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얼마 전, 중국 연변예술대학에서 열린 한ㆍ중 학술 및 실연 교류회에 37명의 회원과 함께 참가하였다. 국악속풀이 이번 주에는 올해로 13회를 맞게 된 한ㆍ중 실연교류회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 볼까 한다. 한ㆍ중 학술 및 실연 교류회는 필자가 회장으로 있는 한국의 전통음악학회와 공동으로 주최하고 있는 연중행사이다. 말 그대로 한국의 전통음악과 중국 연변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는 조선족 음악에 대한 학술적인 강연과 토론을 통해서 학문적 교류를 하고 그리고 겸해서 양쪽에서 연행되고 있는 전통음악의 실연을 통하여 상호 이해의 폭을 넓히는 연구모임이다. 이 교류행사는 2000년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나 최초의 시작은 지금으로부터 21년 전 1990년 7월에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한국과 중국의 수교가 체결되기 직전, 필자는 국내 저명 국악인 20여 명과 함께 처음으로 연변 예술학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중국은 죽(竹)의 장막이어서 조선족 음악에 대한 정보는 접할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조선족들이 어떤 악기로 어떤 노래를 부르며 지내는지? 또한, 어떤 음악인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더욱이 민족음악을 지도하고 있는 대학이 있는지? 있다면 교육체계는 어떠한
벗 물결은 어디 가나 믿고장 닿을 것을 그대는 바람인양 하늘땅 헤매느나 동강난 우리 믿나라 뜻 못이룬 사내어니 젊은 벗이 밥통 앓이가 깊어 그만 숨졌다. 누린 나이 서른여덟이었다. 사람에게는 다 박힌 나이가 있다고 하나 그 틀은 쇠로 된 것이 아니라 고무 같은 것이니 스스로 늘일 수 있다고도 한다.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지 말고 내던지지 말고 때로는 악물고 살아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살아야 할 것이 아닐까?
추사 김정희의 국보 제180호 세한도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간결하게 그리고는 “날씨가 차가워진 후에야 송백의 푸름을 안다.”라는 발문을 붙였지요. 소나무는 이렇게 한겨울 눈이 쌓이 뒤에야 그 진가를 뽐냅니다. 그런데 여기 순수하게 소나무만 그린 이인상의 설송도(雪松圖)가 있습니다. 이인상은 조선 후기의 서화가인데 이 작품은 바위 위로 솟아오른 눈 덮인 낙락장송의 당당한 모습을 그린 것이지요. 바위를 뚫고 곧게 뻗은 굵직한 소나무와 오른쪽으로 급하게 휘어진 아무런 꾸밈 없는 두 그루의 소나무로 화폭을 가득 채웠습니다. 사람의 감정이라곤 눈곱만큼도 끼어들 여지가 없는 소나무 그 자체로 온전한 모습입니다. 더구나 이 소나무들은 예리하게 각이 진 바위들만 있고 흙 한 줌 보이지 않는 비참하리만큼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강인한 의지로 뿌리를 땅에 굳게 박고 있지요. 조선소나무는 이렇게 곧게 뻗은 금강송이 있는 가 하면 구부정 하지만 운치가 있는 소나무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 더 옳고 그르다기 보다는 곧은 것도 굽은 것도 함께 어우러진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이 그림을 그린 이인상은
서울 종로구 사직동 1-28 곧 광화문에서 사직터널 들어가기 300m 전쯤에는 사직공원이 있고 그 안에 사직단(社稷壇)이 있습니다. 사직단은 조선시대 땅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지요. 농사가 나라의 바탕이었던 예전엔 농사를 관장한다고 믿었던 땅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태조는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면서 고려의 제도를 따라 1395년(태조4)에 경복궁 동쪽에는 종묘를, 서쪽에는 사직단을 설치하였지요. 사직단은 홍살문이 설치된 두 겹의 담장으로 사방이 둘러싸여 있는데 동쪽에는 사단, 서쪽에는 직단이 있습니다. 두 단의 모양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의 원리에 따라 한 변이 7.65m인 정 사각형이고 높이는 약 1m입니다. 사직단에서는 1년에 네 차례의 대사(大祀)와 선농(先農)·선잠(先蠶)·우단(雩壇)을 제사지내는 중사(中祀), 그 밖에 나라에서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는 기곡제(祈穀祭)와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기도 하였지요. 그러나 1911년 일제가 조선의 기운을 끊으려고
“어머님은 그런대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만 간혹 앞뒤가 안 맞을 때도 있을 겁니다.” 자신이 모셔야 하는데 여의치가 않아 요양원에 계신 어머님이 안스러운듯 독립운동가 이병희 여사의 며느님은 상냥한 목소리로 어머님의 여러 근황을 알려주었고 약도 대로 요양원을 향하는 마음은 설렘과 동시에 건강상태 걱정이 앞섰습니다. 이 시대의 여성독립운동가 중 몇 안 되는 생존자이신 이병희 애국지사를 만나러 부평 갈산동에 있는 에 찾아가던 날은 막바지 장맛비가 쏟아져 우산을 써도 바짓가랑이가 젖을 만큼 퍼부어대던 날이었습니다. ‘사랑은 마주 보며 이루어진다.’라는 예쁜 이름의 ‘사랑마루’ 요양원 4층 창가 침대에서 글쓴이를 반갑게 맞이하는 이 여사는 바람이 불면 날아가 버릴 듯 몸이 많이 수척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정신만은 새벽녘 맑은 별처럼 또렷했습니다. 할머니는 글쓴이가 내민 명함의 작은 글씨를 한자도 틀리지 않고 또렷하게 읽어 내려가면서 ‘돋보기 없이 글을 읽는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1918년생이며 올해로 95살이라는 것과 칠십여 년 전의 항일독립운동 이야기를 또랑또
토란 밭에서 웃자란 토란잎을 따줬다 / 무성한 잎들이 가을 나뭇잎 떨어지듯 떨어져 갔다 / 굵은 알이 들도록 웃자란 잎들은 / 어쩔 수 없이 처리해야 했다 / 열매를 먹든지 줄기를 먹든지 / 어느 하나만을 잡아야 / 실한 놈을 건진다는 사실을 / 토란 밭을 매며 다시 배웠다 - 김옥광 ‘토란 밭에서’- ‘알토란 같다’라는 말로도 쓰이는 토란(土卵)은 살짝 데쳐 껍질을 벗기면 정말 찐 달걀 모양으로 앙증맞습니다. 토란은 다 자라면 키가 보통 80~120cm인데 토란 밭에 서면 토란이 가슴에 닿을 만큼 키가 크며 잎은 두툼한 게 넓은 방패 모양인데 어떤 것은 우산으로 써도 될 만큼 큼지막하지요. 토란은 뿌리와 줄기를 먹으며 열대 아시아가 원산지로 고려 때 펴낸 《동국이상국집》에 “시골 국은 토란을 삶았고(村羹烹土卵), 손의 밥상에는 나물이 풍족하구나(客俎厭山膚)”라는 글이 보일 정도로 우리나라에서는 오래전부터 먹어 오던 식물입니다. 땅토란, 우자(芋子), 타로감자, 토련(土蓮), 토지(土芝) 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토란의 주성분은 당질, 단백질이지만 다른 뿌리작물에 비해
가곡 이야기를 하다가 잠시 시조 이야기로 흘렀다. 향제시조의 한 갈래인 충청 지방의 내포제시조이야기도 했고, 이어서 시조에 명창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를 설명하면서 시조의 일반적 이야기도 잠시 하였다. 이번 주에는 가곡, 시조와 함께 정가(正歌)에 포함시키고 있는 가사(歌詞)이야기를 잠시 해 보기로 한다. 남창 가곡의 예능보유자인 김경배 명인의 아호가 소하(韶荷)이다. 그가 이번에 가곡이 아닌 12가사 전곡을 한 장 음반으로 담아냈다고 해서 화제가 되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축하의 의미를 담아 축사를 보내면서 그 일부를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지금은 서초구 우면동에 자리 잡고 있는 국립국악원이 1950~60년대 말까지는 종로구 운니동 비원 앞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니까 1960년대 말, 지금의 국립극장이 서 있는 장충동 남산 중턱으로 옮겨가기 전까지가 운니동 시대이다. 이 당시 국립국악원은 일반 시민들을 위한 월례국악강습회를 10~15일간 치른 다음, 반드시 국악감상회를 원내의 작은 공연장에서 열곤 하였는데, 그 공연장의 이름이 바로 춤일(佾), 풍류소(韶)의
. 다 살아 몸 곪아도 다 늙어 몽당돼도 마음은 오직 하나 믿나라 풀흙돼료 남 땅에 몸을 세워도 아리랑 뼈 되잔다. 제 뜻이든 아니든 남나라에 오래 머물어 살면 외로움을 견디면서 얼을 지키고 사는가 아니면 남나라에 파묻혀 살면서 그 나라 사람이 되는가 하는 두 길밖에 없다. 재일동포는 다는 아니라도 많은 사람이 왜정 때 총칼힘으로 끌려 온 신세이니 참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그래서 적지 않은 사람이 귀화하여 '신 일본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환경 속에서도 민족의 얼을 꿋꿋이 지킨 사람들이 우리 말과 거룩한 한글을 지키면서 살았고 살고 있다.
오늘은 잡절의 하나인 초복(初伏)으로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는 때입니다. 1614년(광해군 6년) 이수광이 펴낸 한국 최초의 백과사전 ≪지봉유설≫에 보면 복날을 “양기에 눌려 음기가 바닥에 엎드려 있는 날로 사람들이 더위에 지쳐 있을 때”라고 하였습니다. '오행설'에 따르면 여름철은 '화'의 기운, 가을철은 '금'의 기운인데 가을의 '금' 기운이 땅으로 나오려다가 아직 '화'의 기운이 강렬하므로 일어서지 못하고, 엎드려 복종하는 때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엎드릴 '복(伏)' 자를 써서 '초복, 중복, 말복'이라고 합니다. 또, 최남선의 ≪조선상식≫에는 ‘서기제복'이라는 하여 복날을 더위 꺾는 날이라고도 풀이합니다. 흔히 복날은 삼계탕 등 뜨거운 음식을 먹는데 이를 ‘이열치열(以熱治熱)’이라하지요. 예부터 더울때 뜨거운 것을 먹는 것은 다 그 까닭이 있습니다. 여름이 되면 사람 몸은 외부의 높은 기온 때문에 체온이 올라가는 것을 막으려고 피부 근처에 다른 계절보다 20~30% 많은 양의 피가 모이게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위장을 비롯하여 여러 장기는 피가 모자라게 되고
“참외라는 이름에서 ‘참’의 의미는 / 그 이치를 내 따져 알 수 있다네 / 짧은 놈은 당종(唐種)이라 부르고 / 긴 놈은 물통이라 부른다지 / 베어놓으면 금빛 씨가 흩어지고 / 깎아놓으면 살이 꿀처럼 달지 / 품격이 전부 이와 같으니 / 서쪽 오이란 말과 한가지라네” 허균의 《도문대작(屠門大嚼)》에는 “의주(義州)에서 나는 것이 좋다. 작으면서도 씨가 적은데 매우 달다.”라고만 나오는데 견주어 위의 시에서는 참외 묘사가 자세합니다. 위 시는“참외[眞瓜]”라는 시로 지은이는 조선중기의 이응희(1579-1651)인데 그의 시는 어찌나 토속적이고 소박한지 한 편의 풍속화 같다는 평을 듣습니다. 참외는 《고려도경(高麗圖經)》에 그 이름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부터 참외를 즐겨 먹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일제강점기에 나오던 《별건곤(別乾坤)》이라는 잡지에는 알록달록한 개구리참외, 겉이 노란 꾀꼬리참외, 색깔이 검은 먹통참외, 속이 빨간 감참외, 모양이 길쭉한 술통참외, 배꼽이 쑥 나온 배꼽참외, 유난히 둥그런 수박참외가 소개돼 다양한 종류의 참외가 있었음을 알게 해줍니다. 그밖에 쥐똥참외라는 것도 있었는데 맛이 없어 아이들이 장난감으로만 갖고 놀았다고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