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이규봉 기자] 7월 9일 0시 조금 지난 비행기로 귀국길에 올랐다. 마음이 심히 복잡했다. 장준하와 박정희를 비교해 보았을 때 우리는 누구의 삶을 따라야 하는지. 장준하의 삶을 따라야 하는가? 아니면 박정희의 삶을 따라야 하는가?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교육을 시킬 것인가? 장준하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쳐야 하는가? 아니면 박정희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쳐야 하는가? 왜냐하면 그 둘의 삶은 너무도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이자 민주언론인이며 반독재민권운동가인 장준하 ▲ 1973년 12월 24일 서울 YMCA 2층 총무실에서 개헌 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발표하는 장준하 @장준하기념사업회 광복군 장준하는 1945년 11월 23일 김구 선생과 함께 그렇게 바라던 고국으로 환국했다. 그는 일본군 부대를 탈출하면서부터 해방이 되고 김구 주석의 비서로 활동할 때까지는 조국의 광복을 되찾는 데 헌신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1953년 3월 잡지 《사상계》를 창간했다. 1958년 8월호에 실린 함석헌의 글로 필화사건을 맞았다. 탄압에 맞서 다음해 2월호는 권두언을 백지 상태로 발간해 친일파를 등에 업고 독재를 일삼는 이승만 정권을 비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최근 교학사 역사교과서에 대한 논란이 온 나라를 시끄럽게 하는 가운데 친일∙독재미화 뉴라이트교과서 무효화 국민네트워크 출범 기자회견이 오늘 11시 30분 교육부 앞(정부종합청사 정문)에서 열렸다. 친일∙독재미화 뉴라이트교과서 무효화 국민네트워크는 항일독립운동가기념사업단체연합회, 흥사단, 한국YMCA전국연맹, 참교육학부모회, 학술단체협의회. 역사정의실천연대 등 전국 465개 단체가 참여하고 있는 교학사 교과서 반대 시민연합체다. ▲ 온 나라 465개 단체가 참여하는 친일∙독재미화 뉴라이트교과서 무효화 국민네트워크가 출범 기자회견을 여는 모습. ▲ 인사말과 규탄발언을 하는 한상권 대표, 이이화 선생, 이영주 수석부위원장, 김원웅 회장(왼쪽부터) 기자회견은 한상권 역사정의실천연대 상임대표가 인사말을 했고, 역사학계 원로이며, 전 동민농학혁명기념재단이사장 이이화 선생의 일본인들이 일본어를 국어로 지칭한 것을 마치 한국어를 말한 것으로 해석하고, 독재자 이승만을 추앙하는 교과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규탄발언이 이어졌다. 또 김원웅 항일독립운동가기념사업단체연합회장은 교학사 교과서는 일본 후쇼사 교과
[그린경제 = 정석현 기자]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는 오는 2014년 2월 28일까지 안동독립운동가 어록전이 열린다 일제강점기 치열하게 펼쳤던 안동독립운동가들은 과연 어떤 말들을 남겼을까? 이제라도 안동독립운동가들의 가슴 절절한 외침을 들어보자. 본래 대한民으로서 차라리 죽을 지언정 일본民 되기를 바라지 않는 국민이 독립을 외친 것이 무슨 법에 맞는 다는 것인가 -이상동 판결문(고등법원, 1919년 5월 12일)- *이상동(李相東)독립투사에 대하여... 1865년(고종 2)1951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건초(健初), 호는 만진(晩眞). 이상동(李相東)의 형은 이상룡(李相龍)이다. 이상동은 1895년(고종 32)에 의병장 신돌석(申乭錫)의 지휘 아래에서 싸웠는데, 형 이상룡과 함께 참여하였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이루어지자 이상동은 대한협회(大韓協會)의 안동지회에 들어가, 국권을 회복하는 운동에 참여하였다. 1911년에는 기독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였으며, 이후 장로(長老)가 되어 교회를 건립하는 등 기독교를 전하는 데 앞장섰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안동에 있는 한 시장에서 기독교 교인들과 함께
[그린경제=이윤옥 기자] 최근 분개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매우 많다. 내지(일본) 및 구미의 문제는 제쳐두고 특히 내 고향 조선의 최근 사태 가운데 매우 유감스런 일이 많다. 우리들 동지가 이전부터 희망하던 동양의 평화를 핵심으로 하는 한일합병의 대사업은 사실 이토히로부미 공(公)을 중심으로 메이지천황의 성지(聖旨)를 도와 이뤄진 것이다. 더구나 유신(維新)의 공로자인 이토 공이 조선인에 의해 쓰러져 범상치 않은 희생을 지불한 것은 지금도 국내외인의 기억에 새로운 바다. 우리는 지금 무슨 얼굴로 지하에 있는 이토 히로부미 공을 대할 것인가? 메이지천황의 재위 중 이토 공이 살아있을 때는 충성심이 인정되어 어쩌면 일한동화(日韓同化)의 공덕이 곧바로 이뤄질 것으로 마음속으로 기대했는데 뜻밖에도 십 수 년이 지난 지금 조국(일본)을 향해 반기를 드는 무리가 나타난 것은 정치가 황폐해진 까닭이 아닐까? ▲ 오사카매일신문 1919.8.6 1면 기사 송병준의 (동경전화)대담 조선의 제2 유신 지하에서 이토히로부미를 볼 면목이 없다는 말을 한 사람은친일파 송병준이다. 그는 1919년 8월 오사카 매일신문에서 위와 같이 조국 일본을 위해 피를 토하는 심사로 조선에 대
[그린경제 = 정석현 기자]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는 오는 2014년 2월 28일까지 안동독립운동가 어록전이 열린다 일제강점기 치열하게 펼쳤던 안동독립운동가들은 과연 어떤 말들을 남겼을까? 이제라도 안동독립운동가들의 가슴 절절한 외침을 들어보자.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다 -서대문형무소 옥중 유언- * 김동삼(1878-1937) 독립투사는 누구인가? 본관은의성(義城). 원명은 긍식(肯植), 호는 일송(一松).경상북도 안동 출신이다. 1907년 고향에서 유인식(柳寅植)김후병(金厚秉) 등과 젊은 일꾼의 양성을 위해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세웠으며, 1909년에는서울양기탁(梁起鐸)의 집에서 신민회(新民會) 간부들과 독립운동의 기반 마련과 독립투사의 양성책을 협의하였다. 1910년 국권 침탈로 국내 활동이 어려워지자 1911년 만주로 건너가 통화현삼원보(通化縣三源堡)에서 이상룡(李相龍)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윤기섭(尹琦燮)김창환(金昌煥) 등과 함께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여 재만 동포의 농지개혁과 생활 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신흥강습소(新
[그린경제 = 정석현 기자]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는 오는 2014년 2월 28일까지 안동독립운동가 어록전이 열린다 일제강점기 치열하게 펼쳤던 안동독립운동가들은 과연 어떤 말들을 남겼을까? 이제라도 안동독립운동가들의 가슴 절절한 외침을 들어보자. 우리는 역사적 복수주의를 반복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들의 국권과 자유를 회복하려 함에 있다 우리는 결코 일본 전 민족에 대한 적대가 아니요 다만 일본제국주의의 야만적 통치로부터 탈퇴코자 함에 있다 우리들의 독립의 요구는 실로 정의의 결정으로 평화의 표상인 것이다. -6.10 만세 격고문 가운데서- *권오설 (18991930) 독립투사는 누구인가? 사회주의운동가. 별명 김형신(金亨信). 경상북도 안동 출신. 일본 유학생으로 1923년 7월 서울에서 결성된 사회주의사상단체인 신사상연구회(후에 화요회로 개칭)에 참여하였다. 1924년 4월 창립된 조선노농총동맹에서 화요회를 대표해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6월에는 김찬(金燦)의 권유로 조선공산당의 사전조직인 코르뷰로 국내부에 참여, 조선노농총동맹의 당 야체이카(細胞) 책임자로 활동하였다.1925년 4월 17일 국내에서 결성된 조선공산당 조직에 가담했으나
[그린경제 = 이나미 기자] 100년 편지에 대하여..... 100년 편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100년(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입니다. 내가 안중근의사에게 편지를 쓰거나 내가 김구가 되어 편지를 쓸 수 있습니다. 10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역사와 상상이 조우하고 회동하는 100년 편지는 편지이자 편지로 쓰는 칼럼입니다. 100년 편지는 2010년 4월 13일에 시작해서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됩니다. 독자 여러분도 100년 편지에 동참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매주 화요일 100년 편지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문의: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02-3210-0411 어느 덧 68주년 광복절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찌는 무더위와 장마를 불평하던 여유로운 여름날을 보내다, 문득 민족의 광복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신 애국지사들을 떠올려봅니다. 선열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의 평온한 일상은 상상할 수도 없었겠지요. 애국지사들의 피와 땀이 있었음에 그토록 그리던 조국 광복은 이루어졌지만, 송구하게도 오늘 날 후손들의 조국이 그저 무탈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최근 일본의 역사왜곡 교과서 문제와 더불어 일본 우익 정치인들의 과거사
[그린경제=전수희 기자]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 이 말은 만주 호랑이 김동삼 선생의 옥중 유언이다. 이 밖에도 이만도, 류인식, 이상동, 김지섭, 김시현 등의 독립투사 어록전이 열리고 있는 안동 천전리 내앞마을에 자리한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을 찾았다. ▲ 안동독립운동기념관 전경 2007년 문을 연 안동동립운동기념관(관장 김희곤)은 전시실, 연수교육시설, 독립운동가 추모벽, 야외학습장, 자료실과 수장고를 갖춘 곳으로 생생한 독립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기념관은 1894년 갑오의병에서 1945년 안동농림학교 학생항일운동에 이르기까지 51년간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전개한 안동인의 활동을 중심으로 꾸며져 있다. 전시물은 국외관, 국내관, 영상추모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국외관에는 안동출신 독립운동가들이 국외에서 활동한 모습을 생생히 전하고 있다. 1910년 나라가 무너지자 많은 안동인들은 만주로 망명하여 경학사, 신흥무관학교 등을 통해 동포사회를 형성하고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나아가 1920년~30년대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와 대한민국임시
[그린경제=이규봉 기자] 충칭은 중국의 남서쪽에 위치한 도시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의 임시 수도였다. 일본에 쫓긴 중국 국민당 정부는 중국해로부터 이천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이곳 내륙의 산악지대로 수도를 옮긴 것이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상하이에서 피난 나와 충칭에 자리 잡았다. 육로가 높은 산으로 전부 막혀 진입할 수 없었던 이곳에 일본군은 공중 폭격을 하여 시가지를 거의 초토화 시켰다. 전쟁이 끝난 후 수 십년간 복구하여 현재 인구는 3천만 명이 넘는 대도시가 되었다. 임시정부의 분열에 폭탄선언을 하다 장준하 일행은 기대와 희망을 갖고 목숨을 담보로 그 먼 거리를 걸어서 오직 조국의 광복을 위해 광복군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충칭의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그러나 린취안에서 김학규 주임이 그들을 말리며 한 말과 라오허커우에서 광복군 분견대가 그들에게 충칭으로 가지 말라며 한 말들은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니었다. 충칭에 살고 있는 많지도 않은 조선인에 비하면 파당이 너무도 많았다. 각 단체마다 정당마다 그들을 위한 환영회를 경쟁적으로 열었다. 처음에는 반가움에 기꺼이 그들의 환영식에 참석했으나 점차 실망하기 시작했다. 환영회는 형식적으로는 그
[그린경제=이규봉 기자] 7월 5일 금요일이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늘 갈 곳은 바둥역이다. 이곳이 바둥이니까 바둥역이면 근처에 있을거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이곳에서 자그마치 남쪽으로 100여 킬로미터 더 가야한다. 바둥이리고 하는 현이 그만큼 넓은 것이다. 우리가 있는 곳은 우리나라의 읍 소재지로 보면 된다. 읍 소재지에서 군 경계까지 가는 것이다. 그래서 단지 이름만 보고 바둥역에 왔다가는 역에서 바둥 시내까지 다시 100여 킬로미터를 더 가야 된다. 장준하 일행이 걸어서 온 곳은 바로 이곳 바둥까지였다. 이곳에서 사흘을 머문 후 5천 톤급 군용선박을 타고 만현(萬縣)을 경유하여 8일 만에 충칭(重庆)에 도착했다. 그래서 우리도 공식적으로는 바둥에서 주행을 끝냈다. 장준하 일행처럼 양쯔강을 타고 충칭으로 가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런 배가 더 이상 다니지 않는다. 유람선은 있지만 오래 걸리고 요금도 매우 비싸다. 그래서 바둥에서 바둥역까지는 차를 대절해서 갔고 충칭까지는 기차로 갔다. 대절했는데 말도 없이 사람을 더 태우네! 아침나절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휴식을 하면서 보냈다. 기차가 밤 12시 무렵에 출발하다 보니 일찍 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