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서한범 문화전문기자] 앞에서는 김세종제 춘향가를 이어받은 정응민의 제자로 조상현 명창의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열두어 살 무렵 마을에서 단가와 춘향가 토막소리를 배운 뒤 정응민 선생 댁을 찾아가 집안일을 도우며 일곱 해 동안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등 세 바탕소리를 익혔다. 소년명창의 소리를 듣기도 하고 임방울 명창으로부터도목이 좋은 놈 처음이라는 칭찬을 들었다. 그러다가 김명환으로부터 북을 배우면서 소리와 어울리는 북이 재미있어 정작 주전공 분야인 소리의 사설을 잊어버리기도 하여 선생으로부터 혼이 난 이야기도 재미있게 들었다. 선생님께 야단을 맞고 어린 소년은 그 이튿날, 하직 인사도 못 드린 채,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얼마 동안은 모진 맘으로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특히 선생 앞에서 막히기 일쑤였던 천자뒤풀이 대목은 무려 1,500번이나 불렀다하니 그의 집념도 보통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 조상현 명창이 소리하는 모습 그러면서도 밤이나 낮이나 선생이 계신 회천면 쪽을 향했고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그쪽으로 향하고 있었으며 선생 앞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고 한다. 3개월이 지나면서
[그린경제=서한범 문화전문기자] 앞에서는 김세종제 춘향가를 이어받은 정응민의 제자로 그의 아들 정권진을 소개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사랑채에서 들려오는 판소리를 듣고 흥얼거릴 수 있을 정도로 소리에 대한 재능이 있었다는 이야기, 50년대 후반에는 군산, 대구, 대전 등지의 국악원에서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1960년대 이후 국립창극단과 교육현장에서 공연과 후진양성을 병행하였다는 이야기, 그만의 특이한 훈련방법으로 정응민의 판소리 바디를 충실하게 이어받은 명창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번호에서는 김세종제 춘향가 전승의 특징을 가장 명쾌하게 전승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조상현 명창의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겠다. 유영대교수의 김세종제 춘향가의 전승자들이란 글을 보면 조상현에 관한 재미있는 글들이 있다. 이을 참고해 보면 조상현의 선친은 아들을 공부시키려고 그가 말을 하기 시작할 무렵에 서당으로 보냈다고 한다. ▲ 소리를 하는 조상현 명창 열두어 살 무렵 마을에서 소리하는 분에게 단가 몇 마디와 춘향가 토막소리를 배웠다. 싹수가 있다고 칭찬이 자자해 지자, 그는 열세 살 되던 해 회천면의 정응민 선생 댁을 찾아간다. 선생 집에 들어가 집안일을 도우며 그
[그린경제=서한범 문화전문기자] 1에서는 김세종제 춘향가를 이어받은 정응민이 박유전의 강산제 심청가와 수궁가 등도 익혔다는 이야기, 제자들이 말하는 정응민은 행동에 흐트러짐이 없는 스승이었으며, 제자를 심하게 다그치거나 야단치지 않았다는 이야기, 보성소리의 이론적 기반은 정심(正心), 정음(正音), 사채라는 이야기, 재미위주의 소리나 너름새를 원한다고 해도 시류에 영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보성소리를 진중한 무게, 남다른 품격이 느껴지는 소리라고 입을 모은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정응민은 그의 아들 정권진이 판소리를 시작하려 하자 노력 끝에 명창이 된다 하여도 대우도 못 받고 고되니 그 공을 학문하는데 쓰도록 설득하였다고 한다. 이들 부자에게만 있었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판소리뿐 아니라 다른 장르의 전통음악분야에서도 자녀에게 세습을 원치 않은 부모의 만류 이야기는 하나 둘이 아니다. 소리가 좋아서, 악기를 만지는 것이 재미가 있어서, 춤을 배우기 원하는 자녀들을 집안에 감금시켜 놓고 바깥나들이를 금지시킨 부모들이 많았다는 이야기는 너무도 흔하게 들을 수 있는 경험담이다. 그래서 부모 몰래 집을 뛰쳐나가 갖은 고생을 이겨가며 소리를 배우고 재주를 익혀 왔던
[그린경제=서한범 문화전문기자] 속풀이 107에서는 일반 대중들을 주 수요층으로 삼아 온 판소리가 양반층 청중의 취향을 반영하여 판소리의 사설이나 내용을 변화시켰으며 시창(詩唱)이나 우조(羽調) 틀의 음악을 삽입하게 되었다는 점, 감정의 지나친 표출을 자제하는 창법으로 우아한 미의식을 반영하게 된 배경과 이 같은 변화의 전범을 김세종제 춘향가로 보고 있는 내용들을 주로 이야기 하였다. 이제부터는 김세종제 춘향가를 이어 온 명창들의 이야기를 진행해 보도록 하겠다. 앞에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김세종의 판소리 춘향가는 장재백과 김찬업이 이어받았고, 김찬업은 정재근에게, 정재근은 그의 조카인 정응민에게 전해 준다. 한편, 박유전은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전라도 나주로 내려와 정재근의 집에 은거하면서 그에게 강산제 소리를 가르쳤다. 이렇게 정재근에게 전해진 박유전의 강산제 소리는 정응민에게로 전해 졌기에 정응민은 김세종제 춘향가를 비롯하여 박유전의 강산제 심청가와 수궁가 등도 익히게 된 것이다. 정응민의 보성소리를 이은 제자들로는 김연수, 박춘성, 김명환, 정권진, 조상현, 성우향, 성창순 등 쟁쟁한 명창들의 이름이 눈에 띈다. 이 중 정권진은 정응민의 아들이다. 정
[그린경제=서한범 문화전문기자] 속풀이 106에서는 판소리의 각 유파(流派)를 형성하게 되는 배경이나 기준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이에 따라 동편제, 서편제, 중고제로 구분하고 있는데 동편제는 섬진강 동쪽 지역의 소리로 웅건청담하여 정중하고 온화하면서도 씩씩한 소리제인데, 창법에서 기교를 부리지 않고 선천적인 음량을 소박하게 그대로 드러내는 특징을 지닌 소리라는 이야기였다. . 서편제는 섬진강 서쪽지역에서 불린 유파로 소리의 특징은 애원처절하며, 대체로 정교하면서 감칠맛이 나고 장단의 변화와 장식음의 구사가 특성이다. 그리고 중고제는 경기충청 지역에서 불린 소리로 동서 소리의 중간적인 위치를 지닌 소리제를 말한다는 이야기와 함께 이러한 판소리의 유파 형성은 19세기 초반부터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강산제 심청가는 원래 서편제 심청가의 한 가닥으로 박유전의 한양 생활 이후에 다듬어진 심청가를 특히 강산제라고 부르고 있는데, 대원군이 박유전의 소리를 듣고네가 제일 강산이다.라고 하였다는 설과 그가 말년에 보성의 강산리에 은거하였기에 강산제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다. ▲ 강산제를 만든 박유전비 판소리의 주 수요자들은 일반 민중들이었다. 그런데 김세종제 춘향가의
한국 전통음악의 제반연구 가운데 주로 실기관련 분야의 이론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한국전통음악학회는 2013년 3월 21일 삼성동 소재 무형문화재전수회관에서 김세종제 춘향가의 미적 접근이라는 주제의 학술모임을 개최하였다. 특별히 김수연 명창이 이끌고 있는 판소리김세종제 춘향가보존회와 공동으로 마련된 것이어서 더욱 뜻 깊은 행사였다. 한국전통음악학회는 봄가을로 국내 학술대회를 열어왔고, 여름방학에는 중국의 연변예술학원과 한중 학술 및 실연교류회를 그리고 겨울방학에는 미국의 명문 UCLA와 공동으로 Korean Music Symposium을 12번째 기록 중이다. 국내학술대회는 2000년 남북한 음악의 동질성 회복을 위한 대토론회를 시작으로 해서 주로 악기 연주분야나 시조창분야, 또는 경서도 민요와 선소리 등 주로 서울 경기지방의 음악을 중심 주제로 정하고 논의해 왔다. 그동안 판소리 관련 학술회의는 전통적으로 판소리학회가 전담해 오다시피 하였고 그동안 축적된 결과물도 방대한 편이나 또 다른 시각에서 보면 판소리 이론에 접근하는 통로가 다양한 것도 전통음악 발전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어 용기를 내어 본 것이다. 한국인으로「춘향가」를 모르는 사람은 거
국악속풀이가 100회를 맞았다. 그동안 이 난에 국악 관련 내용들을 조금씩 소개해 드렸는데, 속풀이는커녕, 겉풀이도 제대로 되었는지 의문이다. 가곡과 시조, 가사에 관한 이야기도 했고, 정악과 민속악은 자전거의 앞뒤바퀴와 같은 관계라는 이야기, 농악은 한국인 신명의 뿌리라는 이야기, 한국의 무형문화재 정책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또 국악과 서양음악은 서로 다른 것이 특징이 된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리고 벽파 이창배와 경서도 민요, 관악기의 피리, 대금, 단소 이야기와 현악기 거문고 관련 이야기 등을 이 난에 소개하였다. 그 동안 재미없는 내용들을 열심히 읽어 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감사한다. 그리고 간혹 질의나 이견에 일일이 답장을 못해 드린 점 양해를 부탁드린다. 국악속풀이를 시작할 때 제일 먼저 시작한 글은 추임새에 인색한 세상이었다. 그래서 이번 100회의 제목은 추임새에 인색하지 않은 세상으로 정해 보았다. 평소에도 필자는 남을 칭찬하자는 말을 자주 하는 편으로 주위 사람들 칭찬에 인색하지 않으려 애쓰는 편이다. 특히 무대 위에 올라있는 사람들에게 추임새가 얼마나 용기를 주고 자신감을 불러일으키는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잘 모른다. 그
속풀이 97에서는 사육신과 거문고 관련 이야기로 세조의 왕위 찬탈을 끝끝내 반대하다가 육시를 당한 사육신과 거문고에 관련된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사육신의 대표적인 인물, 성삼문과 박팽년의 집에는 손수 심은 소나무가 울창하여 서로 바라다 볼 정도로 성장하게 되었는데 두 대감의 집안이 전복되고 육시(戮屍)될 때, 처참한 광경을 처음부터 오로지 보아왔다. 시간이 흘러 단종의 복위와 함께 사육신들도 그 결백함이 밝혀졌으나 두 대감집의 소나무도 수명을 다 하였다. 선군께서 이 두 소나무 목재를 얻어 합하여 거문고를 만드시고, 쌍절금(雙節琴)이라 이름 짓고 연주해보니 뛰어난 소리를 냈다. 유심히 들어보니 맑고도 굳센 음색은 곧은 두 대감의 성품이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충신의 집을 지키던 소나무도 주인의 성품이나 모습을 그대로 닮아 그 재료로 거문고를 만들었는데 그 소리가 일반 거문고와는 달리 음색이 강렬하고 굳세다는 이야기이다. 공감이 가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예로부터 거문고만큼 상류 사회, 지식인 계층의 애호를 받은 악기도 드물다. 지금까지 전해 오는 대부분의 고악서(古樂書)나 옛 악보들이 모두 거문고 악보임을 보아도 쉽게 짐작 할 수
지난 주 속풀이에서는 신라의 거문고 음악은 옥보고(玉寶高)로부터 비롯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선생이 없어 홀로 지리산 운상원에 들어가서 50년 동안 거문고를 독학하여 스스로 곡을 짓고 속명득(續命得)에게 전해 주었다는 이야기와 옥보고 작품들은 곡명이 전해 오는데, 그 악곡명이 매우 세련되어 있다는 점을 이야기 했다. 또 속명득은 귀금(貴金)에게 전해 주었는데, 귀금 역시 지리산에 들어가 나오지 않자 임금은 윤흥(允興)이라는 고급관리를 남원 공사로 보내서 거문고 음악의 보존, 계승에 전념할 것을 명하였다는 이야기, 윤흥은 자신의 무례를 알아채고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예를 갖추어 선생의 음악을 간청한 연후에 표풍(飄風)등 3곡을 전해 받았다는 이야기 등 이었다. 거문고는 6줄로 구성된 악기여서 각 줄마다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 음색의 어울림이 일품이다. 특히 억양을 살린 음색은 더더욱 멋이 있다. 제1현은 문현이라 부르고 마지막 제6현은 무현이라 부른다. 문, 무현 안에 가장 많이 쓰이는 제2현인 유현과 가장 굵은 줄의 제3현 대현이 있다. 특히 제3현의 굵고 낮은 대현의 울림은 거문고의 특징을 잘 말해주고 있는 줄이다. 유현은 대현보다 완전4도 높게 조
지난주 속풀이에서는 거문고가 고구려시대 처음 전해졌고 왕산악이 대폭 고쳐 만들어 타매 검은 학이 내려와 춤을 추었다고 해서 이름을 검은학금으로 지었다가 후에 학자를 빼고 거문고라 불렀다는 이야기와 신라 자비왕 때에 백결선생이 지었다고 하는 대악은 세모에 걱정하는 아내를 위하여 거문고로 떡방아 찧는 소리를 낸 것이 아니라 가야금으로 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 까닭은 자비왕이 5세기 말엽의 임금이기에 이 시기는 아직 신라에 거문고가 퍼지기 전이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고구려의 거문고가 신라에 전해진 것은 삼국을 통일하고도 약 200여년이 지난 9세기 말로 보는 것이 각종 자료에 의한 결론이다. 통일신라 이후의 기록에는 신라의 3죽으로 가야금, 거문고, 향비파를 들고 있다. 그러므로 거문고는 고구려-신라-고려-조선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1,500년 이상의 전통을 자랑하는 귀중한 악기로 자리 잡아 온 대표적인 현악기인 것이다. 고구려 때에는 왕산악이라는 악사가 있어 악기를 고쳐 만들고 곡을 짓고 했다는 기록이 보이나 그 후의 기록이 없어 고구려의 거문고 명인은 알기가 어렵다. 그러나 『삼국사기』 신라의 음악조에는 신라의 거문고 음악은 옥보고(玉寶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