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태는 태아의 생명력을 준 것이라고 생각하여 태아를 출산한 뒤에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보관하였습니다. 보관하는 방법도 신분이나 직위에 따라 다른데 특히 왕실에서는 나라 운명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하여 태항아리에 정성스럽게 보관해두었으며 이를 태실(胎室) 또는 태봉(胎封)이라 하였지요. 조선시대에는 태실도감(胎室都監)을 임시로 설치하여 이 일을 맡게 하였습니다. 이 태실은 온 나라 곳곳에 있는데 예를 들면 경북 성주의 세종대왕 태실처럼 명당을 찾아 태실을 만들었지요. 그런데 성종임금의 태실은 창경궁 안에 있습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요? 창경궁에는 조선시대 나라의 역사책을 보관 관리하였던 장서각이 있고, 그 장서각에서 춘당지로 가는 길목에 성종 태실이 있습니다. 이 태실은 원래 경기도 광주군에 있던 것을 1928년에 이곳으로 옮긴 것이지요. 일제강점기의 어수선한 시기에 태실관리를 제대로 못하다보니 일부 도굴되는 태실도 생기고 한편으로는 태실 자리가 명당이라 하여 일반인들이 주검을 몰래 묻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일제는 태실의 온전한 관리를 위해서는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수 없고 형벌을 당한 자는 다시 온전하게 될 수 없으니, 이는 진실로 성인이 삼가던 것이다. (중략) 손자신은 김득수의 무리가 아니었는데도 이미 절도로써 논하여 곤장을 때리고 자자(刺字)해서 종신(終身)토록 평민(平民)에 끼일 수 없게 하였으니, 그 원한이 막심할 것이다.” 이는 성종실록 3년((1472) 5월 17일자 기록입니다. 이처럼 조선 조정에서는 벌을 받는 가운데 혹시 억울한 이가 있는지 살피려는 노력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형(死刑) 같이 엄한 벌을 내릴 때에는 초복(初覆)과 재복, 그리고 삼복(三覆) 의 절차를 거치게 하였는데 이를 복심(覆審)이라 했지요. 이 복심은 조선왕조실록에 무려 233 건이나 나옵니다. 이 가운데는 위 글처럼 멀쩡한 생사람을 범인으로 끌어들여 벌을 받게 한 예도 있고, 양반 부인의 죽음을 놓고 자살인지 타살인지를 가리는 복심도 있으며 숙종실록 8년 (1682) 12월 13일자 기록처럼 서울과 지방의 사형수를 초복했다는 기록도 보입니다. 물론 조선시대에는 당쟁 탓에 수많은 억울한 이가 나왔었지만 이런 노력도
최근 뉴스를 보면 “추운 날 함께한 따뜻한 사랑의 연탄 배달”, “저소득 가정에 연탄 12,500장 지원” 같은 따뜻한 소식들이 보입니다. 그런가 하면 “삼산동 석쇠 연탄불고기”, “역삼동 연탄초벌구이 전문 식당”, “이호테우해변 항골 연탄불 생구이”, “연탄불에 구워 더 고소한 백화 양곱창”처럼 연탄으로 구워내는 음식도 인기입니다. 하지만, 예전 60~70년대 신문엔 연탄가스 중독사고 소식이 많았습니다. 주로 짚이나 장작을 땔감으로 쓰던 대한민국은 편리한 연탄이 나오자 도시나 농촌할 것 없이 연탄을 땔감으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1970년대 석유파동을 거치면서 인기를 끌었던 연탄은 하루 100만장까지도 생산했다지만 그 웬수같은 연탄가스는 갈라진 틈새로 새어나와 많은 생명을 앗아갔던 것입니다. 그 시절 연탄가스 중독이 되면 가정에서는 응급처치로 동치미국물을 마시도록 했지요. 그뿐만 아니라 당시 연탄은 불이 꺼지기 전에 새연탄으로 갈아줘야 했기에 새벽 2~3시에 깨어 코를 파고드는 독한 가스 냄새를 맡으며 연탄을 갈아야했습니다. 연탄과 관련된 또 다른 추억으로는 빙판길이
“사물이 같지 않은 것은 사물의 본질이니 억지로 이를 같게 해서는 안 된다. 여러 신하들이 일을 논의하면서 왈가왈부하는 것은 바로 맑은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니, 만약 한 사람이 창도하고 모든 사람들이 부화하여 고분고분 이견이 없다면 꼭 이것이 진정한 대동의 의논은 아닐 것이다.” 위 글은 정조임금의 시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요즘 어떤 정치인들은 국민의 뜻이 분열되면 안 된다면서 통합을 외치고 있습니다. 물론 통합이 바람직할 수도 있지만, 각자의 뜻을 말하지 못하고, 그저 앞에서 외치는 대로 따라가기만 한다면 그건 진정한 통합이 아니라 전체주의에 불과할 것입니다. 정조임금은 당대 최고의 학자로서 다방면에 걸친 문화사업을 추진하고 방대한 저술을 남겼습니다. 뛰어난 학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신하들의 왈가왈부가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한 정조는 세종임금과 비슷한 성향을 가진 임금입니다. 성군으로 추앙 받는 세종 역시 신하들이 실컷 왈가왈부하게 내버려 두었던 군주였지요. 물론 마지막 결정은 자신이 했지만 충분히 신하들이 자신의 의견을 내놓게 기회를 준
오늘은 대한제국 말기 우국지사였던 매천 황현 선생이 태어난 지 157년 되는 날입니다. 매천이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세상과 하직하며 자손들에게 마지막 남긴 말은 “나라가 망했으나 내가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나라에서 500년이나 선비를 길렀는데, 나라가 망할 때에 죽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어찌 원통치 않겠는가?”였습니다. 매천은 썩은 나라의 벼슬자리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대신 전남 구례에서 제자를 가르치고 시를 짓는 한편 자기가 보고 들은 당대의 역사를 기록했지요. 선비에게 지조가 아닌 나라를 팔아넘기라고 요구하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써내려간 그의 글들은 탐욕으로 가득찬 세상에 시퍼렇게 날이 선 기록이었습니다. 황현이 목숨을 끊던 바로 그 무렵, 매국노의 괴수 이완용은 일왕에게서 백작의 작위와 15만원의 은사금(恩賜金)을 받았는데 대한제국 황실과 친인척 관계가 없는 인물로서는 가장 높은 작위였지요. 같은 시대를 살았던 두 사람은 이렇게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고, 하나는 우국지사로 하나는 매국노로 남았습니다. 오늘 우국지사 매천 선생이 태어난 날.
국악에는 궁중과 양반이 즐기던 정악(正樂)과 백성이 즐기던 민속악(民俗樂)이 있지요. 다시 말하면 양반은 절제된 음악 곧 정악을 몸과 마음을 닦는 수단으로 썼고, 민속악은 백성이 삶의 한스러움을 풀어내는 도구로 즐겼습니다. 그런데 이 나눔은 바로 전통춤에서도 적용됩니다. 궁중무용과 민속무용이 그것이지요. 예를 들면 검무, 처용무, 포구락, 수연장, 봉래의, 학무 같은 것은 궁중무용이고, 민속무용에는 승무, 살풀이, 한량무, 강강술래, 탈춤 따위가 있습니다. 여기서 말 그대로 궁중무용은 궁궐에서 추던 춤이고, 민속무용은 궁궐이 아닌 민가에서 즐긴 것이지요. 그런데 실제로는 민속음악이라 하더라도 탈춤 같은 몇 가지 것들을 빼면 대부분 춤의 형태가 궁중음악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곧 민속무용에서 많이 추는 승무와 살풀이 같은 춤을 보면 궁중무용처럼 절제된, 정중동의 형태를 띤다는 것이지요. 그런 춤들은 춤추는 듯 멈추고, 멈춘 듯 춤추는 모양새가 기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나라의 평안과 태평성대를 기리는 뜻을 담은 엄숙하면서도 화려한 태평무, 웅혼한 기상과 진취
내일은 24절기의 스물한째 대설(大雪)입니다. 한해 가운데 눈이 가장 많이 온다고 하여 대설이지만, 원래 24절기의 기준점 중국 화북지방과 우리나라는 지역이 다르기 때문에 꼭 이때 눈이 많이 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번 대설 즈음엔 눈이 많이 올 모양입니다. 이미 어제도 많이 왔고, 내일도 많이 올 거라는 예보가 있었지요. 김광균 시인은 “설야(雪夜)”라는 시에서 눈이 오는 정경을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라고 읊조립니다. “눈은 보리의 이불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눈이 보리를 덮어줘야 추위로 인한 피해를 입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눈이 오지 않으면 기우제처럼 기설제(祈雪祭)를 지냈습니다. 숙종실록 11년(1685) 11월 13일 자 기록 “절후(節候)가 대설(大雪)이 지났는데도 한 점의 눈도 내리지 아니합니다. 중신(重臣)을 보내서 기설제(祈雪祭)를 종묘(宗廟)와 사직단(社稷壇) 그리고 북교(北郊)에서 행하기를 청합니다.”라고 임금에게 청하는 부분이 보이지요. 히말라야 산맥에 있는 카트만두라는 작은
“저런 고얀 환쟁이를 봤나. 그림을 내놓지 않으면 네놈을 끌고 가 주리를 틀 것이야.” “낯짝에 똥을 뿌릴까보다. 너 같은 놈이 이 최북을 저버리느니 차라리 내 눈이 나를 저버리는 것이 낫겠다.” 최북이 침을 퇴퇴 뱉고는 필통에서 송곳을 들고 나왔다. 그러고는 양반 앞에서 송곳으로 눈 하나를 팍 찌르는 것이 아닌가. 금세 눈에서는 피가 뻗쳤다. 비로소 그가 놀라 말에 오르지도 못한 채 줄행랑을 쳤다. 위 글은 민병삼 장편소설 ≪칠칠 최북≫에 나오는 대목인데 최북이 왜 애꾸눈이 됐는지를 잘 그려주고 있습니다. 올해는 탁월한 그림으로 양반과 세상에 맞섰던 천재화가 최북이 태어난 지 300주년입니다. 이를 기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내년 1월 20일까지 “최북 탄신 300주년 기념 전시”를 하고 있지요. 이 전시회에는 최북의 산수화, 화조영모화(꽃새짐승을 그린 그림), 인물화 23점을 소개하여 그가 왜 '최산수(崔山水)’, '최메추라기’라고 불렸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전시회에서 눈에 띄는 그림은 '호취응토도(豪鷲凝兎圖)'인데 부라린 눈, 붉은 혀는 도망가고 있는 토끼를 당장이
“경제민주화 시장 열렸다. 공정위와 로펌만 살판났네.”, “MB정부 기간 동안 가계는 곪고 기업만 살판”, “불난 집에 도적이 살판난다.” 같은 기사 제목이 보입니다. 여기서 “살판”이란 말은 무엇을 말할까요? 살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재물이 많이 생기거나 좋은 일이 거듭되어 살림이 좋아지는 판국”또는 “기를 펴고 살아 나갈 수 있는 판”을 말합니다. 다시 이 말의 유래를 백과사전에서 살펴보면 “광대가 몸을 날려 넘는 땅재주”를 말하고 ‘지예(地藝)’또는‘장기(場技)’라고도 하지요. 이것은 유랑 연예집단이던 남사당패와 솟대쟁이패들이 하던 놀이종목의 한 가지입니다. 남사당패 12가지의 땅재주 가운데 제일 마지막 재주로서, 땅재주의 기본을 이루지요. 하지만, 이 놀이는 큰 위험이 따르기 때문에 이를 벌이는 연예인들이‘잘 하면 살판이지만 못하면 죽을판’이라고 한 데서 따온 것으로 그들 스스로 한탄하며 부르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살판은 서양의 “아크로바틱(acrobatic)” 또는 비보이들이 추는 브레이크댄스(Break dance)와도 비슷하고 곡예 또는 기예라고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산을 바라보고 섰으니 세찬 비바람 맞으며 배고픔과 추위에 떨고 있네 멀리 거친 하늘 바라보니 눈보라 몰아치고 다시 광야를 바라보니 날이 저물어 가는구나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니 목이 너무 뻣뻣하고 발은 한곳에 머물러 있으니 다리는 한가하구나 조국의 흥망성쇠가 두 어깨에 걸려 있으니 어찌 살아서 고국에 돌아가랴 이 시는 학산 윤윤기(1900-1950) 선생의 ‘보초병을 생각하며’라는 시로 만주 벌판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보초병들의 모습을 보면서 애틋한 마음으로 쓰신 시입니다. 학산(學山) 선생은 전남 보성 출신의 항일독립운동가이자 민족교육에 앞장섰던 분이지요. 또 일제강점기에 “바른 사람, 바른 인재를 길러낸다.”라는 뜻으로 고향에 양정원(養正院)을 세워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받아들인 열린학교의 창시자이기도 합니다. 양정원에서는 수업료는 물론 책과 학용품까지 무료로 제공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쳤지요. 그리고 이곳은 여덟 살부터 서른 살까지 다양한 학생들이 전국에서 몰려들었는데 그 중심에는 언제나 학산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학산 선생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