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당진 안국사터 석탑 - 이 달 균 낮이면 멈추고 밤이면 걸었다 그 뒤로 고려의 별들이 따라 왔다 쉼 없는 삼보일배(三步一拜)의 종착지는 어디인가 묵언으로 걸어온 기나긴 수행의 날들 언제나 배경이 되어 함께 한 동반자여 어엿한 삼존불(三尊佛)이 있어 예까지 왔으리 아쉽다. 하긴 이런 모습이 안국사터 석탑뿐이랴. 1층 몸돌은 남아 있는데 2층 이상의 몸돌은 사라지고 지붕돌만 포개진 채 기형으로 서 있어 어딘지 엉성해 보인다. 자세히 보면 세웠을 때 모습은 제법 어엿했으리라 짐작된다. 각 귀퉁이에 기둥을 본떠 새기고 한 면에는 문짝 모양을, 다른 3면에는 여래좌상(如來坐像)을 도드라지게 새겨 놓은 것이 그렇다. 고려 중기 석탑의 특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탑이기에 1963년에 보물 제101호로 지정되었다. 절은 사라졌으나 이 탑을 배경으로 입상의 석조여래삼존불이 있어 그다지 외롭지는 않아 보인다. 가운데 본존불은 발 모양을 형상화한 부분을 빼곤 하나의 돌로 이뤄진 대형 석불인데, 머리 위에는 화불이 장식된 보관을 착용하고 있어 나그네의 눈길을 끈다. 이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협시ㆍ우협시 보살상이 함께 서 있는데 이 역시 훼손의 흔적이 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곡성 가곡리오층석탑 이 달 균 나는 멀찍이서 마을을 내려다 본다. 어느 나무에서 까치가 우는지 오늘은 또 누가 죽어 곡성이 들리는지 백제계 혈통으로 고려를 짐 졌지만 그 무게 내려놓고 이제 좀 쉬고 싶다 잊고픈 이름 있다면 이곳에서 잊고 가라 이 석탑을 찾아가다보면 마을 입구 길 옆에 석장승 2기가 서 있다. 남녀 한 쌍으로 보이는데 검은 빛을 띤 장승은 눈썹과 눈 주위가 마모되어 형체가 불분명하지만 뭉툭한 코는 든든한 사내다움이 묻어나는 것이 특징이고, 흰빛을 띤 장승은 머리에 족두리인지 뭔지를 쓴 채 가렴한 눈매를 가진 색시상으로 보인다. 마을 수호신으로 세운 것인지 유서 깊은 옛 탑을 지킨다는 염원인지 알 수 없지만 어딘지 범상해 보이지 않는다. 마을 주민에게 탑 자리를 물으니 큰 관심 없다는 듯 대답은 심드렁하다. 석탑은 마을 끝자락 매봉 초입 언덕에 서 있는데 막상 다가가보니 그 자태는 늠름하다. 어디에서 본 듯한 느낌이 들어 생각해 보니 담양 남산리 오층석탑을 닮았다. 그도 그럴 것이 둘 다 고려탑이지만 백제계 석탑 양식을 계승하고 있어 더욱 그런가 보다. 전해 들으니 예전 유물보전에 소홀했던 시절에는 가까이 가도 대숲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정읍 천곡사터 칠층석탑 - 이 달 균 언제부턴가 여인은 선 채로 탑이 되었다 가녀린 어깨와 앙상한 허리선 한 편의 간결한 시(詩)처럼 묵상에 들었다 정읍시 망제동엔 빼빼 마르고 키 큰 여인을 닮은 탑이 서 있다. 바로 7.5m에 이르는 천곡사터 칠층석탑이다. 여인을 연상시킨다고 하나 부드러움과 섬세함, 탐미적 자태와는 다른, 기원에 오로지한 야윈 모습에 나그네도 덩달아 무념에 든다. 처연한 그림자 아래서 까닭 모를 갈증에 시달린다. 하루가 저무는 시간에도 오래 묵상에 든 탑은 군살 빼고 미사여구도 빼고 그저 부처님 향해 하늘로 솟아 있다. 허리를 지탱하는 몇 개의 길쭉하고 간결하게 짜 맞춘 장대석으로 인해 그런 느낌이 더 하다. 앙상한 외형에 비해 옥개석은 두껍고 둔중하여 그리 조화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런 고졸한 모습이 더 고려탑답다고나 할까. 껑충한 탑을 가운데 두고 초록 수풀은 하늘에 닿는다. (시인 이달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산청 내원사 삼층석탑(보물 제1113호) - 이 달 균 탑은 뒷짐 지고 걷고 절은 짐짓 못 본 척 한다 때 이른 산천재 남명매 진다고 그래도 비로자나불 아는 듯 모르는 듯 부처는 바다를 보고 보살은 안개를 본다 물은 갇혀 있어도 연꽃을 피워내고 흘러서 닿을 수 없는 독경소리 외롭다 산천재에 가니 조식 선생 안 계시고 남명매만 피어 있더라. 아니다. 눈으로만 보면 꽃만 보일 것이고, 심안(心眼)으로 보면 글 읽는 선생도 뵐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난 결국 꽃만 보고 나왔다. 그리고 곧장 내원사 간다. 반갑다. 저만치 석탑이 걸어온다. 낮술 한 잔 했는지, 봄볕에 그을린 탓인지 탑은 약간 불콰해 보인다. 아지랑이 속에 흔들거리며 걸어오는 탑의 몸짓을 절은 짐짓 못 본 체한다. 비를 머금었는지 축축한 안개가 내려왔다. “바다를 보았느냐?” “아니오, 안개를 보았을 뿐이오.” 안경을 닦아 보았지만, 시야는 흐려 있었다. 그래, 맑은 물이 아니어도 연꽃은 핀다. 그렇게 날 위무하고 내원사를 나왔다. (시인 이달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양산통도사 삼층석탑(보물 제1471호) - 이 달 균 임진 그 전쟁 통에 산과 절은 타버려도 받침돌 각 면에 새긴, 형형한 코끼리 눈 안으로 나이테를 가진 목질의 기단과 기둥 석탑 말하기를 출가인 산승들은 영축산 통도사 수행의 계단 아래 죽비에 문득 깨닫거든 중생제도에 힘쓰시오 영축산에 둘러싸인 통도사 경내엔 부처님의 영험한 기운이 넘쳐난다. 불타께서 법화경을 설법한 인도 영축산(靈鷲山)의 불국토를 이곳으로 옮겨온 느낌이랄까. 그래서인지 햇살 따라 멋대로 굽은 솔향의 송림불토(松林佛土), 고색창연한 부도림, 흥선 대원군이 썼다는 일주문현판 '영축산통도사(靈鷲山通度寺)' 글씨 등등은 나그네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여기저기 다니다 보면 배도 고프고 괜스레 걸음 빨라지지만 곧장 영산전 찾지 말고 마당에 선 오래된 탑 구경도 하고 가자. 남북국시대(통일신라 말엽)와 고려 초기 역사가 궁금하다면 잠시 이 탑 앞에서 당시를 상상해 보라. 다행스러운 것은 상륜부를 제외하고는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이며 전체적인 규모와 양식 등을 볼 때 9세기 후기의 특징이 잘 드러난 보물이라고 하니 예사로이 지나칠 것은 아니다. 하층 받침돌 아래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의성 관덕리 삼층석탑(보물 제88호) - 이 달 균 탑 지키던 네 마리 사자는 어디로 갔나 상실의 빈자리를 무엇으로 채울까 버려라 돌아올 기약 없는 기다림이 번뇌다 아프다. 우리 역사여. 많은 국보 보물들이 그렇지만 이 탑 역시 비운의 탑이다. 관덕리 삼층석탑엔 원래 있던 네 마리 사자상이 없다. 그런데 어찌 원형으로 건재 하는가? 이 사진은 국립대구박물관에 전시 되어 있는 석탑의 모조품이기 때문이다. 1934년 2월호 《건축잡지》에 실린 사진엔 분명 상층기단 윗면 네 귀퉁이에 암수 두 마리씩 돌사자 네 마리가 있었다. 그런데 훼손되지 않고 잘 생긴 두 마리는 1940년 도둑맞고, 조금 더 훼손된 두 마리는 대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사자상은 1963년 1월 보물 제202호로 지정되었다.(시인 이달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주불국사 다보탑 (국보 제20호) - 이 달 균 처용 탄식하며 울고 간 밤에도 탑은 이 자태로 무념무상에 들었다 역사는 바람 잘 날 없이 그렇게 흘러왔다 서라벌 여행 온 아이들의 왁자지껄 두어라 제어 마라 얼마나 아름다운가 부처님 시방 오셨다고 다보여래 설법 중 불국사는 언제쯤 고요할까? 관광객들과 수학여행 온 아이들은 왁자지껄 소란하다. 산사의 고요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다보여래는 늘 빙그레 웃고 있다. 신라 때부터 고려, 조선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바람 잘 날 없었지만, “그게 바로 사람 사는 일이라네.” 하며 옷깃 여민다. 불국사는 한때 폐사되었지만 다보탑은 온전하여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세밀히 살펴보면 상륜부(相輪部)에 보주(寶珠)가 없는 등 유실된 곳이 더러 있다. 원래는 네 마리 사자상이 있었는데 현재는 하나뿐이다. 없어진 사자상 가운데 1개는 영국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보관 중이며 나머지 두 사자상은 행적을 알 수가 없다. 그래도 다보여래는 웃으며 기다린다. 수행자에게만 부처님이 오시지 않는다. 저자거리에서 웃음을 파는 이에게도, 돌을 깎는 석수장이에게도 부처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 - 이 달 균 부석사 무량수전은 고려를 설법하고 소백산 안개는 석탑을 감싼다 열반한 큰 스님 얼굴 보였다 사라진다 부석사는 고려를 대표하는 목조 절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아 창건한 절이라 기록되어 있다. 무량수전 서쪽에는 부석(浮石, 일명 뜬바위)이 있는데 이 바위는 의상대사를 흠모하던 당나라 선묘(善妙)낭자가 변한 것이라는 전설이 있다. 원융국사는 1041년(정종 7)에 부석사로 들어와 화엄종통(華嚴宗統)을 이어받았고 입적할 때까지 부석사에 머물렀다고 한다.(시인 이달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안동 법흥사터 7층석탑 - 이 달 균 더 높이 오르다보면 하늘에 가까워질까 하늘의 소리 들으면 기원은 이뤄질까 오가는 기적소리가 천년의 고요를 깬다 발목 땅에 묻고 그 세월 버텼으니 뿌리는 지층 뚫고 멀리 뻗어 내렸으리 안동 땅 휘돌아가는 낙강 나루 어디쯤 늠름히 높이 오른 7층 탑신에 비해 공간배치는 협소하고 불안하다. 선 채로 탑 구경하려니 어깨가 좁아 보인다. 사진 찍기도 영 마땅치 않다. 정확한지는 모르지만 왜인들이 독립의 기를 끊고자 탑 옆으로 철로를 깔았다고 한다. 그래서 더 그러한지 갑갑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이 또한 운명임을 어쩌랴. 날개가 없으니 뿌리라도 뻗을밖에. 천년을 한곳에 서 있다 보면 분명 뿌리는 먼 곳까지 뻗어 있을 것이다. 낙동강 어느 한적한 나루에까지.(시인 이달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밀양 숭진리 삼층석탑 - 이 달 균 종소리 대신에 벼 자라고 익는 소리 목어소리 대신에 농투성이 노랫소리 고맙다, 전답이 된 절집 거룩한 부처님 세상 한때 밀양시 삼랑진읍에 있는 역은 꽤나 부산하고 번잡했다. 삼랑진역에 내려 부산에서 오는 서울행 경부선 열차를 갈아타는 곳이기에 규모는 작아도 제법 오일장이 번성했다. 낙동강이 흐르기에 주변의 늪지대에서 나는 민물고기들로 어탕이나 추어탕이 유명했다. 지금은 교통이 좋아져서 반대로 너무도 조용한 마을이 되고 말았다. 내비게이션은 절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으로 안내하는데 인내를 가지고 따라가면 논 가운데 작은 탑이 하나 나온다. 화려하지 않은 작고 소박한 탑은 저 홀로 외로이 고려를 지켜왔다. 탑을 빼고는 전혀 절의 흔적을 찾긴 어려운데, 근처 논밭과 개천에서 기와와 자기 조각 등이 발견되었기에 가리사(加利寺)의 옛터라고 전해진다. 절터는 세월이 흐르면서 경작지로 변했다. 고려 사람들은 절을 세워 마음부자를 기원하였는데 지금은 벼 익는 소리와 농부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오니 그때나 지금이나 부처님 세상은 넉넉하고 거룩하기만 하다.(시인 이달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