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지난 2010년 8월 15일은 광복 65주년이었고 같은 해 8월 29일은 경술국치 100년을 맞았었다. 그래서 우리는 “경술국치 100년, 한일평화를 여는 역사기행” 답사단을 꾸려 조선인들의 강제노동 현장인 기타큐슈의 치쿠호 탄광을 시작으로 시모노세키, 오사카, 교토에 이어 도쿄의 야스쿠니 반대 행사가 있던 히비야공원까지 장장 1,200킬로 거리를 12일에 걸쳐 돌아보았다. 이 글은 그때의 기록이지만 현재의 상황이기도 하다. 곧 다가올 68주년 광복을 앞두고 조선인강제연행 궤적을 쫓아갔던 기록을 10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설명-
“나는 학살 현장인 사할린의 설원에 서게 되면 일본인이 저지른 뿌리 깊은 원죄를 뼈저리게 느낀다. 일본이 양심이 있다면 강제연행한 조선인을 맨 먼저 귀국시켜야 했다. 그런데 일본인만 후송하고 조선인은 내버려둔 것이다. 이렇게 비인간적인 행위가 용서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일본인 하야시에이다이 씨의 격앙된 ‘일본사죄론’이다. 이 말은 비단 사할린에 국한된 이야기만은 아니며 2013년 현재 남아있는 60만 재일조선인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말이다.
“2004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후 몇 번이나 그만두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지금까지 지원해주신 양심적인 일본선생님들 그리고 강연할 때마다 나에게 보내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써내려간 아이들의 감상문에 힘을 얻어 지금까지 해낼 수 있었습니다.”
늙으신 어머니와 함께 일본의 초,중,고등학교를 돌며 재일조선인들의 강제연행과 재일동포의 피눈물 나는 역사를 증언하고 다니는 배동록 씨는 2006년 <조선대학교동창회장려상> 수상 소감에서 이렇게 ‘증언’의 고달픔을 토로했다. 동포 2세인 배동록(67살) 씨는 1995년부터 어머니와 증언 일을 시작해 오는 2010년 11월 10일 치쿠호의 우스이초등학교에서 700번째 증언을 맞이한다고 했다. 그는 살아있는 재일조선인의 역사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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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사단을 태운 전세 버스 안에서 어머니 사진을 들고 재일조선인의 삶을 증언하는 동포 2세 배동록 씨 |
그의 비쩍 마른 야윈 몸이 무려 15년째 해오는 ‘억압과 차별’의 증언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말해준다.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칼 하며 퀭하니 들어간 눈동자는 그가 살아낸 세월의 고단함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지만 그래도 눈빛만은 광채가 났다. 어머니와 단짝을 이룬 모습이 흡사 한 쌍의 기러기처럼 다정해 보였던 두 모자는 그러나 2004년 어머니의 작고로 외로운 기러기가 되어 그날도 ‘전쟁에 광분했던 일제의 만행’을 증언하고 있었다.
2010년 8월 9일 오전 9시 나가사키의 추도식을 마치고 시모노세키로 향하는 버스에서 답사단은 도시락으로 늦은 아침을 때웠다. 그리고는 시간을 아껴 재일 동포 2세 배동록 씨의 버스 안 증언을 들었다. 흔들리는 차 안이었지만 한 손에는 어머니 사진이 들어있는 낡은 액자를 들고 열심히 당시 상황을 설명해주는 동안 차창 밖은 어느새 굵은 빗줄기를 뿌리고 있었다. 그는 우리 답사단을 위하여 별도로 준비한 크고 작은 흑백사진들을 한 장씩 넘겨 보여주었는데 그 모습이 무성영화시대의 변사 같았다. 관객으로 앉아서 우리는 변사의 입심에 울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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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겁먹은 눈의 올망졸망한 아이들을 안고 부관페리를 탔을 배동록 씨 어머니 |
경남 출신의 아버지가 큐슈 야하타제철소로 강제연행 당한 것은 1940년으로 그 뒤 2년 후에 어머니는 올망졸망한 아이 넷을 데리고 부관연락선에 몸을 싣는다. 당시는 태평양전쟁 중이라 일본은 ‘철이 곧 국가’라는 구호 아래 철 생산에 매달렸는데, 부족한 노동력을 위해야하타제철소에만 6,000여 명의 조선인이 강제노역에 종사했다고 한다. 이들은 주로 철광석이나 석탄운반, 석탄 캐기, 흙공사, 짐 나르기 등 가혹한 중노동에 투입되었으며 배동록 씨 어머니 역시 출산 3주 만에 산후 조리도 못 한 채 부둣가에 쌓인 철광석을 4명 1조가 되어 화물차에 실어 나르는 일을 했다.
철광석에 묻혀 화물차 속으로 떨어져 죽고 싶을 만큼 고된 노동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의 어머니는 “철광석에 묻혀 화물차 속으로 떨어져 중노동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라는 말을 달고 살았을까? 그러나 그때마다 7남매를 두고 죽어 버리면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으로 억척스레 일하여 당시로써는 보기 드물게 5남매를 대학에 보내어 주변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배동록 씨의 증언을 듣는 사이 나가사키로부터 4시간이나 달려온 차는 어느새 우리를 시모노세키에 내려놓았다. 빗줄기가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시모노세키에서 맨 처음 들른 곳은 똥굴동네였다. 옛 이름은 오오츠보로 배동록 씨는 여전히 이곳을 똥굴동네라 불렀다.
그러나 지금은 간다(神田)로 바뀌어 있었다. 마을 어귀를 오르는 동안 빗줄기는 다시 굵어졌는데 이곳이 똥굴동네로 불리는 까닭은 예전에 형무소, 분뇨처리장, 화장터, 공동묘지 등이 있어서라고 했다. 요즘 우리로 말하면 혐오시설물이 잔뜩 몰려있던 곳으로 지금은 이런 시설들이 모두 사라지고 보통 일본인 동네처럼 보였지만 주택의 크기와 낡기로 보아 충분히 그때를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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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모가 살던 집 앞에서 비를 맞으며 설명하는 배동록 씨 |
아직도 낡은 양철 지붕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일본의 다른 주택가에 비해 주거환경이 열악해만 보였다. 실제로 배동록 씨의 장모님이 셋방살이하던 집은 다 쓰러져 있었는데 지금까지 방치된 채 잡초만 무성했다. 13년 전에 허물어졌지만 집주인은 수리를 포기했는지 다 쓰러진 함석지붕 위로 굵은 빗줄기만 세차게 내리쳤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 속을 뚫고 똥굴동네 안쪽 깊숙이 우리를 안내한 곳에는 광명사라는 절이 있었다. 이곳에는 제법 큼지막한 한국 전통 양식의 종각이 있었는데 현판에는 ‘평화의 대범종’이라고 쓰여 있다. 종루는 지대가 높아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는데 앞쪽으로는 조선인 학교 운동장이 보였고 사방으로는 벌통 같은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서울의 70년대 달동네가 연상되었다.
빗줄기가 세차게 내리는 가운데 배동록 씨는 답사단에게 타종을 권했다. 타종은 답사팀 중 가장 어르신인 평화재향군인회 최사묵 대표와 젊은 대학생들이 함께 쳤다. 종소리는 우렁차게 빗속을 뚫고 시공을 뛰어넘어 억울하게 잠든 영혼들을 깨웠다. 우리의 안내자 배동록 씨는 서러움에 북받쳤는지 그만 바닥에 주저앉아 시멘트바닥을 맨주먹으로 치면서 말했다. “여러분 제발 재일동포가 살아온 어둡던 과거를 잊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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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묘지였음을 알리는 표지석(왼쪽), 골목길 함석집 2층에 고개를 내밀고 있는 할머니 |
똥굴동네를 돌아 나오는 길목에는 공동묘지 자리도 보였는데 “소화10년(1935) 9월, 합장묘”라고 쓴 작은 돌비석 하나만이 쓸쓸히 비를 맞은 채 서 있었다. 마을을 다 빠져나오는 끝자락 2층 함석집 창가에는 초점 없는 눈으로 우리 일행을 바라다보는 할머니 한 분이 눈에 띄어 답사단의 이정미 (교사) 씨는 연신 할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
“곤니찌와(안녕하세요)”
“....”
할머니 조선사람?”
“....”
열심히 말을 걸어보지만 할머니는 그저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우리를 바라다본다. 혹시 일제 때 강제 연행된 남편 따라 건너와 살다가 탄광에서 남편을 잃은 것은 아닐까? 한 점 혈육 아들마저 잃고 돌봐주는 이 없는 똥굴동네 뜨거운 함석집에서 인적 끊긴 골목만을 하루 종일 바라다보는 망부석이 된 것은 아닐까? 아무 반응이 없는 할머니를 향해 손을 흔들면서도 우리는 줄곧 할머니의 건강과 장수를 빌었다. 어느새 똥굴동네는 내리는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똥굴동네를 벗어나니 굵던 빗줄기가 다시 가늘어졌다. 답사단이 두 번째로 찾은 곳은 간몬연락선(関門連絡船)선착장 터였다. 간몬연락선이란 일본국유철도(日本国有鉄道)가 1901년부터 1964년까지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역(山口県 下関駅)에서 후쿠오카현 모지항역(門司港駅)사이를 운항하고 있던 철도수송선을 말한다. 지금은 간몬해저터널이 개통되어 더는 배를 띄우지 않지만 해저터널이 개통되기 전까지 혼슈와 큐슈를 잇는 가장 중요한 거점지였다.
이곳에는 동판으로 새겨진 간몬연락선 선착장 터라는 동판이 새겨져 있으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조선인 강제연행자들이 부산에서 일본으로 와 첫 발자국을 디딘 장소라는 점과 이곳에서 기타큐슈 등의 탄광으로 다시 후송되었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말끔히 단장되어 선착장이라는 느낌을 가질 수 없지만 고향을 떠나 짐짝처럼 실려 온 조선인들은 다음 갈 곳으로 후송될 때까지 임시수용소에서 노예 같은 취급을 받았으며 그들을 기다리던 기타큐수 일대의 탄광 역시 죽음의 장소였음을 지난 여정에서 이미 확인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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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폐쇄된 간몬연락선 선착장 터라는 설명만이 동판에 새겨있다(왼쪽). 간몬연락선 선착장 터에서 설명을 듣고 있는 답사단 |
이곳에서 모지항역으로 보내지는 수송인원을 보면 개설 10년 후인 1912년에는 연간 84만 명(1일 약 2,300명)이었다가 간몬 철도터널이 개통되기 직전인 1941년에는 연간 880만 명 (1일 24,000명)을 실어 날랐다. 30년 사이에 무려 10배로 늘어난 것이다. 수송선을 탄 사람들은 이곳 시모노세키에서 기타큐슈로 무엇을 하러 간 사람들이며 어느 나라 사람들이었을까? 이에 대한 일본 측 설명은 그 어디에고 없다. 간몬연락선 선착장 터라고 새겨둔 동판에도 이러한 사실은 단 1줄도 없다.
조선인 강제연행자들을 기타큐슈의 탄광으로 실어 나르던 간몬터널
‘이곳은 태평양전쟁 시기에 조선인 강제연행자들을 기타큐슈의 탄광으로 실어 나르던 곳’이라고 써두는 게 역사의 정의가 아니던가! 특히 전쟁 말기인 1941년도에는 1년간 880만 명을 실어 날랐다니 그 속에 조선인은 얼마나 많았을까? 전쟁물자를 확보하려고 혈안이 된 일제는 일본 최대의 제철소인 야하타제철소와 치쿠호 탄광지대로 숱한 조선인을 실어 날랐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아는 일본인 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어째서 간몬연락선을 폐쇄하고 해저터널을 뚫었는지 또한 알지 못할 것이다.
1942년 7월 1일 야마구치현(시모노세키)과 후쿠오카현(모지)을 이어주는 간몬해저터널 개통으로 지금은 두 지역을 자동차로 쉽게 드나들 수 있지만 이 두 곳을 연결하는 해저터널을 만든 것은 민간인의 손쉬운 왕래나 관광 목적이 아님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전쟁 말기 원활한 철도 수송과 인적자원 후송을 위한 것이었으며 지금처럼 터널 기술이 좋지 않은 시절에 또 얼마나 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해저 터널공사에 투입되어 죽어갔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해저터널 공사 시에 죽은 사람들을 위한 순직비가 터널 입구에 세워져 있으나 높다란 울타리를 쳐두고 있어 일반인 접근은 어려웠다. 근처 둑방에 서서 까치발로 바라다보는 게 고작이었다. 순직비라고는 하지만 조선인노동자를 위한 것은 아니며 일본인 기술자 속에 조선인 기술자이름 두어 명이 고작일 뿐이었다. 해저 철도공사장에서 죽어간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숱한 조선인들의 원혼을 안타까워한 것 인지 하늘은 끊임없이 굵은 빗방울을 뿌렸다.
‘세계 최초의 해저터널’로 일본이 자랑하는 간몬 해저터널은 그 길이가 상행선 3,604m(하행선은 3,614m)로 이 가운데 해저 구간은 1,140m이다. 1936년 9월19일 기공하여 1942년 7월 1일 개통되었으니 만 6년이 채 안 된 공사였다. 숱한 노동자들이 투입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이 해저터널을 버스를 탄 채 답사단은 두 번이나 오고 갔다. 그 때 배동록 씨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이곳에서 많이 희생되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희생된 사람들의 자료는 어디에도 없다고 시모노세키에서 동행한 재일동포 김정원 씨와 배동록 씨는 힘주어 말했다.
▲ 증언하다 설움에 북받쳐 통곡하는 배동록 씨(왼쪽), “평화의 대범종”을 치는 답사단
우리를 씁쓸케 하는 기록이 있는데 일본 위키피디어 자료가 그것이다. 이에 따르면 이 공사에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단 1줄도 없는 상태에서 토막이야기 하나가 소개되고 있다.
이 해저터널은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일본이 항복하지 않자 본토 결전으로 이어질 것을 대비해 군수물자 수송을 막을 목적으로 미군의 폭파계획에 있었으나 폭파 직전 항복하는 바람에 폭파를 면해서 다행이라는 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해저터널이 폭파 안 된 것만 다행으로 여길 줄 알지 해저터널을 만든 이들의 희생은 아랑곳하지 않는 게 현재의 일본상식이며 정서임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껴본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세계 최초의 해저 철도터널(世界初の海底鉄道トンネル)이라고 자랑하는 간몬터널은 세계 최초가 아니고 영국의 세반터널(Severn Tunnel 1873~1886년 개통)이 최초이다. 세반터널은 전체길이 7,008m이며 해저부분은 3,600m이다. 일본보다는 56년 앞선 터널로 그 길이만도 해저부분은 3배 이상 길다. 요컨대 중요한 것은 “세계 최초”를 주장하기에 앞서 간몬터널 공사 시에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났는지, 조선인을 포함한 외국인 희생자는 누구였는지를 밝히는 게 인도주의적인 일이라고 본다. 또 하나는 살상용으로 쓰기 위한 전쟁 목적의 터널이었음도 고백하는 게 좋다. 역사의 반성은 그간의 사정을 자세히 알리는 일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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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랑을 부르며 다시는 슬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게 되길 비는 모습(왼쪽) 시모노세키항 터에서 바다에 헌화하는 답사단 |
그럼에도 희생당한 이들을 밝히지 않고 그 흔한 추도비 하나 세우지 않는 일본! 철도현장에서, 해저터널현장에서, 원폭투하 현장에서 죽어간 수많은 조선인은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파악할 길이 없다. 지금이라도 일본정부는 간몬터널 공사에 투입되었던 조선인 노동자들의 이름을 밝히고 그들 유족에게 정식으로 사죄하길 바라는 무거운 마음으로 답사단이 해저터널을 통과하여 찾아간 곳은 옛 부관연락선 터였다.
이곳은 1988년 현재의 시모노세키국제터미널이 완성되기 전까지 화물과 사람들을 실어 나르던 옛 부관연락선 터였다. 주변에는 컨테이너 상자가 잔뜩 쌓여 있었는데 예전에 그 자리에는 조선인 강제연행자들의 임시숙소가 있었던 자리다.
부관연락선(일본 쪽에서는 관부연락선‘関釜連絡船’이라 부름)이란 이름으로 취항하던 한일 여객선은 1945년 패망과 함께 항로가 폐쇄되어 오다가 한일 국교 정상화가 재개된 이후 25년 만에 부관훼리라는 이름으로 1970년 재취항의 길을 맞는다. 그러나 전쟁시기에 취항했던 배이름을 보면 고려마루(高麗丸 1913.1.14), 신라마루(新羅丸 1913.4.5), 경복마루(景福丸 1922), 덕수마루(徳壽丸 1922), 창경마루(昌慶丸 1923)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것은 조선의 궁궐 이름이 아닌가? 왜 하필 많은 이름 중에 남의 나라 궁궐이름을 화물을 싣고 사람 태워 나르는 배에다 붙였을까? 일본의 궁궐이름을 한일 화물선이나 여객선에 붙이면 좋았을까?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 벽돌을 쌓아 둔 곳처럼 보이는 곳이 일본인 순직비(왼쪽) 이곳은 간몬철도 해저터널 입구로 일반인들은 접근할 수 없는 곳이다. 순직비 비문에 조선인 이름이 두어 명 보이지만 이는 기술자로 추정되는 사람으로 당시 일반 노동자들의 희생에 대한 자료는 없다고 재일동포 김정원 씨는 설명했다.
1970년부터 재개된 시모노세키항 취항은 한국의 부산훼리와 중국의 오리엔트훼리, 상해하관훼리 등 3개 회사가 현재 취항 중이다. 비장한 각오로 아리랑을 다 부른 우리는 오사카로 떠나는 야간 배를 타기 전에 한 곳을 더 들렸다. 우리에게는 시모노세키조약으로 더 잘 알려진 청일강화조약기념관(靑日講和條約記念館)이란 곳이었다.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은 1895년 3월 20일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에서 열린 청일전쟁의 강화회의로 체결된 조약이다.
4월 17일 일본제국의 이토히로부미와 청나라의 이홍장 사이에서 체결된 이 조약은 5개 항목으로 되어있으며 청나라의 조선간섭을 물리치고 일본이 조선과 만주까지 지배력을 뻗칠 수 있게 한다는 게 골자였다. 참으로 기가 막힌 노릇이었다. 누구 맘대로 자기네들끼리 조약을 맺고 남의 나라 국권을 좌지우지한 것인지 청일강화조약회관으로 오르는 가파른 언덕에서 숨이 차오른 것은 끝 간 데를 모르는 일제의 침략야욕에 대한 분노에서였을 것이다.
이토히로부미는 이홍장을 앞에 두고 붉은 카펫이 깔린 근사한 사각 테이블에 거만하게 앉아서 조약서에 붉은 도장을 찍게 했다. 이 조약을 두고 일본은 조선이 청나라로부터 독립했다는 주장을 하지만 한국의 역사학계에서는 그러한 견해를 부정하고 있으며 조선은 그 이전부터 독립 국가였다.
‘청국은 일본 제국에 배상금 2억 냥을 지급한다’라는 조항이 있는데 이는 청나라의 3년분 예산이며, 일본의 4년분 세출 예산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이다. 그러나 이러한 엄청난 배상금을 청구하면서도 일본군에게 군량과 의복을 지원하는 등 청일전쟁에 막대한 손실을 본 조선에게는 1원 한 푼 없이 모든 이권을 독차지한 일본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지금은 그 역사를 아는 듯 모르는 듯 그날을 기념한다고 만들어 놓은 시모노세키조약 장소였던 기념관을 찾았을 때는 줄기차게 비만 내리고 있었다.
▲ 오사카행 밤배 위에서 강제 연행된 아버지의 추억을 자료로 설명하는 박남순 씨(왼쪽) 최낙훈 씨(가운데) 열심히 듣는 답사단원들
가까이에 조선통신사들이 드나들었다는 돌비석자리를 보고 우리는 다시 해저터널을 건너 모지항으로 향했다. 오사카행 승선을 위해 떠나는 버스 안에서 3일간 함께한 재일동포 2세 배동록 씨의 ‘재일 조선인들의 삶을 기억해 열심히 고국에서 국력을 키워달라’는 부탁의 인사말과 동포 3세인 박환나 씨도 아쉬운 헤어짐의 인사를 건넸다.
기타큐슈 탄광일대와 시모노세키 일대에 점점이 박혀있는 강제연행자들의 삶의 흔적을 밟아 본 우리는 기타큐슈에서의 4일간 여정을 모두 마치고 오사카로 가는 밤배에 올라탔다. 이튿날 오사카항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선상에서 태평양전쟁보상추진위원회 최낙훈 위원장과 박남순 여사의 증언을 들었다. 두 분 모두 핏덩어리 시절 아버지를 일본에 강제 연행당한 고통의 세월을 담담하게 전쟁을 모르는 답사단원들을 위해 들려주었다.
이 두 분의 증언에 이어 오사카, 교토 여정에서 답사하기로 되어 있는 풍신수길 만행의 현장 ‘코무덤’에 대해서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 이윤옥 소장으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는 모두 갑판에 올라 세토내해의 밤하늘을 바라다보았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엔 밝고 뚜렷한 밤 별들이 벌써 나와 속삭이고 있었다. 그때 그 암흑 시절! 우리처럼 밤배를 탔을 이름 모를 조선의 청년들! 불운한 시대에 태어나 꿈도 펴지 못하고 어두운 탄광에서 죽어갔을 수많은 내 동포들은 그러나 죽지 않고 밤하늘의 별이 되어 우리의 가는 길을 비춰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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