즈믄해의 고요 품은 / 은은한 미소 법당안을 가득 채운 / 부처님 미소처럼 번잡한 마음 내려놓고 / 온몸을 다 태워 너에게 눕는다 - 이은진 '향로' - 나쁜 냄새를 제거해주는 향은 마음의 때를 말끔히 씻어준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져 불교의식에 향이 쓰이게 되면서 다양한 향로가 만들어집니다. 향로는 크게 모양새로 보아 손잡이가 있는 병향로(柄香爐)와 손잡이가 없는 거향로(居香爐)로 나눕니다. 향로의 재료는 금속이나 도자기로 만드는 것이 보통이나 상아나 유리로 된 것도 있지요. 1993년 12월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에서 발굴된 향로, 익산왕궁리 5층석탑에서 발견된 향목,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유향(儒香)·향목편(香木片)·심향편(心香片) 따위로 보아 일찍부터 우리나라에도 향이 쓰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도자기로 된 향로 가운데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국보 제95호 “청자투각칠보문뚜껑향로”는 그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입니다. 여기서 투각(透刻)이란 도자기를 뚫어 모양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 섬세한 기교가 보는 이의 눈을 사로잡습니다. 이 청자향로는 고려 전기의 것으로, 높이
오늘은 가장 큰 보름이라는 뜻의 정월대보름 명절입니다. 정월대보름 달은 지구에 가장 가깝게 다가서기 때문에 가장 작은 때에 비해 무려 14%나 커서 한해 가운데 가장 큰 달로 보인다고 하지요. 대보름날은 다채로운 세시풍속이 전합니다. 특히 정월대보름에는 “복토 훔치기”란 재미난 풍속이 있는데 부잣집 흙을 몰래 훔쳐다 자기 집 부뚜막에 발라 복을 비손하는 것입니다. 또 “용알뜨기” 풍습이 있는데 이는 대보름날 새벽에 가장 먼저 우물물을 길어오면 그해 운이 좋다고 믿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곡식 안내기”가 있는데 경남지방의 풍속으로 농가에서는 새해에 자기 집 곡식을 팔거나 빌려주지 않았습니다. 이날 곡식을 내게 되면 자기 재산이 남에게 가게 된다는 믿음 때문이지요. 그리고 "볏가릿대 세우기"도 있는데 이것은 보름 전날 짚을 묶어서 깃대 모양으로 만들어 그 안에 벼, 기장, 피, 조의 이삭을 넣고 목화도 장대 끝에 매달아 이것을 집 곁에 세워 풍년을 비손하는 풍속입니다. 그밖에 대보름 세시풍속은 더위팔기, 쥐불놀이, 다리밟기, 달집태우기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정월대보름의
오늘은 24절기의 시작이며, 봄이 옴을 알리는 입춘(立春)입니다. 입춘이 되면 도시 시골 할 것 없이 각 가정에서는 입춘축(立春祝)을 대문이나 문설주에 붙이지요. 입춘축을 다른 말로는 춘축(春祝)ㆍ입춘서(立春書)ㆍ입춘방(立春榜)ㆍ춘방(春榜)이라고도 합니다. 입춘날 입춘시에 입춘축을 붙이면 “굿 한 번 하는 것보다 낫다.”고 하며, 전라북도에서는 입춘축 붙이면 “봉사들이 독경하는 것보다 낫다.”고 하여 입춘에는 꼭 하는 세시풍속이었습니다. 입춘축에 주로 쓰이는 글귀는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 곧 “입춘에는 크게 좋은 일이 생기고, 새해에는 기쁜 일이 많기를 바랍니다."라는 뜻이구요. 또 "산처럼 장수하고, 바다처럼 부유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뜻의 "수여산 부여해(壽如山 富如海)", "땅을 쓸면 황금이 나오고, 문을 열면 온갖 복이 들어오기를 바랍니다."라는 뜻의"소지황금출 개문백복래(掃地黃金出 開門百福來)" 같은 것들도 있지요. 전라남도 구례에서는 입춘축을 "잡귀야 달아나라."고 써 붙이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한지를 마름모꼴로 세워 ‘용(龍)’자와
“삐라”라고 하면 “아! 북한의 대남 선전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말일 것이다. “삐라”라는 말을 기억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나이를 먹었다는 말과 같고 한반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공통점을 가진 사람들의 정서라고 정의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이념의 벽을 아우르지 못하고 같은 겨레가 총부리를 겨누는 바람에 숱한 사람들이 죽어가야 했던 전쟁이 6.25라 부르는 한국전쟁이다. 남과 북으로 갈라진 겨레는 그 참혹한 역사에 종지부를 찍지 못하고 아직도 진행형으로 서로 감시하고 서로 못 미더워한다. 비극이란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게다. “삐라”는 그런 시대의 유물이요, ‘삐라를 보면 즉시 신고하자.’는 말 역시 그 시대에 흔히 듣던 구호이다. 당시 공산당을 얼마나 나쁜 놈들로 생각했는지는 그 시대 우리의 미술 시간을 더듬으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그때 우리는 스케치북 하나 가득 머리에 뿔이 서너 개나 달린 공산당 얼굴을 그리느라 바빴다. 미술 시간이면 으레 ‘삐라 신고하라’든가 ‘반공방첩만이
“박기(朴琦)는 영산(靈山) 사람인데, 그 어미 공씨(孔氏)가 광질(狂疾, 미친 병) 에 걸려 거의 죽게 된 지가 9년이 되었는데 온갖 약을 써도 효과가 없으므로, 스스로 왼쪽 무릎 위의 살을 베어 화갱(和羹 : 여러 가지 양념을 하고 간을 맞춘 국) 을 만들어 바쳐 어미의 목숨을 잇게 함으로써 오늘에 이르도록 건강하게 잘살고 있다고 한다." 이는 성종실록 21년(1490) 6월 20일 자 기록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효자이야기입니다. 그런가 하면 1920년대 동아일보에는 “세상에 드문 효부, 무명지를 끊어서 시모 목숨을 구해(동아일보 1921-08-17)”, “편모를 위하여 열두 살 먹은 어린아이가 손가락 잘라(동아일보 1924-01-05)”, “정평군 효부, 살을 베여 병 걸린 시모에게 먹였다고(동아일보 1924-11-12)”, “근래에 드문 효부 시아버지의 부스럼을 입으로 빨아 근치(동아일보 1926-02-06)" 같은 여러 가지 기사들이 자주 눈에 띕니다. 예전에는 이렇게 효자 이야기가 자주 나왔지만 세상이 흉흉해서 인지 요즘엔 효자 이야기보다는 패륜아 이야기가
우리는 가끔 궁궐이나 절과 같은 전통건축의 용마루 양쪽 끝머리에 올라있는 상징물을 봅니다. 이를 마루 끝을 장식하는 기와라는 뜻으로 망새라고 부르며, 치미라고도 합니다.“치미”라는 말은 용을 잡아 먹고산다는 전설의 새 꼬리 모습이라고도 하며, 올빼미 꼬리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지요. 또 치미는 물에서 사는 어룡(魚龍)으로 지붕에 올려놓으면 불을 예방한다고도 하고, 용의 9마리 자식 가운데 멀리 바라보기를 좋아하는 이문으로 이를 지붕에 얹어 놓으면 불을 막는다는 믿음도 있었습니다. 그밖에 이 망새는 건물의 권위를 나타내기도 하며, 상서로움을 나타내거나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벽사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도 하지요. 이렇게 그 유래가 다양한 망새는 청동ㆍ기와ㆍ돌 같은 것으로 만들어졌는데 백제를 통해서 이를 받아들였던 일본의 전통건축물에도 자주 보입니다. 불을 막으려 했다는 이 망새는 궁궐인 근정전에 올려진 잡상, 경복궁 앞의 해태와 창덕궁 인정전 앞의 드므와 그 만든 목적이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불타서 복원하고 있는 숭례문 편액이나 문 앞에 용지라는 연못을 만
일본에서 가장 큰 자연호수 비파호(琵琶湖, 비와꼬) 주변의 시가현에는 많은 문화재가 있는 곳이지만 특히 한반도 관련 유적과 문화재들이 많은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 비파호 지역의 불교미술전이 지금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지난해 12월 20일부터 올 2월 19일까지 열리는 이 전시회에는 비파호 지역의 불교미술품 59건 94점이 선보이고 있으며 글쓴이는 지난 1월 27일 이들 작품을 보고 왔습니다. 이 전시회에는 가마쿠라 시대를 대표하는 불화인 육도그림(六道繪. 13세기. 국보), 화려한 무늬의 꽃바구니(화롱-華籠. 12세기. 국보), 연력사(延曆寺, 엔랴쿠지) 소장 '보상화 문양 경전함'(1031년. 국보), 장복사(長福寺, 조후쿠지) 소장 십일면관음입상(11세기. 중요문화재), 원성사(園城寺, 온조지) 소장 귀자모상(鬼子母像, 13세기. 중요문화재)과 같은 천여 년 전의 귀중한 미술품이 우리의 눈을 사로잡고
빛이라곤 없는 / 어두컴컴한 삼류 극장 / 빨간 비닐 의자에 앉아 / 미워도 다시 한 번 / 동시상영 영화를 봤지 / 낡은 화면 가득히 / 비처럼 흔들리던 그 배우들 / 지금은 다 어디 갔을까? - ‘옛 영화관’ 서승철- 나이가 지긋한 분들이면 신영균ㆍ문희 주연의 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1968)이나 신성일ㆍ엄앵란 주연의 “맨발의 청춘(1964)”을 떠올리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웅장한 스케일의 “벤허(찰턴 헤스턴, 1959)”, 가슴 저리는 사랑 이야기 “닥터지바고(제랄딘 채플린, 1965)”, 그리고 뮤지컬이 영화로 들어 왔던 “사운드오브뮤직(쥴리 앤드류스, 1965)”의 추억도 아련합니다. 그밖에 “졸업(더스틴 호프만, 1967)”과 “황야의 무법자(클린트 이스트우드, 1964)”들도 그 이름을 잊을 수 없지요. 이러한 영화를 보고 싶을 때 돈이 없으면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극장 안으로 들어갔는데 주로 관객이 붐빌 때 담벼락에 붙어 있는 화장실을 통해 들어가곤 했습니다. 그만큼 극장 시설이 허술했던 시절이라 가능했지만 어렵사리 들어간 영
설명절 음식은 차례음식이므로 고춧가루나 고추장을 쓰지 않습니다. 전이나 나물따위가 평소보다 많으므로 명절 끝에는 이러한 음식을 한데 넣어 고추장으로 비벼 먹으면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는 이 고추장을 “메줏가루에 질게 지은 밥이나 떡가루, 또는 되게 쑨 죽을 버무리고 고춧가루와 소금을 섞어서 만든 장”이라고 설명해 놓았습니다. 고추장에 관한 이른 기록은 1611년(광해군 3) 허균이 쓴 ≪도문대작(屠門大嚼)≫에 나오는 초시(매운 메주)란 말을 들 수 있습니다. 또 다른 고추장에 대한 문헌으로는 조선 숙종 때 실학자 홍만선(洪萬選:1643∼1715)이 쓴 ≪산림경제(山林經濟)≫가 있습니다. 이 책에는 “만초장법(장 담그는 법)”이 나오고, 1766년 유중림(柳重臨)이 쓴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는 "콩으로 만든 말장(末醬, 메주)가루 한 말에 고춧가루 세 홉, 찹쌀가루 한 되를 취하여 좋은 청장(진하지 않은 간장)으로 담가 햇볕에 숙성시킨다."라고 쓰여 있어 오늘날과 비슷한 고추장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표
김서방네 놀러 온 아이들/ 콩알 묻혀 놓은 쥐약 먹고 죽고 앞집 처녀 뒷집 총각 / 혼사 길 막혀 먹고/ 취직 못 한 장 씨네 아들 괴로워 먹고 / 늙은 애비 죽으라 밥에 타 먹이던 / 고얀 약. - ‘쥐약’ 서이원 - 지금도 농촌에는 쥐가 예전처럼 바글거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예전에는 쥐가 참으로 많았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쥐덫을 놓거나 잡곡에 쥐약을 개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특히 콩알에 쥐약을 이겨 놓는 때가 많은데 어린아이들이 그것을 모르고 집어 먹어 죽는 일도 심심찮게 뉴스에 나오곤 했습니다. 1957년 8월 8일 자 동아일보에는 서울 마포구에서 11살 8살 2살 먹은 3남매가 쥐약을 묻혀둔 콩을 먹고 죽었다는 기사가 보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늙은 아버지를 죽이려고 밥에다 쥐약을 탄다거나 전실 자식을 죽이려고 쥐약을 타 먹이는 등 쥐약 사고 기사가 수도 없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식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곡물을 먹어치우는 쥐잡기 작업은 그래서 시도군별로 치열하게 전개되었는데 경기도에서도 1984년 4월 28일에 대대적인 쥐잡기 행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