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교수] 지난주엔 1950년대 후반, 13살 나이에 장고를 메고 농악단원이 된 소년 악사 김청만이 2013년도에 판소리 고법의 예능보유자가 되어 발표회를 열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의 스승 한일섭 명인은훗날 판소리가 많이 성하게 되면 고수가 부족하게 될 터이니 지금부터라도 판소리 고법을 제대로 익히라고 충고하였다는 이야기, 80년대초, 오정숙(吳貞淑) 명창을 시작으로 내로라하는 한국의 명인 명창들이 그의 장단에 소리를 했다는 이야기, 국립국악원으로 자리를 옮겨온 이후, 판소리뿐 아니라 활동분야가 전 영역으로 확대되면서 점차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그렇다. 판소리 완창의 붐을 타고 전국의 판소리 명창들이 그를 찾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비단 판소리의 북 반주만이 아니었다. 가야금 산조를 비롯하여 거문고나 대금, 해금 등의 문화재급 연주자들이나 대학의 교수들이 앞 다투어 그에게 장고 반주를 청하기 시작하였으며 민요창이나 무용음악의 공연무대에도 그의 반주는 빠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그의 활동은 점차 확대되어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공연뿐이 아니었다. 음반작업이나, 방송활동, 그리고 후진 양성에도 열성이었다
[그린경제/얼레빗 = 서한범 교수] 지금 국악속풀이는 산조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지난주에는 성공의 비결이 한결같이 그러하듯, 산조음악의 정점에 오르는 길에도 요령이나 지름길은 따로 없다는 이야기, 그래서 반복하고 또 반복 연습해서 익숙해지는 길이 곧 산조음악에 접근하는 길임을 강조하였다. 그 과정에 관련음악을 충분히 듣고 구음(口音)으로 소리를 내며, 귀와 몸과 마음에 이르기까지 그 음악이 서서히 배이도록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과거의 구전심수(口傳心授)방법은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제외하면 선생의 가락을 충실하게 전수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훌륭한 장점을 지닌 방법이라는 이야기도 하였다. 잠시 산조의 이야기를 뒤로 하고, 오늘은 김청만 명인의 고법 발표회 이야기를 먼저 하고 돌아오도록 한다. 전쟁으로 인해 인명도, 재산도 우리는 많은 것을 잃었다. 그래서 불타버린 집이나 학교의 건물을 다시 짓고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찾는 등, 1950년대 중 후반은 복구 작업에 여념이 없던 그 시절은 춥고 배고프던 고난의 시기였다. 그래서 누구를 막론하고 우리네 살림은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시기, 13살 어린 나이에 장고를 메고 농악단원
[그림경제/얼레빗 = 서한범 교수] 지난주 산조 이야기에서는 정악연주와 달리 산조연주는 줄을 흔들거나 누르고, 또는 밀어 올리는 주법으로 인해 매우 적극적이며 자유분방한 음악이라는 이야기, 박자도 처음에는 느리게 시작하나 곧 빨라지기 시작하여 걷잡을 수 없이 휘몰아치며 종지한다는 이야기, 정악 연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고수의 추임새가 터져 나와 흥취가 고조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또 심상건의 산조연주를 듣고 무슨 재미로 평생 이 음악을 연주해 왔는가하는 질문에 그저 줄 죄고 푸는 맛이라고 대답하여 긴장과 이완의 한스 릭 이론과 동일하다는 이야기, 이처럼 죄고 푸는 맛의 표현을 위해서는 농현(弄絃)의 다양성이나, 리듬의 변화, 강약의 다이나믹스 등이 적극적으로 표출되어야 한다는 이야기, 산조음악의 정점에 오르는 길에 요령이나 지름길은 없다는 이야기도 더했다. 그렇다면 산조 연주를 잘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방법들이 있을까 하는 문제를 짚어보기로 하겠다. 예를 들어 한국의 어느 어린이가 미국으로 입양되어 그 곳의 언어에 익숙하게 되면 모국어인 한국어는 점차 잊게 되고 영어를 더욱 능숙하게 구사할 될 것이다. 반드시 어린이가 아닌 성인이라도 한국 사람이 영어를
[그린경제/얼레빗 = 서한범 교수] 산조 음악은 판소리의 기악화, 또는 시나위 가락에서 유래하여 틀을 잡은 기악독주곡이라 했다. 산조를 일러 헛튼가락이니, 허드렛 가락이니, 또는 흐트러진 가락이라는 말은 적절히 못한 표현이다. 이유는 연주자의 음악세계를 개성 있게 표출해 내는 고난도의 음악을 그렇게 폄하하는 것은 당치 않기 때문이다. 필자의 주장은 이제부터라도 한자의 산(散)을 흩어진다는 개념보다는 음악적 전파력이 강해 이웃으로 널리 널리 퍼져나가는 확산(擴散)의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산조 음악은 느리게 -보통으로-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점에서 고려시대의 가요나 조선조의 세틀형식과 맥을 같이하는 민족 기층의 역량이 응집된 시대성을 지닌 양식이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산조가 현재에는 가야금뿐 아니라 거문고, 대금, 해금, 아쟁, 피리, 태평소 퉁소, 단소 등등 선율악기들에 의해 연주되고 있으며 19세기 말엽 김창조, 한숙구, 심창래, 박팔괘 이후, 수없이 많은 명인들이 명멸하며 가야금의 산조음악을 오늘날까지 전해 주었고 현재는 이들의 제자들이 가야금 산조 음악을 지켜나가고 있는 것이다. ▲ 가야금산조를 연주하는 김남순 교수 그렇다면 산조음악의 미(美
[그린경제/얼레빗 = 서한범 교수] 지난 주, 가야금은 오동나무 통속을 파내어 공명통을 만들지만, 산조가야금은 앞면과 뒷면을 따로 만든 다음, 이를 붙여 공명통을 만들어 쓴다는 점, 산조가야금이 보급되면서 기존의 악기를 정악가야금 풍류가야금 또는 법금이라고 부른다는 점, 오른손으로 소리를 내고 왼손으로는 다양한 표현을 하게 된다는 점, 사랑방에서 즐기던 악기가 공연환경이 달라져 음량에 관한 문제가 심각해 졌다는 점, 창작 국악곡에서는 새로운 연주법들이 개발되어 선보이고 있으며 음역이나 음량의 증대, 연주기법의 다양성을 위해 18현, 21현, 22현, 25현 등 다현의 가야금들이 제작, 활용되고 있다는 점 등을 이야기 하였다. 이번 주에는 가야금으로 타는 산조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한다. 산조 음악의 발생과 관련된 주장은 여러 가지가 제기되고 있으나, 그 중에서도 판소리의 기악화나 또는 시나위 가락에서 발전된 기악 독주곡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 가야금 산조를 연주하는 이민영 연주자 가야금 산조의 명인으로 20세기 전반을 풍미해 왔던 심상건 명인이나 박상근 명인 등에 따르면 산조는 마음 내키는 대로 타는 헛튼가락, 허드렛 가락, 또는 흐
[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교수] 가야금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잠시 최창남의 경서도 소리발표회와 제자들이 준비한 고 백인영 1주기 추모음악회 이야기를 하였다. 다시 가야금의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한다. 앞에서는 가야국의 우륵(于勒)악사가 신라로 투항하여 충주 지방에서 가야금 활동을 하던 곳을 지금 사람들이 탄금대라 부르고 있다는 이야기도 하였고, 제자들이 새롭게 고쳐 만든 음악에 대하여 우륵 선생은 낙이불류(樂而不流)애이불비(哀而不悲)라 하여 정악의 핵심이 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또한 신하들의 반대를 악하죄호(樂何罪乎), 곧 음악이 어찌 죄가 된다고 하는가! 라는 말로 신하들을 설득하여 가야금 음악을 신라의 대악으로 삼았다는 진흥왕의 이야기도 하였다. 진흥왕의 혜안이 아니었다면 과연 우리가 가야금과 그 음악을 이어받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는 것이다. 남다른 안목과 판단력을 지녔던 진흥왕의 존재가 곧 가야금의 오늘을 이어준 결정된 계기가 되었다는 점을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이다. 가야금은 오동나무 판 위에 명주실을 꼬아 만든 현악기이다. 줄은 모두 12줄이다. 가야금은 12줄 모두를 기러기발 모양의 안족(雁足)위에 얹어 놓고 이것을 움직여가
[그린경제=서한범 교수] 지금 속풀이는 지난주에 이어 즉흥음악의 1인자였던 고 백인영 명인에게 보내는 추모의 글을 쓰고 있다. 그는 누구도 따를 수 없었던 즉흥음악의 선두주자였다는 점, 음악적 재기(才氣)를 안고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음악적 환경에서 자랐고 누구보다도 음악에 대한 사랑이나 열정이 강렬했기 때문에 그러한 명성을 얻었다는 점, 17살에 KBS 목포방송국의 전속악사로 있으면서 퓨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점,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여성국극단에 입단하여 명인명창들의 음악인생을 배우면서 자신의 음악을 탄탄하게 만들어 왔다는 점들을 이야기 하였다. 그 다음 추모의 글을 이어가도록 하겠다. ▲ 고 백인영 명인 추모공연에서 명인들이 함께 연주한 시나위 합주 백인영 선생! 지상파 방송을 통해 국악프로그램은 물론이고, 연예와 오락, 그리고 사극(史劇) 드라마의 반주음악이나 영화음악에 있어서도 당신의 아쟁이나 가야금 소리는 빠지지 않았지요. 아니 빠지게 되면 극 분위기가 살아나지를 못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오. 당신이 구슬프게 문질러 대는 아쟁소리에는 서민들의 애환이 깃들어 있고 가야금 12줄이 희롱하는 소리에는 여인들의 고달픈 삶이 녹아 있어서 많은 사
[그린경제=서한범 교수] 지난주에는 소리판을 펼치게 된 경서도 소리의 간판, 최창남 명창 이야기를 하였다. 나이 80에도 지칠 줄 모르는 그의 열정에 큰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60~70년대, 국악단체를 조직하여 흥행에 성공했던 김뻑국씨는 한창 때 최창남씨 인기는 정말 대단했다.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멤버들이 공연에 참가한다고 해도 최선생(창남)이 빠지면 흥행이 안 된다는 증언을 해 주었다. 19세에 벽파 이창배 문하에 들었는데 그는 경서도 소리에 알맞은 맑고 구성진 목과 넓은 음역, 기교나 표현력이 특출나서 수료와 더불어 보조강사로 채용되었다는 점, 타고난 목과 강유(剛柔), 명암(明暗), 농담(濃淡)을 표현하는 현란한 기교는 누구도 넘을 수 없는 그의 영역이어서 감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소리의 마술사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는 점을 이야기 하였다. 이번 주에는 즉흥음악의 1인자였던 고 백인영 명인에게 보내는 추모의 글을 쓰기로 한다. 그는 가야금과 아쟁의 명인이었으나 지병으로 작년 가을 고인이 되었다. 그의 타계 1주년을 기리며 제자들과 선후배 음악인들이 1013년 10월 13(일) 오후 5;00시에 대치동 소재 한국문화의 집에서 추모음악회
[그린경제=서한범 교수] 2013년 10월 1일 삼성동 소재 무형문화재 전수회관에서 경서도 소리판을 벌이게 된 최창남 명창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새로움에 도전하기보다는 기존의 전통을 잊지 않고 충실히 지켜가겠다는 의지와 열정을 지닌 명창이란 점, 그는 산타령의 예능보유자이며 산타령은 놀량 앞산타령 뒷산타령 잦은 산타령을 연창하는 소리로 답교(踏橋)놀이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노래란 점, 60~70년대, 국악단체를 조직하여 흥행에 성공했던 김뻑국씨 말에 의하면 유명 연예인이 총 동원되어도 최선생(창남)이 빠지면 계약이나 흥행이 어려웠으며 공연이 끝나면 팬들이 최창남을 보기 위해 장사진을 쳤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구한말 유명했던 선소리패들은 이태문의 뚝섬패, 이명길의 왕십리패, 권춘경의 동막패, 소완준의 과천패, 그 외에도 성북동패, 쇠붕구패, 아오개패, 진고개패, 방아다리패, 배오개패, 자하문밖패 등이 있었다고 하나 변화의 물결에 밀려 전문적으로 부르던 소리패에 의한 연창(演唱)은 이미 맥이 끊어진지 오래 되었다. 이창배의 《한국가창대계》에 따르면 고종 때의 명창으로 뚝섬패의 이동운이 있었는데, 그의 선생이 그 유명한 이태문이었고, 이태문의 선생이 신
[그린경제=서한범 교수] 지금 속풀이는 가야금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지난주에는 우륵의 가야금 음악을 신라의 대악으로 삼으려는 진흥왕과 이를 적극 말리는 신하들의 의견이 대립되는 장면을 소개하였다. 그러나 진흥왕은 보통 임금이 아니었다. 가야는 망한 나라이고 가야금은 망한 나라의 음악이니 절대로 받아드릴 수 없다는 신하들의 반대 이유는 진흥왕의 악하죄호(樂何罪乎), 즉 음악이 어찌 죄가 된단 말이오!! 이 한마디로 결판이 나 버린다. 과거 전통사회에서 가야금은 기녀(妓女)들이 가까이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까지도 가야금을 기녀들의 악기로 보려는 시각은 옳지 않은 것이다. 남다른 안목과 판단력을 지녔던 진흥왕의 존재가 곧 가야금의 오늘을 이어준 결정된 계기가 되었음을 생각해 볼 때, 한 유능한 지도자의 능력이나 판단, 그리고 결단은 역사를 바꾸고도 남는다는 점을 알게 만든다. 잠시 이야기를 바꾸어 이번에는 10월 1일 삼성동 소재 무형문화재 전수회관에서 경서도 소리판을 벌이는 최창남 명창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축하의 메시지를 전달하기로 하겠다. 경서도 소리의 원로, 최창남(崔昌男) 명창이 노익장을 과시하며 올해에도 제자들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