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민족문제연구소가 5년여의 작업 끝에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통감부·조선총독부 편》을 펴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중점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일제강점기 사전 편찬사업’의 하나로, 2009년 《친일인명사전》을 펴낸 데 이어 두 번째 성과이다. 이 사전은 일제가 조선 지배를 위해 설치한 통치기구 중에서 우선 최고 권력기구인 통감부・조선총독부 본부와 소속관서들을 수록했다. ‘을사늑약’으로 사실상 국권을 상실한 1905년부터 1945년 해방될 때까지 40년 동안 존속했던 통감부와 조선총독부 기구를 모두 망라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적지 않다. 수록된 248개(통감부 26개, 조선총독부 222개)의 관서와 기구는 일제가 법령 공포를 통해 설치를 공식화한 것으로 모두 『관보』에서 관련 사항을 확인할 수 있다. 편제는 개별 통치기구를 각 1항목으로 설정하고, 통감부와 조선총독부로 대별한 뒤 다음으로 통감부 본부・소속관서, 조선총독부 본부・지방관서・학교・위원회 순으로 배열하였으며, 같은 범주 내에서는 설치년도 순으로 정리했다. 각 항목은 표제어(기구명)・존속기간・성격・연혁・조직과 기능・참고문헌 순으로 서술했다. 방대한 자료조사와 사료검증을 거쳐 확정
[우리문화신문=남원 하진상 기자] 문화재청 만인의총관리소(소장 이병노)는 정유재란 때 순국한 만인의사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만인의사 순의제향(萬人義士 殉義祭享) 행사를 오는 26일 오후 3시 전북 남원시에 있는 만인의총 충렬사에서 거행한다. 이날 행사는 제향행제, 추모공연, 의총참배, 남원 4대종단 합동 위령제, 음복다과 등 순서로 진행된다. 제향행제는 ▲ 초헌관(만인의총관리소장)의 분향과 초헌례, 축관의 축문낭독 ▲아헌관의 헌작과 아헌례 ▲ 종헌관의 헌작과 종헌례와 헌관 재배 ▲ 문화재청장의 헌화(獻花, 대통령 명의)와 분향(焚香, 향을 피움) 순으로 진행되며, 제향(祭享) 후에는 남원시립국악원의 씻김굿과 보렴(남도민요) 등 추모공연과 의총참배가 이어진다. 한편 하루 전날인 25일엔 남원사회봉사단체협의회(만인정신선양회, 대회장 형창우, 준비위원장 배종철)에서는 제14회 만인의사 추모 및 만인문화제를 역사의 현장인 북문터 (구 남원역)에서 연다. 남원사회봉사단체협의회는 지난 2000년부터 “만인의사추모 및 만인정신계승 범시민대회”를 열어왔다. 제14회 만인의사 추모 및 만인문화제는 저녁 5시부터 진혼무, 기념식, 전쟁시를 회상하는 주먹밥체험(인절미), 전시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일제강점기 118명의 광부들이 집단 수몰된 '옥매광산 광부 집단수몰사건'의 추모조형물이 건립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해남 옥매광산 광부수몰 118인 추모비 건립위원회와 유족회는 6일 황산면 삼호리 선착장에서 옥매광산 광부 집단수몰사건 희생자 추모비 건립식과 72주년 합동추모제를 가졌다. ‘임이여 영원하라’는 주제로 만들어진 5.5m 높이의 추모조형물은 배모양 조각물 위에 희생된 118명의 광부를 상징하는 118개의 원모양을 조성해 마침내 고향의 품에 안긴 광부들의 넋을 그리고 있다. 특히 추모조형물 조성을 위해 해남군민 1인이 1만 원씩을 내는 성금모금행사가 진행돼 지난 8월부터 한 달여 동안 1천300여 명의 군민이 1천400여만 원의 건립 기금을 모금, 조형물 조성 비용을 충당함으로써 더욱 의미를 깊게 하고 있다. 또한 재능기부를 통해 울돌목의 고뇌하는 이순신상을 만든 해남 출신 이동훈 작가가 추모조형물을 제작하고 해남지역 문화예술인들이 추모제 공연을 준비하는 등 각계의 의지가 모여 이번 행사를 마련했다. 그동안 황산 옥매광산 광부 집단수몰사건 추모제는 대부분 유족들이 고향을 떠나면서 남아있던 몇몇 유족들이 돈을 모아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독일 한인동포에는 파독 광부, 간호사 외에 조선기술자도 있었다! 국립민속박물관(관장 천진기)은 2016년 독일 함부르크 한인동포에 대한 생활문화 현지조사(2차례)를 실시해 2017년 8월 《독일 함부르크 한인들의 삶과 문화》 조사보고서를 펴냈다. 이 보고서에는 그간 여러 매체를 통해 소개된 적이 있는 독일 파독 광부와 간호사에 대한 이야기에 더하여,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의 조선 산업을 이룰 수 있었던 배경이 되는 300여 명의 파독 조선기술자들의 이야기를 수록하고 있어 남다른 의미가 있다. 서울-부산간 자동전화가 개통되고, 7ㆍ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던 1971~72년, 3차례에 걸쳐 독일에 파견된 조선기술자들은 함부르크 호발트 조선소에 3년 계약으로 근무하며 기술을 배웠다. 근면 성실한 작업 태도로 독일인들에게 인정을 받은 한국인들은 3년 후에 대부분 귀국했지만, 45명의 인원은 현지에 잔류했다. 귀국한 조선기술자들은 이후 한국의 조선소 등에 취업하여 배운 기술을 활용, 한국 조선산업 발전에 이바지했다. 한편 독일에 남은 조선기술자들은 그곳에 정착하여 일가를 이루고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비슷한 시기에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윤동주 시인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야나기하라 야스코 (楊原泰子, 71살) 씨다. 윤동주 시인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는 뜻깊은 올해 나라안팎에서 많은 행사들이 열리고 있지만 20여 년 넘게 윤동주 시인을 일본에 알리는 일을 해온 야나기하라 야스코 씨를 아는 한국인은 많지 않다. 해마다 2월 도쿄에서 윤동주 시인 추모회를 여는 등 윤동주 시인을 알리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야나기하라 야스코씨를 기자는 지난 8월 5일 오후 3시, 일본 도쿄의 최대 고서점가 진보쵸(神保町)의 한국 북까페 <책거리(CHEKCCORI)>에서 만났다. 야나기하라 씨는 1년에 한두 번씩 윤동주 시인 관련 일로 한국에 다녀갈 정도로 한국통이며 한국어 실력도 상당하다. 기자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건넨 명함에는 아무런 직함도 없이 이름과 연락처만 적혀있다. 그것은 원래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 조용한 성품에서 나온 자세로 사실 야나기 하라 씨의 직함은 ‘시인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 모임(詩人尹東柱を記念する立教の会)’의 대표다. 올해 71살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어 보이는 야나기 하라 씨와의 대담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이뤄졌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스스로 잘난 체 하는 것보다 더 외로운 것은 없다. -孤幕孤於自恃(고막고어자시)-” 안중근(1879~1910) 의사를 모신 국내 단 한 곳의 사당인 해동사(海東祠)안에는 안 의사의 심지 곧은 마음이 드러난 유품 몇 점 만이 덩그렇게 놓여있었다. 국내 유일의 안 의사를 모시는 사당이 전라남도 장흥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 26일(토), 서울에서 부랴부랴 달려갔다. 그간 기자는 안 의사의 유적지를 쫓아 거사 현장인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역과 그곳에 들어선 안중근의사 기념관 그리고 거사 뒤 처음으로 잡혀갔던 일본영사관 건물과 자신이 죽으면 뼈를 묻어 달라던 하얼빈공원(현 조린공원)의 "청초당" 이란 돌비석을 세운 자리까지 찾아다녔지만 국내에 안중근 의사를 모신 사당이 있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다. 부끄러웠다. 출발에 앞서 길찾개(네비게이션)에서 해동사(海東祠)를 찾으니 뜨질 않았다. 간신히 알아낸 정보를 통해 죽산 안씨 사당인 만수사 (萬壽祠, 전남 장흥군 장동면 만수길 25-121)에 안 의사를 모신 해동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러한 극비스런(?) 정보를 준 사람은 장흥의 향토사학자 안명규 씨였다. 안중근 의사 사당을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일제의 한일합병 강제조약이 체결된 남산공원 통감관저터에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가 조성된 지 1년, 그동안 약 2천명의 시민들이 방문해 돌아가신 피해 할머니를 기리고 ‘위안부’에 대한 역사를 배웠다. 시민 참여 문화해설 프로그램이 주중, 주말 운영돼 그동안 3백여 명이 다녀갔으며, 이외에도 단체 방문, 개인 방문 등을 통해 약 2천 명의 시민들이 다녀갔다.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에서 진행되는 ‘문화해설 프로그램’은 위안부 제도에 대한 역사와 일본 제국주의의 역사, 그리고 기억의 터 주변 인권 탄압의 현장을 보여주며 인권과 역사교육이 함께 이뤄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서울시와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 조성 추진위원회(위원장 최영희)는 경술국치일을 앞두고 8월 26일(토) 17시,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에서 1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한다. 기억의 터는 초등학생부터 위안부 피해 할머니, 단체 등에 이르기까지 약 2만 명이 3억 5천만 원을 모금해, 2016년 8월 29일 조성되었다. 지난 1910년 8월 29일은 일제가 강제로 체결한 한일합병조약을 공포, 국권을 상실한 치욕의 날이다. 이런 의미를 담아 경술국치(庚戌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처음으로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 이 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이여 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 새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 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나니" 이쯤 되면 <아멘>하고 싶어진다. 이 시는 한국 최고의 시인이라는 미당 서정주(1915~2000) 의 ‘전두환 대통령 각하 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 <처음으로의>'의 일부다. 이 시를 쓴 이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훌륭한(?) 미당 시인의 시가 아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고 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정말 미당의 시가 맞나? 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맞다. 한국을 대표한다는 미당 서정주의 시가 맞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어떤 일을 한 사람인지 1980년대 이후 출생자들은 잘 모른다. 37살 이후 세대라고나 할까? 그런 사람들을 위해 미당은 ‘전두환 대통령을 위한 찬양시’를 썼는가? 요즘 천만관객을 동원한 광주항쟁을 그린 영화 <택시운전사>의 주인공이 가가 막힐 일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을 유사이래 최고로 극찬한 대한민국 최고(?)의 시
[우리문화신문= 시즈오카 아라리 이윤옥 기자] 아라리항(安良里港)으로 가는 길은 마치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듯 굽이굽이 굽은 산길을 달려야했다. 이즈반도(伊豆半島)의 시모다(下田)에서 아라리항까지는 승용차로 1시간 남짓한 거리였지만 2차선의 좁은 길인데다가 산길이라 속력을 내지 못했다. 동행한 지인 이토 노리코(伊東典子, 62살)씨는 아라리항과 고대한국이 관련된 곳이라고 하자 한국의 ‘아리랑 노래’와 비슷한 땅이름이라고 하면서 아리랑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리코 씨는 과거 한국어를 배운적이 있는데 그때 아리랑 노래를 배웠다며 제법 가사를 외우고 있었다. 등잔밑이 어둡다고 이즈에서 30년을 살고 있는 노리코 씨는 아라리항구 쪽에는 여러번 와봤지만 이곳의 유래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이날 안내는 아라리항 가까이에 사는 야마모토 구미코(山本 久美子, 68살)씨가 해 주기로했다. 하필이면 날씨가 궂어 약간 굵은 빗줄기 속을 달려 구미코 씨와의 약속장소인 아라리항이 건너다 보이는 니시이즈쵸 중앙공민관(西伊豆町 中央公民館)에 도착한 시간은 8월 16일 오전 11시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구미코 씨는 이곳 공민관 2층 도서관에서 자원봉사로 활동하는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수원평화나비는 14일 권선동 올림픽공원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제5차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 행사를 열고, 일본 정부의 공식사죄와 반성, 법적 배상을 촉구했다. 이날 행사에는 위안부 피해자인 안점순(89, 수원 세류동) 할머니를 비롯해 염태영 수원시장, 수원평화나비·수원청소년평화나비 회원 등 150여 명이 참석했다. 2014년 설립된 수원평화나비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와 인권 회복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다. 수원평화나비ㆍ수원청소년평화나비 회원들은 기림식에서 ‘제5차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 맞이 세계연대집회 성명’을 발표하고 “일본 정부를 비롯한 전쟁 범죄 가해국은 피해자들의 명예와 인권회복을 위한 공식 사죄 및 법적 책임을 이행하라.”고 촉구했다. 이어 “각국 정부는 일본국성노예제와 같은 전시 성폭력 전쟁범죄 종식을 위한 구체적인 법·실천적 조치를 계획하고 이행하라”면서 “정의로운 해결을 통한 일본군성노예제 피해자들의 명예·인권 회복은 모든 전쟁과 전시 성폭력을 종식하는 시작이 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안점순 할머니는 “여러분이 힘을 모아서 우리(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도와주셔서 감사드린다.”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