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조선조 2대 정종 2년인 1400년 3월 15일, 임금은 권근(權近)을 정당 문학(政堂文學) 겸 대사헌(大司憲)으로 발령을 내었다. 나흘 후인 3월 19일 대사헌 권근(權近·1352∼1409)은 경연(經筵)에서 임금에게 “신이 본래 혼미하고 우직하며, 젊었을 때 일을 경험하지 못하여 관리들의 이치(吏治)에 서투릅니다. 전하께서 신을 비루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외람하게 사번부(憲司)의 장이 되게 하시니, 진실로 황공하고 진실로 기쁘나, 중외에 웃음을 남길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도 한 가지 얻는 것이 있으니, 어찌 올릴 사항(事項)이 없겠습니까? 원하건대, 전하께서 관대히 굽어 실피셔서, 혹시 올리는 말이 이치에 해롭지 않거든 특별히 유윤(兪允)을 내려 주소서.”라고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보름 후인 4월 5일에 봄 가뭄이 심해지자 임슴에게 말하기를 “금년에 봄이 가무니, 벼나 곡식들이 풍성하지 못할 징조인가 두렵습니다. 신이 언관(言官)으로서 감히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근심하고 두렵게 생각하여, 다시 금주령을 내려 나라의 비용을 절약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라 금주령을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모든 식물은 다 나름대로 이름이 있는데, ‘이름 없는 풀’이라고 한다면 그 풀에 대한 모독입니다” 이런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다. 그래 나에게도 이름이 없고 "어이 거기 이름 없는 사람?"하고 부르면 "왜 멀쩡한 남의 이름을 놔두고 그렇게 부르는거야?"라며 짜증이 날 것이다. 우리 주위에 있는 그 많은 아름다운 꽃이나 나무들 이름, 우리는 과연 얼마나 알고, 얼마나 불러 주고 있을까? 이런 의문이 든 것은 십 년도 더 전인 2009년, 부산에 있을 때 일간신문에서 이런 글을 본 이후였다. "와! 신갈나무, 너 참 튼튼하게 생겼구나, 얼레지 오랜만에 만나네. 기린초가 있는 것을 보니 붉은점모시나비도 찾아오려나?" 이름을 안다는 것은, 숲을 이루고 있는 구성원들을 비로소 하나하나 구분하여 알아본다는 의미이며, 식물과의 인연의 시작을 말한다. 시인의 말처럼 그가 내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비로소 꽃이 되었듯이 우리가 이 나무들을, 풀들을 불러 주었을 때 그들은 의미가 되고 의도가 되며, 행복과 지혜를 건네기도 하는 그 무엇이 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지금까지 몰랐던, 눈부시게 아름답고 새로운 세상을 다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며칠 전 하지가 지났다. 벌써 지난 것이다. 새해를 맞아 우리들의 마음에 희망을 채우면서 이제는 코로나 사태가 풀리겠지 하다가 안 되어 백신만 기다리며 매일매일을 보냈는데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하지가 지나고 한해의 절반도 지나간 것이구나.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라고 버트란드 러셀이 묘비명에 새긴 것으로 전해졌는데, 원뜻은 그게 아니라고 하지만 원뜻과 상관없이 이 말 그대로 어여부영하다가 어느새 하지(夏至)를 그냥 보내버린 셈이다. 하지를 지난 만큼 이제 낮이 줄어들고 밤이 길어지고 있는데, 요즘엔 그냥 하루가 지난 것이지만 옛날에는 이런 하지나 동지에 대해 꽤나 신경을 썼던 것 같다. 천문을 살피고 기상 변화를 기록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치세(治世)의 기본이지만, 기상 변화를 미리 예측하기 어려웠던 고대에 나라에서 정월에 관대(觀臺)에 올라 하늘을 보고 음양의 기운, 사시사철의 흐름을 살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24절기 중에 어떤 때는 분(分)이고 어떤 때는 지(至)인가? 이런 천지와 음양의 변화를 옛사람들은 ‘분지계폐(分至啓閉)’라는 개념으로 파악했다고 한다. 춘분과 추분은 봄과 가을이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중국의 5세기 초, 이른바 남북조 시대에 대륙 남쪽에는 송(宋)나라가 있었다. 당(唐) 이후 들어선 송(宋)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흔히 유송(劉宋)이라고 부르는 이 나라에 단도제(檀道濟, ?~436년)라는 뛰어난 장군이 있었다. 흔히 “도망가는 것이 제일 좋은 책략이다”라는 36계의 저자로도 알려진 이 장군은 군을 잘 통솔하며 국정도 잘 이끌어 북쪽에 있는 위(魏)나라도 어쩌지 못했는데, 혼자 너무 잘나간다고 시기한 송나라의 권신과 왕족들이 왕명이라고 속여 궁으로 부르자, 그 부인이 이상한 일이라며 들어가지 말라고 했지만, 단도제는 왕명을 듣지 않을 수 없다고 들어갔다가 살해되었다. 장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 그는 머리에 쓰고 있던 건을 내동댕이치며 “어찌 너희들이 만리장성을 스스로 허문단 말이냐(壞汝萬里長城)!”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북쪽의 위나라 사람들은 “이제 두려운 사람은 하나도 없다.”라고 하며 수시로 강을 건너 남쪽을 침범하였다. 1623년 3월 12일(음력) 김류, 김자점 등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대북을 몰아내고 능양군을 옹립해 집권한 것이 인조반정인데, 서울에서 왕을 바꾸는 데 성공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올봄처럼 비가 자주 온 해도 없었을 것이다. 아침에 창문을 열면 어김없이 밤새 비가 온 흔적이 역력하고 낮이 되어서 잠깐 해가 나다가 밤이 되면 다시 어느새 빗방울이 뿌리는 날씨가 아마도 5월 한 달 내내 이어진 것 같고, 6월 들어 좀 바뀔까 해도 역시 또 그런 날씨가 이어진다. 그러다 보니 정작 가장 좋은 봄의 핵심인 5월을, 그러지 않아도 코로나19인지 뭐 때문에 출입과 사람 만나는 것이 제약을 받은 상황에서, 정말 가족, 친지, 친구들과 마음껏 회포도 풀지 못하고 이 좋은 봄을 그대로 보낸 것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 봄을 보낸 이유가 우리와는 다르다 해도 봄을 덧없이 보내는 데 대한 후회나 아쉬움은 고금이 같은 것일까? 고려 최대의 시인인 이규보(李奎報, 1168 ~ 1241)도 '봄을 보내며(送春)'라는 시에서 비슷한 감상을 남겼다(동국이상국후집 제3권 / 고율시(古律詩) 春去去能不悲 봄이 가려 하니 슬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 非爾負吾吾負爾 네가 날 저버렸나 아니 내가 널 저버렸네 適我病中遭汝來 마침 병중에 너를 맞아서 未肯對花成一醉 꽃을 대해 한 번쯤 취해 보지도 못하였네 그래서 내년에 올 때는 늙은 것은 가져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사랑하던 소년 아도니스가 산돼지에 물려 죽었을 때, 아도니스를 살리려 아프로디테가 급히 달려오다가 가시에 찔렸는데, 그 피가 흰 장미에 떨어져서 붉은 장미가 되었다는 그리스의 신화가 생각난다. 아파트 담장에 피어난 장미들의 붉은 색이 정말로 아프로디테의 심장에서 흐른 뜨거운 피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6월이다. 6월은 장미의 계절이다. 요즈음 서울 등 대도시에서 장미를 자주 많이도 보게 되는데, 잘 가꿔진 정원에 따로따로 심은 장미가 아니라 담장을 타고, 울타리를 타고 줄기가 끝없이 뻗어가는 넝쿨장미(rambling rose)다. 우리가 어릴 때는 찔레꽃은 어디에나 많이 피었지만, 장미꽃은 보기가 쉽지 않아, 이 장미가 유럽에서 온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는데, 울산에 사는 향토사연구가인 이양훈 씨가 이 덩굴장미는 원래 한반도의 해당화였다가 1750년 무렵 부산 초량왜관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돼 거기서 개량되었고, 1809년에 영국의 무역업자 찰스 그레빌(Charles F. Greville)에 의해 일본에서 영국으로 보내진 뒤에 세계로 퍼졌다는 설을 전한다. 출전이 어디인지 확인되지 않았고 일반적으로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참으로 오랜만에 여의도 공원을 갔다. 공원 곳곳에 길이 나고 꽃이 피고 나무가 무성한 잎을 자랑하고 있다. 내 생각은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 이 공원에 대해서 남다른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평생 근무한 KBS가 여의도 공원 남서쪽에 붙어있어 거기에 관련된 추억이 있지만, 그것과는 다른 사연이다. 넓이 23만 제곱미터, 예전 평이란 개념으로 7만여 평이나 되는 이 공원은 예전에는 벌판이었고 거기엔 공항이 있었단다. 필자도 그 공항을 본 적이 없다. 공항이 있을 정도로 동서남북이 뚫리는 거대한 벌판이었다가 70년대 초 여의도 개발이 시작되면서 그 넓은 벌판이 아스팔트로 포장돼 5.16 광장이란 이름이 붙여졌고, 거기서 국군의 날에는 국군 사열이 벌어졌다. 1977년 봄 필자가 KBS에 들어간 이후에도 그곳은 넓은 광장이었다. 그곳에서 80년대에 국풍이 열렸고 이산가족 만남도 있었고 크고 작은 행사들이 이어졌다. 평소에는 자전거를 탈 수 있지만, 끝까지 걷기도 힘들 정도로 끝없이 펼쳐진 그야말로 허허벌판이었다. 그것이 1997년에 갑자기 공원으로 바뀌게 되었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1995년 7월 1일 조순 전 경제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5월은 신록의 달이란 표현 그대로 모든 것이 파릇파릇, 새 생명들이 보여주는 잔치 속에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등 우리들이 한창 자라나는 삶의 과정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되새기는 날들이 이어지는 바람에 한 달을 정신 없이 보낸 것 같다. 올해는 또 그 중간에 부처님 오신 날이 있어 불교 신자가 아니라도 모두가 우리들이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곧이어 달력에 빨간 표시가 없어서 아무 생각 없이 보내지만 중요한 날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부부의 날이다. 부부의 날을 아시냐고 물으면 글쎄 얼마나 안다고 답할까 잘 모르겠지만 날짜로는 21일이다. 이 부부의 날은 한국에만 있는 날이다. 1995년에 창원에 사는 권재도 목사 부부가 처음 제안해서 2007년에 국가기념일이 됐으니 올해로 14회를 넘겼다. 왜 21일인가. 둘(2)이 하나(1) 돼 잘살자는 뜻이라고 한다. 부부의 날은 세계에 유례가 없고 우리나라만의 국가적인 기념일이 되었다는 데서 그만큼 우리 사회가 부부의 금실과 가정의 화목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뜻이다. 금실이라는 말은 ‘시경(詩經)’의 첫머리에 나오는 금슬(琴瑟)에서 유래된 말로서, 일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서울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은 경복궁 귀퉁이의 민속박물관 자리에 있다가 헐린 중앙청에 있다가 고궁박물관 자리로 옮기는 진통 끝에 2005년에야 현재 자리에 크고 새롭게 지어지는 파란만장한 역사가 있다. 이 박물관의 상설전시관을 들어서면 큰 홀 한가운데에 대리석으로 된 탑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바로 경천사 10층 석탑이다. 국보 제86호인 이 경천사 십층석탑은 높이 약 13.5m에 이르는 웅장한 규모로, 석탑 전체에 불, 보살, 사천왕, 나한, 그리고 불교 설화적인 내용이 층층이 가득 조각되어 있어 무척 아름답다. 그러기에 전시관에 들어서면, 홀 중앙에서 천정까지 치솟는 위용으로 해서 중앙박물관의 얼굴인 것처럼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이 탑은 고려말기 원나라에 기울어져 있던 고려 귀족들이 발원했고, 탑의 외형은 우리나라에 있는 기존의 간결한 석탑과는 달리 원대에 유행한 라마교의 요소가 많으며, 탑을 만든 사람도 원나라 사람이라는 설도 있어서, 중앙박물관을 대표하는 문화재로는 인식되기에는 아쉬움이 있다. 그런데 올 10월에는 전혀 다른 문화재를 만나게 된다. 바로 우리 조상의 뛰어난 기술과 예술관, 심미안을 보여주는 뛰어난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내 나이 어느덧 올해 47살 아이를 낳아 이제야 부모가 되었구나 기르고 가르치는 건 진실로 내 몫이나 수명과 자질은 너에게 달려있다. 내가 만일 70살까지 산다면 25세 된 내 아들 모습 보겠구나 나는 네가 대현이 되기를 바란다만 하늘의 뜻이 어떨지는 나도 모르겠다. 我今行年四十七 生男方始爲人父 鞠育敎誨誠在我 壽夭賢愚繫於汝 我若壽命七十歲 眼見吾兒二十五 我欲願汝成大賢 未知天意肯從否 ... 소옹(邵雍), 《소씨문견록(邵氏聞見錄)》 소옹(邵雍, 1011~1077)은 중국 송나라 때의 대유학자이자 정치가, 문장가였다. 그의 호를 따서 흔히 소강절(邵康節)로 더 유명한데, 특히 동서고금을 통틀어 주역(周易)에 완전히 달통하여 천지가 돌아가는 운수와 사람의 길흉화복은 물론, 이 세상의 모든 이치를 한 손바닥에 꿰고 있었다고 알려져 그에 따른 일화도 많다. 소강절은 가난 속에서 공부에 심취하여 45살의 늦은 나이에 자신보다 한 살 많은 제자의 누이와 혼인하여 47살에 첫 아이 백온(伯溫)을 낳았다. 늦게 본 자식에 대한 걱정과 기대가 시에 절절히 나타난다. 신규야 부르면, 코부터 발름발름 대답하지요. 신규야 부르면, 눈부터 생글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