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박노해 시인이 《걷는 독서》라는 책을 냈습니다. 걷는 독서라니? 걸으면서 책을 읽는다는 것인가? 그렇기도 하겠지만, 꼭 책을 들어야만 하는 건 아니겠지요. 걸으면서 묵상하고, 주위 자연과 교감하며 깨달음을 얻는 것도 걷는 독서라고 할 수 있겠지요. 박 시인은 어린 날 마을 언덕길이나 바닷가 방죽에서 풀 뜯는 소의 고삐를 쥐고 책을 읽었고, 학교가 끝나면 진달래꽃, 조팝꽃, 산수국꽃 핀 산길을 걸으며 책을 읽었답니다. 그러다보면 책 속의 활자와 길의 풍경들 사이로 어떤 전언(傳言)이 들려오곤 했답니다. 감옥 독방에 있을 때에도 박 시인은 ‘걷는 독서’를 계속합니다. 비록 세상 맨 밑바닥 끝자리에 놓인 두 걸음 반짜리 길의 반복이었으나, ‘걷는 독서’를 하는 동안은 박시인의 정신 공간은 그 어떤 탐험가나 정복자보다 광활했다고 합니다. 그 시절을 박시인은 감탄조로 이렇게 말합니다. “철저히 고립되고 감시받는 감옥 독방의 그 짧고도 기나긴 길에서 아, 나는 얼마나 많은 인물과 사상을 마주하고 얼마나 깊은 시간과 차원의 신비를 여행했던가!” 자유의 몸이 된 뒤, 박 시인의 걷는 독서는 국경 너머 눈물 흐르는 지구의 골목길에서도 계속 되었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항공대 항공운항학과 장조원 교수가 이번에 《하늘의 과학》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하늘에 도전하다》, 《비행의 시대》에 이어 3번째 책을 냈군요. 이번 책 제목에는 ‘과학’이라는 단어를 붙였습니다. 비행기는 온통 과학, 그중에서도 수학과 물리학 덩어리입니다. 그래서 장 교수는 이 책을 쓰면서 첨단 과학을 대표하는 항공우주 과학에 수학과 물리학을 접목해 설명하고 싶었고, 학생을 비롯한 독자들이 이 분야에 호기심을 갖고 스스로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랬답니다. 그래서 장 교수는 시작하는 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항상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는 물리 법칙들을 파헤치기 위해 수학이라는 언어로 표현했으며, 이를 통해 하늘을 날아가는 비행기의 모든 것을 마스터할 수 있도록 했다. 《하늘의 과학》에서는 중ㆍ고등학교 교과 과정에 포함된 수학과 물리학이 항공 우주 분야에 어떻게 응용되는지를 다뤘다. 어떤 함수들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비교적 최근 학문적 진전을 보인 확률 이론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 그리고 미분과 적분을 비롯해 벡터와 행렬, 로그함수, 삼각 함수 등이 비행기에 응용된 사례를 다룬다. 특히 수학과 물리학이 항공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엄홍길’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히말라야 8,000m 14개 산을 오르고, 나아가 위성봉 얄룽캉, 로체샤르까지 더하여 히말라야 16좌를 오른 산악인 엄홍길! 그가 지난 6. 11. EBM 포럼의 강사로 와서 회원들에게 히말라야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회원들은 강연을 들으면서 엄홍길씨가 들려주는 16좌를 오르는 동안의 도전정신, 동료를 잃은 슬픔, 재미있는 에피소드 등에 같이 웃고, 같이 아파하였지요. 강연이 끝난 후 현장에서 엄홍길씨의 수필집 《꿈을 향해 거침없이 도전하라》를 샀습니다. 엄홍길씨는 히말라야 16좌에서 내려온 이후에 ‘엄홍길 휴먼재단’을 설립하여 가난한 나라 네팔에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지어주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젊은이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등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산사나이가 단순히 산에만 눈길을 두지 않고, 이렇게 산 아래에서 따뜻한 휴먼 정신을 실천하고 있다니, 엄홍길씨야말로 진정한 산사나이라고 하겠습니다. 머릿글인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사람은 오른다’에서 엄홍길씨가 그러한 휴먼정신으로 나아가게 된 동기에 대해 쓰고 있습니다. 8,000미터의 산을 서른여덟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고미숙 씨가 쓴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을 읽고 난 후, 직접 고미숙 팀이 번역한 《열하일기》를 읽었습니다. 《열하일기》를 읽으니 과연 고미숙 씨 얘기대로 연암은 호기심 제왕이더군요. 연암은 단순히 호기심으로 사물을 피상적으로만 보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벽돌, 방구들, 수레 등 언제 그렇게 자세하게 관찰하고 연구할 수 있었을까 감탄하게 됩니다. 그것뿐입니까? 글 곳곳에 나타나는 연암의 유머에 저도 모르게 볼을 실룩거리게 됩니다. 이 가운데서 연암의 호기심 제왕다운 모습 몇 가지만 말씀드리죠. ① 연암은 머무는 곳마다 중국인들을 접촉하며 궁금한 것에 대해 열심히 묻습니다. 이러다 보니 일행이 출발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아 찾게 되고, 차려놓은 밥은 이미 식고 굳어 혼자 음식점에 들어가 급히 먹고 일행을 따라가게 됩니다. ② 요동으로 향해 가던 중 어느 마을에서는 주인이 방고래를 열고 기다란 가래로 재를 긁으니까, 그 틈에 중국 구들의 구조는 어떻게 되어있는지 열심히 살핍니다. ③ 어느 마을에서는 불을 끄고 돌아가는 수차(水車)를 보고는 잠깐 멈춰 세운 뒤, 열심히 물어보고 구조를 살핍니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에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봉은사에 가면 추사 김정희의 마지막 글씨를 볼 수 있다. 추사가 1856년 죽기 3일 전에 봉은사 주지의 부탁을 받고 쓴 ‘板殿(판전)’이란 글씨다. 당시 봉은사에서는 대장경을 보관할 판전을 짓고, 현판의 글씨를 추사에게 부탁했던 것이다. 유학자가 어떻게 절 현판의 글씨 쓰기를 승낙했을까? 왕실의 내척(內戚)인데다가, 자기만의 서체(추사체)로 중국에까지 이름을 날리던 추사는 1840년 윤상도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8년 동안 제주 유배생활을 한다. 겨우 유배지에서 돌아와서도 얼마 안 되어 1851년 다시 권돈인의 진종(眞宗) 예론(禮論)에 연관되어 또다시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다음 해까지 유배생활을 한다. 조선의 천재였던 추사는 이 두 차례의 유배로 남을 모함하고 공허한 탁상공론의 싸움만 하는 성리학의 세계에 환멸을 느끼고 불교에 가까워진 것이다. 그리하여 집(현 과천시 주암동)에서 가까운 봉은사에 자주 왕래하면서 스님들과 친해졌다. 추사는 불경도 탐독하였고, 특히 유마경에 있어서는 스님들과의 토론에서 지지 않을 정도라 유마거사라는 별명까지 얻기까지 하였다. 이러니 봉은사에서는 당시 새로 지은 판전의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이 이야기를 어디서 시작하고 어디서 끝내야 할지 나 자신도 모를 지경이다. 그들은 성상을 부수고, 순교자들의 신성한 유물을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곳에 집어던졌으며, 구세주의 살과 피를 아무 데나 마구 뿌렸다. 이 적그리스도의 사자들은 성배와 성반을 빼앗아 보석들을 뜯어내고 술을 따라 마셨다....... 대성당에 대한 신성모독은 생각만 해도 끔찍할 정도였다. 그들은 주제단과 전 세계가 감탄하는 예술품들을 파괴하고 그 조각들을 자기들끼리 나눠 가졌다..... 그리고 그들은 말과 노새를 성당 안에까지 끌고 들어와서는 제기, 옥좌에서 뜯어낸 조각이 새겨진 금과 은, 연단, 문짝, 가구 등을 닥치는 대로 실어 날랐다. 짐의 무게를 못 이겨 말과 노새 몇 마리가 쓰러지자 가차없이 칼로 죽여 버리는 바람에 성당 안에는 온통 짐승들의 피와 악취가 가득했다. 한 매춘부가 총대주교의 좌석에 앉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상을 향해 욕설을 퍼붓고, 음탕한 노래를 부르고, 신성한 장소에서 불경스러운 춤을 추었다............. 고결한 부인들이나 정숙한 처녀들, 심지어 신에게 봉헌된 처녀들에게까지도 전혀 자비가 베풀어지지 않았다..... 거리의 주택과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친한 선배의 딸이 얼마 전에 서점극장 ‘라블레’를 열었다길래 한번 가보았습니다. 서점을 방문했으니 당연히 책을 사야겠지요? 세계문학서점을 지향하는 서점이라 눈에 보이는 것은 거의 다 문학에 관한 책입니다. 그런데 저는 역사와 지리를 좋아하는지라 혹시 그런 책은 없을까 하여 둘러보니, 《비잔티움 연대기》라는 650쪽이 넘는 두꺼운 책(존 줄리어스 노리치 지음, 남경태 옮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것도 1권이 아니라 3권짜리 책이고, 3권은 850쪽이 넘습니다. 비잔틴제국이 330년부터 1453년까지 인류 역사상 제일 오래 지속된 나라이니, 이야깃거리가 많아 이렇게 두꺼운 책이 3권이나 되겠지요. 저는 이번 기회에 비잔틴제국의 역사를 공부해보고자, 이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두꺼운 책이 3권이나 되니 좀 부담되기는 했지만, 꼬마 때부터 잘 알고 있는 선배 딸이 서점을 열었다니, 이왕이면 책값 좀 많이 쓰려고 3권짜리 《비잔티움 연대기》에 지갑을 열었습니다. 《비잔티움 연대기》를 나의 독서 시간인 오가는 차 안에서만 주로 읽고 있으니, 며칠 전에야 겨우 다 읽었습니다. 2권 뒤표지에는 이렇게 쓰여있습니다. “비잔티움의 역사는 성직자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여라 교과서에도 나왔던 매창의 시입니다. 저는 학교 다닐 때 단지 매창의 시로 외우기만 하였지, 매창이 말하는 이별한 님이 구체적으로 누군지는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매창이 말하는 님은 촌은(村隱) 유희경(1545~1636)입니다. 촌은은 원래 천민이었으나 13살에 아버지가 죽었을 때 시묘살이를 하다가 남언경의 눈에 띄어 배움의 기회를 얻게 됩니다. 촌은은 특히 상례(喪禮)에 밝아 상례에 대해 의문 나는 것이 있으면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천민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통정대부까지 하사받았습니다. 그리고 광혜군 때는 인목대비 폐모 상소를 거절하여, 인조반정 후 인조는 이를 가상히 여겨 가선대부로 품계를 올려주었습니다. 촌은은 46살 때 부안의 매창이 시로서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부안으로 매창을 찾아갑니다. 당시 촌은은 백대붕과 함께 풍월향도라는 모임을 만들어 시를 나누었기에, 매창에게도 풍월향도의 소문은 들어갔었나 봅니다. 그래서 촌은이 찾아왔을 때, 매창은 촌은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妙句堪擒錦 淸歌解駐雲(묘구감금금 청가해주운) 偸桃來下界 竊藥去人群(투도래하계 절약거인군) 燈暗芙蓉帳 香殘翡翠裙(등암부용장 향잔비취군) 明年小桃發 誰過薜濤墳(명년소도발 수과벽도분) 신묘한 글귀는 비단을 펼쳐 놓은 듯하고 청아한 노래는 머문 구름도 풀어 헤치네 복숭아를 딴 죄로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세상을 떠나네 부용꽃 휘장에 등불은 어둡기만 하고 비취색 치마에는 향내 아직 남아있는데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때쯤이면 누가 설도의 무덤을 찾으리 1610년 허균은 부안의 기생 매창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매창 계생을 애도하며 쓴 시입니다. 매창이라면 황진이와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인 기생 시인 아닙니까? 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 실린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하는 그녀의 시를 외우려고 하던 것이 생각나네요. 부안에서는 지금도 매창을 기려 매창공원도 조성하고 해마다 매창문화제도 열고 있습니다. 그런데 허균이 어떻게 매창을 알게 되었기에 그녀를 애도하는 시까지 썼을까요? 허균은 1601년 조운판관(漕運判官, 조운선의 정비, 세곡의 운반과 납부 등을 관장하는 종5품 관직)이 되어 전라도에 내려갔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田家少婦無夜食(전가소부무야식) 시골집의 젊은 아낙은 저녁거리가 없어서, 雨中刈麥林中歸(우중예맥림중귀) 빗속에 나가 보리를 베어 숲길로 돌아온다. 生薪帶濕煙不起(생신대습연불기) 생나무는 축축해서 불은 붙지 않고 入門兒女啼牽衣(입문아녀제견의) 문에 들자 딸애가 울며 옷자락을 당긴다. 손곡(蓀谷) 이달(李達)의 <예맥요(刈麥謠)>, 곧 보리 베는 노래입니다. 저녁거리가 없어 빗속에라도 보리를 베어와야 하는 가난한 농가의 풍경을 노래하였군요. 그런데 보리도 완전히 익지 않았는데, 먹을 게 없으니 미처 익지 못한 보리라도 베어왔어야 하는 건가요? 이제 땔감에 불을 붙여야 하는데, 비에 젖은 생나무는 축축하여 좀처럼 불이 붙지 않습니다. 그런데 딸아이는 엄마를 보자마자 울면서 엄마의 옷자락을 잡아당깁니다. 배가 고프다는 것이겠지요. 보릿고개. 지금은 보릿고개가 없어졌지만 196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봄이 되면 식량은 바닥나는데, 보리가 익으려면 아직 좀 더 남아있는 배고픈 보릿고개를 넘겨야 했습니다. 요즘 아이들이야 보릿고개라고 하면 먼 나라 얘기로 들리겠지만, 제가 어렸을 때만 하여도 보릿고개가 있었습니다. 가수 진성도 자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