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보니, 아, 나아가보니---- 졸음 잔뜩 실은 듯한 젖빛 구름만이 무척이나 가쁜 듯이, 한없이 게으르게 푸른 하늘 위를 거닌다. 아, 잃은 것 없이 서운한 나의 마음!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보니, 아, 나아가보니----- 아렴풋이 나는, 지난날의 回想같이 떨리는, 뵈지 않는 꽃의 입김만이 그의 향기로운 자탕 안에 자지러지노나! 아, 찔림 없이 아픈 나의 가슴!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보니, 아, 나아가보니---- 이제는 젖빛 구름도 꽃의 입김도 자취 없고 다만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은실 같은 봄비만이 노래도 없이 근심같이 내리노나 아, 안 올 사람 기다리는 나의 마음! 위 시는 1922년 3월 《신생활》이라는 잡지에 실렸던 수주 변영로 선생의 시 봄비입니다. 화곡로를 따라 서울시를 막 벗어나면 고강지하차도가 있는 삼거리에 수주 변영로 선생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저는 부모님 댁에 갈 때마다 이 삼거리에서 좌회전을 하는데, 매번 좌회전하면서 수주 선생을 쳐다만보고 가다가 어느 날은 수주 선생을 뵈기 위해 차를 세웠습니다. ▲ 부천시 고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전에 안산을 오른 적이 있는데, 그 때 안산에 오르기 전에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잠시 들렀습니다. 안산이라고 하면 의외로 모르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연세대 뒷산이라면 다들 고개를 끄덕거리는데, 바로 이 산 반대편 자락에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있는 것이죠. 하긴 이날 같이 등산하는 분들 중 대부분이 안산은 처음이라고 하더군요. 독립문역에서 내려 지상으로 올라가니 바로 앞에는 서재필 박사 동상이 있습니다. 서재필 박사가 이끄는 독립협회가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영은문을 철거하고 독립문을 세웠기에 당연히 이곳에 서재필 박사 동상이 있겠죠. 이번에 독립문을 자세히 보니 독립문 앞에 두 개의 큰 초석이 있습니다. 무얼까 하고 보니 헐어버린 영은문의 주초(柱礎)이더군요. 여태 무심코 지나쳐서인지 독립문 앞에 영은문의 주초가 있는 줄은 모르고 지냈습니다. ▲ 사적 제32호 서울 독립문(문화재청 제공) 또 그 옆에 독립관이 있어, 어? 독립문 세울 때 그 옆에 독립관도 세웠었나? 하며 보니, 영은문 옆에 있던 모화관인데, 서재필 박사는 영은문은 헐면서도 모화관은 그대로 두고 독립관으로 이름만 바꿔 사용하였네요. 독립관은 일제강점기 때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서울 노원구 중계동에 있는 한글로 쓰인 비석중 가장 오래된 비석을 보러 갔습니다. 이 비석은 1536년(중종 31)에 이문건이 자기 아버지 이윤탁과 어머니 고령 신씨의 묘를 합장하면서 묘 앞에 세운 비석으로 문화재 이름은 서울 이윤탁 한글영비(한글靈碑)입니다. 원래 이 앞에는 고령 신씨의 묘만 있었고 이윤탁의 묘는 태릉 자리에 있었는데, 이윤탁의 묘를 이리로 합장하면서 아들 이문건이 영비(靈碑)라는 제목으로 비석을 세우면서 여기에 한문과 함께 한글도 새긴 것이랍니다. 조선 시대 묘비에 한글이 새겨져 있는 것은 이 비석이 유일하다는데, 그럼 이문건은 왜 여기에 한글을 새겼을까요? 한글 비문을 현대어로 하면 이렇습니다. 신령한 비다. 쓰러뜨리는 사람은 화를 입을 것이다. 이를 한문을 모르는 사람에게 알리노라. 이제 짐작이 가시겠지요? 이문건은 한문을 모르는 상놈들이 묘를 훼손시킬까봐 이를 경고하기 위하여 이 한글 비석을 세운 것입니다. ▲ 서울 노원구에 있는 가장 오래된 한글비석 이윤탁 한글영비(한글靈碑)(문화재청) 그런데 제 기억으로는 예전에는 비만 있었는데 지금 한글고비는 비각 안에 곱게 모셔져 있고, 또 예전보다 더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서울 강북에 초안산(楚安山)이라는 해발 114.1m의 야산이 있는데, 녹천역 뒷산이 바로 초안산입니다. 전에 국립현대미술관 창동 창작스튜디오를 갔을 때 바로 근처에 초안산이 있어서 올라가보았습니다. 왠 무덤들이 그리 많은지... 요즈음 형성된 공동묘지가 아니라 조선 시대의 공동묘지입니다. ▲ 내시들의 공동묘지가 있는 초안산(楚安山) 왜 여기에 조선시대 공동묘지가 있을까요? 조선시대 경국대전이나 속대전에는 한양에서 십리(4.7km) 이내에는 무덤을 쓰지 못하도록 금하였습니다. 서울의 4소문 가운데 광희문은 시체가 나가는 문이라고 하여 시구문(屍軀門)이라고도 불렀지 않습니까? 이 문으로 나간 시체가 10리를 바로 벗어난 곳에서 편히 쉴 곳으로 최적지가 바로 초안산이었습니다. 도봉산, 북한산 일대도 자격 요건에는 해당되지만, 이 산들은 산세도 험하고 돌산이라 묏자리로는 부적합하다고 생각하였지요. 더군다나 풍수지리로도 초안산이 좋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안 이씨 문중에서도 초안산에 묘역을 써서 제일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군요. 그런데 초안산에 입주한 망자들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들이 내시입니다. 내시들은 동류의식이 있어 죽어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신항서원에 배향된 또 다른 인물에 충암 김정(1486-1521) 선생이 있습니다. 충암은 제주 오현단의 시초가 되었던 인물입니다. 즉 1578년(선조 11) 판관 조인후가 충암 김정 선생을 모시는 충암묘를 제주시에 지은 것이 시초가 되어 1682년(숙종 8) 귤림서원으로 사액(賜額)을 받고, 1695년(숙종 21) 송시열 선생이 여기에 배향됨으로써 5현단이 된 것이지요. 그러고 보니 제주 오현단의 다섯 현인중 3명(송인수, 김정, 송시열)이 청주 지역 사람이네요. 참 제주의 명문고등학교 오현고등학교의 이름이 바로 이 오현단에서 유래된 것은 제주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충암은 중종 때 조광조를 도와 훈구파의 척결에 앞장섰는데, 그렇기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와 함께 척결 대상에 올랐지요. 다행히 영의정 정굉필의 옹호로 죽음만은 면하고 금산에 유배되었다가 진도를 거쳐 제주도로 유배되었습니다. ▲ 대전 동구 신하동에 있는 충암 김정 무덤 옆의 사당. 사당에는 부인 송 씨의 부인의 정려각이 있다.(문화재청 제공) 진도 벽파진에 있는 정자 벽파정의 현판에는 충암의 시 벽파를 떠나며(渡碧波口號)가 걸려있답니다.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청주 표충사에 들렀을 때, 표충사를 물러나와 신항서원도 들렀습니다. 신항서원은 1570년(선조 3)에 유정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청주지역의 첫 번째 사원으로 건립되었고, 1660년(현종 10)에 신항서원으로 사액을 받았습니다. 신항서원에는 송인수, 박훈, 경연 등 15-17세기 청주 지역을 대표하는 성리학자들이 배향되어 있지요. 그런데 이곳에도 당쟁의 바람이 불어오면서 청주 지역의 유림들을 둘로 갈라놓았습니다. 이런 분쟁의 씨앗을 심은 것이 노론의 거두 우암 송시열입니다. 송시열은 신항서원에 율곡 이이를 추가로 배향하면서 배향 순서를 기존에 배향된 청주 출신 성리학자들을 제치고 이이를 맨 앞으로 하였습니다. ▲ 송인수, 박훈, 경연 등 15-17세기 청주 지역을 대표하는 성리학자들을 배향한 신항서원(문화재청 제공) 더욱이 송시열이 화양동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신항서원은 노론이 주도하는 서원으로 자리 잡게 되어, 신항서원 운영에서 소외된 소론과 남인이 불만을 갖게 되었죠. 이후 청주지역에서는 자파의 세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자파의 서원을 추가 건립하는 등으로 14개의 서원이 난립하였다는군요. 이런 것도 한 원인이 되어 이인좌의 난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전에 재판 때문에 청주지방법원에 갔을 때에, 재판을 끝내고 우암산 밑의 표충사(表忠祠)에 들러보았습니다. 표충사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충신을 배향하는 사당입니다. 표충사는 바로 이인좌가 난을 일으켜 청주읍성으로 쳐들어갔을 때 반란군에 의해 죽은 충청병사 이봉상과 비장(裨將) 홍림, 영장(營將) 남연년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당이지요. 충청병사 이봉상은 충무공 이순신의 현손(玄孫)입니다. 원래는 3충사라고 했다가, 1736년에 표충사로 사액 받은 것이라고 하네요. ▲ 충청북도 기념물 제17호 청주 표충사 (淸州 表忠祠), 문화재청 제공 그런데 표충사에서 제 눈길을 끈 것은 위 3명의 충신들 보다는 기생 해월입니다. 일개 기생이 표충사에 함께 있다니 이상하지요? 해월은 비장 홍림의 애인으로 해월의 열녀문이 여기에 있습니다. 기생과 열녀라. 이것도 뭐가 잘 안 맞는 조합 같은데, 실은 비장 홍림이 살해당하자 해월이 홍림의 뒤를 따라 자결을 하였기에 열녀문을 세워준 것입니다. 곧바로 자결한 것은 아닙니다. 홍림이 살해당할 때 이미 뱃속에 홍림의 아이를 가지고 있었기에, 아이를 낳아 7살까지 키우다가 자결한 것입니다.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충청북도 청원군 남일면에는 효촌리(孝村里)라는마을이 있습니다.마을 이름에서 금방 이 동네에서 효자가 낫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겠지요? 그 효자는 바로 신항서원에도 배향되어 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 경연(慶延)입니다. ▲ 청원군 남일면 효촌리 경연 효비각 경연은 아버지가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을 때 엄동설한에 연못의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 드렸고, 또 눈 덮인 산 속에 시루를 엎어놓고 고사를 드려 고사리를 돋아나게 하여 이를 요리하여 아버지에게 드렸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버지 묘 옆에 여막을 짓고 무려 6년 동안이나 시묘 생활을 하였구요. 이런 효행을 들은 성종이 경연을 불러 사재감(司宰鑑, 조선시대 궁중의 어류・육류・소금・땔나무・횃불 따위 일을 맡아보는 관청) 주부를 내리고, 이후 이산 현감의 벼슬도 주었습니다. 그보다 한참 뒤 숙종은 경연의 효행을 후세의 귀감으로 삼고자 효촌리에 효자비를 세우도록 하였는데, 지금도 청주에서 문의 가는 큰길가에 그 효자비가 비각 안에서 비를 피하며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지요. 경연은 자신만 효자였을 뿐 아니라 인근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도미부인 이야기를 하다보니 개로왕이 백성의 아내를 강탈하기 위하여 참 못된 짓을 많이 한 임금으로 생각되네요. 실제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고구려가 백제를 치기 위하여 고구려 첩자가 그런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얘기도 있더군요. 당시 고구려왕은 남진정책을 펼치는 장수왕이었는데, 장수왕의 남진정책에는 백제의 근초고왕이 평양성 근처까지 쳐들어와 증조할아버지 고국원왕을 죽인 원한을 갚겠다는 것도 많이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장수왕은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한다는 얘기를 듣고 바둑을 잘 두는 도림이라는 스님을 첩자로 파견합니다. 개로왕은 도림의 바둑 실력에 반하여 도림을 상객(上客)으로 삼아 도림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요. 개로왕의 신임을 얻은 도림은 대궐이 너무 좁다, 제방을 제대로 쌓아야 한다는 등으로 개로왕에게 큰 토목공사를 부추깁니다. 가뜩이나 재정이 빈약한 백제는 이러한 토목공사로 나라 곳간이 비고, 백성들도 생활이 어려워져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 검단산에서 내려다본 한강 장수왕은 드디어 때는 왔다 생각하고 백제를 침공하여 개로왕을 사로잡아 죽이지요. 이로서 한성 백제는 망한 것입니다. 개로왕은 자신의 잘못으로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전에 고교동창들과 팔당대교 쪽의 안창모루에서 검단산을 올랐습니다. 안창모루 바로 옆 마을은 바깥창모루입니다. 마을 이름이 특이하죠? 창모루는 창고 모퉁이 나루의 준말이라고 합니다. 옛날 세미(稅米)를 하역하여 보관하던 창고가 이 근처에 있었기에 생긴 땅이름이지요. 검단산 근처에 이런 재미있는 지명이 또 있습니다. 팔당댐 근처의 검단산 밑 마을 이름이 배알미동입니다. 관리가 낙향하거나 귀양 갈 때 여기서 임금이 계신 한양을 향해 마지막으로 배알(拜謁)하였다 하여 생겨난 지명이랍니다. 검단산을 오르다 잠시 쉬면서 한강 건너 예봉산과 예빈산, 적갑산을 바라다보고, 발밑으로 한강이 흘러가는 것도 내려다봅니다. 팔당대교에서 팔당댐 쪽으로 조금 오른 곳은 예전에 도미나루가 있었던 곳입니다. 오늘은 도미나루에 얽힌 이야기를 해보지요. 도미나루라는 이름은 도미부인이 이곳에서 개로왕의 추격을 피해 배를 탔다고 하여 도미나루라고 부른답니다. 도미부인! 많이 들어보셨지요? ▲ 검단산에서 한강을 내려다 본 전경 백제 개로왕 시절에 아름답고 행실이 곧은 도미부인에 대한 소문이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개로왕은 도미를 불러 네 부인이 아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