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에는 맑은 바람 뜨거운 햇볕 / 빛깔도 곱게 오곡을 키워 / 그 곡식 고루 먹고 자라는 우리 / 넘치는 건강에 살찌는 살림 / 쑥쑥 키가 큰다 힘이 오른다 / 혼식 분식에 약한 몸 없다 / 하얀 국수가락 맛좋은 빵에 / 고소한 잡곡밥 그 맛을 알며 / 해와 같이 밝은 마음 튼튼한 육체 / 우리도 넉넉히 살수 있어요 / 쑥쑥 키가 큰다 힘이 오른다 / 혼식 분식에 약한 몸 없다” 위는 혼분식을 장려하기 위해 부르게 한 “혼분식의 노래”입니다. 1969년 1월 정부는 농림부·보건사회부·내무부 합동으로 혼분식 장려 정책을 시작했지요. 겉으로야 혼분식을 하면 몸이 건강해진다고 홍보했지만 사실은 식량이 모자라 잡곡이나 밀가루로 보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 모든 음식점에서는 쌀밥에 보리나 밀가루를 25% 이상 섞어야 했고,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은 무미일(無米日) 곧 '분식의 날'이라 하여 낮 11시부터 저녁 5시까지 쌀밥을 팔지 못했지요. 음식점 만이 아니라 학교에서도 날마다 도시락 검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쌀밥을 먹이려던 어머니들은 흰쌀밥을 보리밥으로 가린 도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뒷길에는 “이면도로 안전한 교통환경 조성을 위한 제한속도 하향”이란 길다란 펼침막(현수막)이 붙어있습니다. 지나다니면서 그 펼침막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꼭 “이면도로”라 하여 국어사전에도 없는 어려운 한자말을 써야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조성, 하향 같은 한자말로 펼침막이 온통 도배가 되어있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이면도로”는 없고 “이면(裏面)”만 설명이 되어 있는데 그 뜻을 보면 “1. = 뒷면, 2. 겉으로 나타나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라고 풀이되어 있지요. 그렇다면 “이면도로”는 “겉으로 나타나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이란 어색한 말이 됩니다. 따라서 “이면도로” 같은 말 보다는 뒷쪽에 있는 길이란 뜻으로 토박이말인 뒤안길 또는 속길로 하면 뜻이 명확해지고 어린아이도 알기쉬운 말이 될 것입니다. 요즈음은 '올레길'을 비롯하여 우회로를 뜻하는 '에움길' 같은 아름답고 정겨운 토박이말을 많이 쓰는 추세입니다. 또한 우로굽은 길, 좌로 굽은 길 같은 말을 도로 표지판에 새기고 있는 가 하면 일본말
“여종인 의(義)가 끝내 일어나지 못했으니, 견딜 수 없이 참담하고 가슴이 저민다네. 그의 근면과 노고, 충성스러움과 순종함은 나라의 충신과도 견줄 만 했는데, 노고에 대한 보답을 채 하기도 전에, 갑자기 역병에 걸려 죽고 말았네. 더욱이 그녀의 시신마저도 뜻대로 염습조차 하지 못했을 터, 내 마음도 이처럼 슬픔을 잊기 어려운데, 더군다나 자네 마음은 어떻겠는가.” 위 글은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1651∼1708,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이 아우인 김창집(金昌緝)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아우 여종의 죽음에 가슴 아파하는 것은 물론, 아우에게 편지로 위로하는 모습은 참으로 따뜻합니다. 당시 사대부가 노비를 사람으로 대우해 주는 경우는 드물었지요. 더 나아가 여종을 성적 대상으로 생각하거나 가문의 재산 일부로 여겼습니다. 성종실록에 보면 사대부가 질투심으로 자신의 여종을 처참하게 죽여 수구문 밖 왕십리에 내다버린 사건이 있을 정도입니다. 김창협은 아버지 김수항이 정쟁으로 죽자, 이후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문학과 학자의 길을 걸음으로써 그 이름을 높였습니다. 그는 “
지난 3월 뉴스를 보면 “서울 핵안보정상회의에 참석하는 각국 정상들의 입맛을 사로잡기 위해 한식 메뉴로 김치전, 녹두전, 잡채처럼 우리 식탁에서 친근하게 접할 수 있는 음식과 함께 궁중신선로, 한차와 과즐 등을 포함해 한식의 고급스러움까지 더했다.”는 내용이 보입니다. 여기서 각국 정상들을 대접하는 최고급음식에 꼽힌 “과즐”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전통과자를 흔히 “한과(韓菓)”라 하는데 이는 중국의 “한과(漢菓)”와 헷갈릴 염려가 있고, 서양과자 "양과(洋菓)"와 구별하려고 만든 말이어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원래 한과를 우리는 “과즐”이라 불렀고, 과즐은 흔히 유밀과(油蜜菓)를 뜻하지만 정과(正果, 각종 과일이나 생강 ·연근 ·당근 ·인삼 따위를 꿀이나 설탕에 재거나 조려서 만든 과자), 다식(茶食), 숙실과(熟實果, 밤·대추와 같은 과실을 꿀로 달게 하여 만든 음식), 과편(果片, 신맛이 나는 앵두, 모과, 살구 따위의 과육에 꿀을 넣고 졸여서 굳힌 음식) 따위를 포함한 전통과자를 뜻합니다. 이 과즐 곧 유밀과는 통일신라 때 불교 행사의 제물로 쓰기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스무째 절기로 첫눈이 내린다는 소설(小雪)입니다. 소설은 대개 음력 10월 하순에 드는데, “초순의 홑바지가 하순의 솜바지로 바뀐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날씨가 무척 추워지는 계절이지요. “소설 추위는 빚을 내서라도 한다.”라는 속담이 있는데 소설에 날씨가 추워야 보리농사가 잘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설 전에 김장을 하기 위해 서두르고, 여러 가지 월동 준비를 위한 일들을 합니다. 시래기를 엮어 달고 무말랭이나 호박을 썰어 말리기도 하며 겨우내 소먹이로 쓸 볏짚을 모아둡니다. 또 줄줄이 감을 깎아 매달아 곶감을 만드느라 처마 밑이 온통 붉은빛으로 출렁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한겨울이 아니고 아직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때여서 “소춘(小春)”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방고래 청소하고 바람벽 매흙 바르기 / 창호도 발라 놓고 쥐구멍도 막으리라 / 수숫대로 울타리 치고 외양간에 거적 치고 / 깍짓동 묶어세우고 땔나무 쌓아 두소.” 농가월령가 10월령에 나오는 노래입니다. 김장 말고도 겨울채비에 바쁜 농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제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용은 여러 문화에서 발견되는데 우리에겐 친숙하거나 존경스러운 초월자로서 나타나지요. 하지만 어떤 민족에게선 혐오와 공포의 상징인 악마로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거북은 상상의 동물인 용과 달리 세상에 실재하는 동물입니다. 그 거북은 장수를 상징하여 십장생(十長生)의 하나로 꼽히지요. 그런데 그 용과 거북을 합쳐놓은 상상의 동물은 무엇일까요? 국립경주박물관에 가면 보물 제636호 “서수모양 주전자”가 있습니다. 바로 몸통은 거북, 머리와 꼬리는 용의 모양을 한 주전자입니다. 높이 14cm인 이 주전자는 경주시 미추왕릉지구에서 출토된 것이지요. 흡사 고구려 고분벽화의 사신도(四神圖)에 나오는 현무(玄武)를 연상시키고 있어 무덤을 지키기 위한 특별한 뜻을 담아 제작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현무(玄武)는 북방(北方)의 신으로 동쪽의 청룡(靑龍), 서쪽의 백호(白虎), 남쪽의 주작(朱雀)과 함께 사신(四神)의 하나이지요. 좀 더 구체적인 모양새를 보면 뒷머리에 지느러미가 6개 있는데, 쑥 내민 혀, 툭 튀어나온 눈은 해학적이기까지 합니다. 그 뿐
우리 겨레가 만든 그릇인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는 세계적인 명품입니다. 이에 못지 않은 그릇으로는 방짜유기가 있습니다만 그간 잊혀졌지요. 그러나 요즈음 다시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써온 이 유기는 근대 말 일제가 유기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각 가정에서 그릇을 빼앗아 간데다가 6·25 한국전쟁 이후 연탄을 사용하면서부터 연탄가스에 변색되기 쉬운 놋그릇 대신 스테인레스 그릇을 쓰게 됨에 따라 방짜유기가 점차 사라졌던 것입니다. 그렇게 잊힌 방짜유기(방자유기)는 최근 각종 실험을 통해 식중독을 일으키는 대장균 가운데 가장 무서운 독성의 O-157균은 물론 살모넬라균을 비롯해서 많은 식중독 세균을 죽이는 효과가 드러나 다시금 각광을 받기 시작합니다. 또 이 방짜유기는 온도 53도의 밥을 담아놓고 30분 뒤 다시 온도를 측정했을 때 42도를 유지해 다른 그릇들과 견주어 뛰어난 열보존율을 자랑했습니다. 유기는 제작기법에 따라 방짜(方字)와 반방짜(半方字) 그리고 주물(鑄物)로 나눕니다. 그 가운데 방짜유기는 구리와 주석을 78:22로 합금하여 거푸집에 부은 다음, 불에 달구
“전하의 나랏일은 이미 잘못되었고, 나라의 근본은 이미 없어졌으며,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나버렸고 민심도 이반되었습니다. 낮은 벼슬아치들은 아랫자리에서 히히덕거리며 술과 여자에만 빠져 있습니다. 또 높은 벼슬아치들은 빈둥거리며 뇌물을 받아 재산 모으기에만 여념이 없습니다. 온 나라가 안으로 곪을 대로 곪았는데도 누구 하나 책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남명 조식(1501 ~ 1572)의 이 사직상소를 받은 임금은 어머니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받는 명종이었지요. 대비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는 동안 윤형을 비롯한 명종의 외척들은 권력을 마음대로 농단했고, 급기야 임꺽정의 난과 왜구의 침략으로 나라 안팎의 혼란은 가중되었는데 이때 가장 고통스러웠던 사람들은 백성들이었지요. 이렇게 극단적인 상소를 올려 임금과 대비를 꾸짖던 조식은 ‘경(敬)’으로 마음을 곧게 하고, ‘의(義)’로서 실천하라고 제자들을 가르칩니다. 곧 그의 가르침은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행에 옮겨야 하고, 철저한 자기 절제를 통해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강한 절의였습니다. 조식은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이 있었지만 번번이 사양했고, 심지어는 당대의 대학자 퇴계 이황의 벼슬길에 나아가라는 권고도
“진장을 일즉 하는 것은 혹간 일기가 더워서 시여진다고 하는데 그것은 움을 못짓고 부엌 속에 무더두기 때문입니다. 아모쪼록 북향 헛간에 기피 독을 뭇고 우에다가 둑겁게 덮어두면 그러케 실 염려가 적습니다.” 위는 1931년 11월 10일자 동아일보의 김장 이야기입니다. 김치 냉장고가 없던 시절 김장이 시어버릴까봐 주부들이 걱정하던 모습이 선합니다. 예전에는 지금보다 더 일찍 김장을 담갔는데 특히 추위가 일찍 찾아오는 산간지방이나 지방에서는 11월 중순이면 얼추 김장을 마친 집도 꽤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어버리는 일도 있게 마련이지요. 김장이야 밭에서 바로 뽑은 배추와 무나 갓, 파 따위를 쓰지만 특히 김장을 마친 뒤에 집집 마다 무청을 말리던 정경이 그립습니다. 새파란 무청이 꾸득꾸득 말라갈 때 처마 밑으로 옮겨 달아 매두었다가 한겨울에 시래기 우거지국을 해 먹으면 밥 한 그릇을 후딱 해치울 정도로 꿀맛이었던 기억이
“남으집 하이칼라는 다꾸시를 타는데 우리집의 멍텅구리는 똥구르마만 끄네 정선읍내 물레방아 물살을 안고 도는데 우리집의 서방님은 나를 안고 돌 줄 모르나“ 위 노래는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1호 정선아리랑의 일부입니다. 하이칼라와 견주어 남편의 무능함을 ‘똥구르마를 끄는 멍텅구리’라고 빗댑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적으로 제구실을 못하는 남편을 물레방아에 견주어 조롱하는 것이 재미납니다. 그러나 악에 받쳐 남편을 욕한다기 보다는 걸쭉한 입담으로 가슴속에 맺힌 응어리를 풀어내는 소리지요. 이렇게 정선아리랑은 한이 맺혀 있다기보다는 두메산골 정선 사람들의 고달픈 삶을 풍자와 해학으로 담아낸 소리입니다. 1926년 10월 1일 일제에 의해 헐리고 망가진 경복궁 앞에 거대한 조선총독부 낙성식이 거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날, 종로 단성사에서는 중대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스물다섯의 청년 나운규(羅雲奎)가 감독, 각본, 주연을 맡아 첫 영화로 만든 영화 ‘아리랑’이 개봉된 것이지요. 이 날의 광경을 주연배우 신일선(申一仙)은 '목 놓아 우는 사람, 아리랑을 합창하는 사람, 조선독립만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