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신라선신당(新羅善神堂)은 오오츠시청 서쪽에 있다. 일찍이 북원(北院)에는 신라선신당을 중심으로 많은 가람과 승방이 있었으나 명치유신 때 정부가 신라선신당과 페노로사묘(1853-1908, 미국인으로 일본의 미술을 서구에 소개함)가 있는 법명원(法明院)만 남기고 모두 헐어 버렸다. 전후 미군의 캠프로 쓰이다가 현재는 오오츠시청과 현립오오츠상업고교, 황자공원이 들어 서 있다.” 위는 삼정사(三井寺, 미이데라) 누리집에 있는 신라선신당의 이야기로 당시에는 무척 규모가 컸으나 지금은 본당 건물 하나만 달랑 남아있다. 삼정사는 일본 남부 시가현(滋賀縣) 오오츠 시에 있는 유서 깊은 절로 원래 이름은 원성사(園城寺)이다. ‘三井’이라 하니까 우물이 세 개나 있어 보이는데 실제 이렇게 절 이름이 바뀐 것은 우물과 관련이 있다. 삼정사 안에는 우물이 있는데 이 우물은 천지왕(天智天皇), 천무왕(天武天皇), 지통왕(持統天皇)이 태어났을 때 산탕(産湯, 갓 태어난 아기 목욕물)으로 쓰였다고 해서 붙인 것으로 이 절이 고대 황실과 밀접했음을 보여준다. 이 절을 세운 사람은 지증대사 원진으로 원진스님(円珍,814-891)은 도쿄대 이노우에(井上光貞) 교수가 쓴 《왕인의 후
“시월은 초겨울 되니 입동 소설 절기로다 / 나뭇잎 떨어지고 고니소리 높이 난다 / 듣거라 아이들아 농사일 다했구나 /…/ 무 배추 캐어 들여 김장을 하오리라 /…/ 방고래 구들질과 바람벽 흙 바르기 / 창문도 발라 놓고 쥐구멍도 막으리라 / 수숫대로 울타리치고 외양간에 거적치고 / 깍짓동 묶어 세워 땔나무로 쌓아 두소.” 위는 농가월령가 가운데 음력 10월을 노래한 대목입니다. 오늘은 24절기 중 스무 번째 절기로 첫눈이 내린다고 하여 “소설(小雪)”이라고 하지요. 우리나라에서는 소설을 명절로 생각하지는 않지만, 눈이 내리고 추위도 시작되기 때문에 겨울 채비를 서두릅니다. 소설은 대개 음력 10월 하순에 들어 “초순의 홑바지가 하순의 솜바지로 바뀐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날씨가 점점 추워집니다. 그러나 한겨울에 든 것은 아니고 아직 따뜻한 햇살이 비치므로 소춘(小春)이라고도 하지요. 또 “소설 추위는 빚을 내서라도 한다.”라는 속담이 있는데, 이는 소설에 날씨가 추워야 보리농사가 잘된다고 믿은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잎새 하나가 파르르 떱니다. 하지만,
우리 어렸을 적에는 가을에 벼를 거둬들이면 “홀태”라는 기구에 대고 알갱이를 떨어내었습니다. 하지만, 그 홀태가 보급되기 이전에는 개상이란 기구에 곡식을 떨어냈지요. 곧 개상은 곡식의 알갱이를 떨어내는 탈곡기구로 가상, 개샹, 챗상, 태상, 공상이라고도 했습니다. 보통은 나무였지만 널찍한 돌을 쓰기도 했구요. 보통 농가에서는 개상을 따로 준비하는 일은 드물며, 한쪽이 평평한 굵은 통나무를 그대로 엎어놓거나 절구를 가로뉘어 쓰기도 합니다. 자리개(몸을 옭거나 볏단을 묶는 데 쓰는 짚으로 만든 굵은 줄)로 단단히 묶은 볏단이나 보릿단을 어깨 위로 돌려서 머리 위로 높이 쳐들었다가 힘껏 내리쳐서 곡식의 알갱이를 떨어내는데 이를 “개상질 한다”고 하지요. 남자 한 사람이 하루에 벼나 보리 한 가마 반에서 세 가마를 떨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개상질은 아무리 잘하여도 낟알을 완전히 떨어내기는 어렵습니다. 덜 떨린 것을 따로 모아 두었다가 벼훑이, 짚채처럼 집게 비슷한 기구를 써서 떨어내는데, 이것을 "짚 앗는다" 또는 "벼 앗는다"라고 합니다. 이제 농촌에서는 벼를 거둬들일
악보 가운데 음의 길이와 높이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을 유량악보라고 합니다. 그에는 서양의 오선기보와 세종이 창안한 동양 최초의 정간보(井間譜)가 있습니다. 고려시대부터 써온 것으로 보이는 율자보(律字譜)ㆍ공척보(工尺譜) 같은 것들은 음 길이를 나타내지 못하는 흠이 있어 이런 흠을 없애려고 절대음감의 소유자인 세종이 만든 것이 정간보였지요. 세종 때 만든 정간보는 1행 32 간(間)을 ‘우물 정(井)’ 자 모양으로 칸을 질러놓고, 한 칸을 1박으로 쳐서 음의 길이를 나타낸 것입니다. 세종은 “아악은 본래 우리 음악이 아니고 실은 중국 음악이다. 우리 조상이 살아서는 향악을 익숙하게 듣다가 죽어서는 제사 때 아악을 들으니 잘못된 일이다. 따라서 제사 때에도 향악을 연주해야만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자주적인 정신을 가졌기에 세종은 정간보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 정간보를 이용한 악보에는 ㆍㆍㆍ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서양 음악의 오선기보는 9세기 말부터 시작하여 17세기 초까지 700여 년이라는 긴 시간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것에 견주어 세종이 만든 정간보는 그보다
오늘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선열의 얼과 공덕을 기리려고 제정한 “순국선열의 날”입니다. 깊어 가는 가을, 아담하게 조성된 충남 당진의 최구현(1866 ~ 1906.12.23) 의병장 무덤에는 짧은 가을 햇볕이 따스하게 내리쬐고 있었습니다. "몇 해 전 선조의 무덤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최구현 할아버지도 다른 곳에서 이장을 하게 되었지요. 그때 할아버지를 모셨던 무덤 자리에서 석고로 만들어진 묘지석이 나왔는데 이 묘지석을 통해 98년 만에 할아버지가 당진 지방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신 것을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대한민국 역사상 묘지석을 토대로 독립운동을 인정받은 경우는 최구현 의병장이 처음이라고 손자 최사묵(평화재향군인회 공동대표) 씨는 그때 일을 회상하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200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충남 당진 출신의 최구현 의병장은 1866년(고종 3)에 태어나 1887년 무과에 급제한 뒤 훈련원봉사와 군부참서관으로 일을 하던 중 1904년 일제의 강요로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자 국운을 탄식하고 관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그 뒤 을사늑약을 당하자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던 조선 민족이 일제의 노예가 될
“좋은 장인이 오랫동안 공들여 / 귀신의 솜씨인 양 조각했구나 / 대나무 곁에 매화는 피려 하고 / 구름 찌르며 학은 함께 난다 / 맑은 물결은 잔잔하게 자고 / 푸른 산은 가까운데도 희미해라 / 묵객들이 어루만진 지 오래이니 / 몇 번이나 붓 휘둘러 시를 지었을꼬” 이 시는 조선 중기 선비 이응희 (李應禧, 1579~1651)가 지은 “硯刻梅竹雲鶴山水”라는 시로 벼루에 매화ㆍ대나무ㆍ구름ㆍ학ㆍ산ㆍ물을 새겨 놓았다는 내용입니다. 이응희는 경기도 군포 수리산(修理山) 아래에서 숨어 살면서 학문에 전념했던 사람이지요. 조선시대 선비들이 거처하던 사랑방에는 서안(책을 얹는 재래식 책상), 고비, 책장, 사방탁자, 문갑과 함께 붓, 벼루, 먹, 종이, 문진, 연적, 연갑(硯匣, 벼룻집), 필가(붓을 걸어 놓는 기구), 필세(붓을 빠는 그릇), 필통, 향꽂이, 차도구 따위가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벼루는 ‘석우(石友)’라고 해서 선비들이 중요시 했는데 선물로도 많이 주고받았습니다. 한국 벼루는 조선 세종부터 성종 시기의 문예 부흥기에 많은 발전이 있었는데 특히 숙종부터 영조
외국인들에게 인기 있는 한국음식의 하나가 '삼겹살'이라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물론 한국인들도 좋아하는 삼겹살은 제주도 똥돼지를 최고로 칩니다. 그 똥돼지를 키우는 우리를 제주도 사람들은 “돗통시(일명 돗통)”라고 하는데 1등 삼겹살로 꼽히는 똥돼지를 기르는 돼지우리 돗통시는 제주사람들이 만들어낸 슬기로운 공간입니다. 돗통시의 구조는 사람이 똥오줌을 누는 곳인 반평 정도의 공간과 그 밑에서 돼지가 사는 한 평 정도의 돼지막, 그리고 돼지가 활동하는 3~5평의 마당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디딜팡(뒷간)’에서 웅크리고 앉아서 똥오줌을 누면 그 밑에서 돼지가 똥오줌을 받아먹지요. 디딜팡은 반개방형으로 지붕이 없지만 입구를 뺀 세 방향은 앉은키만큼 돌담으로 둘러처져 있으며 폐쇄식 변소와는 달리 돼지가 똥오줌을 먹어 치우기 때문에 냄새가 나지 않고 구더기가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제주 똥돼지는 사람의 인기척이 나면 돼지막에서 나오는데 간혹 설사똥 일 때는 받아먹지 않고 건강한 똥만 받아먹습니다. 물론 똥돼지는 똥만이 아니라 주인이 먹이통인 ‘돗도고리’에다 주는 구정물에 겨와 가루, 돗통시에 던져주는 음식찌꺼기도 함께 먹지요. 또 쇠거름을 돗통시에 넣어주어 돼지똥과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 한강 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 양이면 / 나는 밤 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 종로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위 시는 심훈이 쓴 “그날이 오면”입니다. 나이가 지긋한 분들은 심훈의 소설 를 기억할 것입니다. 1935년 동아일보사에서 주최한 '창간15주년기념 장편소설 특별공모' 당선작으로, 그해 9월 10일부터 1936년 2월 15일까지 연재되었지요. 이광수의 〈흙〉과 더불어 일제강점기에 농촌계몽과 민족주의를 고취시켰다는 점에서 한국 농촌소설의 쌍벽을 이루는 작품입니다. 다만, 이광수는 훗날 친일문학가로 남고 심훈은 독립운동가로 길이 추앙을 받게 되는 점이 다릅니다. 는 경기도 안산 샘골에서 나라를 빼앗긴 암울한 시대에 처녀의 몸으로 농촌계몽운동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힘쓰다가 26살에 요절한 실존인물 최용신(崔容信) 선생을 그린 작품입니다. 심
오늘은 대학에 들어갈 학생들이 수능시험을 치르는 날입니다. 예전에는 시험날만 되면 으레 한파로 고생이었으나 시험 날짜를 11월로 옮기고 나니 날씨 걱정은 한시름 놓입니다. 온 나라가 출근시간까지 늦추며 수학능력고사를 치르는 요즈음과 달리 조선시대엔 국가적인 시험으로 과거가 있었지요. 과거 시험 말고 많은 사람이 모여서 글솜씨를 겨루는 백일장(白日場)도 있었는데 당시에 유생(儒生)들을 모아 시제(試題)를 내걸고, 즉석에서 시문을 짓게 하여 장원(壯元)을 뽑아 연회를 베풀고 상을 주었습니다. 벼슬길과는 관계가 없는 백일장은 과거(科擧)낙방생과 과거지망생의 명예욕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기도 했지요. 조선 후기에는 일자무식꾼까지도 참가하여 남의 글을 표절하기도 하고, 시험지 심사에 기생까지도 관여하여 엉터리로 등급을 정하거나 수령을 욕하는 글을 썼다가 포박되는 따위의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백일장은 지난 50~60년대만 해도 성행하였지요. 1959년 10월 31일 자 동아일보에는 “異彩! 두 女流도, 과거 방불ㆍ백일장대회”라는 기사가 눈에 뜨입니다. 기사에 보면 8
“현대 아파트가 들어서며 / 홍은동 사거리에서 사라진 / 털보네 대장간을 찾아가고 싶다 / 풀무질로 이글거리는 불 속에/ 시우쇠처럼 나를 달구고 / 모루 위에서 벼리고 / 숫돌에 갈아 / 시퍼런 무쇠낫으로 바꾸고 싶다 / 땀흘리며 두들겨 하나씩 만들어 낸 / 꼬부랑 호미가 되어 / 소나무 자루에서 송진을 흘리면서 / 대장간 벽에 걸리고 싶다" 위 시는 김광규 시인의 “대장간의 유혹”이란 시입니다. 조선 풍속도의 대가 라고 하면 김홍도(金弘道, 1745 ~ ?)를 떠올립니다. 김홍도의 그림 가운데 “대장간” 이 있는데 김득신(金得臣, 1754 ~ 1822) 그림에도 “대장간” 그림이 있습니다. 김홍도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나 김득신의 그림은 김홍도와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서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먼저 김홍도의 그림에서 보이던 모자도 쓰지 않은 채 낫 갈던 녀석은 대장장이가 아닌 까닭에 김득신은 과감히 빼버렸습니다. 대신 대장장이들이 훨씬 젊어지고 힘있는 모습으로 나옵니다. 김홍도는 대장간을 사실 그대로 그렸지만 김득신은 생략할 건 생략하고 그 대신 대장간에 걸맞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