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중 전통음악 학술 및 실연교류회 Ⅳ 지난 주 속풀이에서는 【한중 전통음악 학술 및 실연교류회】행사가 연변예술대학에서 민족성악을 가르치고 있는 전화자 교수가 어렵게 한국으로 유학을 왔고, 그를 통하여 연변대학과 연결이 되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1990년 한ㆍ중 수교가 이뤄지지 않았던 아주 어려운 여건에서 민족의 전통소리를 배우고자 한국《국립국악원》으로 유학을 온 전 교수를 만나게 된 배경을 잠시 이야기 하였다. 거문고의 명인 고 황득주로부터 전 교수를 소개받고 우리 3인은 반포 삼거리 식당에 가서 불고기와 냉면으로 늦은 저녁을 함께 했다. 맥주도 한잔 곁들였다. 그 당시의 우리와 중국의 화폐가치를 기억나게 하는 일이 하나 생각난다. 3인이 식사를 끝내고 75.000원을 계산 했는데, 전교수가 영수증을 자꾸 보여 달라는 것이었다. 무슨 영문인가 싶어 무심코 주었더니 그의 말이 “야, 내 3달 치 신봉을 한자리에서 먹어 치웠습네다”라고 놀래는 것이었다. 그 당시 고참 대학교수의 1개월 급여가 우리돈으로 25,000원이었음을 알게 하는 말이었다. 그러니 젊은 교수들은 2만원 미만이었을 것이고 대학 졸업 후, 운 좋게 전문 연주단체에 들어가 활동하는 사람들
지난주에는 “한중 전통음악 학술 및 실연교류회”를 준비하고 있는 연변예술대학 교수진들의 환영사를 소개하였다.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정례적인 우리의 만남이 우리 민족문화 유산을 후손들에게 전승하는 길에서 더욱 공고한 초석이 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고, 더하여 이러한 교류의 장이 우리의 전통문화를 더욱 소중히 여기는 계기가 될 것이 확실하다는 점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교류 행사가 시작된 계기는 연변예술대학에서 민족성악을 가르치고 있는 전화자 교수가 어렵게 한국으로 유학을 왔고, 그를 만나면서 연변의 교수들을 소개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교류가 가능해 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전화자 교수는 누구인가? 잠시 소개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1990년 당시, 《국립국악원》에서는 미수교국이었던 중국의 교포인 연변대학의 전화자 교수로부터 한국에 와서 민족성악인 경기민요나 서도민요를 배우겠다는 유학의 뜻을 전달받았다. 그의 내한 목적이 남쪽의 노래를 배워 그의 입신이나 더 큰 출세를 위해서가 아니라, 연변의 지역민들이나 대학의 제자들에게 남쪽의 소리들을 배워 전해
한·중 전통음악 학술 및 실연교류회 Ⅱ 지난주에는 30여 명의 한국전통음악학회 회원들이 중국 연변예술대학을 방문하여 열네 번째 한-중 전통음악 학술 및 실연 교류회를 했다는 이야기와 이 행사는 한국의 전통음악과 중국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사는 동포들이 지키고 있는 음악을 상호 이해하고 서로 교류하는 행사라는 점을 소개하면서 올해의 발표내용과 발표자들을 소개하였다. 이 행사를 준비한 중국의 연변예술대학에서는 강광훈 학장, 신호 부학장, 김성삼 전학부장, 전화자 교수, 중국음악가 협회 박장수 주석, 표현전업의 리훈 주임, 최성룡 교수 등 그 외에도 여러 교수와 학생들이 뜨겁게 환영해 주었다. 그 중 리 훈 주임교수의 “중·한 교류음악회의 진정한 의미”라는 제하의 환영사 일부를 소개해 보도록 하겠다. “연변대학예술학원과 한국의 전통음악학회가 매해 여름에 만나 공동으로 개최하는 중한 학술 및 실연 교류회가 벌써 금년으로 14회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이번에도 저희 연변대학 예술학원을 찾아주신 한국전통음악학회 회장 서한범 박사님을 위시한 모든 가족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하나 되는 환영과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뿌리가 없는 나무에 열매가 맺을 수 없는
중요무형문화재 19호 선소리 산타령의 이수자로 용인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경기소리의 중견 곽윤자 명창이 음반 출시를 했다고 한다. 평소 그의 활동을 지켜보고 있는 필자의 입장에서 노래에 대한 그의 열정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 것이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미국과 중국의 대학과 학술 및 실연교류회를 해 오고 있다. 겨울철에는 미국의 UCLA와 Korean Music Symposium 행사를 11년째 해 오고 있고, 여름 방학을 이용해서는 중국의 연변예술대학, 그리고 조선족 예술단과 학술 및 실연교류회를 20여년 전부터 해 오고 있다. 이 행사에 국악계 여러 교수와 석 박사 과정의 대학원생, 인간문화재급 명인명창이나 이수자급의 실기인들이 동참해 주고 있다. 몇해 전부터는 선소리 산타령의 황용주 예능보유자 외 보존회 멤버들이 본 행사에 동행해 주면서 자연스럽게 곽윤자를 가까이 알게 되었던 것이다. 연주여행을 함께 하면서 남들과는 다른 그녀만이 지니고 있는 인상에 남는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하게 되었다. 첫째는 그녀가 매사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사고를 지닌 소리꾼이라는 점이다
해마다 6월이면 부여에서 내포제 시조창 강습회가 열리고 있다. 때를 맞추어 문화재 보유자인 김연소 명창의 개인 발표회도 열리고 해서 시조를 좋아하는 전국의 애호가들이 부여로 발걸음을 하게 될 것이다. 내포제 시조란 내포지방, 즉 충청남도 서해 바닷가와 인접해 있는 홍성, 당진, 서산, 서천, 보령, 부여, 청양, 연기, 논산, 예산 지역에서 부르고 있는 3장 형식의 간결한 노래선율을 말한다. 충청남도에서는 일찍이 이 내포제 시조를 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그 보존과 계승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초대 보유자는 고 소동규 명인, 2대 보유자는 고 김원실 명인, 그리고 현 보유자는 김연소 명인이다. 충남의 시조인들은《충남통합시우회》를 조직하고 보유자를 중심으로 내포제시조의 확산과 보급을 위해 해마다 시조 강습회를 열기도 하고, 가을에는 전국적인 시조창대회를 열기도 한다. 그 중심에 김연소 명인을 포함한 이규환, 김영숙 등과 같은 열성있는 시조인들이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충청 지역에 내포제시조가 전해오는 것처럼 경상도 지역에는 영제시조가 있고 전라도 지방에는 완제시조
지난주까지 벽파가 어떤 분인가 하는 점을 정리하면서 벽파는 민속음악, 그중에서도 경서도 민요를 소리로 지켜온 명창이었다는 점을 피력하였고, 둘째로 선생은 학문을 즐겨 한 학자였다는 점을 말했고, 셋째로는 앞서가는 국악교육자였다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다음으로, 벽파를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는 선생은 겸손하고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로 많은 분으로부터 존경을 받아 온 대 사범이었다는 점입니다. 이름난 명인 명창 중에는 스스로 자기의 음악성을 자랑하거나 목자랑, 소리자랑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위에서도 흔히 만날 수 있지요. 오호의 결과나 평가는 듣는 사람들이 하는 법인데 스스로 자기 소리에 도취해 품위를 잃는 경우를 목격하게 됩니다. 같은 소리를 듣더라도 A가 부르면 천박해 보이고 B가 부르면 고상해 보이는 법입니다. 그래서 실기인이라 해서 소리만을 앞세워서는 훌륭한 음악인으로 대접받기 어렵다는 진리가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소위 예술인인가, 아니면 쟁이인가? 하는 점이 본인의 인격이나 교양과 직결된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벽파 선생은 여타 명창과는 다른 품격을 지니고
“ 1955년 7월, 민요계의 거장 이창배는 인멸 위기에 있는 우리 고유의 가락들을 정확하게 보존전수하고자 <청구고전성악학원>을 개설하고, 일반인 및 정규 수강생들을 지도하기 시작하였다. 동 학원에서는 일반 민요를 비롯하여 경기 및 서도의 입창 잡가 각 도의 속요들을 중심으로 교수하였고, 그 활동은 20여년 이상 끊이지 않고 지속되었다. 민요 한 가락이라도 부른다는 사람들은 전문인이든 비전문인이든 간에 모두 이곳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동 학원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현역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수십 명에 이르고, 사사받은 사람들은 헤아릴 수도 없으며, 인간문화재급 국창들도 모두 이곳을 거쳤다. 개원 당시만 하더라도 민요계는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에, 부르는 사람마다 서로 다르고 식자층의 손이 닿지 못해 사설은 오류투성이로 전해질 뿐이었다. 어려운 고사나 한문구는 제 뜻을 바르게 새기지 못한 채 불러 왔기 때문에 사설 내용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왜곡된 발음이나 표현을 일삼는 예도 허다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정 작업은 동 학원의 이창배 사범에 의해 하나 둘 정리되어 나
벽파 이창배 선생은 1921년 여섯 살이 되어 한강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는데 마침 집 옆에 교회가 있어서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찬송가의 영향으로 노래를 잘 따라 불렀다고 합니다. 경서도 소리와 만나게 된 계기는 일본인 선생들이 일본음악을 가르치고 일본 노래를 부르라는 지시에 그것이 싫어서 조선의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고 하지요. 어린 벽파야말로 애국자 중에서도 애국자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선생은 보통학교를 졸업할 무렵, 퉁소의 명인으로 알려진 고모부로부터 퉁소며 단소 등의 관악기를 배웠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서도의 명창들이 간혹 관산융마와 같은 시창을 부를 때면 선생이 단소로 반주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도 있었습니다. 선생이 본격적으로 소리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18세 무렵, 한양공업학교를 졸업하고 체신국의 전기과 측량기사가 된 이후라고 생각됩니다. 이 무렵 동네 공청에는 왕십리패나 뚝섬패의 선소리 명창들이 드나들었기에 자연스럽게 그들의 음악을 듣게 되었을 것이고, 그러다가 원범산에게 경서도 잡가를 배웠으며 학강 최경식에게 본격적으로 소리 공부를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에는 학강의 <조
2012년, 6월 14(목요일) 오전 10부터 성동구 왕십리에 있는 소월 아트홀(성동문화원)에서는 벽파 이창배의 생애와 예술을 조명해 보는 학술모임과 기념공연이 한국전통음악학회 주최로 개최된다. 이 대회에서 발표될 필자의 기조강연 내용을 몇 회로 나누어서 매주 얼레빗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좌장으로부터 소개받은 전통음악학회 회장 서한범입니다. 이 행사를 주최하게 되어 영광스럽고 또한 보람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목청을 높여 <전통예술의 진흥>을 부르짖고 있지만 아직도 일부에서는 전통음악은 구시대의 낡은 유산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들, 국가를 경영하는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이 전통음악은 소수의 특수 계층이 그 명맥을 이어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듯해서 씁쓸할 때가 있습니다. 얼마 전의 일입니다. 전직 국회의원 한 분과 00감독원장, 기업체 회장을 지낸 분들과 담소하는 자리에서 한 분이 “거 서 교수가 쓴 책 추임새에 인색한 세상 있잖아,” 하니까 국회의원을 지낸 분이 “추임새요? 무슨 새의 이름입니까?” 하고 되물어서 깜짝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경기민요의 대명사 이은주 명창의 제자인 노경미 씨가 경기지방에 전승되고 있는 12좌창 전곡을 음반에 담아냈다. 좌창(坐唱)이란 글자 그대로 앉아서 부르는 노래라는 의미이다. 이는 서서 부르는 노래라는 의미의 입창(立唱)과 구별 짓기 위한 이름이다. 입창을 순 우리말로 선소리라 부르는 것은 한자의 입(立)이 설 “입”이어서 같은 의미이지만, 좌창을 달리 잡가라고 부르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하여튼 좌창이나 입창, 이들은 줄곧 잡가라는 이름으로 전해 온 노래들로 상류 지식인 사회에서 즐겨 부르던 정가(正歌)의 대칭개념인 것이다. 좌창 중에서 12곡으로 선정하고 있는 곡들은 다음과 같다. 1) 유산가(遊山歌) 2) 적벽가(赤壁歌) 3) 제비가(燕子歌) 4) 소춘향가(小春香歌) 5) 선유가(船遊歌) 6) 집장가(執杖歌) 7) 형장가(刑杖歌) 8) 평양가(平壤歌) 9) 십장가十杖歌 10) 출인가(出引歌) 11) 방물가(房物歌) 12) 달거리(月令歌) 일반적으로 앉아서 부르는 연창형태는 적극적인 표현을 절제하는 노래들이다. 가곡이 그렇고 가사와 시조가 그렇다. 그래서 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