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원경(桃源境)”은 “복숭아꽃 피는 아름다운 곳. 곧 속세를 떠난 이상향”을 뜻합니다. 이와 같은 뜻의 말로 “무릉도원”이란 것이 있습니다. “무릉도원(武陵桃源)”은 신선이 살았다는 전설적인 중국의 명승지, 곧 속세를 떠난 별천지를 뜻하지요. 결국, “무릉도원”이란 옛 사람들이 꿈꾸던 아름다운 세상인데 이를 묘사한 그림들이 많습니다. 특히 일본 덴리대학(天理大學) 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조선 초기 화가 안견(1418 ~ 1452)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안견의 “몽유도원도” 못지않은 또 다른 아름다운 그림들이 있습니다. 바로 조선 후기 서화가로 시·서·화에 뛰어나서 '삼절(三絶)'이라 일컬어졌던 임득명(林得明, 1767~?)의 “등고상화(登高賞花)”와 진경산수화로 유명한 정선(鄭敾, 1676~1759)의 “필운대상춘(弼雲臺賞春)”이 그것입니다. 어느 따뜻한 봄날 선비들이 인왕산 남쪽 기슭 필운대에 올랐습니다. 이들은 필운대에서 봄 경치를 마음껏 즐깁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 시에 보면 “도화동 복사꽃 나무 1
“254전이오, 732전이오, 598전이오, 992전이오, 634전이면?” 교실에서 낭랑한 선생님의 호산 목소리가 들리면 이내 학생들은 3,210전이라고 대답합니다. 바로 예전 60~70년대 흔히 보던 교실풍경이지요. 당시는 “주산경시대회”라는 것도 있었고, 상업학교에선 부기와 함께 주산(珠算)이 필수과목이었는데, 은행 직원으로 들어가려면 꼭 배워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가게들에선 손님에게 상품을 판 다음 주판(籌板)으로 계산하곤 했습니다. 또 기억이 나는 것은 주판알이 빡빡해서 잘 안 움직일 때는 쌀 속에 주판을 넣어서 문지르면 쌀겨 덕분에 주판알이 매끄럽게 움직이지요. 그뿐만 아니라 개구쟁이들은 주판을 뒤집어놓고 썰매타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전자계산기가 나오고, 컴퓨터가 보급되면서 주판은 저 멀리 추억의 공간으로 사라졌지요. 그러다 최근엔 주산이 머리 발달에 좋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다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지난 2007년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 일요판이 뽑은 “세상을 바꾼 101가지 발명품”에도 뽑힌 주판은 기원전 3000년 무렵 바빌로
파르라니 봄바람에 가냘프게 핀 너는 / 어찌 그리 자매가 많더냐 / 변산바람꽃 국화바람꽃 꿩바람꽃 들바람꽃 외대바람꽃 숲바람꽃 매화바람꽃 나도바람꽃 / 아니 너도바람꽃이라고? / 이리 오너라 어디 보자 / 흰 옷에 살랑이는 너의 속살 / 뭇 사내의 가슴을 녹일 꽃술 / 한 떨기 아름다운 바람꽃 이어라! -송 원 ‘너도바람꽃’- 겨울을 보내고 숲은 봄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아직 쌀쌀한 꽃샘바람이 붑니다. 저 황량하게만 보이는 숲에 또다시 꽃은 필까요? 그런데 숲으로 들어가면 반갑게도 가장 낮은 곳부터 점점이 뿌려진 하이얀 꽃들이 보입니다. 햇살에 앙증맞게 기지개를 켜는 바로 “너도바람꽃”입니다. 아직 숲은 쌀쌀한데 어찌 이리도 빨리 꽃을 피웠을까요? 어쩌면 너도바람꽃이 피어야만 봄이 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너도바람꽃”은 숲 속 반그늘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고개를 숙여야 보이는 10- 15cm의 키 작은 꽃입니다. 눈
“「돌멘」은 중국 본토 및 남북미주를 제외한 세계 도처에서 발견되며 특히 구라파 각지에 허다하고 우리 인근에서는시베리아 만주 그리고 인도 등지에 발견된다. 유럽인의 전설에 의하면 이것은 태길(太吉)시절에 천사들이 내려와 연회를 하든 자리라 하나 이것은 공상적 전설에 불과하는 것이오. 학술적으로 과연 이것이 무엇인지는 아즉 반다시 해결되지 못한 문제인 모양이다.” 위 내용은 3 ·1운동 이후 천도교를 배경으로 발행된 월간 종합지 신간 제1호(1934년 11월 1일 발행)에 나온 국사학자 손진태의 “朝鮮돌멘(Dolmen)考”란 글입니다. 고인돌에 관해 처음 등장하는 문헌이라 생각됩니다. 고인돌은 현재 전북 고창 일대 447기, 전남 화순 일대 306기, 경기 강화 일대 70기가 세계문화유산이 등록되어 있습니다. 고창 , 화순고인돌은 보존상태가 좋고 분포 밀집도가 높으며, 강화고인돌은 형식이나 분포 위치 등에서 연구할 만한 가치
“그는 이미 순교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준비 정도가 아니고 기꺼이 아니 열렬히 귀중한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싶어 했다. 그는 마침내 영웅의 왕관을 손에 들고는 늠름하게 법정을 떠났다.” 이렇게 영국 그래픽지 찰스모리머 기자는 안중근 공판 기사(1910.4.16)에서 안중근에 대해 영웅의 왕관을 손에 들고 늠름하게 법정을 떠났다고 전합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는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르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이렇게 루쉰옥중에서 최후의 유언(1910.3.9)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
따르르 따르릉....1896년 8월(음력) 26일 인천 감옥소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습니다. 한성-제물포 간 행정전화가 개통된 지 3일째 되던 날이었습니다. 바로 그날은 백범 김구 선생이 명성황후 시해범인 츠치다를 처단한 죄로 사형 집행을 기다리던 시각이었습니다. 이 사형 집행을 연기하게 한 것은 고종황제였는데 이때 전화가 요긴하게 쓰였던 것입니다. 고종황제는 백범의 사형집행 당일에야 그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었고 국모 살해범을 처단한 청년 백범은 영락없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뻔한 지경에 놓였었으므로 아주 긴박한 순간이었습니다. 이때 전화가 가설되지 않았더라면 당시에 상용하던 전보나 사람을 시켜 사형중지를 해야 했으니 하마터면 때를 놓칠 사건이었지요. 이날 고종이 인천감옥소에 직접 전화를 건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시외전화 기록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궁궐과 관청인 아문 사이의 연락용 전화기가 처음 들어온 것은 1882년 청나라에 간 영선사 일행이 2대를 가져온 뒤입니다. 이것은 미국 알렉산더 그레엄 벨이 1876년 전화를 실용화한 지 불과 6년 뒤 일입니다. 나아
오늘은 음력 2월 29일로 2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음력 2월은 중춘(仲春), 중춘(中春), 묘월(卯月), 협종(夾鐘), 여월(如月), 여월(麗月), 화조(花朝), 화조(華朝), 혜풍(惠風), 도월(桃月), 화월(花月), 걸춘(乞春), 반춘(半春) 같은 별명이 있습니다. 2월 농촌에서는 농사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때지요. 그래서 머슴이 썩은 새끼줄을 가지고 뒷산에 목매달아 죽으러 올라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농사가 시작되면 죽을 만큼 고생을 하게 되지만 막상 죽을 수는 없는 심경을 잘 표현하고 있는 농촌속담입니다. 바닷가에서도 2월은 중요한 달로 영등달이라고도 하는데 바닷일은 무엇보다도 바람에 의해서 영향을 크게 받기 때문에 어촌에서는 영등달을 중시하지요. 지방에 따라서는 ‘영동달’, ‘남의달’, ‘너무달’, ‘노무달’, ‘상달’처럼 부르기도 합니다. 특히 영등달에는 지키는 것이 많은데 예를 들면 혼인을 치르지 않고 장례식도 다음으로 미룹니다. 부득이 사람이 죽어 장례를 치를 수밖에 없을 때는 땅을 파지 않고 주검 위에 흙을 덮은 채 두었다가 나중에 장사지내거나
오늘은 24절기의 넷째 춘분(春分)입니다. 이날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해가 진 후에도 얼마간은 빛이 남아 있기 때문에 낮이 좀더 길게 느껴집니다. 춘분 즈음엔 논밭에 뿌릴 씨앗을 골라 씨 뿌릴 준비를 서두르고, 천둥지기 곧 천수답(天水畓)에서는 귀한 물을 받으려고 물꼬를 손질하지요. '천하 사람들이 모두 농사를 시작하는 달'이라는 옛사람들의 말은 이 음력 2월을 이르는 말로, 바로 춘분을 앞뒤로 한 때를 가리킵니다. 옛말에 ‘춘분 즈음에 하루 논밭을 갈지 않으면 일년 내내 배가 고프다.’ 하였습니다. 춘분은 겨우내 밥을 두 끼만 먹던 것을 세 끼를 먹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지금이야 끼니 걱정을 덜고 살지만 먹거리가 모자라던 예전엔 아침과 저녁 두 번의 식사가 고작이었지요. 그 흔적으로 “점심(點心)”이란 아침에서 저녁에 이르기까지의 중간에 먹는 간단한 다과류를 말하는 것입니다. 곧 허기가 져 정신이 흐트러졌을 때 마음(心)에 점(點)을 찍듯이 그야말로 가볍게 먹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겨레가 점심을 먹게 된 것은 고려시대부터라 하지만, 왕실이나 부자들을 빼면 백성은 하루 두끼가 고작이었습니다. 보통은 9월부터 이듬해 정월까지는 아침저녁
조선의 3대 통감이자 초대 총독이었던 데라우치(寺內正毅,1852-1919)는 동양 3국의 고문헌 18,000여 점을 끌어모아 고향인 야마구치에 가져갔다. 그가 죽자 아들 수일(壽一)이 그 장서를 모아 1922년 고향인 야마구치시에 데라우치문고를 설립하게 된다. 부자로 이어지는 문화재 약탈의 전승이다. 데라우치가 조선관련 문화재를 끌어모으기 시작한 것은 조선총독 취임 때부터이다. 그의 곁에는 책 전문가인 고도소헤이(工藤壯平,1880-1957)가 항상 곁에 있었는데 데라우치는 그를 조선총독부 내대신비서관(內大臣秘書官) 등의 자리를 주어 고서묵적(古書墨蹟)을 조사한다는 핑계로 규장각 등의 고문헌을 마음대로 주무르게 했다. 군인 출신의 무식한 데라우치를 도와 고도소헤이는 값나가는 유구한 고서들을 데라우치 손에 넘겨주었다. 지금 야마구치현립대학 도서관에 있는 데라우치문고 (1957년에 데라우치문고는 야마구치현립여자단기대학에 기증했다가 현재는 야마구치현립대학 부속도서관 소속으로 바뀌었다)는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다. 양심 있는 일본시민들이 만든 동경의 고려박물관에서 펴낸
경주 탑정동 영묘사터에서 출토되어 “신라인의 미소”로 알려진 “얼굴무늬 수막새”를 모르는 분은 별로 없습니다. “눈가에 주름이 지고, 입 언저리 양끝이 살짝 올라간 모습, 두툼한 볼은 당시 신라인의 온화하고 여유로운 삶을 느끼기에 충분하다.”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만 그렇다면 백제인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부여 관북리 백제 왕궁터로 추정되는 유적에서 발견된 “사람얼굴무늬토기조각[人面文土器片]”을 보면 검은색 표면에 사람얼굴무늬가 연속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현재 깨진 조각만 남아 있어 전체를 알기 어렵지만, 눈코입 따위가 섬세하게 그려진 얼굴무늬가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어 관심을 끕니다. 이 토기조각의 얼굴을 살펴보면 약간 처진 눈에 두툼한 입술을 하고 시름에 잠긴 듯한 표정을 하고 있으며 수염이 표현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의 장년 남성 모습일 것이라고 합니다. 관북리에서 출토된 얼굴무늬토기조각은 백제 불상과 부여 구아리에서 나온 흙으로 만든 인물의 머리부분, 도깨비 얼굴모양 꾸미개와 함께 백제인의 모습을 짐작게 해주는 유물이지요. 문화예술이 크게 발전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