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돌이는 소 우리에 길쌈애는 베틀 앞에 겨울 끝 하늘에는 미리내가 호젓하니 봄에는 한 믿나라를 죽도록 안고 싶네 * 결 미래내 : 겨울의 은하수 * 쇠돌이 : 견우성 * 소 우리 : 외양간 * 길쌈애 : 직녀성 * 겨울 끝 : 동짓달 * 미리내 : 은하수 * 믿나라 : 조국, 고국, 본국, 모국 * 한 믿나라 : 통일된 조국
어제까지 부드럽던 작은 봄의 아침건만 올아침은 핏대 올려 칼날을 세운 건가 빠알간 아기손 잎을 달래려 휘든거냐. * 가을 새암 : 단풍을 더 이쁜 빛깔로 해 주는 벼락 추위. * 작은 봄 : 소춘 * 올아침 : 오늘 아침 * 아기손 잎 : 빨갛게 물든 단풍 잎 가웃 가을(중순)이 지나가면 아침이 갑자기 쌀쌀할 때가 있다. ‘꽃 새암’ 아닌 ‘단풍 새암’인 느낌이다. 그러나 그 쌀쌀함이 단풍을 더 빨갛게 물들여 사람 맘을 기쁘게 해 준다. 꽃샘하고는 좀 다른 느낌의 아름다움이다.
먼 갈쪽 갈바람에 눈물만 쏟아나고 어릴 때 뛰놀던 어버이 믿고장을 오늘도 못 잊는 속을 스스로 달랜다. * 벼덕 : 볏단걸이 요즈음, 일본에서는 벼덕을 보는 일이 드물어졌다. 모심기부터 시작해서 김매기, 가을걷이에 이르기까지 다 여름지이틀(농기계)로 해 치우기 때문이다. 한국에도 그렇다고 들은 적이 있다. 아무리 ‘근대화’라 해도 예나 오늘이나, 앞으로도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인데……. 우리도 빵을 먹어야만 ‘근대화’를 할 수 있는 건가? 가끔 길 먼 농촌에 갔을 때 벼덕을 보면 고향 창원이 그리워진다.
어디서 지냈느냐 무엇이 좋으냐 왔다 갔다 하는 사이 살도 피도 줄어 드니 찾은 땅 믿고장이면 뿌리쳐서 살아야지. 두루미(학)는 우리 한겨레의 상징인 느낌을 가슴에 줄곧 안고 있다. 날개의 하얀 빛깔은 백자 같은 한겨레의 맘과 같고 나는 모습도 우아하기 때문이다. 또 두루미는 글양반의 상징이기도 하니 더더욱 좋다. * 글양반 : 선비
일주일 전 우리는 대통령 선거를 치렀습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은 지금까지 모두 18번의 대통령 선거를 했습니다만 그때마다 야당은 ‘갈아보자’를 여당은 ‘구관이 명관’을 외쳤지요. 18 차례의 치열한 여야 싸움에서 15대 선거 때 단 한 차례만 야당의 김대중 후보가 기존 여당을 뒤엎었고 나머지는 모두 여당의 승리였습니다. 그동안의 선거 가운데 치열한 선거였던 3대와 7대의 선거구호에는 부정의 뜻을 나타내는 “못”이란 어찌씨(부사)가 쓰여 눈길을 끌었습니다. "못살겠다. 못참겠다" 같은 말이 그것이지요. 1956년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과 맞붙은 신익희는 내각책임제 개헌을 통한 책임정치의 구현만이 1인 독재의 폐해를 막는 지름길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때 거리는 온통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펼침막(현수막)이 나부꼈으나 호남 유세를 위해 타고 가던 기차 안에서 신익희 후보가 뇌출혈로 삶을 마감하는 바람에 진정한 민주주의에 목말라하던 이 땅의 많은 사람들에게 크나큰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또 하나 1971년에 있었던 제7대 대통령 선거는 박정희 후보에 맞서
“한가로이 살며 구차스러운 가운데에서도 없어서는 안 될 것은 오직 책 한 시렁ㆍ거문고 한 틀ㆍ벗 한 사람ㆍ신 한 켤레ㆍ지팡이 한 개 ㆍ차 달이는 화로 하나ㆍ등을 대고 따뜻하게 할 기둥 하나ㆍ서늘한 바람을 끌어들일 창 하나ㆍ잠을 맞이할 베개 하나ㆍ타고 봄 경치를 찾아 다닐 나귀 한 마리면 그만이다. 이것이 열 개의 버리지 못할 하나들이다. 늘그막을 보내는 데 이 밖에 또 무엇이 필요하랴.” 위 글은 조선 중기의 학자 권별(權鼈)의 문헌설화집 ≪해동잡록 2 본조(本朝), 김정국 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선비에게 꼭 필요한 것 가운데는 시렁에 가득한 책도 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문헌에 등장하는 “시렁”은 많습니다. 정약용의 ≪경세유표 12권 창릉지저 3≫에는 “곡식을 쌓는 법은 움집 안에 옆으로 가자(架子 : 시렁)를 많이 설비하고 복판에는 통로를 둔다.”라는 내용이 보입니다. 또 세종실록 18년(1436) 11월 17일 기록에는 “좋은 음식물을 얻으면 시렁 속에 갈무리해 두고서는, 손수 그릇 속에 있는 것을 꺼내서 먹고 다시 손수 이를 갈무리하니”라는 부분도 있지요.
“궁예(弓裔)는 호를 미륵불(彌勒佛)이라 하고 금모자를 쓰고 몸에는 방포(方袍, 네모난 가사)를 입으며 장자(長子, 큰아들)를 청광보살(靑光菩薩), 계자(季子, 막내아들)를 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 하고 나아갈 때에는 채색(綵色, 비단빛깔)으로 장식한 백마를 타되 동남동녀(童男童女, 어린 아이) 100명으로 하야금 일산과 향화(香花, 향기로운 꽃)를 밧들고 압흘 인도하며 승니(僧尼, 스님) 200여 인(人)으로 염불을 하고 뒤로 따르게 하얏다." 위는 일제강점기 잡지 ≪별건곤≫ 제29호(1930년 6월 1일) “라말괴걸 태봉왕 궁예 비사(羅末怪傑 泰封王 弓裔 秘史)”의 일부입니다. 신라말기에 태봉왕 궁예라는 사람이 스스로 미륵이라 일러 사람들을 현혹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미륵(Maitreya, 彌勒)이란 석가모니불의 뒤를 이어 56억 칠천만년이 지나면 세상에 와 석가모니불이 구제하지 못한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래의 부처를 말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미륵불신앙이 오랫동안 백성들의 희망 신앙으로 받아들여 폭넓게 이어져왔지요. 그래서 마을 곳곳에 가면 친근한 모습의 돌미
“가난하고 빌어먹는 사람을 구휼(救恤)하는 법이 이미 상세한데, 이웃과 족친(族親)들이 전혀 구휼하지 아니하여도 관리들이 검거(檢擧)하지 아니하니 미편(未便)하다.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구휼하지 아니하는 자는 규찰(糾察) 검거(檢擧)하여서 추핵(推劾)하여 아뢰도록 하라.”세조실록 8년(1462) 10월 26일자 기록입니다. 세조임금은 어려운 이들을 구하는 것이 법에도 있는데 이웃과 친지가 거들떠보지 않고 이를 관리들이 잡아들이지 않는 것을 나무라고 있습니다. 여기서 구휼(救恤)이란 “재난을 당한 사람에게 금품을 주어 구하는 일”을 말합니다. 또 성종실록 13년(1482) 3월 23일자 기록에는 수령들이 백성을 구휼하지 않고 돌려보내 구걸하다 죽는 일을 아룁니다. 그러면서 백성은 갓난아기이고 임금은 부모이며, 수령은 유모 또는 보모인데도 백성을 구휼하지 않고 당상에 앉아 큰소리만 치고 구휼을 제대로 못하고 있음을 개탄하지요. 백성을 제대로 구휼하지 못하면 수령자리를 빼앗으라고 호통치기까지 합니다. 조선시대는 의지할 데 없는 이들의 한(恨)도 가뭄이 오는 원인이 될
“충청도 홍주 합덕지에 해마다 겨울이 되면 얼음의 모양이 용이 땅을 간 것 같이 되는 이상한 일이 있었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언덕 가까운 쪽으로 세로 갈아나간 자취가 있으면 이듬해는 풍년이 들고,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복판을 가로질러 갈아나가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혹 갈아나간 흔적이 동서남북 아무데로나 가로세로 가지런하지 않으면 평년작이 된다고 한다. 농사꾼들은 이것으로 이듬해의 농사일을 짐작한다.” 위는 ≪동국세시기≫ 11월조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내일은 동지입니다만 예전에는 이렇게 민간에 전해지는 믿음이 많이 있었지요. 또 이날은 동지부적(冬至符籍)이라 하여 뱀 ‘사(蛇)’자를 써서 거꾸로 붙여 잡귀를 막는 믿음이 있으며, 팥죽을 쑤어먹지 않으면 쉬이 늙고 잔병이 생기며 잡귀가 많아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짓날 날씨가 따뜻하면 이듬해에 병으로 죽는 사람이 많을 거라고 하며, 눈이 많이 오고 날씨가 추우면 풍년이 들 징조라고 여겼지요. 또 동짓날 추우면 해충이 적으며 호랑이가 많다는 믿음도 있었습니다. 동지에는 악귀를 쫓기 위해 죽을 먹었고, 여름 단오의 부채와 함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위는 윤봉길 의사 (1908. 6. 21. ~ 1932. 12. 19.)가 두 아들 모순(模淳)과 담(淡)에게 쓴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라는 시의 일부분입니다. 오늘은 25살의 꽃다운 나이로 조국의 독립운동을 외치다 숨진 윤봉길 의사가 형장의 이슬로 떠난 날이지요. 19살 나이에 농촌계몽운동에 뛰어든 윤 의사는 고향인 충남 예산에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글 교육을 통한 문맹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계몽운동만으로는 독립운동의 한계를 깨닫고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곧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비장한 각오의 글을 남기고 중국 망명의 길에 오릅니다. 그리고는 임시정부 지도자인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조국독립을 위해 기꺼이 한 몸을 던지게 되지요. 1932년 4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