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지난해 봄 창간호에 이어 지난해 10월 30일 《서애연구》 2권이 나왔습니다. 이번에도 서애의 후손인 고교 친구 벽하가 2권을 보내왔습니다. 벽하 덕분에 서애 선생에 대해 많이 공부하게 됩니다. 2권의 첫글은 창간호와 마찬가지로 서애학회 회장인 송복 교수의 논문입니다. 이번 논문의 제목은 <류성용의 중용 리더십>입니다. 송교수님은 서애 일생을 한 글자로 표현하면 단연코 성(誠)이라고 하면서, 이를 박학지(博學之), 심문지(審問之), 신사지(愼思之), 명변지(明辯之), 독행지(篤行之)로 풀이해나갑니다. 이 가운데서 ‘박학지’를 읽으면서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박학지’란 널리 읽고 넓게 배우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조선은 성리학 외에 다른 학문은 인정하지 않았고, 특히 주희의 학설만 오로지 숭상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주희의 학설에 이설을 다는 선비는 사문난적(斯文亂賊, 교리를 어지럽히고 사상에 어긋나는 언행을 하는 사람)이라는 맹비난을 면치 못하였고, 박세당은 이 때문에 유배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송 교수는 정상적인 학문을 하려면 성리학뿐만 아니라 다른 학문도 널리 넓게 두루 섭렵해야 한다는 것이 <중용>의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可憐行色可憐身 가련행색가련신 可憐門前訪可憐 가련문전방가련 可憐此意傳可憐 가련차의전가련 可憐能知可憐心 가련능지가련심 가련한 행색의 가련한 몸이 가련의 문 앞에 가련을 찾아왔네. 가련한 이 내 뜻을 가련에게 전하면 가련도 능히 가련한 이 마음 알아주겠지. 방랑시인 김삿갓이 가련이라는 기생에게 쓴 가련기시(可憐妓詩)라는 시입니다. ‘가련(可憐)’이라는 기생 이름에 빗대기 위하여 연마다 ‘가련(可憐)’을 넣어 시를 지었네요. 역시 김삿갓다운 시입니다. 김삿갓은 함경도를 방랑하다가 함흥에서 가련이라는 기생을 만나 3년간 걸음을 멈추고 아늑한 시간을 보냅니다. 한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길위에서 떠돌던 김삿갓이 어떻게 한곳에서 3년을 보낼 수 있었을까요? 그만큼 가련이 김삿갓을 휘어잡았나요? 그런 점도 있겠지만 김삿갓이 가련을 만나기 전에 두 번이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가련의 얘기를 들으면서 어떤 인연을 느낀 점도 작용하였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금강산 불영암 암자에서 공허스님을 만났을 때입니다. 시로서 김삿갓과 의기투합하여 서로의 시세계를 논하며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공허는 떠나는 김삿갓에게 함흥에 가거든 가련이라는 기생을 만나보라고 하였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김화 정진국 시인의 시집 《가을엽서》가 어느 날 저에게 배달되었습니다. 제가 시집 선물을 많이 받아봤지만, 정진국 시인은 그동안 저에게 시집을 선물한 시인과는 또 다른 분입니다. 정 시인은 예비역 준장입니다. 육군3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오랫동안 군문에 있었지요. ‘장군과 시인’이라는 조합이 어딘가 어색한 느낌을 준다는 사람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무인이 시를 쓴다고 하니 언뜻 호탕하고 나라를 생각하는 우국충정의 시가 연상되기도 할 테고요. 그러나 정 시인의 시는 그런 시와는 좀 거리가 있습니다. 정 시인의 시를 감상하면서 저에게 떠오르는 단어는 ‘풍경시인’입니다. 정 시인은 주위에서 만나는 풍경을, 특히 숲의 풍경을 시로 많이 남겼습니다. 시인의 말을 들어보지요. 어렵고 힘들 때마다 십여 년간 함께 걸어온 숲은 나의 진정한 친구요. 보금자리였음을 인정합니다. 아름다운 숲은 나에게 상큼한 새벽을 열어주기도 하였고, 칠흑 같은 밤길에 등불처럼 노래를 들려주기도 하였습니다. 이제 지나온 결실을 잘 거두어 새로운 씨앗을 자연에 한 톨 한 톨 심어가는 참된 시인이 될 것입니다. 다시 다가올 가을을 위해... 정 시인은 군문을 떠난 이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일제시대 왜놈들의 우리 민족에 대한 집단적 학살이 많았지요? 3.1 운동 후 국내에서 학살로 먼저 떠오르는 것은 제암리 교회 학살사건이네요. 만주에서는 청산리 전투에 대한 보복으로 화룡현 장암동, 연길현 와룡동 등 한인촌을 휩쓸며 독립군도 아닌 일반 백성들을 학살하였고, 연해주에서는 1920년에 블라디보스크의 신한촌과 우수리스크 한인촌 등을 돌며 한인 백성들을 학살하였지요. 그리고 지금까지는 일본군에 의한 조직적 학살이라고 하면, 관동대지진 직후에는 광기의 일반 일본인들이 한인들을 학살하였구요. 그런데 《Colors of Arirang(이정면ㆍ류승호ㆍ승률ㆍ서용순, 이지출판》을 보니 사할린에서도 일반 일본인들이 한인들을 학살하였습니다. 그것도 1945. 8. 15.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직후인 8월 20일에서 25일까지 한인들을 무차별 학살했습니다. 아리랑 답사대는 그 학살이 일어났던 미즈호 마을도 찾았습니다. 도대체 이들이 왜 한마을에 같이 살던 한인들을 살해하였을까요? 일본인들은 자기 조국이 패망하면서 자기네가 살던 마을이 하루아침에 적국 소련땅이 된 것에 어느 정도 패닉 상태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럴 때 한인들이 소련군에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우리 모두 대한민국의 꽃은 무궁화임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무궁화~ 무궁화~ 우리나라꽃~♪♬♪”을 불렀고, 무엇보다도 애국가 가사에 ‘무궁화 삼천리’가 나오니까요. 그런데 왜 무궁화가 나라꽃[國花]인지 생각해보신 적 있습니까? 사실 무궁화는 공식적으로 나라꽃으로 지정된 것도 아닙니다. 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가 ‘무궁화가 왜 나라꽃인가?’라는 의문을 품고 파고들어 《두 얼굴의 무궁화(국가상징 바로잡기)》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강 교수는 전세계의 나라꽃을 조사해보니, 세계 각국은 나라꽃에 대하여 아래와 같은 5가지 특성을 보유했거나, 보유하려고 애쓰고 있다고 합니다. ⓵ 지리성 : 원산종이거나 자생지가 분포하고 있거나 국토 대부분 지역에서 재배가 가능한 꽃 ⓶ 민주성 : 위에서 아래로의 일방적 지정이 아닌 국민의 의사를 반영하여 선정한 꽃 ⓷ 역사성 : 예로부터 그 나라의 신화, 역사, 문학과 예술에 중요한 지위와 역할을 차지한 꽃 ⓸ 접근성 : 국민 대다수가 좋아하고 국민 일상생활에 쉽게 접할 수 있는 꽃 ⓹ 상징성 : 국가와 민족의 특징과 전통을 대표할 수 있는 꽃이거나 세계적으로 희귀한 특산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國破君亡社稷傾(국파군망사직경) 나라는 망하고 임금도 죽어 사직은 기울었는데 包羞忍死至今生(포수인사지금생) 부끄럼 가득 안고 죽지 못해 지금껏 살아있었네 老身尙有沖霄志(노신상유충소지) 몸은 늙었지만 아직 하늘을 찌를 뜻이 남아있으니 一擧雄飛萬里行(일거웅비만리행) 한 번 날아올라 만리 길을 떠나노라 한일합방이 되면서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던 동농 김가진(1846~1922) 선생이 1919년 10월 무렵 상해로 떠나면서 쓴 시 ‘上海發行日口號(상해로 떠나는 날에)’입니다.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고 하면 얼른 친일파가 떠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농은 조선의 마지막 대신이었기에 일제의 조선귀족령에 따라 일방적으로 작위를 받았던 것이지요. 그 대신 동농은 연금 받는 것은 단호히 거부하였습니다. 위 시에서 보듯이 동농은 망해버린 나라의 대신으로서 일제 치하를 살아가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3.1만세운동 뒤 대동단이 찾아옵니다. 대동단은 3.1만세운동 직후인 1919년 3월 말 무렵 3.1 운동에 자극을 받아 전협, 최익환 등이 주동이 되어 만든 독립단체로 이들은 동농에게 대동단 총재를 맡아달라고 요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野闊秋多月(야활추다월) 들은 넓어 가을 달빛 그득하고 江淸夜少煙(강청야소연) 강은 맑으니 밤의 연기는 있는 듯 마는 듯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의 동인으로 활동하였던 왕태(王太, 1764~?)의 시입니다. 왕태는 집안이 가난하여 술집 심부름꾼으로 힘들게 일하면서도 문학에 대한 꿈을 잃지 않아 점차 시재(詩才)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당시 대표적인 시사였던 송석원시사의 일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송석원시사는 천수경(1758~1818)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중인들 문학단체입니다. 그동안 시사는 양반들의 전유물이었는데, 중인들이 시사를 결성하였다는 것은 이 당시 중인들이 시사를 결성할 만큼 문학적 소양이 있었고, 경제적 능력도 되었다는 얘기지요. 18세기 말에는 조선도 점차 상업이 발달하면서 경제적 부를 축적하는 중인들도 늘어났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의 신분 상승에 대한 열망, 문학 활동에 대한 욕구가 이런 시사까지 만들게 된 거지요. 이 당시 이러한 중인들에 의해 이루어진 문학 활동을 위항문학(委巷文學) 또는 여항문학(閭巷文學)이라고 합니다. ‘송석원’이라고 하면 소나무와 돌이 어울리는 원림(園林)이라고 할 텐데, 송석원시사를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소문에 종 갓동(同)과 철매(哲每)가 병으로 죽었다고 하니 참 불쌍하다. 중 해당(海堂)도 왔다. 밤 10시쯤 급창, 금산과 그 처자 34명이 모두 유행병으로 죽었다. 3년 동안이나 앞에 두고 미덥게 부리던 자라, 하루 아침에 죽어간 것이 참혹하다. 새벽에 종 한경(漢京), 돌쇠(乭世), 해돌(年石) 및 자모종(自慕終) 등이 돌아왔다. 저녁에 종 금이(金伊), 해돌, 돌쇠 등이 돌아갔다. 양정언(梁廷彦)도 같이 돌아갔다. 저녁부터 비바람이 크게 일어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는데 어떻게 돌아갔는지 모르겠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亂中日記)》 중에 나오는 대목들입니다. 한낱 종이 병으로 죽은 것에 대해서도 가슴 아파하고, 비바람이 밤새도록 몰아치는데, 종들이 무사히 돌아갔는지 걱정하고 있는 장군! 이순신 장군에 대한 기록들을 보다보면 여러 가지 면에서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게 되는데, 한낱 종들에 대해서도 따뜻한 마음 씀씀이를 보여주는 이 일기의 대목에서 또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네요. 노비들까지 걱정하는데, 부하들에 대한 기록도 없을 수 없겠지요? “흐리고 가랑비가 오더니 저녁에는 큰 비로 변하여 밤새도록 내린다.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이통제사의 죽음을 애도함 혼자 힘으로 하늘의 절반을 받들어 지탱했지. 고래 같은 흉악한 도적 격살하여 거친 물결 피로 물들였고. 맹렬한 불길로 풍이(馮夷) 같은 왜적 소굴 다 태웠네. 공이 높아지니 시기와 모함의 덫 피하지 못하면서도, (나라 위해) 목숨을 깃털처럼 여겼으니 얼마나 애석한가. 그대는 못 봤는가 현산 동쪽의 한 조각 비석에 양공(羊公)이 세상을 뜬 후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처량하구나 몇칸의 민충사(愍忠祠) 해마다 비바람에 훼손돼도 수리조차 못 하는데, 지네 나오는 사당에 소리 삼키며 우는 곡소리 들리도다 哀 李統制使 閑山島古今島 (한산도고금도) 大海之中數點碧 (대해지중수점벽) 當時百戰李將軍 (당시백전이장군) 隻手親扶天半壁 (척수친부천반벽) 鯨鯢戮盡血殷波 (경예륙진혈은파) 烈火燒竭馮夷窟 (열화소갈풍이굴) 功高不免讒妬構 (공고불면참투구) 性命鴻毛安足惜 (성명홍모안족석) 君不見峴山東頭一片石 (군불견 현산동두일편석) 羊公去後人垂泣 (양공거후인수읍) 淒凉數間愍忠祠 (처량수간민충사) 風雨年年OO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효사재 가는 길》을 보다 보면 장 이사장이 우리나라의 대표적 그룹인 현대를 살린 이야기도 나옵니다. 장 이사장은 공직 생활을 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이 바로 현대 부도를 막은 일이라고 하는군요. YS가 대통령이 되고 난 뒤 YS는 선거기간 중 자신을 괴롭힌 정주영을 손봐주려고 하였답니다. 정주영 회장이 대통령 후보로 나왔을 때 아무래도 경쟁 후보인 YS를 많이 괴롭히지 않았겠습니까? YS는 은행장들을 전부 청와대로 불러 현대에 돈 주는 은행들은 전부 문 닫게 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답니다. 그때만 하여도 제왕적 대통령 시절이니 은행장들이 감히 대통령의 엄명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그전에 대우가 정치적인 이유로 문을 닫아 우리나라 경제에 큰 주름이 생겼었는데, 현대마저 그런 식으로 문을 닫게 하면 나라 경제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고 현대 부도는 대우 부도보다 더 큰 파장을 몰고 올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은행장들이 머리를 썼답니다. 직접 현대에만 돈을 주지 않으면 되지 않겠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현대종금에 돈을 빌려주었답니다. 현대종금은 이 돈을 받아 현대그룹 내 각 회사에 돈을 풀었구요. 그때만 하여도 현대종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