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비어 길을 주니 소리는 아름답고 꺾인들 굽히잖고 닳도록 뻗어 가니 그 누가 하늘만 높다 우격다짐할 거냐. 젓대나 퉁소는 속이 비어 있는 대나무로 만들어진다. 사람도 속이 비어 있어 겸손해야 참되게 배워져 지식과 교양과 지조를 지닐 수 있다.
네 철은 길동무요 해달도 벗이니 햇더위는 식혀 주고 함박눈은 데워 준다 그러리 떳떳한 뜻은 하늘 땅도 못 막으리. * 햇더위: 태양 염열 참 친구는 몇십 년을 두고 변하지 않고 때로는 따끔한 충고를 해 주니 스스로 말라 죽을 때까지 소나무처럼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간해야 잘 가라 온 해야 잘 왔네 앓는 속 참고 견뎌 쉰두 해 넘겼건만 올해도 하늘 치솟는 솔,대,매라 하느나
‘김 모씨의 항아리’ 이야기를 이 난에 소개한 이유는 그가 자기 집에 항아리를 두고도 그것이 귀한 보물임을 모르고 지내 왔듯이, 한국 전통음악의 진정한 가치를 잘 모르고 있는 한국인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악이라는 항아리를 들고 전문 감정가들을 찾아 나서기로 한 것이다. 제일 먼저 알렌․호바네스(Alan Hovhaness)를 만났는데, 그가 말한 논평문 속에 ‘아악’ ‘향악’ ‘거문고’ ‘가곡의 대여음’과 ‘처용무’ 등의 낯선 용어들이 나오기 때문에 이에 대한 속풀이를 하는 중이다. ‘아악’ ‘향악’ ‘거문고’ 등은 이미 간단하게 풀이하였고 ‘가곡’과 ‘처용무’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리라 생각되어 간단하게 풀이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가곡’은 홍난파 이후의 신가곡이 아니다. 조선조 전기부터 문인이나 선비들 사이에서 널리 불려오던 전통 가곡을 말한다. 가곡은 5장 형식이다. 시조시 초장을 가곡에서는 1장과 2장으로 구분하고, 시조시 중장 전체를 3장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종장을 4장과 5장으로 나누는데, 가곡의 4장은 시조시 종장의 첫 3음
지난주 국악속풀이 41에서 필자는 김 모 씨의 항아리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의 가치를 잘 모르고 지내다가 타인의 충고를 받고 그 유산이 매우 귀한 존재임을 확인하게 된 과정의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소개한 이유는 ‘김 모씨의 항아리’를 김 모씨=한국인 항아리=국악 즉 ‘한국인의 국악’으로 비유하여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예와 악을 교육이념으로 삼고 인격을 도야하며 자기완성을 실현코자 했던 할아버지 시대의 국악은 귀중한 백자(白磁) 그 자체였다. 그러나 집까지 잃고 가난 속에 푸대접을 받던 아버지 시대의 국악은 깨져버린 항아리처럼 끊기고 잘리는 아픔을 견뎌 내야만 했던 식민시대였다. 일제는 우리 고유의 음악문화를 말살하려 들었지만, 끈질기게 살아남은 마지막 항아리처럼 힘겹게 그 명맥을 오늘에 잇고 있는 것이다. 이 힘겹게 이어지고 있는 우리의 전통음악이 많은 한국인이 알고 있듯, 그렇게 볼품없고, 수준 낮은 과거의 낡은 음악인가 아닌가 하는 점을 확인하고자 세계의 유명 감정가들을 만나 보기로 하겠다. 먼저 미국의 유명한 작곡가
자주 만나는 편은 아니었지만, 오래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김 모씨의 고백을 들은 적이 있다. 그의 이야기는 대강 이러한 내용이었다. 그의 집에는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조그맣고 흰 항아리가 하나 있었다. 그가 어렸을 때만 해도 그의 집에는 이런 종류의 항아리들이 몇 개 있었다고 한다. 가족 중에서는 특히 조부가 그 물건에 관심이 많으셔서 매일같이 그 항아리들을 닦고 매만지는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누가 손이라도 댈라치면 걱정을 하시며 지극 정성으로 보존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부께서 돌아가신 다음, 아버지의 사업도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게 되었고 그럴 때마다 그의 가족은 작은 집, 더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하다가 드디어는 남의 집 방 한 칸에 신세를 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어렵게 사는 동안 가족들의 관심 밖으로 돌려진 항아리들의 보관문제는 관심 밖의 일이 되어버렸다. 조부께서 그토록 아끼시던 항아리들은 관리소홀로 하나 둘 깨지고 조각이 나 버렸다. 남아 있는 것은 오직 한 개뿐이다. 가장이 된 김씨는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었고 생활
문화재의 지정 또는 인정의 해제와 관련된 조항으로 “국가지정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거나 기타 특별한 사유가 있는 때”에는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그 지정을 해제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한 “보유자가 신체 또는 정신상의 장애 등으로 인하여 당해 문화재의 보유자로서 적당하지 아니하다고 인정되거나 기타 특별한 사유가 있는 때”에는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보유자의 인정을 해제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보유자가 신체 또는 “정신상의 장애”와 “특별한 사유”가 있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어떤 경우인가? 만일 보유자가 신체 또는 정신상의 장애로 전수활동이나 발표공연을 할 수 없을 경우에는 당연히 명예보유자로 전환해야 한다. 그리고 특별한 사유에 속하는 경우는 ‘장기간 해외에 체류하는 경우’ ‘전수교육을 게을리하여 진전이 없는 경우’ ‘의무사항인 공개발표를 이유 없이 안 하는 경우’ ‘보유자로서의 품위를 손상하거나 추락시키는 경우’ 등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경우에도 인정을 해제시켜야 마땅하다. 개인종목이나 단체종목 구분 없이 1년을 주기로 보유자들의
무형문화재의 새 종목을 지정하고 이에 대한 보유자 인정이 내정되었다면 이를 일정기간 관보에 고시해야 한다. 국민에게 알려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결정사항을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기본 취지가 간혹 악용되는 일도 있다. 의도적으로 이해(利害)관계에 결부시키는 집단이나 개인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앞에서 강조한 것처럼 조사위원이나 기량의 평가위원을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로 배가시킨다면 자연스럽게 해소되거나 어느 정도 완화될 수 있다고 본다. 그래도 문제가 생긴다면 재조사를 통해 확인과정을 거치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서연호의 “제도와 운영, 대폭 개혁해야 한다”는 글을 보면 무형문화재의 조사나 심사과정이 매우 신중해야 한다는 점을 알게 한다. “이미 지정된 모든 문화재들은 재심사를 통해 재지정되어야 한다. 전반적으로 부실하고 변질된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루속히 재지정을 통해 대폭 정비하지 않는 한, 무형문화재의 난맥상은 가속적으로 위기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국내외적으로 모든 분야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은 그 전문성을 끊임없이
어느 집이건 6~70년대 마루 풍경은 닮았습니다. 북쪽으로 난 창 위쪽에 큼지막한 액자가 걸려있고 그 속에는 크기가 제각각인 빛바랜 사진들이 시간을 잊은 채 서로 살을 대고 걸려있습니다. 한가운데는 할아버지 할머니 환갑 사진이 자리하고 그 옆에는 부모님의 흑백 결혼사진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막내 삼촌이랑 나이가 같은 큰 형의 빡빡머리 중학생 시절 증명사진도 보입니다. 사진과 앨범이 귀하던 시절 대부분 집에서는 마루 벽면 위 또는 안방 뒷문 위쪽에 큼지막한 액자를 걸어두고 기념될만한 사진이 생길 때마다 그때그때 액자를 내려 사진을 추가하거나 바꾸던 때가 있었지요. 올망졸망한 아이들이 커 나가면서 하나씩 찍어 나르던 사진과 그 아이들이 커서 결혼한 사진 그리고 손자들이 태어나면서 찍어 보내온 사진은 빠짐없이 그 액자로 올라갔기에 액자 속 사진은 흐르는 물처럼 고여 있지 않고 수시로 교체되곤 했습니다. “경성부 공평동 종로에 새로 설립한 금옥당은 가옥과 기계를 새로 완비하고 우수한 기술로 일반의 순응에 응하는데 경성시내 현재 조선사람이 경영하는 유일한 사진관으로 설비가 완
“목멱산(木覓山:남산) 아래 치인(痴人)이 있다”로 시작하는 책 ≪간서치전(看書痴傳)≫을 아십니까? 이 책은 조선 후기 학자 이덕무(李德懋)가 쓴 것입니다. 이덕무는 선비의 윤리와 행실을 밝힌 《사소절(士小節)》은 물론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71권 33책 외에 많은 책을 펴낸 학자로 유명합니다. 그는 ≪간서치전≫에서 목멱산 아래 치인(바보)이 있다고 하여 자신을 독서에 미친 매니아 곧 “독서광(讀書狂)”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덕무는 ≪간서치전≫에서 “그의 전기를 쓰는 사람이 없어서 붓을 들어 이 책을 썼는데 그의 이름은 기록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실제는 자신의 얘기를 쓴 것이라고 하지요. 이덕무는 “오직 책 보는 즐거움에 추위와 더위, 배고픔도 전혀 알지 못했다.”라고 쓸 정도로 책에 빠져 살았습니다. 역시 이 책에서 그는 “집안사람들은 그의 웃음을 보면 그가 기서(奇書, 기이한 내용의 책)를 구한 줄 알았다.”라고 할 정도로 그때 최고의 독서가였지만 며칠씩 굶기가 예사였습니다. 중국의 시성(詩聖) 두보가 뛰어난 문장가이면서도 평생 가난하게 살았던 것처럼 이덕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