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알간 빛깔에 누님이 돋아나고 쪼그르르 난 소리에 웃음이 나던데 이제는 남 첫여름에 꽈리꽃이 피느나. 어릴 때 이웃 처녀들이 주홍빛깔로 변한 익은 꽈리의 씨를 솜씨 있게 파내고 그것을 입안에서 쪼그르르 울리는 놀이를 많이 봤는데 요즈음 보지 못한다. 그때면 “아아, 바야흐로 여름이다.”라는 생각이 많이 돋은 기억이 있다.
어제는 24절기 열두 번째인 대서(大暑)였습니다. 대서는 우리말로 하면 “큰더위”를 뜻하며 한국인들이 무더위를 크게 느끼는 날로는 복더위도 있는데 오는 28일 토요일은 중복(中伏)입니다. 현대인들이야 에어컨 밑에서 더운 줄 모르고 지내지만 옛 사람들은 어떤 옷을 입고 여름나기를 했을까요? 물론 모시적삼을 기본으로 입었어도 땀이 줄줄 흐르면 적삼이 젖어 감당하기가 어려웠지요. 그래서 입었던 것이 “등등거리”입니다. 이 등등거리는 소매가 없어 “등배자(藤褙子)”라고도 부르는데 등나무 줄기를 가늘게 쪼개서 얼기설기 배자 모양으로 엮어 만든 것으로 여름철 모시적삼 밑에 받쳐입습니다. 등등거리를 입으면 땀이 흘러도 옷이 살갗에 직접 닿지 않아 적삼에 배지 않고, 등등거리가 공간을 확보해주기에 공기가 통하여 시원합니다. 이 등등거리는 등나무 가지로 만든 팔에 차는 등토시와 함께 여름나기에 중요한 옷이었지요. 등등거리를 입은 선비는 쥘부채(합죽선)을 부쳐가며 책을 읽다가 죽부인을 안고 화문석 돗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습니다. 이제 이 등등거리도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겠지만 등등
중요무형문화재 19호 선소리 산타령의 이수자로 용인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경기소리의 중견 곽윤자 명창이 음반 출시를 했다고 한다. 평소 그의 활동을 지켜보고 있는 필자의 입장에서 노래에 대한 그의 열정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 것이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미국과 중국의 대학과 학술 및 실연교류회를 해 오고 있다. 겨울철에는 미국의 UCLA와 Korean Music Symposium 행사를 11년째 해 오고 있고, 여름 방학을 이용해서는 중국의 연변예술대학, 그리고 조선족 예술단과 학술 및 실연교류회를 20여년 전부터 해 오고 있다. 이 행사에 국악계 여러 교수와 석 박사 과정의 대학원생, 인간문화재급 명인명창이나 이수자급의 실기인들이 동참해 주고 있다. 몇해 전부터는 선소리 산타령의 황용주 예능보유자 외 보존회 멤버들이 본 행사에 동행해 주면서 자연스럽게 곽윤자를 가까이 알게 되었던 것이다. 연주여행을 함께 하면서 남들과는 다른 그녀만이 지니고 있는 인상에 남는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하게 되었다. 첫째는 그녀가 매사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사고를 지닌 소리꾼이라는 점이다
낮인들 밤인들 온 밤낮 젖는 하늘 땅 가랑비랑 이슬비랑 다 지녀 가는 장마 어릴 적 소금 꾸러 간 그 꼴 곱게 뜨네. 오늘날 일본의 동포사회에는 어린이가 오줌을 싸도 소금 꾸러 가는 일이 없어졌다. 본국에도 그와 비슷한 것 같다. 아동 심리학적으로 그것은 유해하다는 소리를 하는 학자들이 있다 하는데 나에게는 소금 꾸러 가던 날이 곱게 되생각나서 그런 기회가 있었으면 하고 바랬는데 새끼가 한 번도 싸지 않아 기회를 놓쳐버렸다.(웃음)
“십릿길 읍내 짜장면집 앞엔 언제나 고소한 짜장 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빛나는 졸업장을 쥔 선배들이 드나들던 그 감격스런 짜장면집 식탁에 누이랑 앉았던 내 졸업식날 얼굴에 검은 짜장 묻히며 긴긴 짜장면발을 당겨 재보던 추억의 시간 위로 검은 머리는 희어져갔다“ -짜장면 먹던 날 ‘이경수’- 예전 졸업식을 하고 나면 으레껏 가는 곳이 있었지요. 바로 중국집으로 그곳에서 짜장면을 먹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평소엔 먹기 어려웠고, 졸업식처럼 특별한 날에만 먹었던 짜장면은 원래 중국음식에는 없었습니다. 짜장면은 1905년 인천 차이나타운 '공화춘'이라는 식당에서 처음 만들어졌으며, 단무지와 양파를 곁들여 먹었지요. 대한제국 말기 인천 부둣가는 배에서 싣고 내리는 물건을 나르도록 고용된 수많은 짐꾼을 대상으로 빨리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짜장면이 개발된 것입니다. 몇 년 전 일본 답사 때 일본음식에 지쳐 있던 답사단원들의 성화에 못
오늘은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는 초복입니다. 복날은 하지로부터 세어 셋째 경일(庚日)을 초복(初伏), 넷째 경일을 중복(中伏), 입추 후 첫째 경일을 말복(末伏)이라 하며 이를 삼복(三伏) 혹은 삼경일(三庚日)이라 하지요. 복날은 10일 간격으로 들며 양력을 기준으로 합니다. 복날 먹는 음식으로는 단연 개장국을 꼽을 수 있는데 이를 복달임이라 했으며 삼계탕이나 질병에 걸리지 않는다 하여 팥죽도 쑤어 먹었는데 조선 후기 왜어역관(倭語譯官)인 홍우재가 일본에 다녀오면서 적은 사행일록인《동사록(東錄)》에는 “초복날 일행 여러 사람에게 팥죽을 먹였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복날 여인들은 계곡물에 머리를 감거나 목욕을 하면 풍이 없어지고 부스럼이 낫는다고 하였는데 이를 ‘물맞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물맞이 풍습은 1920년 7월 22일자 동아일보에 “초복날 서대문 밖 악박골(金鷄洞)에 물 맞으러 가는 부녀자들”이라는 기사로 보아 이 무렵까지도 행해지던 풍습으로 여겨집니다. 또한, 무더위 날에는 학문도 하기 어려운 듯 정조실록 2년 무술(1778) 3월 28일자에 “승보시(
요즘은 장마철이어서 비가 억수로 올 때가 잦습니다. 그런데 내리는 비에도 사연을 간직한 경우가 있습니다. 명절인 유두날에 비가 오면 사흘을 내리 내린다고 하는데 그것은 부녀자들의 바깥나들이가 금지되던 시절에 이 날만은 특별히 나들이를 허락받은 날임에도 비가 내리면 나들이를 하지 못해 그 한이 서려 사흘간 내린다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특정한 날에 내리는 비에는 태종우도 있습니다. “태종우(太宗雨)”는 심한 가뭄이 들어 백성이 고통받자 태종임금이 내가 죽어 하늘에 빌어 비가 오게 하리라고 유언하면서 죽었는데 죽은 그날 비가 내렸음은 물론 그 뒤 해마다 그날(음력 5월 10일)이 되면 태종우가 내렸다고 하지요. 또“살창우(殺昌雨)” 는 광해군에 의해 강화도로 유배된 영창대군을 강화부사가 방에 가두고 불을 펄펄 때서 죽였는데 방바닥에서 손톱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필사의 몸부림을 치다 죽었기에 그 한으로 서럽게 죽은 영창대군의 눈물이 비가 되어 음력 2월 9일을 전후하여 내리는 비를 말합니다. 그런가 하면 광해우(光海雨)도 있습니다. 인조반정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어 가시울타리 속에서 죽었기 때문에 광해군의 한이 맺혀 비를 내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광해우는 광
“늙은 몸이 역대, 네 임금을 섬겼고, 경서(經書)와 사서(史書)에 대강 통하지만, 고금에 상감마마와 같으신 분은 없었사옵니다.” 정이품의 노환관 김처선은 목숨을 걸고 임금(연산군)에게 아룁니다. 이에 분노가 폭발한 연산군은 활시위를 당겨 김처선의 갈비뼈를 뚫습니다. 하지만, 김처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임금에게 간합니다. “조정 대신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늙은 내시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다만, 상감마마께서 오래도록 임금 노릇을 할 수 없게 될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그러자 연산군은 화살 하나를 더 쏘고 다리를 부러뜨립니다. 그런 다음 김처선에게 일어서서 걸으라고 명합니다. 이에 김처선은 “상감께서는 다리가 부러져도 걸어다닐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고 연산군은 김처선의 혀를 잘라버리게 합니다. 살신성인의 충신에게 연산군은 온갖 못된 짓을 다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연산군의 김처선에 대한 악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연산군은 김처선의 양자 이공신을 죽이고, 그의 집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칠촌까지 벌을 주고, 그의 부모 무덤을 뭉갠 다음 석
“아~이스케키! 얼음과자!” 신나게 외치고 다니던 아이들.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아이들은 구슬땀을 흘리면서 골목골목을 돌았습니다. 가난한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이스케키 통을 들고나가 파는 일밖에는 없던 시절 얼음과자 장사는 한철 장사로는 그만이었지요. 그런데 날마다 잘 팔리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스케키가 팔리지 않는 날 아이들은 통에 앉아 가위바위보를 합니다. 이기는 사람이 지는 쪽의 아이스케키 하나씩 먹는 내기였지요. 그러다 보면 파는 것보다는 먹어치우는 것이 더 많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럼 아이스케키를 사먹는 사람은 용돈이 흔했을까요? 당시 사먹는 아이들 역시 용돈이 없기에 떨어진 고무신짝이나 비료부대 그리고 구멍 난 양은 냄비 같은 것들을 주고 사먹었습니다. 어떤 아이는 아이스케키 먹을 욕심에 떨어지지도 않은 고무신을 시멘트 바닥에 문질러 일부러 구멍을 내다가 아버지에게 경을 치기도 했지요. 지금이야 아이스크림은 재벌기업들이 만들지만 그때 아이스케키를 만들던 곳은 영세한 업체였습니다. 그래서 유통조직도 없기때문에 아르바이트하려는 아이들에게 판매를
"최 참판댁의 기둥 군데군데 초롱이 내걸려 있고 행랑의 불빛도 환하게 밝았다.” 박경리의 토지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초롱이라고 하면 왠지 귀여운 등불이 연상된다. 전기가 없던 시절 불을 밝히는 도구였던 초롱은 꽃이름에도 붙어 있는데 금강초롱이 그것이다. 꽃모양이 흡사 신랑신부 가마 타고 시집가던 날 들던 청사초롱 모양을 하고 있어 더욱 정겹다. 그런데 이 꽃이름의 학명은 ‘Hanabusaya asiatica’로 이 꽃에 이름이 붙은 하나부사(花房義質, 1842-1917)는 25살 때 유럽과 미국을 순방한 경험을 토대로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했던 시기의 조선주재 초대 공사이다. 금강초롱은 1902년 강원도 금강산 유점사 근처에서 자생하는 꽃으로 알려졌으나 지금은 태백산·오대산·설악산·향노내봉·금강산을 거쳐 함경남도에서도 자라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최근에는 경기도 가평군 명지산에서도 금강초롱이 발견되어 화제를 모았다. 그런데 어째서 이 꽃에 하나부사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하나부사의 한자는 화방(花房)으로 사람들은 여기에 초(草)자를 붙여 화방초라 불렀는데 금강초롱에 하나부사라는 이름을 붙인 사람은 일본의 식물분류학자인 나카이 타케노신(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