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일취스님(철학박사)] 사람은 태어남과 동시에 이별은 약속되고, 덧없는 시간 속에 만남과 헤어짐이 무량억겁(無量億劫, 헤아릴 수 없이 긴 시간) 윤회를 반복한다. 만난 자 기필코 떠나보내야 하고, 어느 것 하나 그대로 붙잡아 둘 수 없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혹의 세계에서는 영원한 내 것처럼 한순간도 놓지 않으려고, 떠나보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래 언제까지나 그대로 가지고 갈 것처럼 두 손 불끈 쥐고 있다. 이미 가버린 사람도 그리워한다. 다시 내 곁으로 돌아오라고 손짓한다. 그러나 아무리 달래도 갈 사람은 기어코 가고 만다. 가수 이범학은 <이별 아닌 이별>이란 시 속에서 재회를 절절히 그려내고 있다. “…어디서나 행복을 바라는 내 맘은 무너진 내 안의 사랑이 번지면 다시 찾을 꺼야 내사랑 굿바이 굿바이 어디서나 행복을 바라는 내 맘은 사랑한다는 그런 말보다 더 진실함을 이해해 이젠 떠나가는 그대 모습 뒤로 아직도 못다 한 나 만에 얘긴 하지마 다시 언제까지 나만의 미련으로…“ 맹자의 《진심장구(盡心章句)》에는 “往者不追 來者不拒(완자불추 내자줄거)” 곧 가는 사람 붙들지 않고 오는 사람 거절하지 않는다."라는 구절이
[우리문화신문=일취스님(철학박사)]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와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기쁘고 반가우며, 행복한 일이다. 그러나 만남 뒤에는 항상 따라다니는 이별을 어쩌란 말인가. 만남은 무엇이고 이별이란 무엇인가.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영원히 내 곁에 있게 할 수는 없다는 말인가. ‘회자정리거자필반(會者定離去者必返)‘란 고사성어가 있다. ‘회자정리’란, 만난 자는 분명코 헤어진다는 말이 되겠다. 그렇지만 만남 뒤에 이별이 올지라도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속담에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보다, 너무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야 하는 절박한 심정에서 그 아픔을 달래기 위해 ‘거자필반’이라 했다. “헤어진 사람은 언제가 반드시 돌아오게 된다.”라는 사자성어가 마음에 간다. 만난 자는 반드시 떠나고, 떠난 자는 반드시 돌아온다고 하였으니, 만남과 헤어짐에 너무 집착하거나 매달리지 말라는 뜻일 게다. 이러한 언어의 중심에는 누구나 태어나면 불가항력적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사후세계에 대한 불안에서 오는 위안과 대책이라 보인다. 여기에 대한 역사적 근거가 있다. 이집트 고대 무덤 곧 4,300년 간 굳게
[우리문화신문=일취스님(철학박사)] 요즘 트로트가 대중 속에 깊이 파고들면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트로트를 많이 애창하고 있다. 그 노래 가운데 가수 노사연의 ‘만남’의 노래 한 구절을 음미해 보자.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람이었어 잊기엔 너무한 나의 운명이었기에 바랄 것은 없지만 영원을 태우리~ (아래 줄임) 만남이란 여러 가지 형태로 이루어지지만 모두 운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게다가 또 헤어지는 것조차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 하기야 인연 따라 만났다 인연 따라 헤어지는 것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냐만, 누구나 거역할 수 없는 법칙이기에 운명으로 돌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사람들은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을 되풀이하며 살아가고 있다. 예컨대 만남과 헤어짐 그 자체는 뜬구름 같아서 만났지만 언제 어떻게 헤어질지 모르는 묘연한 만남의 관계를 두고 그저 “정처 없이 꿈속을 걸어가는 나그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단지 인간 삶의 문제라기보다 어차피 만물의 생존 법칙에 해당하며, 자연의 순환이기 때문에 만남의 그 자체를 크게 부각하여 ‘천생연분(天生緣分)’이니 ‘지란지교(芝蘭之交)‘란 말이 어쩌면 모순일 수도
[우리문화신문=일취스님(철학박사)] 우리의 만남은 어머니 배속에서 세상 밖으로 태어남과 동시에 시작된다. 맨 처음, 태어남과 동시에 만나는 사람은 대부분 산부인과 의사와 간호사와의 만남이라 하겠고, 곧이어 아버지와 만남 그리고 같은 날 태어난 친구들 그리고 친족 등등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아름다운 세상을 만났다는 것이 더없이 거룩한 일이며, 태어남과 동시에 세상 다양한 존재들과 만나서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그 때문에 탄생이란 너 나 할 것 없이 축복의 대상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탄생의 성스러움은 인간뿐만 아니라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들에게 해당하는 축복이다. 또한 어떤 모습으로 태어났건,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들 어느 것 하나 차별 없이 모두 다 고귀한 것이며 마땅히 보호받아야 하는 것이 생명 존엄의 원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라고 해서 특별하게 의미 부여한다는 것은 모순적 해석일 수가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란 은유를 써서 사람의 권위를 높이 치켜세우고 있다. 게다가 사람으로 태어나기란 1억 겁 선행을 해야 태어날 수 있다고 하여 ‘맹구우목(盲龜遇木)’이란 비유를 들어
[우리문화신문=일취스님(철학박사)] 정(情)이란 무엇일까? 가수 조용필의 노래 가사가 떠오른다. 「정이란 무엇일까 받는 걸까 주는 걸까 받을 땐 꿈속 같고 줄 때는 안타까운 것 정을 쏟고 정에 울며 살아온 살아온 내 가슴에 오늘도 남모르게 무지개 뜨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공기처럼 보이지 않은 정의 기운을 주고받고 살아간다. 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짐 속에서도 가슴과 가슴으로 보이지 않게 흐르는 것이 정일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정 때문에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정이란 우리 마음속에 따뜻한 감정의 원천이며 무형(無形)의 보시며 사랑이다. 정은 우리 혈관을 통해서 흐르는 피와 같다. 또 정을 생각하면 모정(母情)을 떠오르게 한다. 어머니 사랑이야말로 어떤 것과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소중하다. 어머니 사랑을 잘 받고 자란 아이는 밝고 건강하게 자란다는 것을 두말할 나위가 없다. 누구나 모성애 같은 정을 받기를 원한다. 정은 무엇보다 받는 쪽보다 베푸는 쪽에 값어치를 둔다. 이처럼 정에 근접한 용어를 찾는다면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 ‘내가’ ‘무엇을’ ‘누구에게 베풀되 베풀었다는 생각마저 같지 않은 마음)일 것이다.
[우리문화신문=일취스님(철학박사)] 길을 가는 사람을 붙들고 "당신은 왜 사나요?" 하고 묻는다면, 뜬금없는 질문에 누구나 질색하거나 어리둥절할 것이다. 그것도 각본에 짜인 문답이라면 몰라도 갑작스럽게 던진 말 한마디, 각자의 삶에 중요한 핵심이긴 하지만 실로 깊고도 난해해서 쉽게 답을 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온갖 답이 나올 법도 하다. 예를 들면, “태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산다.” “잘 살고 잘 먹기 위해 산다.” “죽지 못해 산다. “소풍 가듯 산다.” “애(자식)들 때문에 산다.” “한 편의 연극처럼 즐기며 산다.” “그저 물 흐르듯 바람같이 산다.” “산다는 것이 대수냐, 되는대로 살면 되지” “숨 쉬고 있으니까 산다, 숨 끊어지면 죽는 것이고.” 등등 무성한 답이 예상된다. 생각해 보면 “왜 사느냐?”에 대한 이렇다 할 정답이 없을 것 같고, “숨 쉬고 있으니까 산다.”라는 말에 제일 마음이 간다. 호홀지간(毫忽之間)이라고 했다. 누구나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모호한 상태에서 숨이 끊어지면 그날로 삶을 마감하는 것이 당연지사일 것이다. 늙어 자연사(自然死)하는 죽음이나 병들어 죽는 상황을 빼고, 요즘 텔레비전에
[우리문화신문=일취스님(철학박사)] “내가 허약한 가설 위에 지어 올렸던 환상의 성은 눈 깜짝할 사이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그 후에는 무감각하고 밋밋한 평면이 덩그렇게 남아있을 뿐이었다.” - 무라카미 하루키, 장편소설 《상실의 시대》 가운데서- 어느 날 내가 기대했던 어느 것 하나가 환상이었음을 깨닫곤 한다. 복권을 사놓고 긴장된 마음으로 추첨 일을 기다렸다가 추첨이 끝나자, 주먹 안에 무참하게 뭉개진 종잇장처럼 그 시간까지 기대했던 꿈도 처절하게 뭉개진 것을 여러 번 경험했다. 꿈이 어느 때는 그저 생각만으로 지어 올린 가설과 논리들의 군상들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가 다가설 수 없는 여러 색깔의 꿈의 반란을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꿈이 없는 삶이란 망막한 사막과 같다. 한 여자가 양계장에서 하루 일을 해주고 그 대가로 달걀 한 판을 받았다. 달걀판을 머리에 이고 부픈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그녀는 큰 부자가 될 거라는 꿈을 꾸며 길을 걸었다. “이 달걀을 부화시키면 병아리 30마리가 된다. 30마리 병아리를 다섯 달 동안 잘 키우게 되면 그 닭들이 수많은 알을 낳게 되고, 그 알로 또다시 병아리를 부화시키면 닭은 엄청나
[우리문화신문=일취스님(철학박사)] 대개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일상의 대부분을 선과 악의 숲을 들락거리게 마련이다. 그런가 하면 때로는 자신이 선인이 되거나, 악인이 되기도 한다. 그래 악인이 선인인 척하는가 하면, 선인이 악인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무릇 모두가 원하는 선인으로 살아가기는 무척이나 어려운가 보다. 아무리 자신이 선인이라 하지만 마음은 항상 악의 숲을 들락거리기 때문이다. 다만 악을 좀 더 적게 지을 따름이지 자신도 모르게 죄를 짓고 살아가고 있어서다. 그렇기에 악에 물들어 버린 자는 선을 뒤로한 채 악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거소습불이여구(渠所習不以與狗)” 이는 “제 버릇 개 못 준다.”라는 말이다. 이처럼 자신의 못된 습성은 죽어서도 고치기 어렵다고 함이겠다. 어쩌다 악인이 뜬금없이 개과천선(改過遷善)했다고 하자. 이런 경우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어려운 일이다. 얼마 전 부산에서 ‘묻지 마’ 살인사건이 있었다. 텔레비전에 비친 화면에 외양으로는 우리네와 별반 다르지 않은 양순한 사람 같아 보이건만 어찌 인간의 탈을 썼는가 싶을 만큼 극악무도한 살인을 저질러 세간을 경악게 했다. “저렇게 곱게 생긴 여성이 어떻게 저런 살인을
[우리문화신문=일취스님(철학박사)] 초봄부터 산과 들에는 갖가지 꽃들이 피고 진다. 시기에 따라 전국 곳곳에서는 꽃 잔치가 요란하다. 도심 길가에도 어느 한 곳 빈 데 없이 깔끔하게 다듬어진 꽃길이 행인들의 눈을 즐겁게 하고 있다. 꽃과 사람! 꽃과 사람의 관계는 깊은 것임을 말해주는 것일까? 꽃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인지, 사람이 꽃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물음에 답을 내리기가 묘연(杳然)할 지경이다. 하지만, 분명 사람이 꽃이 좋아 꽃을 탐하는 마음은 숨길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본다면 꽃의 처지에서는 꽃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사실 꽃이 아름답게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환심을 사고, 사랑을 얻기 위해서 아름답게 핀다고 보기보다는, 꽃들은 그들만의 꿈을 가지고 독특한 세계를 꾸미며 생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생각과 관계없이 그들만의 자유로운 세계에서 어느 곳 가리지 않고 다채로운 형상과 향기 그리고 아름다움을 뽐내며, 자연과 순응하며, 생명의 생존법칙에 따라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사람이 보고 안 보고 상관없이 ‘아름답다’, ‘추하다’라는 분별과 차별에도 휘말리지 않고 그 어느 곳에서나 다소
[우리문화신문=일취스님(철학박사)] 안치환의 노래 가운데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노래가 있다. 노래 가사가 애정이 넘치고 사랑스럽다. 강물 같은 노래를 품고 사는 사람은 알게 되지 음~ 알게 되지 내내 어두웠던 산들이 저녁이 되면 왜 강으로 스미어 꿈을 꾸다 밤이 깊을수록 말없이 서로를 쓰다듬으며 부둥켜안은 채 느긋하게 정들어 가는지를 으음~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본 사람은 알게 되지 음~ 알게 되지 그 슬픔에 굴하지 않고 비켜서지 않으며 어느결에 반짝이는 꽃눈을 닫고 우렁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랑이야말로 짙푸른 숲이 되고 산이 되어 메아리로 남는다는 것을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이 모든 외로움 이겨낸 바로 그 사람 누가 뭐래도 그대는 꽃보다 아름다워 (아래 줄임) 다정한 연인끼리의 애정행각과 환상의 세계를 그림으로 펼치듯 그 감정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라고 비유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가사 내용에 꽃과 만난 적도, 꽃이 나라고 모습을 드러낸 적도, 꽃과 사람의 장단점을 대조하여 나타낸 근거도 없다. 하지만 어떤 발상에서인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했다. 꽃의 우월성을 말하기 전에 꽃은 꽃일 뿐, 인간과는 별개가 아닐까 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