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조선의 산업 곧 먹고 사는 길은 농업에 의존하는 바가 컸다. 세계사적으로도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인류는 농사나 축산에 의지하는 바가 컸다. 서양은 농축업의 기본 틀인 봉건제에서 산업혁명 이후 기술발전에 따른 통상이 활발해 진데 견줘 동양은 기술발전에 늦어 세계사적으로 뒤처지는 역사를 맞게 되었다. 중세 왕권제도 시대 세종은 농업이 주 산업인 시대에 만약 가뭄이 들면 민생 대책을 어떻게 세웠을까? 이러한 연구를 하려면 다른 시대, 다른 임금들과 견줄 필요가 있겠으나 여기서는 기본적으로 민생이 어려워졌을 때 세종은 어떻게 대응했는지 살펴보는 것을 통해 세종의 정치 지도력ᅇᅳᆯ 알아보기로 한다. ‘‘민생가려’라는 백성의 먹고사는 일에 대한 배려를 세종은 어떻게 대처했는지 시기적으로는 오가고는 하지만 재해를 맞아 일을 어떻게 대처했는지 순서와 시기를 고려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조선왕조실록》에서 ‘가뭄’에 대해 출현 횟수를 보면 국역 모두 3,463건 가운데 세종 323건, 성종 454건, 중종 474건, 숙종 224건, 영조 255건 등으로 중종, 성종 다음으로 많았다. 유사한 ‘장마’를 찾아보면 모두 930건 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내가 서경식 선생과 처음 만난 것은 2022년 3월 5일, 고려박물관에서의 강연회 때였다. 강연 뒤 간담회 시간에 《회상과 대화》라는 책에 사인을 받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뒤 서경식 선생은 고려박물관 이사를 거쳐 공석으로 남아있던 고려박물관의 관장을 맡아 주셨다. 관장 취임 이전인 지난해(2023) 7월 31일(9월 전시를 앞둔 모임)에 실시한 <관동대지진으로부터 100년이 지난 지금 과거에 배우고, 미래의 공생사회를 만드는 교육>이라는 특별 전시계획을 앞두고 서경식 선생에게 전시 아이디어에 대한 자문을 구한 적이 있다. 그때 선생은 “‘특별 계획이란 박물관 전체의 목표 가운데 개별 기획전이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답이 나오지 않을 때는 그에 대한 생각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 중요하다’, ‘논리적ㆍ 이성적으로 발언할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하다’ 는 등의 충실한 조언을 해주셔서 전시 기획에 대한 시야가 확장되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이는 일본의 양심있는 시민단체인 고려박물관에서 펴낸 <고려박물관(高麗博物館)> 회보 제67호(2024.3.1.)에서 츠브라야 메구미(円谷 惠) 씨가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한농선의 소리가 좋아 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는 노은주, 소리뿐 아니라 겸손함과, 따뜻한 마음씨, 그리고 매사 반듯한 스승의 태도를 닮고 싶은 마음에서 노은주는 선생과 가까운 곳에 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여의찮아, 그는 매주 서울과 남원을 올라 다니며 소리공부를 했다고 한다. 한농선 명창이 강조한 것처럼 아니리나 발림도 중요하나, 판소리는 항상 소리가 중심이어서 그 공력이 묻어나야 한다”라는 가르침, 특히“ 목 재주를 부리지 말라”라는 충고를 잊지 못하고 있다. 노은주가 전하는 한농선 명창의 사생활은 어떠했을까? 역시 배울 점이 많았던 분이었다고 털어놓는다. “선생님은 방이동 아주 작은 평수의 아파트에 사셨어요. 그 자체를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며‘집이 좁거나 작다’라는 등의 불평을 들어 본 적이 없어요. 매우 검소하셨고 참으로 깔끔하신 분이었어요. 때로는 선생님의 속옷을 제가 세탁하려고 하면, 야단을 치셨지요. ‘내 지저분한 옷을 왜 네가 하느냐?’라며 절대로 못 하게 하셨어요. 식사는 소식하셨고, 인근에 있는 돈가스 집이나, 현대백화점의 수타 자장면을 별미로 좋아하셨어요. 가끔 백화점에서 립스틱 사는 것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의 스물둘째 절기 ‘동지(冬至)’로 명절로 지내기도 했던 날입니다. 민간에서는 동지를 흔히 ‘아세(亞歲)’ 곧 ‘작은설’이라 하였는데 하지로부터 차츰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기 시작하여 동짓날에 이른 다음 차츰 낮이 길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이날을 해가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날로 생각하고 잔치를 벌여 태양신에게 제사를 올렸습니다. 그래서 동지를 설 다음가는 작은설로 대접했지요. 동지에는 팥죽을 쑤어 먹는데 원래 팥죽은 붉은색으로 귀신을 쫓는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동짓날 팥죽을 쑨 유래는 중국 형초(荊楚, 지금의 후베이ㆍ후난 지방)의 세시풍속을 기록한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나옵니다. ‘공공씨’의 망나니 아들이 동짓날 죽어서 돌림병 귀신이 되었는데 그 아들이 평상시에 팥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돌림병 귀신을 쫓으려 동짓날 팥죽을 쑤어 악귀를 쫓았다고 합니다. 전병윤 시인은 <동지 팥죽>이란 시에서 “눈이 쌓여 오도 가도 못한 사람들이 굶어 죽어서 못된 짓 하는 역귀(鬼)가 되었다. 그는 피를 보면 바들바들 떤다. 그래서 피 대신 팥죽을 쑤어 집안 곳곳에 뿌리면서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소리꾼 노은주가 90년대 중반, 한농선 명창댁에서 함께 기거하면서 <흥보가>를 배우며 소리와 함께 발림의 중요성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 다행히 노은주는 어려서부터 가야금과 춤을 배웠기에 발림이 예쁘다는 평가를 받았다는 이야기,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농선 명창이 세상을 떴다고 이야기하였다. 판소리 <흥보가>의 예능보유자로 활동하던 고 한농선은 그의 부친이 유명했던 가야금 산조의 명인, 한성기다. 한 명인은 19세기 말, 산조(散調) 음악의 창시자인 김창조에게 직접 산조를 배운 뒤, 그 가락을 김창조의 손녀딸(국가문화재 가야금 산조 예능보유자를 지낸 김죽파)에게 전수한 거물급 명인이었다. 이 이야기는 별도로 이야기하겠다. 아버지 한성기 명인 밑에 한농선이 태어나고 자랐다는 점은 이미 그의 음악적 인자가, 원인을 이루고 있다는, 곧 근본 소질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자라면서 더욱 그 요인들을 키워왔다는 점을 알게 한다. 그래서 명인 명창 앞에 젊은 소리꾼들이 몰려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농선 명창은 평소 조용하면서도 깔끔했던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노은주는 그의 스승, 한농선 명창을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어ㆍ거ㆍ주〉는 3‧1만세운동에 참여한 애국지사이자 근대 한국의 대표 서예가인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의 1929년 작품입니다. 오세창은 화면 가운데에 물고기[魚]ㆍ수레[車]ㆍ배[舟]를 뜻하는 세 글자를 상형문자로 쓰고, 그 옆에 글자들의 뜻을 작은 글씨로 적었습니다. 글의 마지막 부분에는 오세창의 인장 ‘수양(首陽)’, ‘위로고흥(葦老高興)’, ‘와전산방(瓦全山房)’이 찍혀 있습니다. 언뜻 보면 그림 같고 서로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어ㆍ거ㆍ주〉에는 사실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오세창, 민족의 어른이 되다 오세창은 1864년(고종1) 역관(譯官) 오경석(吳慶錫, 1831~1879)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가업을 이어받아 1879년(고종16) 역과(譯科)에 급제했고 중국어 역관으로 활동했습니다. 또 1886년(고종23) 박문국(博文局) 주사(主事)로 근대 신문 <한성주보(漢城周報)>의 발간에 참여했고, 갑오개혁 이후 관직에서 물러난 뒤로는 언론인으로서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습니다. 오세창은 1910년 국권을 강제로 빼앗겼을 때 일제가 내린 작위와 은사금을 받지 않았고, 1919년 민족 대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임금은 신하를 거느리고 백성이 잘살게 하는 정책을 펴는 사람이다. 정책의 기준을 관리들 편의에 두느냐 백성의 편에 서느냐가 관건이다. 현실적으로 백성들의 욕구는 끝이 없고 그때마다 임금은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그 시작은 상대방 곧 백성의 소리를 듣는 데서 출발하여야 한다. 그러나 어려운 때도 있다. 지방관리가 부당하게 처결할 때는 백성은 누구에게, 어디에다 하소연을 전달할 수 있을까. 세종 13년에 이런 문제에 논의가 있었다. 임금이 찬성 허조에게 이르기를, "근간에 들으니, 경이 고을 사람들이 친히 수령을 고소하는 자는 마땅히 수리하기를 허락지 말라고 하여, 내게 상달되기를 바란다.’라고 하고, ... 태종(太宗)께서도 기꺼이 들으시어 경자년(1420)에 이미 법을 세웠는데, 경의 말이 매우 옳으나, 자기의 억울한 바에 이르러서도 가령 수령이 백성의 노비를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주어도 다시 수리하지 않는 것이 가할까... 이에 임금을 세워서 다스리게 하였는데,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을 받지 않으면 어찌 다스리는 체통에 해롭지 않을까." 하니, 허조가 대답하기를, "마을 사람들과 수령에 대한 관계는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노은주에게 처음 소리를 지도해 준 강도근(1918~1996)은 김정문, 송만갑, 유성준 등에게 배웠고, 창극단과 지방의 국악원, 특히 1973년 무렵부터 <남원국악원>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는데, 그의 장기는 ‘제비 후리는 대목’이었다는 이야기, 무엇보다도 그는 돈이나 명예를 좇지 않는, 순수한 소리꾼으로 70살에 흥보가 예능보유자로 인정을 받았다는 이야기, 노은주는 초등학교 때, 처음으로 강도근 명창을 만나 <백발가>와 판소리 <흥보가> 등을 배웠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노은주는 “강도근 선생님 다음으로 남원국악원에 오신 젊은 전인삼 선생에게 배웠는데, 그 분은 소리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지도해 주셨지요. 선생과 제자들이 일정기간 산에 들어가 소리공부를 집중적으로 하는 형태의 수련을 산(山)공부라고 표현하는 데, 젊은 선생님은 공부시간, 연습시간, 휴식시간, 잠자는 시간, 등을 엄격하게 정해놓고 지도해 주셨어요. 지속해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는 말씀이 잊히지 않네요.”라고 말한다. 강도근, 전인삼 두 분 남창 선생님들에게 배운 이후, 그러니까 90년대 중반 전남대학에서 판소리를 전공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젊은 소리꾼, 노은주가 목포 전국 국악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아 명창의 반열에 올랐다는 이야기, 그가 근무하고 있는 <판소리보존회>는 일제강점기 <조선성악연구회>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는 이야기, 동 연구회에 참여했던 당시 인물들의 공연물이나 음반들이 이 분야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소리꾼, 노은주의 이름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이전에도 소리가 깊고, 공력이 들어있어 인정은 받고 있었으나, 전통과 권위가 있는 대회에서 장관상이나 총리상을 뛰어넘는 수상 경력이 없어 본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주위의 아쉬움을 사고 있었다. 그러던 차, 2024년 7월 목포에서 열렸던 제36회 전국국악경연대회 명창부에 참여했던 그는 심사위원 전원의 만점으로 대상(대통령상)을 받게 되면서 자타가 인정하는 명창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 것이다. 이처럼 노은주 소리꾼을 명창 반열에 오를 수 있도록 지도해 주고, 이끌어준 분들은 여러분이지만, 누구보다도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소리의 세계를 안내해 준, 강도근 명창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작업 중 다이너마이트 불발탄이 폭발하여 눈앞에서 죽은 사람만도 10여 명이나 있었다. 그들은 손발이 갈가리 찢겨 나갔고, 바윗돌이 가슴을 덮쳐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래서 사체의 행방은 잘 모른다. 강제징용자들은 질병으로 죽은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부상으로 죽었다. 터널 공사 중 나온 돌덩어리를 나르는 짐차에서 떨어지거나 터널 받침목을 제대로 설치 안 해서 죽어 나가는 사람도 많았다. 공사장에서 죽은 사람을 끌고 나가는 것을 수백 번 이상 목격했다. - 나가노 히라오카댐(長野平岡) 강제연행노동자 김창희 증언, 경북 월성 출신, 160쪽 -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끌려가 강제노역에 시달린 조선인 수는 얼마나 될까? 그들은 어디서 어떠한 극심한 노동을 하며 삶을 마감했을까? 조선인들의 강제노역지는 일본 전역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지만 특히, 발전소용 댐 건설지, 비행장 건설 현장, 도로 건설지, 군수용품 공장, 탄광 등이 유력한 곳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기자는 지난 4월 8일, 조선인 강제노역을 다룬 《본토결전과 외국인 강제노동》을 쓴 곤도 이즈미(近藤 泉, 73) 씨 일행과 대담을 했다. 곤도 이즈미 씨는 나가노현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