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107년 전 남대문 정거장(지금의 서울역)에서 경부선 개통식을 연 날입니다. 경부선 철도는 1901년 8월 20일에 서울 영등포에서 일본 자본인 경부철도주식회사에 의해 착공되어 4년 뒤인 1904년 12월 27일 완공되었습니다. 그리고 1905년 1월 1일을 기하여 서울에서 부산까지 영업이 개시되었지요. 개통 무렵엔 서울과 부산 사이가 무려 17시간이나 걸렸습니다. 지금처럼 철도부설에 좋은 기술이 없던 시절 철도부설에 동원되어야 하는 조선 백성의 저항은 컸습니다. 또한, 홍수 같은 자연재해 따위도 있어 처음엔 지지부진했지만 러일전쟁이 임박하자 일제는 일본군과 군수물자의 수송을 위해 공사를 서둘러 강행하였고, 그 결과 졸속공사를 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일부 못된 일꾼들은 일제의 비호 아래 공사가 없는 야밤을 틈타 도둑질을 하고 행상을 약탈하는 등 온갖 못된 일을 저질러 철도가 지나가는 곳마다 아수라장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철도를 놓는다는 핑계로 왜놈들은 말 안 듣는 일꾼들을 무자비하게 때려죽여 구덩이에 파묻는 일도 예사로 자행했다고 황현
전남 구례군 마산면 지리산 노고단 서쪽에는 천년고찰 화엄사(華嚴寺)가 있습니다. 이 절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544년(신라 진흥왕 5)에 인도에서 온 연기(緣起) 스님이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670년(신라 문무왕 10)에는 의상대사(義湘大師)가 화엄10찰(華嚴十刹)을 불법 전파의 도량으로 삼으면서 이 화엄사를 중수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절의 특징은 각황전에 있습니다. 대부분 절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가람을 배치하지만, 이 절은 국보 제67호 각황전이 중심을 이루어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주불(主佛)로 모십니다. 원래 이 자리엔 670년 의상대사가 이 절을 중수할 때 돌에 화엄경을 새겨 벽에 둘렀다는 장륙전(丈六殿)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장륙전은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파괴되었고 이를 숙종 때 계파(桂波) 선사가 다시 세웠다지요. 이에는 한 설화가 전해집니다. 화엄사에서 잔심부름을 해주고 누룽지 따위를 얻어가는 거지노파가 자신이 가난하여 장륙전을 불사할 돈이 없음을 한탄하고 불보살의 원력으로 왕궁에 태어나기를 빌면서 연못에 몸을 던졌는
“아사쿠사는 옛도시의 분위기를 간직한 유서깊은 절이 있는 도쿄에서 가장 전통적인 거리입니다. 수세기의 역사를 간직한 아사쿠사간논절(淺草觀音寺)과 아사쿠사신사(淺草神社)는 물론 주변 지역에까지 아사쿠사의 매력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아사쿠사에서는 에도시대 서민 경제와 오락의 중심이었던 옛 도시의 매력을 느낄 수 있고 또한 현재 이 시대 서민들의 활기찬 생활 모습도 즐길 수 있습니다.” 다이토쿠(臺東區) 관광과에서는 아사쿠사 일대와 센소지에 대한 한국어판 안내문을 만들어 아사쿠사 일대를 편하게 여행할 수 있도록 아사쿠사 역 근처 여행안내소에서 관광객들에게 무료로 나눠주고 있다. 아사쿠사 센소지(628년)는 신도들에게 관세음신앙의 명소이지만 관광객들에게는 뭐니뭐니해도 나카미세(절 입구에 즐비한 상점)를 구경하는 재미를 빼놓을 수 없다. 가미나리몽을 지나자마자 펼쳐지는 상점가는 다양한 일본 전통인형은 물론이고 직접 구워 파는 전통과자와 모찌(떡) 같은 먹거리와 핸드백을 비롯한 여성들의 소품 액세서리, 옷, 신발, 기모노를 만들 수 있는 옷감 종류까지 품목도 다양하다. 거기에
시조창은 자연 그대로의 모양새를 나타내는 격조 있는 전통성악이다. 이러한 시조창이 시류에 밀려 점점 퇴색해 가고 있는 현실이어서 안타깝기 그지없던 차에 경기도 파주에서 5월 26일, “전국시조경창대회”가 열릴 예정이라니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시조창의 부흥과 보급이라는 시대적 열망 속에 새로운 명창을 찾는, 그러면서도 시조인들의 결속과 화합을 다지는 파주의 이번 대회는 조옥란 명창이 다섯 번째로 주도하게 된 행사이다. 처음과는 달리 점차 지역민들의 관심 속에 지역의 특색사업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분위기여서 앞으로의 진행이 희망적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시조시는 향가나 민요 등과 공존하며 성장하다가 조선의 유학자들에 의해 크게 발전한 분야이다. 이처럼 시조가 발전하게 된 배경은 무엇보다도 시조시의 형식이 간결 소박하다는 형태상의 특성이 당시의 유학자, 지식인, 선비층의 취향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 하겠다. 이러한 시조시는 조선전기만 해도 ‘대엽조’라는 시형에 얹혀져 불렸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의 가곡을 잉태시켜준 만대엽, 중대엽, 삭
날나라 암수이는 벚꽃 보면 미치고 피어도 좋다하고 잎꼴도 좋다하니 이래서 봄 보내느니 재미있는 핏줄이라 요즈음은 믿나라 겨레도 벚꽃을 좋아한다고 한다. 그러나 날 나라에 머물러 사는 우리 나이 많은 한겨레의 마음은 어수선하다. 꽃에 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들딸 손자소녀들이 벚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물론 꽃에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다. 왜정 때 일본인이 벚꽃 구경하는 우리 한겨레를 업신여겨 “3등국민”, “노예국민”으로 보고 말할 수 없는 모욕적인 천대를 했기 때문인데 돌아가신 우리 아버님은 그런 일을 겪으셔선지 봄마다 벚꽃이 피면 몇며칠 방에 박히시어 아침부터 밤까지 줄곧 약주를 하시면서 빨리 지는 것을 바랐다. * 날나라 : 외국, 타국.여기서는 일본을 말한다. * 암수이 : 남자와 여자. 남녀 * 잎꼴 : 나무와 풀이 새 푸른 잎 돋은 모습 * 믿나라 :조국 * 몇며칠 : 며칠간
“야 내 구멍이 크다!” “아냐 내 구멍이 더 커!”“뭐야 내 것이 더 크다니까” 동무끼리 자기 엿에 난 구멍이 더 크다고 싸웁니다. 그러면 엿장수 아저씨가 심판이 되어 줍니다. “오늘도 내가 졌네! 재수 없어.” 투덜거리는 아이. 하지만, 소박한 엿치기에 동무들의 우정은 깊어집니다. 70년대만 해도 곳곳에서 벌어졌던 엿치기. 엿을 동강 낸 다음 엿 속에 난 구멍이 더 커야 이기는 놀입니다. 진 사람은 엿값을 내야만 하지요. 지금은 인사동 또는 민속행사장이나 가야만 볼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컴퓨터가 없던 시절에는 엿치기도 아주 중요한 놀이의 하나였죠. 그런데 엿치기를 하려면 엿값이 있어야 합니다. 용돈이 없던 아이들은 엿장수의 가위질 소리만 들리면 잽싸게 집 뒤꼍에 숨겨뒀던 떨어진 고무신짝이나 구멍 난 양은그릇을 들고 뜁니다. 예전 아이들에겐 엿치기 말고도 자치기, 못치기, 구슬치기 같은 놀이도 있었습니다. 자치기는 긴 막대기로 짧은 막대기를 쳐내는 것이고, 구슬치기는 구슬 하나를 손톱으로 튕겨서 다른 구슬을 맞추는 놀이지요. 지금 돌아보면 참으로 순박한 놀이였습니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 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가슴이 뭉클해지는 이 글은 지난 1998년 4월 안동 이응태 무덤에서 출토된 424년 전 조선시대 원이엄마가 사별한 남편에게 쓴 한글편지 중 일부입니다. 당시 이 편지는 조선판 '사랑과 영혼'이라며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지요. 그런데 지난 21일 국가기록원은 이보다 더 오래된 한글편지를 공개했습니다. 그것은 대전 유성구 안정 나씨(安定羅氏) 무덤에서 미라와 함께 출토된 500여 년 전 조선시대 부부의 애틋한 사랑을 담은 한글 편지였습니다. 국가기록원이 복원한 이 조선시대 한글편지는 지금까지 발견된 한글편지 중에서 가장 이른 때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기존 순천김씨 무덤 출토 한글편지(충북대박물관 소장, 1555년)와 앞에서 예를 든 원이엄마 편지(1586년)보다 앞선 16세기 전반의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입니다. “분(화장품)하고 바늘 여섯을 사서 보내네. 집에 못 다녀가니 이런 민망한 일이 어디에 있을꼬, 울고 가네.” 함경도 경성(鏡城) 군관으로 부임 받
우리 도자기에는 고려청자와, 분청사기, 그리고 조선백자가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분청사기는 무엇을 말할까요? “분청사기(粉靑沙器)”는 고려청자에서 조선백자로 이어지는 중간 시기인 15~16세기에 번성했던 도자기입니다. 분청사기는 청자유약을 바르기 때문에 고려청자의 전통을 이은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분청사기는 굽기 전에 백토를 바른 다음 초벌구이를 한 뒤 청자유약을 발라 본구이를 한다는 것이 고려청자와 다른 점입니다. “분청사기(粉靑沙器)”는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의 준말로 맨 처음 이 이름을 쓴 사람은 한국의 첫 미술사학자인 고유섭 선생입니다. 분청사기 종류를 보면 도장으로 찍어 무늬로 새긴 인화무늬[印花文], 철분이 섞인 물감으로 흑갈색을 띠는 그림이 그려진 철화무늬[鐵畵紋], 백토물에 덤벙 담갔다가 꺼낸다 하여 이름이 붙은 덤벙무늬, 넓고 굵은 붓으로 백토를 발라 무늬를 그린 귀얄무늬 따위가 있습니다. 분청사기의 무늬들은 즉흥적이면서도 세련된 것인데 500년 전에 빚은 도자기라고 하기엔 너무나 현대적이란 평을 듣습니다. 미술사학자 고 최순우 선생은 분청사기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여덟 째 절기인 소만(小滿)입니다. 만(滿)은 햇볕이 풍부하고 만물이 점차 자라 가득 찬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에 “4월이라 초여름 (孟夏, 초여름)되니 입하, 소만 절기로다.”라고 했지요. 소만 무렵에는 모내기 준비에 바빠집니다. 이른 모내기, 가을보리 먼저 베기, 여러 가지 밭작물 김매기가 줄을 잇습니다. 또 이때는 씀바귀 잎을 뜯어 나물을 해먹고, 냉이나물은 없어지고 보리이삭은 익어서 누런색을 띠니 여름의 문턱이 시작되는 계절이지요. 소만 때는 모든 들과 뫼가 푸르며 대나무는 푸른빛을 잃고 누렇게 변하는데 이는 새롭게 태어나는 죽순에 영양분을 모두 주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어린 자식을 정성 들여 키우는 어미의 모습을 보는 듯하지요. 그래서 봄철의 누런 대나무를 가리켜 “죽추(竹秋)”라고 합니다. 또 이 무렵은 “보릿고개”란 말이 있을 정도로 양식이 떨어져 힘겹게 연명하던 때입니다. 입하와 소만 무렵에 행했던 풍속으로는 봉숭아 물들이기가 있는데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4월 조에 보면 “계집애들과 어린애들이 봉숭아를 따다가 백반에 섞어 짓 찧어서 손톱에 물을 들인다.”라는
“추석 연휴가 끝나기 무섭게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9월 15일 전국 곳곳에 사상 초유의 정전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예고 없는 정전사태에 전국이 일대 혼란에 휩싸였고 피해도 속출했다. (생략) 이번 사태의 시초는 전력 사용량의 폭주였다. 9월 15일 오전만 해도 예비전력은 600만㎾로 넉넉했지만 오후 2시 이후 최대 전력수요로 예상했던 6,400만㎾를 320만㎾ 이상 초과하면서 불안한 조짐이 보였다. 오후 3시 무렵 상황이 심각해지자 전력거래소는 예고 없이 순환정전을 실시했고, 전국 곳곳에서 정전사태가 속출했다. 약 5시간 동안 벌어진 동시다발적 정전사태에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위는 2011년 9월 21일 자 기사입니다. 물도 그렇고 전기도 펑펑 써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줄 알았던 시민들은 예고 없는 갑작스러운 정전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지요. 이후 전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절전형 전기제품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전기 절약 시대에 들어선 것입니다. “지금 전기를 절약하지 아니하면 나중에는 아주 없어진다. 필요치 않을 때는 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