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건곤 제15호(1928년 8월 1일)에는 “단돈 二十錢 避暑秘法, 記者總出競爭記事”이라는 제목의 글이 보입니다. 불볕 쪼이는 날 점심때가 지나자 “한 사람이 20전씩 가지고 해질 때까지 기막힌 피서를 해볼 것”이란 편집국장이 명령이 내립니다. 영업국 재무 주임은 이에 10전짜리 두 푼씩을 나누어 줍니다. 이에 한 기자는 다음과 같은 피서를 합니다. “아모리 생각해 보아도 20전 가지고 도라 다니다는 땀밧게 흘릴 것 업겟는지라 집으로 가는 길에 안동 과실뎐에 가서 수박 한 개 쌈싸호듯하야 15전에 하나 사서 가지고 와서 어름 2전 설탕 3전(총합 20전) 사다가 수박 속에 집어 느어서 움물에 띄여 노코 옷 훌훌 벗고 랭수 목욕 한 차레 하고서 등거리 고의만 걸치고 뒷겻 마당에 드러 누으니 아모 딴 생각 업서 진다.” 그런가 하면 다른 기자는 어름 곱게 갈기로 경성에서 이름 난 빙수집에서 빙수를 먹고는 “그 얄밉게까지 달콤한 맛. 그 삿듯한 �원한 맛이 혀끗에서 왼 입안으로 목구녕으로 가슴으로 등덜미까지 배속까지 �원한 뎐긔가 찌르르르 도라가는
18. 공자는 정(鄭)나라의 음악을 미워했다 지난주 속풀이 17에서는 정악(과거 아악이라고 부르던 음악)과 민속악의 용어를 설명하면서 양자의 관계는 상하의 개념이나 우열의 대비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들은 음악적 환경이나 성격, 또는 표현방법에 따라 서로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으면서 한국 전통음악의 양대 산맥을 이루어 온 상대적 관계로 마치 자전거의 앞, 뒷바퀴와 같은 존재임을 설명하였다. 그렇다면, 보다 구체적으로 아악이란 무슨 말인가? 아악이란 말은 세 가지 의미가 있는 용어이다. 첫째는 아정(아담하고 바른)하고 고상한 음악이라는 의미, 둘째는 중국 고대의 음악으로 고려조에 들어온 이후 국가의 각종의식에 쓰였던 음악, 셋째는 궁중에서 연주되었던 아악, 당악, 향악을 통칭하는 용어이다. 일반적으로 아악이라 함은 세 번째 경우를 뜻하는 말이다. 과거 임금이 거처하던 궁궐 안에서는 중국 송나라에서 들어온 아악도, 당악도, 그리고 고려나 조선을 통해서 작사 작곡된 향악도 연주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국가 조정에서는 중국에서 들여 온 아악을 쓰지 못하게 되면서부터 자연스레 기존의 아악, 당악, 향악을 묶어 넓은 의미로 아악이
21. 불여름(2) 오르며 뒷쪽 찾고 내리며 마쪽 찾고 숨 사이 캄캄길을 얼빠진 사람이냥 아히유 미리내 아래 잠 못 이룰 나그네. * 뒤쪽 : 북쪽, 마쪽 : 남쪽 * 캄캄길 : 암흑길, 미리내 : 은하수 왜정 때 나라와 땅 빼앗긴 우리 한겨레는 목숨을 이으려고 북에 가고 또 만주 땅도 찾았다가 별수가 없어 또 남쪽으로 되돌아오는 일이 흔했다. 헐벗고 굶주리던 우리 한겨레는 올 데 갈 데 없는 귀신과도 같았다. 그러나 은하수를 우러러보면서 고향을 생각하고 되찾아야 할 조국을 생각했다.
오늘은 1936년 제11회 베를린올림픽대회 마라톤에서 손기정 선수가 당당히 금메달을 딴 날입니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는 국권을 잃은 상태로 일장기를 달고 출전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그것이 국내 언론의 일장기 훼손사태로 발전하여 조선,중앙일보는 폐간, 동아일보는 무기한 정간을 당하고 말았지요. 슬픈 일은 그것뿐만이 아니라 당시 마라톤 우승자에게 주기로 했던 그리스 청동투구가 일제의 방해로 손 선수에게 돌아가지 못한 것입니다. 이 고대 그리스 청동투구는 1875년 독일의 고고학자에 의해 그리스 제우스신전에서 발굴된 것으로 기원전 6세기에 그리스 코란트 지방에서 제작된 것이라고 하지요. 이런 형태의 투구는 고대 그리스의 올림피아제전에서 투사들이 마상경기를 할 때 쓰거나 경기에서의 승리를 기원하고 신에 대한 감사의 뜻을 바치고자 만들어진 것입니다. '손기정 투구'로 알려진 이 유물은 그리스 아테네 브라드니신문사가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경기 우승자에게 수여토록 했습니다. 그러나 이 투구는 손 선수에게 돌아오지 못하고 50년 동안이나 베를린의 샤르텐부르크박물관에 보
“아들아 / 옥중의 아들아 / 목숨이 경각인 아들아/ 칼이든 총이든 당당히 받아라 / 이 어미 밤새 / 네 수의 지으며 / 결코 울지 않았다 / 사나이 세상에 태어나 / 조국을 위해 싸우다 죽는 것 / 그보다 더한 영광 없을 지어니 / 비굴치 말고 / 당당히 / 왜놈 순사들 호령하며 생을 마감하라” 위 시는 얼레빗 작가의 한 분인 이윤옥 시인이 광복절을 맞아 펴낸 시집 ≪서간도에 들꽃 피다≫에 있는 안중근 의사 어머니 조마리아를 노래한 것입니다. 이윤옥 시인은 몇 해 전 학생들에게 여성독립운동가를 써보라고 했는데 거의 백지로 낸 것에 충격을 받아 여성독립운동가를 소개하는 시를 쓰기로 맘먹었다고 시집 머리말에서 말합니다. 현재 훈포장을 받아 보훈처에 등록된 여성독립운동가는 202명이나 되지만 우리 국민 대다수는 잘 모르고 있지요. 이 시집은 춘천의 여성의병장 윤희순, 임신부의 몸으로 평남도청에 폭탄을 던진 안경신,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쓴 남자현, 안동의 독립운동가 3대를 지키고 그 자신 만세운동으로 잡혀가 두 눈을 잃었던 김락 애국지사를 비롯한 스무 명의 여성독립운동
9. 백제 성왕이 최초로 불상을 보낸 절 향원사 가만히 서 있어도 숨이 턱턱 차오르는 아스카의 더위는 말 그대로 찜통 속이다. 한국과 달리 바람 한 점 없이 푹푹 쪄대는 아스카의 한 낮은 수은주가 39도를 오르내렸다. 나라현 타카이치군 아스카촌 (奈良県 高市郡 明日香村)에 있는 향원사는 ‘일본 최초의 절’이라는 수식어가 붙어다니는 절로 일본의 사서(史書)에 일찌감치 그 이름이 보인다. 일본서기에는 “552년에 백제 성명왕이 금동 석가불을 보내왔는데 향원(向原)에 있는 개인 집을 깨끗이 치운 뒤 절로 사용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가정집을 고쳐서 임시로 절로 사용한 것일 뿐 제대로 된 절은 이후 50여 년이나 지나야 등장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야마토(645년에 일본이라는 국호 생김)조정에서는 불교 공인 후 불상을 안치할 절을 지을 기술자도 없고 승려도 없으며 경전도 아직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이후 꾸준히 한반도로부터 경전을 지닌 고승(高僧)들이 건너가고 대규모의 목수들이 파견되어 불사(佛事)를 한 결과 비조사(飛鳥寺,아스카데라), 사천왕사(四天王寺,시텐노지), 법륭사(法隆寺,호류지)들이 세워지게 되는 것이다. 향원사가 자
17. 정악과 민속악의 관계는 자전거의 앞 뒤 바퀴와 같다. 지난 금요일, 독자가 쓰는 얼레빗은 서도소리를 전공하는 학생의 글로 정악과 민속악에 관한 개인의 의견이 재미있게 소개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염려스러운 것은 이를 자칫 잘못 이해하게 되면 정악은 바른 음악, 존귀한 음악이고 이에 반해 민속악은 바르지 못한 음악, 저속한 음악으로 이해하는 독자가 있을 것 같다는 점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양자는 우열의 개념이 아니다. 정악은 음악을 표출하는 방법이 민속악에 비해 적극적이지 않기 때문에 매우 단아하게 들린다. 그래서 예부터 아정하다는 의미로 아악(雅樂)이라 불렀다. 그러나 지금은 아악이라는 용어 대신 정악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데, 이는 아정(雅正)하다는 말에서 아악이나 정악을 동의어라 보기 때문이다. 민속악은 속된 음악이라는 뜻이 아니다. 원래 ‘속(俗)’이라는 글자의 의미는 풍속, 바램, 이어감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일반 백성의 풍속이며 백성이 이어가는 순수한 음악을 뜻하는 말이다. 얼레빗 독자들의 바른 이해를 돕기 위해 보다 구체적으로 국악용어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해 보도록 하겠다. 9세기, 통일신라시대에 중국 당 나라에서 당의 악기나 음악이
20. 불여름(1) 믿고장 숨은 노래 남기신 어머님은 넋모실 깊은 밤에 저승서 보내느니 언제면 아아 언제면 달래 드릴 날 오랴. * 믿고장 : 고향 * 넋모실 : 제사 지낼 일제에게 끌려 온 재일 한겨레는 교육을 덜 받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일제가 배움길을 막거나 빼앗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 모르는 어머니라 해도 옛이야기와 자장가는 많이 알고 있어 어린 자식들에게 들려주었는데 어머님이 돌아가신 뒷 날 그것이 한 얼을 키우는데 큰 힘과 슬기와 겨레 얼넋을 기르는데 큰 밑천이 되었다.
1907년 일본 궁내부대신인 다나카는 황태자 순종 결혼식에 축하사절로 참석했다가 개성에 있던 경천사십층석탑을 85명의 일본군을 보내 뜯어서 일본으로 가져가 버렸습니다. 이를 안 한국문명화와 한국의 국권수호를 위해 온몸을 불사른 헐버트(Homer B. Hulbert, 교육자, 역사학자, 한글학자, 언론인, 선교사, 독립운동가) 박사는 즉시 현장을 답사한 뒤 ‘Japan Chronicle’과 ‘뉴욕포스트’ 등에 기고하고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고 있는 헤이그에서도 이 사실을 폭로했지요. 이런 헐버트의 노력으로 국보 제86호 경천사석탑을 되돌려 받을 수 있었습니다. 헐버트는 ‘사민필지’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교과서를 펴내면서 한글애용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한글학자이기도 했지요. “나는 웨스트민스터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라고 평소 소원한 대로 그는 서울 양화진에 묻혔습니다. 헐버트박사기념 사업회는 해마다 8월 5일 양화진묘지에서 헐버트박사 추모식을 열고 있습니다. 호머 헐버트 박사(1863∼1949)는 1886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 교사로 한
만파식적이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신라 때의 전설상 피리인데 이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낫는 등 나라의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진다고 하는 신비한 악기이지요. 사람들은 이 피리를 대금의 원형으로 봅니다. 그런데 지금 연주하는 대금에는 정악대금과 산조대금이 있습니다. 정악대금은 주로 궁중음악이나 양반들의 정악을 연주하려고 만든 악기로 다른 악기와 합주할 때 적합하지요. 정악대금은 관이 길게 되어 있으며, 취구가 작아서 농음이 어렵고, 지공이 넓어서 다루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호흡에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산조대금과 같은 꺾기나 깊은 농음, 다루치기가 어려운 단점이 있지요. 반면 산조대금은 대금산조 독주를 위해 만들어진 악기입니다. 다양하고, 화려한 가락이 많아 손동작을 원활하게 하려고 정악대금보다 짧게 만들어져 손 움직임을 편하게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산조를 연주하려고 만든 산조대금이 아닌 정악대금으로 대금산조 연주를 한 명인이 있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예능보유자 이생강 선생이 바로 그분입니다. 원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