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 = 이나미 기자] 100년 편지에 대하여..... 100년 편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100년(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입니다. 내가 안중근의사에게 편지를 쓰거나 내가 김구가 되어 편지를 쓸 수 있습니다. 10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역사와 상상이 조우하고 회동하는 100년 편지는 편지이자 편지로 쓰는 칼럼입니다. 100년 편지는 2010년 4월 13일에 시작해서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됩니다. 독자 여러분도 100년 편지에 동참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매주 화요일 100년 편지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문의: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02-3210-0411 어느 덧 68주년 광복절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찌는 무더위와 장마를 불평하던 여유로운 여름날을 보내다, 문득 민족의 광복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신 애국지사들을 떠올려봅니다. 선열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의 평온한 일상은 상상할 수도 없었겠지요. 애국지사들의 피와 땀이 있었음에 그토록 그리던 조국 광복은 이루어졌지만, 송구하게도 오늘 날 후손들의 조국이 그저 무탈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최근 일본의 역사왜곡 교과서 문제와 더불어 일본 우익 정치인들의 과거사
[그린경제=전수희 기자]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 이 말은 만주 호랑이 김동삼 선생의 옥중 유언이다. 이 밖에도 이만도, 류인식, 이상동, 김지섭, 김시현 등의 독립투사 어록전이 열리고 있는 안동 천전리 내앞마을에 자리한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을 찾았다. ▲ 안동독립운동기념관 전경 2007년 문을 연 안동동립운동기념관(관장 김희곤)은 전시실, 연수교육시설, 독립운동가 추모벽, 야외학습장, 자료실과 수장고를 갖춘 곳으로 생생한 독립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기념관은 1894년 갑오의병에서 1945년 안동농림학교 학생항일운동에 이르기까지 51년간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전개한 안동인의 활동을 중심으로 꾸며져 있다. 전시물은 국외관, 국내관, 영상추모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국외관에는 안동출신 독립운동가들이 국외에서 활동한 모습을 생생히 전하고 있다. 1910년 나라가 무너지자 많은 안동인들은 만주로 망명하여 경학사, 신흥무관학교 등을 통해 동포사회를 형성하고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나아가 1920년~30년대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와 대한민국임시
[그린경제=이규봉 기자] 충칭은 중국의 남서쪽에 위치한 도시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의 임시 수도였다. 일본에 쫓긴 중국 국민당 정부는 중국해로부터 이천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이곳 내륙의 산악지대로 수도를 옮긴 것이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상하이에서 피난 나와 충칭에 자리 잡았다. 육로가 높은 산으로 전부 막혀 진입할 수 없었던 이곳에 일본군은 공중 폭격을 하여 시가지를 거의 초토화 시켰다. 전쟁이 끝난 후 수 십년간 복구하여 현재 인구는 3천만 명이 넘는 대도시가 되었다. 임시정부의 분열에 폭탄선언을 하다 장준하 일행은 기대와 희망을 갖고 목숨을 담보로 그 먼 거리를 걸어서 오직 조국의 광복을 위해 광복군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충칭의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그러나 린취안에서 김학규 주임이 그들을 말리며 한 말과 라오허커우에서 광복군 분견대가 그들에게 충칭으로 가지 말라며 한 말들은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니었다. 충칭에 살고 있는 많지도 않은 조선인에 비하면 파당이 너무도 많았다. 각 단체마다 정당마다 그들을 위한 환영회를 경쟁적으로 열었다. 처음에는 반가움에 기꺼이 그들의 환영식에 참석했으나 점차 실망하기 시작했다. 환영회는 형식적으로는 그
[그린경제=이규봉 기자] 7월 5일 금요일이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늘 갈 곳은 바둥역이다. 이곳이 바둥이니까 바둥역이면 근처에 있을거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이곳에서 자그마치 남쪽으로 100여 킬로미터 더 가야한다. 바둥이리고 하는 현이 그만큼 넓은 것이다. 우리가 있는 곳은 우리나라의 읍 소재지로 보면 된다. 읍 소재지에서 군 경계까지 가는 것이다. 그래서 단지 이름만 보고 바둥역에 왔다가는 역에서 바둥 시내까지 다시 100여 킬로미터를 더 가야 된다. 장준하 일행이 걸어서 온 곳은 바로 이곳 바둥까지였다. 이곳에서 사흘을 머문 후 5천 톤급 군용선박을 타고 만현(萬縣)을 경유하여 8일 만에 충칭(重庆)에 도착했다. 그래서 우리도 공식적으로는 바둥에서 주행을 끝냈다. 장준하 일행처럼 양쯔강을 타고 충칭으로 가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런 배가 더 이상 다니지 않는다. 유람선은 있지만 오래 걸리고 요금도 매우 비싸다. 그래서 바둥에서 바둥역까지는 차를 대절해서 갔고 충칭까지는 기차로 갔다. 대절했는데 말도 없이 사람을 더 태우네! 아침나절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휴식을 하면서 보냈다. 기차가 밤 12시 무렵에 출발하다 보니 일찍 갈
[그린경제 = 이한꽃 기자 ] 지금은 그저 묵묵히 전주시내를 굽어보고 있지만 전주 사람들에게 다가산은 눈물같은 공간이다. 일제 강점기에 다가산 정상에 세워진 신사를 참배하기 위해 닦아 놓은 이 길을 참궁로(參宮路)라 하였다. 곧 신사에 참배하러 가는 길이라는 의미인데 다가교를 신사에 참배하기 위해 건너는 다리라는 의미의 대궁교(大宮橋)라고 이름 지은 것과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전주신사(神社)가 있던 다가공원 중턱 팻말에써 놓은 글이다. 역시 역사의 고장 전주다웠다. 남원신사, 인천신사, 나주신사 터에서는 못보던 것이었다. 다가공원 입구 등나무 의자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던 어르신들에게 다가가 전주신사가 있던 곳을 물으니 앞 다투어 선뜻 길을 안내 해준다. 다가공원 꼭대기가 그 자리라면서 산꼭대기로 오르는 중턱에 표지판도 있다고 친절히 가르쳐주는 것이다. ▲ 다가산중턱에 세운 팻말 어르신들이 가르쳐준 공원 꼭대기를 향해 발길을 돌리자니 크고 작은 돌비석들이 나란히 줄지어져 있다. 이 지방 유지들을 위한 공덕비 같았다. 공덕비를 보면서 오른쪽으로 돌아 산마루로 오르는 길은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었고 오른편에는 활터였다. 어르신들이 일러준대도
[그린경제 = 이나미 기자] 100년 편지에 대하여..... 100년 편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100년(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입니다. 내가 안중근의사에게 편지를 쓰거나 내가 김구가 되어 편지를 쓸 수 있습니다. 10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역사와 상상이 조우하고 회동하는 100년 편지는 편지이자 편지로 쓰는 칼럼입니다. 100년 편지는 2010년 4월 13일에 시작해서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됩니다. 독자 여러분도 100년 편지에 동참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매주 화요일 100년 편지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문의: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02-3210-0411 안녕하십니까. 국가기록원 학예연구관 이강수입니다. 이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0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헌법은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어떤가요. 최소한 대한민국 국군의 역사성과 뿌리는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광복군 제5지대 창설 기념사진 잘 아시겠습니다만,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광복군 등 해외 무장투쟁세력이 귀국하지 못한 상태에서, 국내에서는 다양한 군사단체들이 신국가의 창군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리
[그린경제=이규봉 기자] 7월 3일 아침 7시에 싱산을 출발했다. 장준하 일행의 행적을 따르면 우리는 여기서 자전거 주행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바둥으로 갈 수도 있다. 하지만 여비가 떨어진 또 다른 일부는 산을 넘어 바둥으로 걸어갔기에 그들을 생각해서 우리는 산을 넘기로 했다. 참, 그들은 왜 돈을 그렇게 낭비해서 우리를 또 고생시키나! 싱산과 바둥 사이는 100여 킬로미터 되겠지만 산이 높고 하루 일정이 남아 원래 계획과 달리 중간에서 하루 더 묵기로 했다. 호텔에서 바둥으로 가는 길은 처음에 강을 따라 간다. 이 강을 따라 장준하 일행은 배를 타고 갔을 것이다. 어제 그렇게도 많이 산을 내려오고도 아직 덜 내려왔는지 길은 계속 내리막이다. 어디까지 내려갈 건지 걱정하게 만든다. 주변의 산은 매우 높은 데 내려간다는 것은 그만큼 올라갈 길이 더 높아진다는 것이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좋은 날이 너무 오래되면 불행이 올 수도 있는 것처럼. 강을 어느 정도 따라가니 다리를 건너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이제 우리는 강이 아닌 산으로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한다. 곧이어 터널이 나왔다. 호텔을 출발한 지 17km 만에 전체 일정을 통해 본 단 하나뿐인 터널이다.
[그린경제 = 이윤옥 기자] 오늘은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에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날이다. 리히터 지진계로 7.9도를 기록한 이날의 대지진을 일본에서는 관동대진재(関東大震災)라 부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 날을 조선인 관동대학살의 날로 기억한다. ▲ 조선인이 방화를 일삼고 폭동을 일으킨다는 오사카신문 호외.1923.9.3 90년이 지난 지금 왜 우리는 이 날을 기억해야 하는가? 아니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그간 관동대지진 때 희생된 조선인 사망자 수는 6천여명으로추정된다. 하지만문헌에 따라 1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등 정확한 숫자 파악이 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강효숙 원광대 사학과 교수는 지난23일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열린 관동대지진 90년을 맞아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사건에서 당시 학살된 조선인 수는 공식 기록보다 3.4배나 많은 2만 3,058명에 이른다는 독일 외무성의 사료를 들어 밝혔다. 뿐만 아니라 도쿄대공습 때 희생된 조선인 수도 41,000여 명에 이르는 등 관동대지진과 도쿄대공습으로 희생당한 조선인 수는 상상을 초월하는 숫자다. 이들 희생자들 중 일부는 여름철 불꽃놀이로 유명한 스미다가와구 요코즈나
[그린경제 = 이한꽃 기자] 인천신사(仁川神社) 가 있던 곳을 찾아 가던 날은 8월 더위가 막바지에 달하던 때라 몹시 더웠다. 일본인 작가 도다이쿠코(도서출판 토향 대표)씨는 무더운 더위임에도 인천신사가 있던 곳을 안내해주었다. 신사가 위치한 자리는 지금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가 들어서 있는 자리였다.(인천광역시 중구 인중로 146번지) 먼저 학교 정문 입구 언저리에 차를 세우자마자 담장 쪽으로 걸어가던 도다이쿠코 씨는 한 오십 보 정도 걸어간 곳쯤에서 멈추어 서서 학교 담장을 가리켰다. 올려다보니 그곳에는 신사 앞에 놓였던 돌이 담장 마감 재료로 쓰고 있는 현장이었다. 일부 시멘트 부분 끝자락에 잇대어 있어 확연히 알 수 있지만 무심코 지나가면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담장을 둘러 본 뒤 우리는 교문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을 다 오르니 인천 앞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일 만큼 전망이 좋았다. ▲ 인천신사 모습 ▲ 신사 입구를 알리는 도리이 일제는 조선에 신사를 세울 때 남산신궁처럼 그 지역에서 전망이 가장 좋고 신성하다고 여기는 곳에 신사 터를 잡았다. 인천신사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본관 앞에 나란히 서 있는 1개의 석등과 2개의 도리이
[그린경제=이규봉 교수]7월 1일이다. 갈 길이 멀어 일찍 호텔을 나섰다. 앞을 바라보니 굉장히 높은 산이 앞을 가린다. 우리가 넘어야 할 산이다. 저걸 어떻게 넘어? 걱정도 잠시, 길가에 식당이 보이기에 아침을 길에서 먹었다. 쌀국수도 있고 밀가루 덩어리인 꽃빵에 역시 밀가루로 만든 전(일명 부치기)도 있었다. 전은 꼭 우리의 그것과 같았다. 그러나 그 흔한 밥이나 장준하 일행이 그렇게 좋아했던 두부탕은 없었다. 뜨거운 물이 있기에 중국에서는 찾기 힘든 인스턴트커피를 우리는 타 마실 수 있었다. ▲ 우리가 오늘 넘어야 할 산이다. ▲ 쌀국수, 꽃빵, 전으로 아침을 먹다. 그 흔한 밥은 없다. 또 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라오허커우를 떠난 장준하 일행은 산 속으로 들어갔다. 계곡을 지나고 절벽을 오르면서 파촉령을 올랐다. 엿새째 고원지대를 향해 오르고 있을 때 호랑이가 바로 앞에 나타났다가 가버렸다고 한다. 파촉령은 고원지대라 그곳에도 사람들이 살아 일정 거리마다 주막이 있어 배고픔을 달래 수 있었다. 겨울이라 고원에는 온통 눈으로 쌓여 있었다. 한파 속에 눈 위를 걷다 그 날 묵을 예정이었던 주막이 나오기도 전에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