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들아 밥 올려야지 / 선생님은 언제나 나긋한 목소리로 / 우리의 도시락을 꺼내게 했다 / 얘들아 조개탄 좀 넣어라 / 당번이 영식이니 철균이니? / 선생님은 언제나 추운 우리반을 / 따숩게 해주었다 / 지지직 지지직 / 무쇠난로 위에서 층층이 달궈지던 / 양은 도시락 속의 추억 / 그 속에서 김순희 선생님 / 사랑도 뜨거워져갔다 - 양은 도시락 ‘김영옥’ - 무쇠 난로가 버티고 있던 겨울철 교실은 난로가 항상 중심이었습니다. 가까이 앉으면 덥고 난로에서 멀어지면 춥던 교실 안에서 6-70년대를 보낸 사람들은 기억할 것입니다. 조개탄이 아직 벌겋게 타오르기 전 연기로 가득하여 콜록이던 그 교실 정경을 말입니다. “하오 2시 열차는 논산역에 도착하였다. ‘떡 사시오 에이’, ‘벤또 사시오 에이’ ‘엿이랑 떡이랑…… 모두모두 조그마한 들판에 담아 이고 계집아이, 아낙네들이 산산이 나온다. 역부들이며 취체관의 눈을 피하여 슬금슬금 다가오는 들판장수들 - 언제 생긴 풍경이기에 언제까지나 계속되려나? 기자는 100원을 내던지고 도시락을 샀다. 두부에 명태보쌈, 깍두기에 배추
“동쪽누각의 매화를 찾아가는 길 東閣尋梅逕 차가운 향기 이는 곳 외로워라. 寒香生處孤 두어가지 성긴 그림자 쓸쓸하고 數枝影苦 늙은 나무는 반쯤 말라있네. 老樹半身枯 아름다운 이에게 주고 싶지만 欲爲美人贈 맑은 이 밤에 사라져 버릴 것 같아 其如淸夜 깊이 읊조리며 우두커니 서 있노라니 沈吟佇立久 조각달이 성 모퉁이로 숨네. 片月隱城隅“ 위 한시(漢詩)는 조선 선조 때의 시인 손곡(蓀谷) 이달(李達, 1539~1612) 선생의 문집 《손곡집(蓀谷集)》에 있는 입니다. 시인은 매화를 찾아 나섰고 그곳에서 만난 차가운 매화향을 아름다운 사람에게 주고 싶지만 밤사이 사라져버릴 듯하여 그냥 우두커니 서 있다는 아름다운 시지요. 마치 매화향이 40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진동하는 듯합니다. 옛 선비들은 보통 문무를 겸비했기에 장군들도 시를 지을 줄 알았습니다. 을지문덕 장군의 <유수장우중문(遺隋將于仲文)>과 이순신 장군의 가 대표적입니다. 그리고 조선시대 선비들은 꽃 피는 봄날이나 단풍이 아름다운 가을엔 으레 산에 올라 시회를 가졌습니다. 그들은 시를 주고받으며 인생과 자연을 노래
국악속풀이 46에서는 조나단 컨디트(Jonathan Condit) 박사의 논평을 통해서 국악과 서양음악의 차이, 그리고 궁정음악, 즉 아악과 민속악의 차이도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리라 믿는다. “한국음악은 자연에 좀 더 가까운 것 같고 서양음악은 인공적인 것 같다.”는 그의 평가는 매우 인상적이다. 이제 유럽의 신문들은 한국음악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살펴보도록 하겠다. 다음은 독일의 디벨트(DIE Welt)신문의 논평이다. “한국음악은 현대음악에 큰 위협을 느끼게 했다. 한국음악은 바로 현대음악이다. 500년 전의 종묘제례악이나 천년 전의 대취타(大吹打)가 바로 오늘의 현대음악이요, 그 본보기이다.” 이어서 프랑스의 르몽드(LE Monde)지와 르피가로(LE Figaro)지에 실린 기사를 보자. “우리 서구인들에게 이 신비로운 음악을 듣는다는 기쁨은 색채의 조화성과 아름다운 변화의 다양성을 맛보게 하여 황홀한 예술의 극치를 경험하게 하였다.” “전위 음악가들이 한국 음악을 들었을 때에 그들이 찾고자 하는 새로운 운율을 충족시켰을 것이며, 동시에 무
어디까지 왔는지 이곳은 어디냐 하늘아 말해다오 이 몸은 누구냐 가는가 바람탄 구름 오는가 해달아 * 스스로 돌이켜 보면 이곳이 어디고 나는 누구인지?
“흰 저고리 고름 날리며 / 일본 칸다구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칼 찬 순사 두려워 않고 / 2·8 독립의 횃불을 높이든 임이시여! 그 불씨 가슴에 고이 품고 / 현해탄 건너 경성 하늘 아래 모닥불 지피듯 독립의지 불붙이며 / 잠자는 조선여자 흔들어 깨워 스스로 불태우는 장작이 되게 하신 이여!“ 위는 이윤옥 시인의 시의 일부입니다. 오늘은 김마리아(金瑪利亞, 1892.6.18-1944.3.13) 애국지사가 고문후유증으로 눈을 감은 날입니다. 김마리아가 세 살 먹던 해에 34살이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죽는 바람에 과부가 된 어머니는 99칸 종갓집 맏며느리 자리를 뒤로하고 세 딸의 교육을 위해 학교시설이 있는 곳으로 이사하는 열성을 보인 덕으로 1910년에는 광주 수피아여학교에서 교사를 시작으로 1913년엔 모교 정신여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그 뒤 김마리아 애국지사는 동경유학 길에 오르지만 1919년 2·8독립운동에 가담하는 것을 계기로 유학을 포기하고 〈독립선언서〉10여 장을 베껴 변장한 일본 옷띠인 오비 속에 숨기고 차경신 등과 2월 15일에 부산항에 들어
“젊어 여기서 꽃을 한 번 보았는데 少年曾此一看花 늙어서 지금 오니 감개가 무량하구나 老大今來感慨多 세월은 머물지 않아 사람은 다 바뀌었는데 歲月不留人換盡 눈앞의 풍물들은 오히려 번화하기만 하구나 眼前風物尙繁華“ 위는 고려 말 조선 초 문신인 하륜(河崙, 1347~1416)의 한시입니다. 하륜은 조선 초 이방원을 도와 왕위에 오르게 하였고 왕권강화의 기틀을 다지는 데 이바지하였으며, 이첨과 함께 《동국사략(東國史略)》을 편수 했습니다.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하광정리에는 '하조대'라는 정자가 있는데 이곳은 하륜과 더불어 고려 말·조선 초 문신인 조준(趙浚, 1346~1405)이 숨어 살았던 곳으로 하씨와 조씨의 앞글자를 따서 '하조대(河趙臺)'라고 부르지요. 그런데 하조대에는 하륜과 조준의 이야기 말고도 또 다른 전설이 서려 있습니다. 하조대 근처에는 하씨 성을 가진 잘 생긴 청년이 있었는데, 그 이웃에는 조씨 성을 가진 혼기가 찬 처녀 자매가 그 청년을 서로 사랑했지요. 이에 총각은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어서 세 사람이 함께 저 세상에 가서 같이 살자며 바다에 몸을
“중국망신문중심”이라는 신문 2010년 3월 22일 자에는 중국 꾸이저우(?州) 서남부에 위치한 류판쉐이(六水) 지역은 백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극심한 가뭄을 겪고 있어서 국민의 식수난 해결을 위해 그 지역 무장경찰팀이 등에 물지게를 지고 산속 깊은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물을 날랐다는 기사가 보입니다. 지금은 집집이 수도가 들어와 물을 쉽게 얻을 수 있지만, 수도가 놓이기 전인 60~70년대에는 우리나라도 역시 마을에 하나 있던 공동 우물에서 물지게로 물을 길어 나를 수밖에 없었지요. 특히 뻘밭을 개간한 곳은 마을에 우물을 팔 수가 없어서 멀리 2~3km 떨어진 산밑의 우물까지 가서 물을 길어 날라야 했습니다. 물론 우물에서 각 가정까지 물을 나르는 도구로 아낙들이 머리에 이는 물동이가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많은 양을 길어 나를 수 없기에 거리가 멀면 어쩔 수 없이 물지게가 필요했지요. 물을 가득 담은 물통을 고리에 연결한 물지게를 지고 걸어가자면 중심을 잘 못 잡고 기우뚱거려 물이 쏟아지기도 했던 옛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처음 물지게를 지던 날 집에 돌
“새벽이면 일어나 골목을 쓸고 / 낮이 되면 문을 닫는데 / 행인이 지나가는 긴 골목이 너무나 깨끗하였네 / 밥상을 들어 눈썹까지 올리는 / 그 장면을 보지 못했다면 / 누가 알았으랴? / 행랑에도 양홍(梁鴻)이 있었음을” 위 내용는 조선 후기 시인 조수삼(趙秀三, 1762~1849)이 펴낸 책 ≪추재집 秋齋集≫ 가운데 <추재기이(秋齋紀異)>에 있는 시입니다. 한양 조동(棗洞, 현재 을지로 2가와 장교동 사이) 안씨 집 행랑에 품팔이하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늙은이였는데, 닭이 울면 일어나 문 앞 골목은 물론 멀리 이웃 골목까지 깨끗하게 쓸었습니다. 그리고는 문을 닫고 혼자 앉아 있으므로 집주인조차 얼굴을 보지 못하였지요. 하루는 집주인이 우연히 그 여인이 남편에게 밥상을 올리는 장면을 보았는데, 밥상을 남편 눈썹에까지 올려 마치 큰 손님을 모시듯 공경하였습니다. 그걸 본 집주인은 아마도 남편이 덕이 높은 선비라고 생각하여 예를 갖추어 만나려고 하였지요. 그러나 노인은 사양하며, “천한 것이 주인에게 예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이는 잘못된 일이므로 제가 떠나야 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어디론가 떠나버렸지요. 조수삼은 이런 기인을 책에 소개하면
지금 국악속풀이는 한국전통음악이라는 항아리를 들고 세계의 유명 감정가들을 만나는 중이다. 지난주 46에서는 조나단 컨디트(Jonathan Condit)박사의 평가로 “한국음악은 자연에 좀 더 가깝고, 서양음악은 더욱 인공적인 것 같다.”는 논평이었는데, 그 대표적인 음악으로 수제천을 들고 있기에 이를 소개하였다. 아악과 민속악의 차이뿐 아니라, 국악과 서양음악의 차이도 명쾌하게 정의 내리고 있어서 참고가 되었으리라 믿는다. 수제천이란 음악은 궁중음악으로 음향 자체도 매우 인상적이고 위엄 있으며 강렬하지만 진미를 알려면 여러 번 들어야 한다. 그 음악에 내재하여 있는 갖가지 음악적 요소도 특징적이지만, 일정치 않은 불규칙 장단 속에서도 많은 연주자가 하나같이 호흡을 맞추어 나가는 모습은 마치 물이 흐르고 바람에 구름이 움직이듯 자연의 형상 그대로라는 느낌이다. 잠시 분위기를 바꾸어 이번 주 국악속풀이 47에서는 최창남의 공연 관련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공연일시는 3월11(일) 오후 5시, 국립국악원 예악당) 중요무형문화재
국악이란 항아리를 들고 다섯 번째 감정가인 캠브릿지 대학의 조나단 컨디트(Jonathan Condit)박사를 만나 보도록 한다. “한국음악에서 또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특색은 궁중음악과 민속음악 등 매우 풍부한 다양성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광범위한 감정 묘사가 있는 것이다. 궁중음악은 한없이 우아하고, 위엄 있고, 세련되고, 품위 있고, 진진하며 아주 아름답다. 반면에, 민속음악은 정서적이고 정열적이다. 궁중음악이 오랜 전통이 있듯이 민속음악 역시 뿌리깊은 전통이 있다. 차이를 말하자면, 민속음악은 더욱 대중에 침투되어 있어 처음 들을 때 이해하기가 쉽고, 반면에 궁중음악은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깊이와 참뜻을 이해할 수 있다. 예컨대, 수제천과 같은 음악은 궁중음악으로 음향 자체도 매우 인상적이고 위엄 있으며 강렬하지만, 진미를 알려면 여러 번 들어야 한다. 한국과 서양의 음악을 대비할 때 한국음악은 아주 느린 속도와 동시에 아주 빠른 속도를 갖추었는데, 서양에선 그렇듯 느린 것은 없다. 한국음악은 자연에 좀 더 가까운 것 같고 서양음악은 인공적인 것 같다” 컨디트 박사는 한국에 와서 오랫동안 정악, 민속악 등 한국의 전통음악을 기초부터 공부하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