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현재까지 전해지는 국악기는 약 60여종에 달한다. 이렇게 전해지고 있는 수많은 악기가운데는 음악 연주용이 아닌 의식에 필요한 의물(儀物)에 가까운 것도 있고, 사용법을 잃고 보관되어 있는 악기들도 포함되며, 문묘제례악(文廟祭禮樂)과 같은 음악에 상징적으로 편성되는 악기들도 상당수 있다. 따라서 이런 종류의 악기들을 제외하면 약 20여종의 악기가 오늘날까지 활발하게 쓰이고 있는 셈이다. 이 국악기를 분류하는 방법으로는 전통적으로 해 오던 계통에 따른 분류와 재료에 따른 분류가 있고 현대의 분류법에 따라 연주법(演奏法)에 의한 분류방법, 민족음악학적인 분류법 등 네 가지 방법에 의하여 구분하고 있다. 첫째의 분류방법은 음악의 계통에 따라 구분하는 분류이다. 음악의 계통이라 함은 과거 우리 음악의 갈래를 의미하는 말로 중국 고대의 아악(雅樂)인가, 중국의 속악인 당악(唐樂)인가, 한국땅에서 생성된 향악(鄕樂)인가 하는 분류에 따라 그 악기가 어느 계통의 음악에 편성되어 쓰였는가 하는 즉, 용도에 따른 분류방법이다. ≪악학궤범(樂學軌範)≫의 분류에서는 향부악기로 거문고, 가야금, 향비파, 대금, 향피리, 소관자, 풀피리 등 7종이 있고 당부악기에는 방
한국의 전통악기, 곧 국악기는 대나무나 명주실을 이용하여 만든 악기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물론 편경처럼 돌로 만들어진 악기도 있고 편종이나 방향처럼 쇠붙이를 재료로 하여 만든 것도 있으며 흙이나 가죽, 나무 등으로 만든 것도 있다. 여하튼 전통악기의 대부분은 자연산 재료를 그대로 활용하여 제작한 것이 특징이다.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전통음악의 고저(高低), 즉 선율을 이끌고 있는 악기들은 관악기(woodwind instrument)와 현악기(stringed instrument)들이다. 관악기의 주재료는 대나무로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고, 현악기들은 거의가 명주실을 오동나무통 위에 얹어 소리를 내고 있다. 선율을 만들어 나가는 주된 악기들의 재료가 대나무나 명주실, 오동나무라는 점에서 이들의 음색은 벌써 식물성 재료를 활용한 부드럽고 친환경적인 자연의 소리라는 점이 특징적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서양 음악이 금속성 악기에서 나오는 차가운 지성의 소리요 과학적인 음악이라면, 한국의 악기들은 식물성 소재에서 나오는 따스한 감성과 서정을 느낄 수 있는 철학적인 음악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어떤 사람은 국악기의 음색은 서양악기에 비해 어둡고, 탁하며
누렇게 머리 숙인 삶내음 좋고 좋네 갈걷이 끝나면 짐승들은 결잠 드니 언제면 이어진 된마 다 함께 지내냐 * 삶내음 : 벼내움 * 갈걷이 : 가을걷이 * 결잠 : 겨울잠 * 된마 : 북남(남북) 비무장 지대에 사는 짐승, 벌레들은 자유로이 무상출입을 하고 바닷고기도 그러하다. 그런대 우리는 어째서 맘대로 오갈 수 없는가? 한 겨레인데.
늦더위 지나가면 먼 메는 높은 하늘 가람 바람 가볍고 갈쪽 바람 오고마는 올해도 뒷마 사이를 번개만 치느나 * 가람 바람 : 강바람 * 갈쪽 바람 : 서쪽 바람 * 뒷마 사이 : 남북 간 재일동포들에게는 춘하추동 자나 깨나 늘 서쪽에 맘이 끌렸다. 고향이 서쪽에 있기 때문이다. 겨울에 서쪽서 불어오는 맵짠 바람조차도 정답고 상냥하고 그윽하다. 고향에서 불어오기 때문이다. 그만큼 고향은 그립고 또 그리운 것이다. 우리나라는 백범 스승님이 말씀 하셨듯이 남북이 하나가 되어야 참된 ‘우리나라’가 되고 내 고향이 있다고 실감된다. 언제면 그날이 올까?
“인천의 성냥공장 성냥공장 아가씨 하루에도 한 갑 두 갑 일 년에 열두 갑 치마 밑에 감추고서 정문을 나설 때 치마 밑에 불이 붙어…….“ 오래 전 군복무 했던 사람들은 아무 뜻도 모르고 고참을 따라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하지만, 이 성냥 속에도 우리나라 근대사가 숨어있음은 잘 모릅니다. 인천에 성냥공장이 처음 들어선 것은 1886년이라 하지만 기록이 남아있는 것은 1918년 송림동(옛 피카디리극장 터)에 세워진 “조선인촌회사(朝鮮燐寸會社)”입니다. 조선인촌회사는 신의주에 딸린 제재소까지 두었고, 남자 직원 200여 명, 여자 직원 300여명을 두었었다고 하지요. 당시에는 기계화가 되지 않아서 성냥 만드는 작업을 모두 손으로 했는데 이 일은 주로 가난했던 어린 소녀들의 차지였습니다. 그런데 하루 13시간 꼬박 서서 성냥개비 1만 개를 붙여야 겨우 60전을 받은 것은 물론 노동환경이 지나치게 열악하여 1930년대에는 여공들
“망망대해 달려온 바람 / 파도 하얗게 부수며 / 거친 숨 몰아쉬는 곳 태고에 연모하던 그 누구 있어 / 화산으로 뜨겁게 솟아올라 즈믄해 끝없이 바다를 향해 달려가는가?” 이는 이종수 시인의 입니다. 도리코지는 제주시 내도동 알작지 해변 가까운 곳에 형성되어 있는데 지하 깊숙한 곳에서 지표를 향해 올라오던 마그마가 지표 근처에서 굳어진 다음 바닷물의 차별침식작용에 의해 현재의 암맥군으로 자리 잡은 곳입니다. 이 ‘도리코지’ 암맥군을 제주환경운동연합 현원학 공동대표는 ‘바다를 연모하여 줄지어 서 있다’라고 말합니다. 180만 년 전부터 1,000년 전까지의 화산활동으로 형성된 섬 제주도는 화산지형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지구과학적 가치가 크고 경관이 아름답고 신비로움을 간직한 섬입니다. ‘코지’란 육지가 바다로 돌출한 지형을 말하는 ‘곶'의 제주도 사투리로 제주도에는 서귀포시 성산읍 신양리에 ‘섭지코지’도 있습니다. 또한 육지의 곶으로는 울산의 ‘간절곶’, 황해도 장연의 ‘장산곶’, 포항의 ‘호미곶’들이 있지요. 가만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신비한 형상의 '코지'는 자연이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 외로이 한양 길로 가는 이 마음 /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이는 고향 강릉을 떠나 서울로 가는 신사임당이 대관령을 넘으며 지은‘사친시’입니다.“고개가 하도 높고 하늘이 낮아서 고개 위가 겨우 석자”라는 말이 전해지는 대관령은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과 평창군 대관령면 횡계리 사이에 있는 고개로 예전에 눈만 오면 교통이 끊기곤 하는 험한 길이었습니다. 대관령 고갯마루는 높이가 832m인데 신라시대에는“대령(大嶺)”, 고려시대에는 “대현(大峴)”, “굴령(堀嶺)”이라 했으며, 1530년에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처음 대관령이라는 이름이 나타나지요. 대관령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옵니다. 강릉의 한 선비가 과거 길에 오르면서 곶감 한 접(100개)을 지고 대관령을 올랐는데, 굽이 하나를 돌 때마다 곶감 하나씩을 빼먹으며 고갯길을 올랐습니다. 그런데 고갯마루에 올라보니 곶감이 달랑 한 개만 남게 되어 대관령이 아흔아홉 굽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지요. 이 대관령을 지나던 영동고속도
강세황의 그림 가운데 연꽃을 그린 '향원익청(香遠益淸)’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연꽃 하나는 활짝 핀 모습으로 하나는 봉오리를 오므린 상태로 그려 연꽃의 다양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게 해줍니다. 그 뿐만 아니라 백련임에도 흰색 연꽃잎의 끄트머리에 붉은색을 찍어 발라 한껏 운치가 묻어납니다. 더구나 연잎 위에 살포시 앉은 청개구리는 금세라도 연꽃 아래서 퐁당거리는 소리가 들릴 듯 실감나게 합니다. ‘향원익청’을 그린 강세황은 조선 후기 남종화풍을 주도한 사대부 화가입니다. 각 서체에도 능했을 뿐만 아니라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같이 서양화풍을 받아들인 작품도 남겼습니다. 또한 강세황은 자신의 자화상도 그렸지요. 그 자화상에는 스스로 찬문을 적어넣었는데 ‘마음은 산림에 있지만 이름이 조정에 있다(於以見心山林 而名朝籍)’라고 했습니다. 마음과 이름이 다른 곳에 있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강세황은 평생 야인으로 살다 61살이 되어서야 영조임금의 배려로 처음 벼슬길에 올랐는데 이후 고속승진 하여 이‘자화상’을 그릴 당시에 종2품 가의대부까지 올랐습니다. 하지만, 그는 남들이 우러러보는 높은 자리에 있음에도 거들먹거리지 않고 야인시절의 마음으로 정치에 임했
오늘은 원래 그때를 아십니까를 내보내야 하는 목요일입니다만 내일이 24절기의 백로여서 백로 얘기로 대신합니다. 다음 주에는 예정대로 그때를 아십니까가 연재됩니다. 앞으로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독자 여러분께서 그때를 아십니까?에 관한 자료가 있으면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꼬리가 긴 잔서(殘暑, 남은 더위)도 차츰 물러가고 산양에는 제법 추색이 깃들고 높아진 하늘은 한없이 푸르기만 하다. 농가 초가집 지붕 위에는 빨간 고추가 군데군데 널려 있어 추색을 더욱 짙게 해주고 있는가 하면 볏논에서는 어느새 ‘훠이 훠이’ 새를 날리는 소리가 한창” 위 글은 “秋色은 「고추」빛과 더불어 「白露」를 맞으니 殘暑도 멀어가”란 제목의 동아일보 1959년 9월 8일 자 기사일부입니다. 내일은 24절기의 열다섯 번 째 백로(白露)이지요. 백로는 “흰이슬”이란 뜻으로 이때쯤 밤에 기온이 이슬점 이하로 내려가 풀잎이나 물체에 이슬이 맺힌다는 뜻입니다. 백로부터는 그야말로 가을 기운이 물씬 묻어나는 때입니다. 이때쯤 보내는 옛 편지 첫머리를 보면 “포도순절(葡萄旬節)에 기체만강하시고…
대한제국 말기 주한 미국 공사 알렌은 어느 날 공관에서 연회를 열고 대신을 초대했습니다. 이때 알렌은 여흥으로 당시에는 신기하기 짝이 없는 유성기를 틀어 놓았지요. 난생처음 보는 물건을 앞에 두고 조선의 대신들은 한결같이 못 본 체, 못 들은 체 했습니다. 그러자 알렌은 짧은 연설을 하고 이에 대한 한 대신의 답사를 모두 녹음하여 반시간 정도 뒤에 유성기로 다시 들려줬습니다. 알렌 생각에는 모두 놀랄 것으로 생각 했는데 대신들은 조금 전 했던 말이 그대로 재생되어 나오는데도 역시 눈만 조금 크게 뜰뿐 천장을 보거나 창밖을 보는 등 애써 태연자약하더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들은 왜 그랬을까요? 옛 선비들은 희비나 노여움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고(喜怒不形於色) 요사스러운 것은 뜻을 상하게 한다(玩物喪志)는 유교의 가르침을 금과옥조처럼 받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단지 눈물이 고였다는 것만으로도 벼슬하는 데 지장을 받았다고 하지요. 그래서 유성기를 처음보고 신기해할 대신들이 속으로는 놀랐겠지만 겉으로는 짐짓 태연한 척 했던 것입니다. 유성기 이후 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