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한반도에서는 개기월식을 관측할 수 있었죠. 월식은 특별한 장치가 없어도 관측이 되지만 해가 가려지는 일식은 어떻게 관측할까요? 해가 가려지긴 해도 햇빛이 강하기 때문에 맨눈으로 해를 오래 관측할 때에는 심각한 눈의 이상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두운 셀로판지를 서너 겹 겹쳐서 보거나 태양필터를 써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없었던 조선시대엔 어떻게 관측할 수 있었을까요? 영조 11년(1735년) 9월 1일 승정원일기에 보면 좌승지 이강보가 “일식은 월식과 달라서 물을 담아서 관찰합니다.”라고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햇빛이 수면에 닿으면 반사되어 보이는데 반사율이 낮아서 눈부시지 않은 점을 이용한 것이지요. 그런데 바람이 불면 수면이 흔들리기 때문에 해가 일그러져 보입니다. 그래서 상에 올려놨던 물그릇을 땅에 내려놓거나 주변에 바람막이 장치를 설치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또다시 영조실록 18년(1742) 5월 1일 조선왕조실록에는 “감관(監官)이 바람이 불고 물이 출렁거려 관측하기가 어려우므로 규일경(窺日鏡)으로 관측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
지난 11월 28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제6차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에서 는 줄타기ㆍ택견과 함께 인류무형유산에 올랐습니다. 이전에 인류무형유산이 된 우리의 무형문화유산은 종묘제례, 판소리, 강릉단오제 같은 것들이 있었지요. 는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모시[紵 ·苧]는 마(麻)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풀로, 키는 2m 정도이며 곧게 자랍니다. 신라 제48대 경문왕(景文王) 때 모시를 나라밖에 수출한 기록이 있을 정도로 모시는 오랫동안 우리 겨레의 옷감으로 사랑 받아왔습니다. 모시섬유는 물들이기 쉬운데다 색도 바래지 않고 또 땀 흡수와 발산이 잘되며 물에 강해 빨아 입을수록 윤기가 더하지요. 풀을 먹여 다듬이질을 곱게 한 모시옷은 단아하면서도 가벼워 잠자리 날개 같다고 일컫습니다. 밤낮 쉬지 않고 석 달을 일해야 한 필(약 21m)이 나온다는 모시는 계속 침을 발라가며 삼아야 하기에 한 필 만드는데 침이 석 되 들어간다고 할 정도로 옛 여인의 정성이 들어간 옷감입니다. 입이 부르트고 피가 날 때까지 쪼개고 또 쪼개야 고운 옷감이 될뿐더러 모
“1919년 31독립만세 때 애국부인회를 지도하다가 체포되었다. 여사는 아이를 빼앗겼고 결국 아이는 헌병이 내동냉이쳐 죽었지만 여사의 독립운동 의지는 꺾을 수가 없었다. 이후 남편이 있는 시베리아로 밀행하다가 왜경에게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고 죽었다.” 애국지사 이애라 여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충남 아산에 있는 이애라 애국지사 집안의 충국순의비(충혼탑)를 찾아 나선 날은 찬바람이 볼을 스치던 11월 말이었습니다. 충혼탑 소재지가 아산시 영인면 월선리까지만 나와 있고 번지수를 확인할 길이 없었지만 워낙 유명한 독립운동 집안 인지라 동네 어귀쯤 가면 쉽게 찾으리라 생각했던 것은 오산이었습니다. 서울에서 김 씨 찾는 꼴이었으니까요. 묻고 묻길 수십 차례 끝에 간신히 마을 이장님을 찾아 안내를 받았습니다. 숨이 약간 가쁘다고 생각할 즈음해서 산마루에 다다랐는데 그곳에는 독립운동가인 남편 이규갑 애국지사를 비롯한 여러 가족의 무덤이 있었습니다만 이애라 여사의 무덤은 없었습니다. 이애라 여사는 1921년 블라디보스톡에서 27살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하였는데 이때 유해를 거두
오늘(12월7일)은 24절기 가운데 스물한째인 대설(大雪)입니다. 대설의 말뜻은 눈이 많이 내린다는 것인데, 이때 눈이 많이 와 보리밭을 얼지 않게 충분히 덮어주면 다음해에 풍년이 든다고 하지요. 하지만, 대설이라 해도 꼭 눈이 많이 내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24절기가 중국 화북지방을 중심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또 요즘은 지구온난화 영향으로 날씨가 옛날과 많이 달라진 탓도 있지요. 눈이 오면 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도 '서설(瑞雪)'이라고 해서 좋아합니다. 그리고 눈사람을 만들거나 눈싸움을 하면서 놀았지요. 또 지금과는 달리 옛날 눈은 깨끗했기에 눈을 먹기도 했습니다. 특히 섣달 그믐날 밤에 내리는 눈을 남모르게 혼자 받아먹으면 그해에는 더위를 타지 않는다는 믿음도 있었지요. 대설 즈음 가장 큰일은 메주 쑤기입니다. 콩을 삶아 메주를 쑤면 며칠 방에 두어 말린 뒤, 짚을 깔고 서로 붙지 않게 해서 곰팡이가 나도록 띄웁니다. 이때에 곰팡이가 잘 번식하게 하려면 이불로 덮어 주는데, 이때 이불은 합성섬유가 아닌 천연섬유로 된 것이 좋습니다. 또 알맞게 뜨면 나일론끈이
“석전은 내가 보기를 즐기는 것이니, 만약 이 놀이를 보고 나면 어찌 병이 나을는지 아는가.” 세종실록 12권(1421) 3년 5월2일자 기록에 보면 세종의 아버지 곧 태종이 이질을 심하게 앓아 몸이 편치 않음에도 석전놀이를 보러 나간다고 하여 말리는 대목에서 이러한 이야기가 보입니다. “나라 풍속에 이르길 5월 5일에 넓은 길에 크게 모여서 돌을 던져 서로 싸워서 승부를 겨루는 습속이 있는데, 이것을 ‘석전(石戰)’이라고 한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석전에 관해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사 권44에도 보일 정도로 오래된 세시풍속으로 전해 내려오던 놀이지요. 석전은 마을 놀이의 하나로 일정한 날을 정하여 갑·을 두 마을 주민 사이에 행하는 희전(戱戰)ㆍ석전(石戰)ㆍ줄다리기ㆍ차전(車戰) 따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석전은 돌을 던지는 놀이이므로 위험하여 성종이나 영조 임금 때는 이를 금지하기도 합니다만 일제강점기 때까지 석전놀이가 있었음을 알리는 기록이 있습니다. 바로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35살에 장렬한 죽음을 맞은 김상옥(1890.1.5-1923.1.22) 의
예전 우리 마을마다 또랑광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또랑광대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판소리를 잘 못하는 사람”이라고 풀이합니다. “또랑”이란 집 담벼락 옆을 흘러가는 작은 실개천을 일컫는 말이지요. 따라서 또랑광대는 또랑에서나 소리자랑을 하는 어쭙잖은 소리광대라는 뜻으로 마을에서나 소리 좀 한다고 우쭐거린다며 비하하여 일컫던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또랑광대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형편 없는 광대일 뿐일까요? 실제 예전 또랑광대는 마을의 크고 작은 일 어떤 마당이나 사랑방 같은 삶의 곳곳을 지키며, 판을 살리던 감초 같은 존재였습니다. 소리꾼은 소리꾼이되 음악성에 파묻히지 않은 채 판이 요구하는 소리를 하던, 아주 중요한 광대였지요. 늘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과 만드는 판이기에, 판에 보이는 이웃의 면면과 일상사를 훤히 꿰뚫고 있을 뿐만 아니라, 편안함과 익숙함에서 오는 즉흥 사설, 판을 자유자재로 놀리는 놀이성,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한 덕담이나 재담, 그리고 누구 눈치도 보지 않고 풍자와 해학을 맘대로 구사하던 이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1742년 10월 보름날, 경기도 관찰사 홍경보(洪景輔, 1692~1744)는 당시 최고의 화가인 양천현령 겸재 정선(鄭敾, 1676~1759), 문장가인 연천현감 신유한(申維翰, 1681~1752)과 함께 뱃놀이를 합니다. 이 세 사람은 북송 시인 소동파처럼 연강(漣江, 임진강)에 배를 띄운 것입니다. 이날의 뱃놀이를 정선이 그림을 그리고, 홍경보와 신유한이 글을 써서 화첩(畵帖) 세 벌로 남겨 한 벌씩 나눴지요. 이 화첩 이름은 '연강임술첩(漣江壬戌帖)'입니다. “우화등선(羽化登船)”이란·“우화정(羽化亭)에서 배를 타다”란 뜻이지요. 당시 66살 최고 전성기였던 정선은 이 그림과 “웅연계람(熊淵繫纜)” 곧 “웅연나루에 정박하다”라는 그림과 함께 이날의 뱃놀이를 세밀하게 그려냈습니다. 해거름 하늘은 옅은 먹으로 은근히 그렸으며, 강가의 벼랑은 짙은 먹의 부벽준(산수화에서 도끼로 찍은 듯한 자국을 남겨 표현하는 동양화 기법)으로 대담하게 표현했지요. 겸재의 인왕제색도, 금강전도가 바위와 산을 그린 대표작이라면 이 작품은 강에 대한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이 그
일본 최대의 호수인 비파호(琵琶湖)를 끼고 있는 시가현(滋賀)은 교토와 오사카에 면해 있는 유서 깊은 도시이다. 이곳은 1건의 세계문화유산을 비롯하여 55건의 국보 그리고 806건의 중요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도시로 국보보유로 치면 교토부, 도쿄도, 나라현, 오사카부 다음으로 많은 곳이다. 에도시대에는 강남, 강서, 강동 지역으로 나누던 것을 명치시대 이후에는 비파호를 중심으로 호남, 호동, 호북, 호서 4곳으로 생활권역을 구분하고 있다. 예부터 관동지방으로 올라가는 길목으로 교통의 요지인 이곳은 전국 어디서나 접근성이 좋은데다가 특히 가을철 단풍의 명소로 꼽혀 단풍철에는 숙박을 정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일 정도로 전국적으로 인기가 높은 지역이다. 이에 맞춰 “호동3산 순례”라든가 “호남3산 순례”와 같은 유서 깊은 절 순례코스를 만들어 놓고 임시버스를 운행하는 등 지역 관관협회의 홍보도 매우 적극적이다. “호남3산 순례길”을 나선 것은 지난 11월 21일 월요일이었다. JR고세이 역에서 탑승한 임시버스는 맨 처음 우리를 선수사에 내려 주었다. 국보답게 고색창연한 본
현재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종목은 병창에 3인, 가야금 산조에 3인이 각각 예능 보유자로 인정되어 있다. 가야금 산조의 경우, 19세기 말 김창조가 가야금으로 산조를 타기 시작한 이래 수없이 많은 명인이 명멸하며 그들의 산조를 남겼다. 현재 가야금산조의 유파에는 박상근류, 성금련류, 심상건류, 김윤덕류, 강태홍류, 김병호류, 최옥삼류, 김죽파류, 서공철류, 유대봉류, 김종기류, 신관용류 등등 그 외에도 여러 유파가 전해오고 있으나, 현재의 예능 보유자는 김윤덕류의 1인과 김죽파류의 2인 등 3인이 인정되어 있다. 유파마다 보유자를 인정하는 문제는 현실적으로 불가할지 모른다. 그러나 유파마다 전수조교를 지정하여 각 산조의 특징을 잃지 않고 계승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문제는 그 유파의 음악적 특징이나 문화재적인 가치가 인정되므로 적극적인 검토가 뒤따라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의 체제로 이어진다면 김윤덕류나 김죽파류 등 일부의 산조만이 문화재로서의 보호를 받으며 배우려는 학생들이나 애호가가 많아 활성화될 것이고 기타의 산조 후계자들은 상대적으
무형문화재 기ㆍ예능보유자를 도와 전수교육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전수교육조교이다. 인기있는 일부 종목에서는 그 경쟁이 보통 치열한 것이 아니다. 힘든 이수자의 과정을 끝냈다는 의미와 함께 보유자가 되기 위한 직전 코스이기 때문이다. 전수교육조교는 어떠한 과정으로 선정되는 것인가. 문화재법 시행규칙 제22조 전수교육조교와 관련한 주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제1항. 중요무형문화재의 보유자 또는 보유단체는 자신의 전수교육을 보조하게 하기 위하여 이수증을 교부받은 자 중에서 문화관광부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중요무형문화재 전수교육 조교가 되고자 하는 자를 문화재청장에게 추천할 수 있다. 다만, 보유자의 사망 또는 인정해제 등으로 추천할 수 없는 경우에는 문화재 위원회의 해당분야 분과위원회의 위원 또는 전문위원에게 추천을 의뢰할 수 있다. 제3항. 전수교육 조교가 되고자 하는 자를 추천하는 때에는 문화재청장이 선정하고자 하는 전수교육 조교 수의 2배수 이상을 추천한다. 제4항. 전수교육 조교를 선정하고자 하는 때에는 문화재위원회의 해당 분과위원회의 위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