 저격당한 현익철, 유동열, 지청천 중 현익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백범 김구 선생이 이운환에게 저격당하여 장사의 상아의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을 때입니다. 하루는 간호사가 슬그머니 들어오더니 편지 한 통을 두고 사라집니다. 발신인은 상덕포로수용소 신정숙(일명 신봉빈)입니다. 신정숙이 자신은 중국 유격대에 붙잡혀 수감되어 있다며 석방시켜달라며 청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정숙은 백범과 일면식도 없는 여자입니다. 어떻게 모르는 여인이 그것도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는 여인이 백범에게 편지를 보낸 것일까요? 자세한 경위는 알 수 없으나, 신정숙은 산동에 볼 일 보러 갔다가 중국 유격대에 붙잡혔습니다. 중국 유격대는 신정숙이 일본 식민지 백성이니 적국인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포로수용소에 수감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신정숙이 자신을 차별하는 일본 포로에 항의하며 적개심을 드러내는 것을 보고 이상하다싶었는지 조사를 합니다. 내막을 알게 된 신문관이 한국인 가운데 친숙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니, 신정숙은 백범의 이름을 댑니다. 백범과 일면식도 없지만 평소 존경하던 백범의 이름을 댄 것이지요. 마침 신문관이 장사 사람이었고, 신문관은 백범이 상아의원에 입원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요. 신정숙은 신문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