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히는 세종대왕이 태어나신 날입니다. 사람들은 오늘이 스승의 날인 줄은 알지만 5월 15일이 세종대왕이 태어나신 날임을 잘 모릅니다. 세종대왕의 탄생 기록은 세종실록 총서에 나오는데 “태조 6년 정축 4월 임진에 한양 준수방(俊秀坊) 잠저(潛邸)에서 탄생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태조 6년”이란 서기로 1397년을 말하지요. 태어나신 곳 준수방은 지금의 어디일까요? 준수방은 현재 종로구 통인동 137번지로 경복궁 서쪽문인 영추문길 맞은편 의통방 뒤를 흐르는 개천 건너편인데, 청운동을 흘러내리는 한줄기 맑은 물과 옥인동으로 내려오는 인왕산 골짜기의 깨끗한 물줄기가 합치는 곳입니다. 현재는 경복궁 전철역에서 북쪽으로 200여 m쯤 가면 길가에 초라하게 “준수방터”라는 표지석 하나만이 달랑 있을 뿐입니다. 별로 행적이 없는 사람들도 생가 하나쯤 복원해두는 세상에 우리 겨레의 위대한 스승 세종대왕의 생가 복원은 시급히 해야 할 과제입니다. 세종대왕의 생전 이름 곧 휘(諱)는 “도(아래 설명 참조)이고, 시호(諡號) 곧
세종임금 때 위대한 과학자 장영실(蔣英實)은 관노이면서도 정3품 벼슬인 “호군”까지 오른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특히 명나라도 만들지 못하던 자동시보장치가 달린 물시계 자격루를 발명하고, 세계 최초로 측우기와 수표를 만들어낸 뛰어난 과학자였지요. 하지만, 그 위대한 과학자 장영실은 어처구니 없게도 그가 만든 어가가 부서지는 바람에 곤장 80대를 맞고 파직 당한 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그런 장영실의 이야기를 연극 무대에 올린 것이 지난 4월 24일부터 어제 5월 13일까지 국립극단이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공연한 “궁리(窮理)”였지요. “궁리(窮理)”는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이윤택이 대본을 쓰고 무대화한 것입니다. 이 연극은 그러나 장영실의 창의성이나 과학적 성취 대신 왜 그가 역사의 뒤안길로 홀연히 사라졌는가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장영실은 연극에서 당시 지도층 내부의 세력 다툼과 외교의 줄타기 속에
“팥빙수 팥빙수 난 좋아 열라좋아 / 팥빙수 팥빙수 여름엔 왔다야 / 빙수기 얼음 넣고 밑에는 예쁜 그릇 얼음이 갈린다 갈린다 / 얼음에 팥 얹히고 프루츠 칵테일에 체리로 장식해 장식해” 윤종신의 “팥빙수‘란 노래말입니다. 아직 여름이 되지 않았는데 벌써 한여름을 방불케 하는 더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느새 얼음이 생각나고 더불어 아이스크림이나 팥빙수가 생각나는 계절입니다. 팥빙수의 유래는 기원전 3000년 무렵 중국에서 눈이나 얼음에 꿀과 과일즙을 섞어 먹기 시작한 데서 비롯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 때 서빙고(西氷庫)의 얼음을 관원(官員)에게 나누어주었는데 이때 관원들이 이것을 잘게 부수어 화채를 만들어 먹었다는 기록이 전하지요. 지금의 빙수는 잘게 부순 얼음 위에 차게 식힌 단팥을 얹어 먹는 일본음식이 일제강점기 때 전해진 것입니다. 요즘 인터넷 검색을 하면 팥빙수가게를 소개하는 글을 비롯하여 빙수 위에 얹는 재료도 과일빙수ㆍ커피빙수ㆍ녹차빙수는 물론 인절미팥빙수ㆍ떡볶이팥빙수ㆍ흑임자팥빙수 같은 다양한 팥빙수가 선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렸을 때
"떡 날라 떡다리 똑똑 소리나 똑다리 / 흙으로 빚어 탈 나니 / 튼튼한 돌로 만들어라 / 나주와 함평을 꿋꿋이 이어준 다리 / 무심한 세월 속에 잊혀 / 유채꽃 희롱 속에 숨어 잠들어 있네" -양현자 '고막천다리'- 전라남도 함평군 학교면 고막리와 나주시 문평면을 잇는 함평고막천석교(咸平古幕川石橋)를 아십니까? 고막천(古幕川)에 동서로 가로놓인 돌다리 고막천석교는 1273년(고려 원종 14) 무안(務安) 법천사의 고막대사가 도술을 부려 만들었다고 하지요. 마을에서 떡을 만들어 이 돌다리를 건너 나주와 영산포에 떡을 팔았다 하여 일명 “떡다리” 혹은 “똑다리”라고 불립니다. 다리 모양은 좀 투박해 보이지만 멋 부리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느낌을 줍니다. 자연을 닮은 화강암 돌 4~5개를 포개어 교각을 만들고 네모난 돌을 한두 개 받쳐 굄돌로 삼았지요. 그 위에 다시 시렁돌을 올렸는데 이 돌은 노면보다 양쪽으로 50cm가량 튀어나와 있어서 멀리서 보면 마치 다리의 날개처럼 보입니다. 전체 길이 20m, 너비 3m, 높이 2.1m인 이 다리는 옛날엔 수수, 조를 널어도 한 알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상판에 틈이 없었다고 하는데 700여년이 지난 세월 때문인지 다리
“안응일(安應一)은 문성공(文成公)의 11대손으로 어버이를 섬기면서 효성을 다하여, 밤낮으로 곁에 모시면서 허리띠를 풀지 않았고 부모가 잠든 뒤에 곁에 누웠다. 낚시와 사냥으로 맛있는 반찬을 올리고, 옷과 이불이 더러워지면 손수 세탁하였으며, 어버이가 병들자 변(便)을 맛보아 증세를 징험했다. 상을 당하여서는 몹시 늙고 쇠약한 몸으로 집상(執喪, 상제 노릇 하는 일)에 예를 다하여 질대(帶, 상복의 띠)를 벗지 않았고, 채소와 과일을 입에 대지 않아 몸이 몹시 여위어 거의 목숨을 잃을 지경에 이르렀다.” 위 이야기는 안향의 19대 손인 안정구(安廷球 1803~1863)가 쓴《재향지(梓鄕誌》에 나오는 효자 이야기입니다. 또 여기에는 전주사람 이약림(李若霖)이 40년을 한결같이 어버이를 봉양하며 곁에서 조금도 곤궁한 모습이나 근심스러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으며 진주사람 강흡(姜恰)은 항상 몸으로 어버이의 이부자리를 따뜻하게 하였고, 저녁마다 손수 땔감의 무게를 달아 알맞게 덥혀드렸다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화천사람 권윤석(權胤錫)은 어머니 안씨(安氏)가 백 살
연산실록 11년(1505) 2월 20일 기록에 보면 “서울 밖의 운평(악기를 다루는 기생) 가운데 풀피리를 잘 불고 예쁜데도 숨겨진 자가 있을 것이니, 널리 다니면서 찾게 하라.”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원문에서는 “초적(草笛)”이라고 쓰였는데 “초금(草琴)”이라고도 했지요. 나뭇잎이나 나무껍질, 풀잎 따위를 입술로 불어서 소리는 내는 악기가 바로 풀피리입니다. 풀피리 연주자 가운데 나라에서 지정한 중요무형문화재는 없고, 현재 지방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데 보유자는 서울(제24호)의 박찬범 선생과 경기도(제38호)의 오세철 선생입니다. 조선 성종 때 성현(成俔) 등이 의궤(儀軌)와 악보를 정리하여 편찬한 음악서 《악학궤범》에 "예전에는 초적에 복숭아나무 껍질을 만 것이 있었다. 예전 사람이 이르기를 잎사귀를 입에 물고 휘파람을 부는데 그 소리가 맑게 진동하며, 귤과 유자의 잎사귀가 더욱 좋다 하였고, 또 갈대 잎사귀를 말아서 초적을 만드는 데 그 모양이 그와 같다 하였다. 지금은 벚나무 껍질을 즐겨 쓴다. 대개 나뭇잎이 단단하고 두꺼우면 다 쓸 수 있다. 그저 가만
“우수에는 삼밭을 갈고, 경칩에는 농기구를 정비하며, 춘분에는 올벼를 심고 청명에는 올기장을 심으며, 곡우에는 호미질하러 나가고 입하(立夏)에는 들깨를 심으며, 망종에는 모시와 삼을 거두고 하지에는 가을보리를 거두며, 입추에는 메밀을 심고 처서에는 올벼를 수확한다.” 위는 정조실록 22년(1798) 11월 30일 자 기록입니다.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일곱째인 입하(立夏)입니다. 입하는 여름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절기인데 ‘보리가 익을 무렵의 서늘한 날씨’라는 뜻으로 맥량(麥凉), 맥추(麥秋)라고도 하며, ‘초여름’이란 뜻으로 맹하(孟夏), 초하(初夏), 괴하(槐夏), 유하(維夏)라고도 부르지요. 이때에는 묘판에서 모가 한창 자라고, 밭의 보리이삭들이 패기 시작합니다. 집안에서는 부인들이 누에치기에 한창이며, 논밭에는 해충도 많아지고 잡초가 자라서 풀뽑기에 부산해집니다. 또 입하 때면 한창 찻잎 따기에 일손이 바빠집니다. 일반적으로 녹차는 곡우 전에 따 가공한 우전차를 최상품으로 칩니다. 하지만, 차의 성인으로 불리는 초의(艸衣)선사가 “우리 전통차는 곡우 전후보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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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도 박사가 되랴면 전과 가티 성균관 가튼 데만 다녀서는 안된다. 적어도 관립전문학교나 또는 경성대학 가튼 곳을 졸업한 다음에 무엇을 또 연구하야 론문을 제출하고 그것이 입격이 되여야 명색 박사가 될 것이다. (중략) 그것도 년수가 너무 멀어서 각갑하거던 남에게 구걸을 하야서라도 돈을 몃 백원만 주선하야 손쉽게 박사 운동을 하여라. 그러면 그럿케 실패는 하지 안을 것이다. (중략) 현재 조선에도 법학통론(法通) 한 권 못 사본 사람도 법학사가 되고 우주관(宇宙觀)이니 인생관(人生觀)이니 하는 문자 한아를 몰나도 철학박사된 일이 만치 안으냐.” 위는 일제강점기 잡지 제47호(1932년 01월 01일 발행)에 나온 “대풍자! 대희학, 현대 조선 10대 발명품 신제조법” 가운데 “제4 박사 제조법”이란 글입니다. 당시에도 법학통론 한 권 안 본 사람이 법학박사가 되고, 우주관이란 글자 하나 몰라도 철학박사가 되었다니 박사학위의 허술함이 엿보입니다. 몇해 전에는 가짜학위 소동으로 시끄럽더니 최근에는 박사학위 표절사건으로 또 한차례 홍역을 치루고 있습니다. 박사가 흔치
이제 본격적으로 농사철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전 농업국가였던 우리나라는 농업 생산성 향상을 위해 무척 고심했지요. 그래서 세종 때에는 정초 등이 지은 ≪농사직설((農事直說)≫이란 농업책이 나왔고, 효종 때는 신속이 엮은 《농가집성(農家集成)》 같은 책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농사관련 책으로 《과농소초(課農小抄)》도 있는데 이 책은《열하일기》, 《허생전》 등으로 유명한 조선후기 실학자 박지원(朴趾源)이 쓴 책입니다. 《과농소초(課農小抄)》는 충남 당진의 면천(沔川) 군수였던 박지원이 1799년에 쓴 책으로 땅을 깊숙이 갈아 잡초를 제거하는 따위의 농경법을 개량하여, 노동력을 줄이고서도 더 많은 수확을 할 수 있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으며 또 농민들에게 지우는 부역을 줄이고, 농기구의 개량을 통해 노동력을 절감할 수 있는 방법을 꾀하기도 했지요. 그뿐만 아니라 농업 생산력을 늘리는 방법으로 땅에 거름을 주는 방법의 개선과 논에 물을 대는 방법의 개량을 논하기도 했지요. 박지원은 사행단을 따라 청나라에 가서 중국 농업의 현황을 살펴 조선과 중국의 농학을 비교하면서 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