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조선의 아악을 이해하고 그 보존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상진행과 전변상웅(田邊尙雄-다나베히사오)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상진행은 일본 궁내성 악부(樂府)의 책임자였고, 다나베는 부속 기관이었던 아악연습소의 강사였는데, 어느 날 그의 스승 상진행 악장으로부터 당시 조선의 아악부가 폐지될 위기에 처해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 당시 총독부의 반응은 동물원과 아악부 중 동물원을 남기고 아악을 폐지한다는 결정을 내렸는데, 이미 그 이전부터 아악부는 재정곤란을 이유로 악인들이 감축되고 있었다. 1917년 무렵에는 겨우 50여명이 남게 되었다가 폐지가 결정되면서 명완벽 등 6명의 노악사만이 남아 잔무를 처리 중에 있었다. 일본 악부의 책임자였던 상진행 악장 역시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해 보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었다. ▲ 다나베가 찍은 종묘등가악(宗廟登歌樂), 1921년 대 그렇다.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지극히 불행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어온 아악부인가!! 저 멀리 신라시대부터 국가의 음악을 관장해 오던 음성서(音聲署)란 국가기관이 그 뒤 대악감이나 전악서 등으로 이름은 바뀌었으나 고
[한국문화신문 = 서한범 명예교수] 지난 주 속풀이에서는 조선의 음악 현황을 살피러 나온 다나베 앞에서 아악부의 존폐를 걱정하며 연주하게 된 노악사들의 심경을 상상해 보았다. 그들은 피눈물을 흘리면서 선조들에게 응원을 청하였을 것이고, 그러면서 최선을 다해 연주를 했을 것이라는 이야기, 이에 감동을 받은 다나베는 실로 세계의 보배인 이 음악을 동양의 음악으로 발전시켜 나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는 이야기, 악사들의 혼신을 다한 연주도 연주이지만, 그보다도 종묘제례 음악속에 녹아있는 한민족의 혼이 그의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하였다. 감동을 받은 다나베는 아악부의 청사를 확대 증축하는 문제, 악사들의 처우 개선문제, 아악의 보존을 당국에서 더욱 철저히 해야 된다고 청원을 하였고, 일본 정부는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아악부에서는 계획대로 일반인들로부터 아악생들을 양성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등, 등을 하였다. ▲ 다나베 히사오가 쓴 《조선, 중국음악조사기행》 실로 믿기 어려운 일이다. 침략국의 음악인이 식민지국가의 음악을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니 쉽게 믿어지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조선을 방문하여 조선의 아악을 직접 조
[한국문화신문 =서한범 명예교수] 지난 속풀이에서는 종묘제례에서 둘째 잔을 올리는 아헌례(亞獻禮)의 이야기와 종헌례, 철변두, 송신례와 관련된 음악이야기를 하였다. 아헌례에 쓰이는 정대업의 음악적 분위기는 보태평과 달리, 씩씩하고 활달하며 강렬하면서도 애절한 느낌을 주는 음악이란 점, 둘째 잔을 올리는 의미는 조상의 외적인 업적, 즉 무(武)와 공(功)을 칭송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 음악의 시작은 진고십통이라고 해서 큰 북을 10회 치는 것으로 시작하며 일무는 무무라는 점을 들었다. 그리고 종헌례는 셋째잔을 올리는 의식이며 음악이나 춤은 아헌례와 동일하지만, 음악을 끝낼 때는 대금십차(大金十次), 즉 징을 10회 쳐서 음악을 끝낸다는 점, 종묘의 제례음악에서 시작은 북소리, 종료는 쇳소리를 내는 것은 고진퇴금(鼓進退金)으로 옛 전쟁터에서 북소리 울리거든 진격, 쇳소리 나면 퇴각이라는 전술에서 유래되었다는 점, 다음의 의식은 철변두와 송신(送神)례로 이어지며 음악은 공히 진찬이란 점, 특히 종묘제례악은 1920년대 초, 조선의 음악을 살피기 위해 나온 일본의 다나베 히사오(田邊常雄)를 감동시켰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 다나베가 찍어 책에 올린
[한국문화신문 = 사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종묘의 제사의식 중 영신례, 전폐례, 진찬, 초헌례까지의 음악과 춤 이야기를 하였다. 영신례는 신을 맞이하는 의식으로 <희문>을 헌가에서 연주하며 왼 손에 약(), 오른손에는 적(翟)을 들고 추는 문무(文舞)가 행해진다는 점, 두 번째 의식은 전폐(奠幣)례로 등가에서 <전폐희문>을 연주하며 역시 문무가 추어진다는 점, 전폐희문은 희문을 변주시켜 연주한다는 점, 세 번째 의식은 진찬의 예로 진찬이라는 악곡을 연주하지만 일무는 쉬게 된다는 점을 말했다. 또 종묘나 문묘는 음악을 연주하는 악대가 두 곳에 나누어져 있는데, 돌계단 위의 악대는 등가, 댓돌 아래 넓은 뜰에 위치한 악대는 헌가라는 점, 그리고 네 번째 의식이 바로 첫잔을 올리는 초헌례의 의식인데 여기서는 보태평 전곡을 반복하여 연주하게 되며 춤은 문무가 이어진다는 점, 제사를 지낼 때 초헌, 아헌, 종헌 등 세잔을 올리는데, 그 중에서도 첫째잔의 의미는 조상의 내면세계, 즉 문(文)과 덕(德)을 칭송하는 의미라는 점을 이야기 하였다. ▲ 종묘제례에서 일무를 추고 있다. 이번 속풀이에서는 종묘제례에서 둘째 잔을 올리는 아헌례(亞獻禮)의
[한국문화신문 = 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세조이후 종묘제례에 연주되고 있는 보태평 11곡의 이름, 임진왜란으로 인해 중단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점, 전쟁은 인명의 손실이나 재산의 피해, 주권의 침해가 막대하지만 이와 함께 눈에 보이지 않는 문화의 공백, 예술의 퇴영을 가져오는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전쟁이 끝난 다음 인조임금 때 다시 종묘에서 음악이 연주되기 시작하였으나 그 규모는 매우 초라한 모습이 되었다는 이야기, 실례로 성종 때의 헌가악사는 70여명이었으나 그 절반도 못되는 23명뿐이었으며, 특히 거문고, 가야금, 향비파와 같은 향악기들이 빠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러나 보태평과 정대업이 종묘의 제사음악으로 채택된 이래, 오늘날까지 그 음악의 전승과정은 충실한 편이라는 이야기, 역사성만으로도 가치는 충분하나 그 위에 예술성을 인정한다면 이 음악의 가치는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 그래서 국가는 1964년 12월, 종묘제례악을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하였고, 이 음악의 예능보유자로 성경린 외 19명을 인정한 바 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 종묘제례악에서 편경을 연주하는 모습 이번 주에는 종묘제례의
[한국문화신문 = 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조선조의 역대 임금들의 신위가 모셔져 있는 종묘에서 이분들을 위한 제례를 할 대 연주하는 음악의 총칭이 종묘제례악이고, 실제로 연주되고 있는 악곡의 이름은 「보태평」과 「정대업」이라는 이야기, 보태평은 첫잔, 정대업은 둘째잔과 셋째잔을 올릴 때 연주된다는 이야기, 종묘제례악은 관현타악기들의 합주음악이면서 성악과 의식무를 포함하고 있어서 악가무의 종합연출이란 이야기를 했다. 또 보태평과 정대업은 세종17년(1435)에 지어졌으나 그 뒤 세조시대에 와서 개작을 한 후, 종묘의 제례음악으로 채택이 되었다는 이야기, 고쳐진 음악은 세종 때에 비하여 음계가 높아졌다는 점, 악곡의 수를 줄였다다는 점, 악곡의 길이를 원래의 악곡보다 짧게 줄였다는 점, 악장가사의 자구를 줄인 점 등이지만, 가사의 원 뜻은 그대로 살리고 있다는 점, 종묘제례악으로 채용이 된 후, 선조임금까지는 충실하게 쓰였다는 점 등을 이야기 하였다. 참고로 세조이후 종묘제례에 연주되고 있는 보태평 11곡의 이름은 1, 희문(熙文) 2,기명(基命) 3, 귀인(歸仁) 4, 형가(亨嘉) 5, 집녕(輯寧) 6, 융화(隆化) 7, 현미(顯美) 8, 용광정명(龍光貞明
[한국문화신문 = 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음악의 범주에 포함되는 기악, 성악, 춤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음악의 개념은 악기로 연주하는 기악만이 아니라 시나 사를 노래하는 성악, 무용까지도 포함하고 있다는 개념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였다. 기악과 성악, 춤 등이 각기 독립적으로도 존재할 수 있지만, 원래는 한 뿌리에서 자라난 줄기라는 이야기도 하였고, 가야금 악사 우륵선생이 신라의 3제자에게 그의 음악을 전해 주면서 한 사람은 악기, 또 한사람은 노래, 그리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춤을 지도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또한 이러한 전통은 조선조 이후, 현재까지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데, 왕가 시절의 아악부나 국립국악원의 국악사 양성과정에서도 기악 전공자들에게 성악과 춤을 가르쳐 거의 전문가 수준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 그러한 배경은 악의 개념이 악, 가, 무 일체라는 점을 확인하며 생활 속에서 함께 익혀왔기 때문이라는 이야기, 그리고 대한민국의 무형문화재 제1호가 바로 <종묘제례악>인데, 바로 이 음악이 기악, 성악, 춤 등으로 구성된 대표적인 음악이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번 속풀이에서는 종묘제례악에 대하여 개략적인 이해를 돕고자 한다. 종묘제
[한국문화신문 = 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산조음악의 악보화문제, 즉 산조를 위시하여 판소리나 시나위, 무악과 같은 음악은 악보가 필요 없다는 무용론(無用論)과 유용론(有用論)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산조음악처럼 유동성이 심한 음과 미묘한 음정의 표기나 음색, 또는 농현의 모양을 악보화 할 수 없다는 무용론의 주장은 자칫 자유분방하고 역동성(力動性)이 생명인 산조음악이 악보로 인해 고착될 위험이 크다는 점을 주장한다는 이야기를 썼다. 그러나 현대의 교육은 악보라는 매체가 절대적이라는 이야기, 그러므로 유용론의 주장처럼 악보의 장점을 살리면서 악보가 주는 폐단은 최소화해야 한다는 이야기, 산조는 12현 가야금으로 타야 제대로 된 연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이야기, 18현, 25현 등의 개량가야금은 기존의 12현 가야금과는 전혀 다른 악기임으로 전공의 세분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 산조음악에 있어서 장단의 비중은 곧 산조음악 그 자체라 할 정도로 중요하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이번 주부터는 음악의 개념 속에 기악, 성악, 춤이 포함되어 왔다는 이야기, 나아가 전통춤과 반주음악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도록 한다. 노래와 반주음악, 또는 춤과
[한국문화신문 = 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산조의 전수방법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하였다. 종래에는 구전심수(口傳心授)의 방법이 유일하였는데, 이는 선생과 제자가 인간적인 유대관계를 갖기 때문에 더욱 훌륭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배우는 사람의 기억력에 의존하기 때문에 학습 분량이 제한적이라는 이야기, 그래서 근래에는 악보를 통한 전수방법이 일반적이나 이 역시 악보 자체가 음악이 아니기 때문에 악보와 실제 음악의 괴리를 어떻게 좁히느냐 하는 것이 문제로 남는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와 함께 다양한 농현이나 시김새를 표현하는 공통적인 기호나 부호의 약속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이야기, 산조음악이 전라도, 혹은 충남 일부지역에서 연주되기 시작하였으나 지금은 어느 특정지역이나 특정인의 구분 따위는 별로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이야기, 장차 산조음악의 세계화가 도래할 경우, 어느 외국인이 한국인보다 더욱 더 산조음악을 잘 연주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이야기, 상상만으로도 반가운 일인데 이미 시작이 되고 있는 분위기여서 더욱 기대가 된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산조음악의 전수, 특히 한국인뿐 아니라 전 세계인이 즐기는 음악이 되기 위해서는 악보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
[한국문화신문 = 서한범 명예교수] 지난 주 속풀이에서는 이민영의 세 번째 가야금 독주회 이야기를 하였다. 산조 음악의 전통은 전통적인 12줄의 가야금으로 연주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민영은 18현으로 종래의 가야금보다 6줄이 늘어난 가야금으로 초연하면서 극찬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또한 새로운 주법에 도전이라도 하듯이 25현 가야금으로 북한의 눈이 내린다 를 연주하였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뿐만이 아니라 북한에서 개량한 대표적인 현악기 옥류금(玉流琴)을 김계옥교수로부터 익혀서 영역을 확대시켰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국립민속국악원을 비롯하여 서울의국립국악관현악단,국립남도국악원,전주시립국악단,전주전통문화센터,강원도립,목포시립교향악단등과 협연무대를 가졌으며 해외연주 활동도 활발했던 것이다. 특히 지난 주 가야금 독주회에서 백인영류 18현 산조외에 5곡을 발표하였는데, 특히 18현 산조는 고 백인영 명인이 2002년부터 직접 가락을 읊어 주면서 짠 산조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이번 속풀이에서는 산조 음악의 속이야기를 조금 해 보고자 한다. 종래의 산조음악을 전수하는 방법으로는 선생이 전해주는 대로, 선생의 가락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