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사신을 대하여 주인으로서 한 모금도 능히 마실 수 없다면 어찌 손님을 권하여서 그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겠느냐? 충녕은 비록 술을 잘 마시지 못하나, 적당히 마시고 그친다. 또 그 아들 가운데 장대(壯大)한 놈이 있다. 효령대군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니, 이것도 또한 불가(不可)하다. 충녕대군이 대위(大位, 매우 높은 관직)를 맡을 만하니, 나는 충녕으로서 세자를 정하겠다.” 위 내용은 태종실록 18년(1418) 6월 3일 자 기록입니다. 태종이 말하길 “충녕대군(뒤에 세종)은 술을 마시되 적당히 마시고 그친다.(適中而止)”라면서 그 때문에 세자로 정한다고 말합니다. 태종은 술을 마시지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지나쳐서도 안 된다면서 ‘적중이지’를 강조하고 있지요. 또 세종은 어전회의에서 신하들에게 이야기하도록 한 다음 끼어들고 싶은 유혹을 참고 기다렸다가 신하들이 충분히 얘기하면 그 가운데 가장 좋은 의견이다 싶은 말에 힘을 실어줍니다. 세종은 이렇게 술만이 아닌 매사에 적중이지를 실천하는 임금이었습니다. 바로 “적중이지”는 “중용(中庸)”과 통하는 말로
절벽은 천 길 깎아지르고 폭포는 거기 걸렸으니 / 壁立斷崖千飛流懸 마치 은하수가 푸른 하늘에서 오는 것 같도다 / 有如銀漢來靑天 창공을 울리는 음향, 용의 읊조림을 듣는 듯 / 隱空似聽水龍吟 진주 찧고 옥 부숴 쏴쏴 만 길 높이로다 / 珠玉碎兮萬尋 용은 보물을 품고 그 못에 누웠는지 / 龍應抱寶潛其淵 음침한 골짜기는 낮에도 항상 구름이요 연기로다 / 陰壑白日常雲煙 위는 동문선 제7권 "박연폭포행"에 나오는 시 일부인데 셋째 단락 끝 부분에 보면 “수룡음(水龍吟)”이란 말이 나옵니다. 말뜻대로라면 용이 물속에서 읊조린다는 뜻이지요. 용이 어떻게 읊조릴까요? 흔히 '수룡음'은 '생소병주‘ 곧 생황(笙簧)과 단소(短簫)가 함께하는 음악인데 참 맑고 청아한 소리가 납니다. 태종실록 2년(1402년) 6월 5일자에 보면 예조에서 궁중 의례 때 쓰는 음악 10곡을 올리는데 '수룡음'은 셋째에 속하는 음악입니다. 그러면서 10곡을 고른 까닭을 말합니다. “신 등이 삼가 고전(古典)을 돌아보건대, ‘음(音)을 살펴서 악(樂)을 알고, 악(樂)을 살펴서 정사(政事)를 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악(樂)을 합하여 하늘의 신령과 땅의 신령에 이르게 하며 나라를 화합하게 한
키는 탈곡이 완전히 기계화되기 전까지 농가에선 없어서 안 되는 도구였습니다. 곡물을 털어내는 탈곡 과정에서 곡물과 함께 겉껍질, 흙, 돌멩이, 검부러기들이 섞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키로 곡물을 까불러서 이물질을 없앴지요. 키는 지방에 따라서 ‘칭이’, ‘챙이’, ‘푸는체’로도 부르는데 앞은 넓고 편평하고 뒤는 좁고 우굿하게 고리버들이나 대쪽 같은 것으로 결어 만들지요. "키" 하면 50대 이상 사람들은 오줌싼 뒤 키를 뒤집어쓰고 이웃집에 소금 얻으러 가던 물건쯤으로 기억하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키를 쓰고 간 아이에게 이웃 아주머니는 소금을 냅다 뿌려댑니다. 그리곤 “다시는 오줌을 싸지 마라.”고 소리지르는데 그렇게 놀래키면 오줌을 싸지 않는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또 싸는 아이들이 있었던 것을 보면 이 방법이 그리 신통하지는 않았던 듯합니다. 경상남도 지방에서는 정초에 처음 서는 장에 가서는 키를 사지 않는데 키는 까부는 연장이므로 복이 달아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모르고 사온 경우라도 집안어른이 부수어버립니다. 또 제주도에서는 섣달 그믐날 키점(箕占)을 칩니다. 부엌을 깨끗이 치우고 키를 엎어두었다가 새해 아침에 그 자리를 살펴봅니다. 쌀알
그래 그 컵이었어 / 색도 어쩌면 꼭 그런 색이었는지 / 노랗든지 밤색이든지 아니면 흰색이든지 / 이것저것 반반씩 섞다 만 색 / 오! 그 얄궂은 컵들이 / 어미닭 주변에 병아리 모이듯 / 누런 주전자 곁에 / 꼭 그렇게 모여 있었어. -그 컵이 있던 자리 ‘이고야’- 흑판 옆에는 어느 반에나 똑같은 크기의 나무탁자가 놓여 있고 그 위에는 손으로 짠 촌스런 테이블보가 삐딱하게 덮여 있었습니다. 찌그러진 양은 쟁반이 그 위에 놓여 있었고 그리고 다시 그 위에는 빛바랜 누런 주전자와 그 얄궂은 컵이 있었지요. 그것이 60~70년대 학생들의 교실이었습니다. “박학규 선생은 일본대학 고등사범 지력과(地歷科)를 마추신 이로, 지금 지리, 조선어, 습자를 가르치시고 이선호(李善浩) 선생은 경성고등상업을 마치시고 부기, 상산(商算), 기하를 가르치시고, 박인호 선생은 동경여자고등상업학교를 마추시고 주산, 타자를 가르치시고….” 삼천리 제10권 제5호 (1938.5.1)에는 인왕산 서쪽 비탈에 자리 잡은 경성여자상업학교를 찾아간 기자가 학교를 소개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컴퓨터가 나
조선 백자에서 병(甁)은 기본적으로 술병입니다. 그 술병 가운데 제사를 지내려는 제주병(祭酒甁)은 순백자를 사용했지만 잔치용 술병에는 갖가지 무늬를 그려 넣었습니다. 아무래도 그래야 술맛이 났던 모양입니다. 술병에 그리는 그림으로는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꽃과 십장생, 매화와 난초가 많지요. 그림 대신 목숨 ‘수(壽)’, 복 ‘복(福)’, 술 ‘주(酒)’ 자처럼 글자 한 자만 쓴 것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기발하게도 병목에 질끈 동여맨 끈을 무늬로 그려 넣은 보물 제1060호 “백자철화끈무늬병[白瓷鐵畵繩文甁]”이 있지요. 이는 옛날 술병을 사용할 때 병목에 끈을 동여매 걸어놓곤 했던 것을 무늬로 표현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 병을 빚은 도공은 술을 마시다 남으면 술병을 허리춤에 차고 가라는 뜻으로 그림을 그려넣었을지도 모릅니다. 그야말로 도공의 기막힌 재치와 해학 그리고 익살과 여유가 살아있는 명작입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영남대 교수 시절, 시험문제로 한국미를 대표하는 도자기 한 점을 고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인문대생은 달항아리를, 미대생은 백자철화끈무늬병을 많이 골랐다고 합니다. 그만큼 이 백자철화끈무늬병은 보물 제1437호 “달항아리”와 함께
지금에 견주면 난방이 시원찮았던 조선시대 선비들은 어떻게 겨울을 났을까요? 누비옷을 입고 방안에 화로를 두는 정도였을 겨울나기에 “구구소한도”라는 것도 한몫을 했다고 합니다. 이 구구소한도는 동지가 되면 종이에 9개의 칸을 그려놓고 한 칸에 9개씩 81개의 매화을 그린 다음 하루에 하나씩 매화에 붉은빛을 칠해나가게 한 것을 이릅니다. 그런데 붉은빛을 칠해가는 방법을 보면 흐린 날은 매화 위쪽을, 맑은 날은 아래쪽을, 바람 부는 날에는 왼쪽을, 비가 오는 날에는 오른쪽을, 눈이 오는 날에는 한가운데를 칠하지요. 그렇게 하여 81일이 지나면 모두 81개의 홍매화가 생기고 그러면 봄이 온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또 다른 구구소한도는 9개의 꽃잎이 달린 매화 9개를 그려놓은 것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한 자에 9획으로 된 글자 9개를 써서 모두 81획을 만든 것도 있지요. 이렇게 선비들은 자기 마음에 드는 방법으로 홍매화를 만들어가거나 글자를 써나가 81일이 되는 날 봄이 왔다고 반겼던 것입니다. 중국에서 전해오는 글에 따르면 “첫 아홉 날과 두 번째 아홉 날은 손을 밖으로
“구황염(救荒鹽)과 군자(軍資)에 보충(補充)하는 소금은 다릅니다. 가령 군자(軍資)를 보충하는 소금을 가지고 백성을 진휼(賑恤)하게 되면 그 수량(數量)이 많지 않아서 많은 백성이 골고루 혜택받기가 어렵고, 혹 값을 깎아주거나 받지 않는다면 국고가 점차 줄어질 것이니, 옛날과 같이 곡식과 베로 바꾸어 군자(軍資)를 보충하게 하소서.” 이는 성종실록 25년(1494) 1월 3일 자 기록입니다. 나라에서 소금을 관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자료입니다. 소금은 동물이나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물질로 특히 몸속의 소금(나트륨)균형이 깨지면 생명이 위태롭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전엔 소금을 주고 노예를 샀으며, 소금을 얻으려고 가난한 사람들이 자기 딸을 판 예도 있지요. 소금을 생산하는 소금밭(염전,鹽田)은 해와 바람 같은 자연의 힘을 이용하여 바닷물을 증발ㆍ농축하는 시설로 이 소금밭도 시대에 따른 변화가 있었습니다. 1955년 이전에는 “토판(土版)”이라 하여 염전 바닥이 그저 흙으로 되어 있어서 소금에 갯벌이 섞여 검은색을 띠게 됩니다. 여기서 나오는 소금을 토판염이라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스물셋째인 소한(小寒)으로 한겨울 추위 가운데 혹독하기로 소문난 날입니다. 이 추운 겨울을 어떻게 나야 할까요? 동의보감에 보면 “겨울철 석 달은 물이 얼고 땅이 갈라지며 양(陽)이 움직이지 못한다. 일찍 잠자리에 들고 해가 뜬 뒤에 일어나야 한다.”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많은 동물이 겨울에 겨울잠을 자듯 사람도 활동을 줄이고 잠자는 시간을 늘리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현대인들이 겨울이라 해서 활동을 줄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대신 햇볕을 가까이하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동지가 지나면 해가 길어지듯이 사람 몸 안의 양기운도 점점 움트기 시작하는데 이때 양기가 찬 기운을 이기지 못하면 호흡기에 병이 생기기 쉽다고 하지요. 그래서 이를 보완해주려면 햇볕을 쐬어주어야 합니다. 또 혈자리에 뜸을 떠 몸속으로 따뜻함이 들어가 기의 순환을 원활하게 해주는 것도 좋습니다. 햇볕 말고도 겨울나기에 도움이 되는 것은 한방차와 신맛이 나는 과일입니다. 한방에서 ‘총백’이라고 부르는 ‘파뿌리’를 물에 넣고 끓여 마시면 땀을 내주고 기침, 가래를 삭여주며, 항균 작용도 있어 평소 자주 마시면 감기 예방에 좋다고 하지요. 그밖에 비타민 C가 많은 유자나 단백
성종 때 세도가 한명회의 6촌형이며 조선 전기 문신인 한계희(韓繼禧)는 그 누구보다도 청렴한 선비였습니다. 대대로 덕을 쌓았고 얼마든지 부유하게 지낼 수 있었지만 나라에서 받는 봉록을 친척 가운데 부모 없는 사람이나 홀어미가 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근근이 살았지요. 또 집안이 가난하여 아침저녁을 나물에다 검소한 음식으로 지냈는데 그도 과분하다 하여 양과 횟수를 줄였습니다. 어느 날 한명회의 집에서 문중 모임을 할 때 한계희의 가난함에 이야기가 미치자 모두 공론 끝에 동대문 밖 고암(鼓岩) 밑에 있는 논 열섬지기를 주기로 했지요. 이에 한계희가 사양하자 한명회와 이를 주선한 사람들이 소리를 모아 호소하며 자리를 뜨지 않음에 어쩔 수 없이 논을 받았습니다. 대신 한계희는 그 논에서 거둔 곡식을 절대 집 담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고암 둘레에 사는 어려운 집, 가장이 병든 집에 골고루 나눠주었지요. 이를 기리는 뜻에서 고암이란 이름은 편안할 안 자로 바꿔 안암(安岩)이 되었습니다. 참고로 조선 전기 문신 김정국(金正國)이 말한 청빈관을 들어보면 “없을 수 없는 것은 오
전라남도 담양군 고서면 산덕리에는 조선 중기 문신 오희도가 살던 집의 정원 명옥헌이 있습니다. 흐르는 물소리가 옥구슬이 부딪쳐 나는 소리와 같다고 여겨 명옥헌(鳴玉軒)이라 했다지요. 명옥헌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정자인데 그 동쪽에는 작은 내가 흐르고 있으며 이 물을 끌어들여 연못을 꾸며 놓았습니다. 연못은 세상이 네모나다는 옛 사람들의 생각대로 네모나게 만들었는데 가운데에는 자연석으로 된 섬이 있지요. 또 연못 주위에는 한여름 붉은 꽃이 아름답게 피는 배롱나무가 있으며 오른편에는 소나무 군락이 있어 그 운치를 더합니다. 명옥헌이 있는 이 정원은 오희도(吳希道,1583~1623)가 광해군 치하의 어지러운 세상에서 피하여 조용히 지내려고 옮겨와 살게 되면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는 집 옆에 ‘망재(忘齋)’라는 조그마한 서재를 짓고 틈틈이 자연을 즐겼지요. 그가 세상을 뜬 뒤 그의 아들 오이정(吳以井)이 아버지가 평소 자연을 즐기던 이곳에 터를 잡아 명옥헌을 짓고, 아래위에 못을 파 꽃나무를 심어 가꾼 것이 오늘날 전하는 명옥헌 정원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땅 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