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새벽잠에서 깨어난 현영감의 마음은 지푸라기 헝클어뜨린 것 같았다. 단 한 번 본 사람이 그렇게 또렷하게 꿈에 나온다는 게 영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비만증에다 하지정맥류로 고생하는 할멈을 부축해 오줌을 뉘고 다시 자리에 누웠으나 잠 껍질은 한 꺼풀씩 벗겨져 나가기만 했다. 창에는 성에가 고사리처럼 자라나고 있었다. 다시 볼 일이야 없겠지만 전화번호라도 받아 놓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멈 몰래 빠져나와 거실을 서성이며 조반시간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수화기를 들었다. “여 청소이시더. 박 씨 양반 댁이니껴?” “아, 그렇지 않아도 아버님 당부도 있고 해서 삼우가 지나면 전화 드리려고 했습니다.” 박 씨. 야위어 보여도 단단한 구석이 느껴지던 사람. 전화번호를 또박또박 눌러쓰는 작은 손이 맵차 보이던 사람. 얄궂은 운명이 아니었더라면 매제가 될 뻔했던, 눈꼬리가 유난히 부드러운 사람. 그가 현영감을 찾은 건 두어 달 전 가을 거두미*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였다. “저, 여기가 월외리가 맞습니까? 아까부터 낯선 이가 집집이 다니며 주인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 목소리가 현영감네 차례까지 온 것이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좀 먹어둬라. 너라도 기운 차려야 한다.” 그는 몰라보게 핼쑥해져 있었다. 수염은 한 뼘이나 자라있었고 광대뼈는 쇠무릎 같은 몰골로 고기를 마분지 씹듯 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고기 먹는 양(量)을 알아도 너무나 잘 안다. 그는 한 자리서 돼지갈비 5~6인분 정도는 간식 취급하는 마귀였다. 한 번은 내기당구에서 진 내가 그와 고깃집에 갔다가 평생 지울 수 없는 쓰라린(?) 경험을 하게 된다. 그의 입을 상식으로 접근하면 크나큰 오산이다. 그는 주먹 크기도 보통 남성의 두 배나 되는데, 그의 “선방”에 나가떨어지지 않은 이가 없다는 무용담이 그가 사는 도시에 전설처럼 내려온다. 그는 놀랍게도 턱관절을 분리해 그 큰 주먹이 다 들어가는 입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마치 자기 머리통의 몇 곱절이나 되는 알을 꾸역꾸역 입안에 집어넣는 뱀을 연상하면 쉽게 이해가 간다. 그런 그가 상추 대여섯 장을 그 큰 손바닥에 포개놓고 고기를 수북이 올려 아귀 같은 입 속으로 집어넣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라! 내 돈 나가는 처지에서 어찌 이빨 부딪는 소리가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날 나도 밑지지 않으려고 실성한 듯 먹어 댄 결과, 계산서에는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어느새 가을이 다녀간다. 배추 밑동이 도려지고 무가 뽑히고 집집마다 담벼락에 장작더미가 쌓여간다. 개옻나무 밑엔 붉은 양탄자가 깔리고 찔레 덤불 참새소리가 한층 야물어졌다. “빛은 휘어지지 않는다.”라는 말은 정설이 아니다. 갈대 이삭이 일으키는 바람에도 서녘 햇살은 휘어지고 늘어져서 금실그물을 호면 위에 풀어 놓는다. 꽃은 땅에서만 피지 않는다. 처마마다 곶감으로 꿰어져 겨울로 가는 이정표로 피어있다. 내가 어살*에 걸린 물고기처럼 세파에 떼밀리는 동안 이렇게 가을이 다녀가고 있다. 그동안 참 바쁘게 살았다. 집을 짓는 일, 연못과 도랑을 파서 정원을 만들고 꽃밭 가꾸는 일만 해도 허리가 휘어질 지경인데, 비록 녹음방송이라곤 하지만 매일 나가는 프로그램을 턱 하니 맡았으니 몸이 몇 개라도 모자랄 판이었다. 평생 해온 일이 방송이라 앞뒤 재지 않고 덥석 달려든 게 나를 조급증으로 몰고 가고 말았다. '바쁘다'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뜻 말고도 '어렵다'라는 뜻을 지닌 함경도 사투리가 그것이다. 바쁘게 살면 다른 건 몰라도 살림살이의 어려움은 줄어들어야 할 텐데 더 하면 더 했지, 여간해서 나아지지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들판이 비어간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듬성듬성 누런 늦벼가 성성하더니 이제 밭에 푸른색이라곤 무, 배추밖엔 남지 않았다. 풍요가 황량으로 바뀌는 데 걸리는 시간이 그리 오래지 않음에 마음이 소소해져, 마당에 나와 서리 맞은 꽃씨를 받으며 새삼 “남는 것”과 “남기는 것”에 대한 생각에 잠긴다. 꽃이 꽃씨를 남기듯 세상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열매를 남긴다. 그 가운데 사람이 가장 다양한 열매를 맺는데, 훌륭한 학업으로 후학들에게 맑은 산소 같은 열매를 남기는 사람, 불길 같은 예술혼으로 영롱한 열매를 남기는 사람, 성품이 온화하고 사랑이 깊어 향이 아름다운 열매를 남기는 사람이 있다. 이 열매는 식물의 열매든 사람의 열매든 지나온 날들이 새겨져 있다. 머리에 서리가 내리면 인생의 가을도 깊은 것인가? 초겨울로 접어드는 초로의 길목에서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본다. ‘나’라는 잡초는 마지막에 어떤 열매를 남기고 스러질까? 막상 생각해보니 딱히 내세울 만한 게 없다. 소장음반을 내세우자니 나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고 내용도 더 알찬 이가 여럿일 테고, 음악활동 역시 나보다 실력이 뛰어난 이가 많고 많을 것이다. 글 실력 또한 남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사월은 분홍 세상이었다. 얼음새꽃, 고들빼기꽃, 구릉대꽃이 깔아놓은 노란 멍석 위에 진달래, 산벚꽃, 개복숭아꽃, 살구꽃이 흐드러져 노을마저 분홍으로 물들였었다. 그 분홍 사월이 가니 이젠 층층나무, 이팝나무, 때죽나무, 찔레꽃 같은 흰 꽃들이 오월을 뒤덮는다. 봄비치고는 제법 많은 비가 내리는 덕택에 참으로 오랜만에 가져보는 꿀맛 같은 망중한(忙中閑)이다. 취나물, 동박 잎에 부추겉절이를 얹어 싼 삼겹살에다 아내가 빚은 청주까지 한 잔 곁들이니 이 맛이 그 맛이요, 이 세상이 바로 내 세상이다. 우리는 길게 다리를 뻗고 내친김에 영화도 한 편 감상했다. 옛날 영화를 쭉 검색하다가 빨간 냄새가 나는 제목이 있어 눌러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1972년에 제작된 <꽃 파는 처녀>라는 북한영화였다. 구닥다리 “꼰대”라서 북한영화가 버젓이 돌아다닌다는 현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아 한동안 지남력* 상실상태로 있다가 정신을 차려 격세지감(隔世之感)으로 보았다. 1930년대가 시대배경인 영화의 줄거리는 대충 이렇다. 어느 고장인지 알 수 없으나 그리 크지 않은 저잣거리에서 “꽃분이”라는 한 처녀가 꽃을 팔러 다니는 장면에서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1) 그러면 봄이 온 것이었다. 분홍 아지랑이로 버디기재 마루가 가물거리고 강 건너 큰골 장끼소리 빨랫줄 타고 내 귀에 꽂히면. 그러면 봄이 온 것이었다. 마른버짐 얼굴에 뭉게뭉게 피어나고 기계충* 꽃 까까머리에 빨갛게 피어나면. “할머이, 제비는 운제 와?” 이제 제비만 돌아오면 될 것 같았다. 나의 이 간절한 소망이 하늘에 닿아 하늘님이 제비에게 박씨를 물어다 주라고 시킬 것 같았다. 그러면 뜬구름으로 떠도는 아부지도, 돈 벌러 서울로 간 어머이도 돌아와 온 식구가 오순도순 한 군데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파리똥 앉은 꽁보리밥은 더는 먹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2) 제비가 와야 한다. 홍매화 지는 창가에서 내다보니 아직은 메추라기와 직박구리 같은 겨울새나 텃새들만 보이지만 밭가에 냉이꽃 피고 개구리 소리 들려오니 제비도 곧 오겠지. 그래야 제대로 갖춰진 봄이라 할 수 있겠지. 과연 우리 집 처마 밑에 집을 지을까? 우리가 거들어 줄 방법은 없을까? 쑥국이 이렇게 맛있을 줄 몰랐다며 눈이 동그래진 아내에게 숟가락을 손에 들고 아침부터 제비 얘기만 해댔다. (3) 그래, 어쩌면 그때 이미 나는 은하수를 건넜는지도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너, 김진성 형 알지? CBS. 그리고 진이 형, 이진. 어제 모처럼 만에 만났다. 얘기 끝에 네 얘기도 했다. 대단하다고 하더라.” 그의 목소리가 많이 달라졌다. 젖은 솜이불처럼 그를 짓누르던 깊은 좌절이 벗겨지고 있었다. 그는 한때 스타 방송작가였다. 유명 방송사의 라디오 간판 프로들이 그의 펜 끝에서 나왔다. 그런 그가 공교롭게도 나와 거의 같은 시기에 “파산”이라는 혹독한 통과의례를 치르게 된다. 처음에는 뭐가 뭔지 잘 몰랐다. 그저 내가 가지고 있던 물질적인 걸 모두 잃는 것으로만 알았다. 그리고 잃은 물질이야 열심히 다시 뛰면 만회되는 것으로 믿었다. 그 믿음은 옳았다. 하지만 그 믿음의 실현을 위해선 무서운 의지가 필요했다. “형. 우리 노가다 판이라도 나갑시다. ‘나 죽었소.’하고 한 몇 년 종잣돈 만들어 다시 시작합시다.” 내 말에 솔깃하여 관심을 두는 듯했으나 그는 끝내 용기를 내지 못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머리 위에서 뭐가 떨어질지, 언제 내가 저 까마득한 바닥으로 떨어질지 몰랐다. 콘크리트 두들겨 깨는 소리가 귀마개를 뚫고 들어와 고막을 찢었다. 희뿌연 분진으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그땐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늘 벙거지를 눌러쓰고 다녔고, 옷이며 신발이며 온몸에 때 국물이 흘러내렸다. 가뜩이나 어눌한 말재주에 동문서답을 해대기 일쑤이니 같이 얘기하려면 웬만큼의 참을성은 바탕에 깔아야 했다. 그는 경기도 어디쯤 가서 파지를 주우며 산다고 했다. 내게 올적엔 어떤 때는 한참을 걸었는지 옷을 털면 금방이라도 먼지가 풀썩일 것 같았다. 그런 그였지만 밥걱정은 안 한다고 했다. 막걸리가 주식이니 밥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주독이 쌓여 그런지 거무튀튀한 얼굴에 군데군데 쌀알 같은 게 돋아 있기도 했다. 머릿속에 환등기가 켜졌다. 흑백사진이 여러 장 지나갔다. 그래도 세상은 돌아가고 있었다. 철옹성인 줄 알았던 18년 절대권력이 무너졌다. 아직은 곳곳에 왕조숭배사상이 남아 있던 터여서 하늘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는 줄 알고 벌벌 떠는 사람도 많았다. 당장이라도 김일성이가 쳐내려올 것 같고 수출길이 막혀 공장이 멈추고 다 굶어 죽을 것 같은데도 세상은 여전히 굴러가고 있었다. “3김 시대”가 오는 듯했으나 어느 귀신이 채 갔는지 “3김”의 3자조차 증발해 버리고 영문 모를 총성이 서울 밤하늘을 가르는 가운데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방효유(方孝孺)는 명(明) 초기의 학자로 건문제의 스승이다. 주체(朱棣)가 정난의 변을 일으켜 조카인 2대 황제 건문제(建文帝)를 죽이고 황제에 오르자, 그를 비난하는 글을 썼다가 역사상 최악의 필화사건의 장본인이 된다. 영락제(永樂帝)가 있었다. 그는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체(棣), 열한 살에 연왕(燕王)에 봉해졌다. 태조가 죽자 장남 표(標)의 아들인 윤문(允炆)이 2대 황제에 오르게 된다. 야욕가인 그는 비밀리에 군사력을 키워 “황제 주변의 간신들을 토벌 한다.”라는 구실을 달고 반란을 일으켜 황제 자리를 빼앗는다. 조카 건문제 주위의 신하들을 모두 살해했으나 방효유만은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즉위조서를 써 달라며 구슬렸다. 완강히 버티던 방효유는 영락제의 거듭된 종용에 마침내 붓을 든다. 잔뜩 기대하며 지켜보던 영락제에게 전해진 종이에는 단 네 글자 연적찬위(燕賊簒位, 연나라 도둑이 황제 자리를 빼앗다)였다. “네 이놈! 구족을 멸하리라.” “구족이 아니라 10족을 멸해 보거라. 내가 눈 하나 깜빡 하나!” 방효유의 입은 그 자리에서 찢기고 10족 색출의 회오리가 분다. 당대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내겐 자신을 “DNA 반역자"라 부르는 벗이 한 명 있다. 지천명에 가깝도록 인류의 보편적 삶에 세뇌되어 살다가 반백(半白)이 되어서 반역의 길에 발을 들여놨다. 사업의 실패가 잠자던 그의 반골기질을 깨운 것이다. 그는 이참에 종전의 자신의 삶을 확 뒤집기로 작정한다. 그 첫 번째 작업으로 도시의 표상인 서울을 버리기로 하고 그길로 아내의 손을 이끌고 무작정 떠났다. 달랑 칠십 만원이 남은 재산의 전부였다. 부부의 발길이 닿은 곳은 가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생면부지의 강원도 산골이었다. 부부는 그곳에서 남의 집 날품팔이로 연명하며 뒷날을 도모한다. 몇 해 뒤 성실과 근면으로 노력한 끝에 인적 없는 골짜기에다 반역의 본거지를 마련하기에 이른다. 전력 혜택은 거부했지만, 산채만큼은 흙벽돌로 제법 그럴 싸 하게 지었다. 그때를 시점으로 그는 본색을 드러낸다. 철저하게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설계되어 있는 현생인류의 뇌 구조에 반기를 들고 혁명의 나팔을 분 것이다. 우선 무슨 무슨 날이니 하는 “날”부터 없애기로 했다. 명절, 생일, 결혼기념일, 제삿날…. 강요당하기 싫다는 게 이유였다. 다음으로 한 일이 어머니를 갑갑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