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랴오둥[遼東]반도 남단부에 있는 군항도시 여순에서 러일전쟁의 격전지 203 고지를 가보았습니다. 일본은 러시아 함대가 기항하고 있던 여순항을 기습공격하면서 러일전쟁을 도발하였지요. 그런데 러시아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쉽게 여순항을 점령하지 못하자 여순항이 내려다보이는 203 고지 점령에 사활을 겁니다. 이 전투에서 일본은 만 명이 훨씬 넘는 전사자를 내고서 겨우 고지를 점령합니다. 그리고 고지에서 여순항의 러시아 함대를 향하여 맹포격을 가하여 함대를 격침하고서야 겨우 여순을 점령할 수 있었지요. 이 전투를 이끈 일본군 사령관이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입니다. 비록 전투에서 승리하긴 하였지만 너무 많은 일본군의 희생이 뒤따랐기에 노기 사령관에 대한 비난 여론도 잠깐 일었는데, 여순 공략전에서 노기의 두 아들도 전사하였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오히려 노기는 명장으로 성가가 올라가지요. 그런데 노기는 나중에 단순한 명장에서 군신(軍神)으로까지 추앙받습니다. 곧 1912년 명치 일왕이 사망하자 일왕 장례식 밤에 본인도 부인과 함께 할복자살하면서, 사람들은 노기를 군신으로 추앙하며 신사(神社)까지 세우지요. 부인과
▲ 나눔문화에서 전시회의 감동을 나누고자 전시회의 기록들을 정리한 책 표지《다른 길 열리다(회원용비매품)》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지난 2월 5일부터 3월 3일까지 세종문화회관 전시관에서 박노해 시인의 사진전 다른 길이 열렸었지요? 따로 홍보도 하지 않고 기업체 등에 표를 뿌린 것이 아닌데도, 27일간 3만 5천여 명의 사람들이 전시장을 다녀갔습니다. 영화로 치면 1,000만 관객이 든 것입니다. 전시회가 끝난 후 전시회를 주최한 나눔문화에서 전시회의 감동을 나누고자 전시회의 기록들을 정리한 《다른 길 열리다(회원용비매품)》라는 책자를 냈습니다. 전시 코디네이터인 김예슬(김예슬은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고 선언하고는 다니던 고대를 자퇴한 당찬 의식 있는 여성)은 머리말에서 박노해 시인과 함께 천 일간의 준비, 27일간의 전시를 진행하며 감동의 순례 행렬 그 모든 순간들을 지켜봐온 코디네이터로서, 각자 나만의 다른 길을 찾아나서는 디딤돌로 삼기를 바라며 우리 시대 희망의 씨알 하나 남기고자 이 책을 펴낸다고 했습니다. 김예슬은 말합니다. 현대문명이 정점에 달한 시대에 박노해 시인의 사진은 우리가 돌아 나아가야 할 좋은 삶의 원형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누드 크로키전을 보러 안나비니 갤러리 갈 때에 정릉 골짜기 건너편의 경국사도 가보았습니다. 경국사는 고종의 왕위 등극 축하 재가 열렸던 절로 고려 충숙왕 때 자정율사에 의해 창건되었습니다. 원래 청봉(靑峰) 아래에 있다고 하여 청암사(靑巖寺)라고 하였는데, 조선 명종 때 문정왕후가 나라에 경사가 끊이지 말라는 바램을 담아 경국사(慶國寺)라고 하였다는군요. 임진왜란 때는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승병을 이끌고 이곳에 머무르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정릉천을 건너 일주문 안으로 들어가니 경국사도 어김없이 부도밭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큰 책을 펼쳐놓은 모습의 돌조각이 보입니다. 불교백과사전인 불교 대사림 편찬 발원문이라는데, 2012년 1월에 이곳 경국사에서 입적하신 전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스님이 조성한 것입니다. 동국대 총장을 역임한 대표적 학승(學僧)이라 여기에 이런 발원문도 남기신 것이겠지요. 실제로 지관스님은 작년까지 총 12권의 불교 대사림을 편찬하였다고 합니다. ▲ 정릉 경국사, 가운데 가람이 극락보전 부도밭을 지나 오르니 관음전이 나타납니다. 문화재 설명판을 보니 이곳 관음전에는 숙종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올라오다 보면 마지막으로 들르는 휴게소가 죽전 휴게소이지 않습니까? 얼마 전에 올라오다가 오래간만에 죽전 휴게소에 들르니 죽전의 유래에 대한 안내문을 붙여놓았더군요. 바람직한 일입니다. 안내문을 읽어보니 죽전이 포은 정몽주 선생과 관계가 있더군요. 포은이 개성 선죽교에서 이방원에게 피살되었지요. 포은의 주검은 처음에 개성 근처 풍덕이라는 곳에 모셨다고 합니다. 그 후 1411년 포은의 주검을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 이장하기로 했는데 주검을 모시고 가던 중 죽전 서쪽의 풍덕천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돌풍이 불어 영정이 날아올라 떨어졌습니다. 사람들이 영정이 떨어진 곳을 쫓아 가 주위 형세를 보니 명당자리였다는군요. 그래서 굳이 고향까지 가지 않고 영정이 떨어진 곳에 무덤을 썼답니다. 포은의 무덤이 죽전에 있게 된 데에는 그런 사연이 있었습니다. ▲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 영정 사람들은 포은의 무덤을 그곳에 쓴 후, 그곳 지명을 죽절(竹節)이라 불렀습니다. 대나무와 같이 굳은 절개의 인물이라, 그 인물이 묻힌 곳을 죽절이라 바꿔 부른 것이겠지요. 포은이 피살된 선죽교도 원래 선지교라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수원 월드컵 경기장 고개를 넘어 영동고속도로 쪽으로 내려가면 고속도로 밑에 심온 선생의 무덤이 있습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심온은 세종의 장인입니다. 얼마 전에 수원 재판 갔다가 고속도로를 타고 다시 서울로 올라오기 전에 잠깐 심온 선생의 무덤에 들렀습니다. ▲ 태종에게 사약을 받은 세종 장인 심온 무덤 전경 한 나라 대왕의 장인이면 그 위세나 권세가 대단했겠지요. 그래서 왕의 장인은 국구(國舅)라고 하여 존경의 표현을 쓰지요. 특히 조선시대 최고의 대왕이라 불리는 세종의 장인이었으니, 그 위세가 더했겠지요? 심온이 1418년에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가기 위해 한양을 출발할 때에는 왕의 행차에 버금갈 정도로 위세가 대단하였답니다. 그런데 심온은 돌아오는 길에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의주에서 체포되어 수원으로 압송되어 사약을 내렸습니다. 아니? 심온이 명나라 간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심온이 국경을 건너 돌아오자마자 체포하였다는 말입니까? 설마 세종이 자기 장인을 체포하였을까요? 태종이 한 짓입니다. 당시 태종은 세종에게 왕위를 내주고 상왕으로 내려앉았지만, 병권만은 그대로 자기가 쥐고 있었습니다. 태종에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일개 수병(水兵)인 안용복이 일본 어선이 울릉도와 독도를 넘보지 못하도록 일본까지 가서 호오키주 성주와 담판을 벌이고 일본 막부로부터 일본 어부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서계를 받아낸 것은 근본적으로는 조선 정부가 직접 나서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나라가 그렇게 하지 못하기에 보다 못한 안용복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나선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선 정부로서는 공도정책을 포기하고 울릉도에 백성들을 입주시켜 다시는 일본이 그런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조선은 1884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공도정책을 포기하고 울릉도에 다시 백성들을 입주시킵니다. 그 대신 조선은 울릉도를 비운 후 정기적으로 실시하다가 흐지부지된 수토(搜討) 정책을 다시 실시합니다. 곧 울릉도에 사람을 입주시키는 대신 3년에 한 번씩 울릉도에 관헌을 보내어 울릉도를 시찰하고 조사하게 합니다. 그러나 3년에 한 번씩 울릉도를 돌아보는 정도로 되겠습니까? ▲ 여객선을 타고 울릉도에 들어가며 찍은 울릉도 모습 실제로 일본 막부가 1697년(숙종 23)에 일본 어민의 울릉도 출입을 금하겠다는 서계를 조선 정부에 보낸 후에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지난번에 부산 출장 갔다가 수영사적공원 안에 있는 안용복 장군 사당에 들렀습니다. 사당 옆 관리실에는 안용복 장군에 대해 약간의 전시를 해놓았는데, 제가 자료를 관심 있게 보면서 질문을 하니까, 관리인이 저에게 책자를 하나 주더군요. 사단법인 안용복 장군 기념사업회에서 펴낸 《안용복 장군 其功不滅》이라는 책자였습니다. 其功不滅은 그 공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란 뜻이지요. 책자를 보면서 제 머리 속에 흐릿하게만 떠돌던 안용복 장군의 위용이 확실하게 잡혀갑니다. ▲ (사)안용복 장군 기념사업회에서 펴낸 《안용복 장군 其功不滅》 책 표지 안용복 장군은 부산 좌천동에서 태어나 경상좌수영의 함선에서 노를 젓던 수병이었습니다. 일개 수병을 장군이라 부르니 엄청난 진급이겠는데, 물론 이는 안용복의 행적을 흠모하고 그의 공적을 높이 산 후손들이 존경의 의미로 장군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안용복 장군이라 부르게 된 것은 1954년 부산 대동문교회에서 안용복을 독전왕(獨戰王) 안용복 장군이라 부르며 추존식을 거행하면서 시작된 것이라고 합니다. 안 장군은 1693년(숙종 19) 봄에 동래 어부 40여명과 함께 울릉도로 고기잡이를 갑니다.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오늘은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얘기 하나 하겠습니다. 신유박해의 모든 것을 흰 비단에 써서 북경에 보내려다 들켜 능지처참형을 당한 황사영이란 천주교 순교자가 있지요. 이때 황사영이 처형당한 뒤 그의 아내 정명련(일명 난주)와 아들이 겪었던 얘기입니다. 황사영이 백서 사건으로 능지처참형을 당한 후 황사영의 아내와 아들은 노비로 전락하여 제주도 대정으로 유배 갑니다. 정명련은 다산 정약용의 큰 형인 정약현의 딸이지요. 정약현이 처음 딸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장래가 촉망되는 황사영에게 시집보냈을 때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겠지요. ▲ 황사영이 신유박해의 모든 것을 흰 비단에 써서 북경에 보내려다 들켜 처형당한 황사영 백서 정명련이 유배 갈 때에 명련은 두 돌배기 아들 황경헌(황경한이라는 기록도 있다)을 데리고 있었습니다. 배가 추자도 예초리에 잠시 정박할 때에 명련은 뱃사공을 매수하여 아들을 물새울 황새바위에 두고 떠납니다. 아들을 데리고 제주도로 가봐야 아들은 노비로서 클 수밖에 없으니, 차라리 추자도에 내려놓은 것이지요. 물론 명련은 아들을 내려놓을 때 아들의 이름과 출생일을 적은 쪽지를 아기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동락골 갔을 때에 성주대교로 낙동강을 건넜는데, 육신사(六臣祠)라는 이정표가 보이더군요. 6명의 신하를 모신 사당? 무언가 틀림없이 사연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뭘까? 예전에는 이런 궁금증을 풀려면 집이나 사무실에 들어와 인터넷을 검색했어야 하는데, 요즈음은 슬기전화(스마트폰)가 있으니 즉석에서 궁금증을 풀 수 있지 않습니까? ▲ 성주대교로 낙동강을 건넜을 때 보인 육신사 팻말 찾아보니 육신사는 사육신을 모시는 사당이었습니다. 사육신을 모신다고? 서울 노량진의 사육신 무덤이 있는 곳에 의절사가 있고, 단종이 죽은 영월에 창절사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지만, 이곳은 과연 사육신과 무슨 관련이 있다고 사육신을 모시는 사당이 있는 것이지? 여기엔 기막힌 사연이 있습니다. 사육신은 세조가 역적으로 몰아 처형한 신하들 입니다. 옛날에는 역적이라면 3족을 멸하여 그 후손들이 이어지지 못하게 하였지요. 여자들은 노비로 만들었구요. 그런데 사육신중 박팽년만은 유일하게 후손을 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요? 지금부터 알아봅시다. 박팽년이 아버지와 아들 모두와 함께 처형될 때, 둘째 며느리 성주 이씨는 임신 중의 몸으로 대구의 관비(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어제 자야 여사의 내 사랑 백석에 대한 글에서자야 여사의 본명은 김영한이고, 기생으로서의 예명은 진향, 법정스님이 붙여준 법명은 길상화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야(子夜)는 백석 시인이 붙여준 별명이지요. 그런데 제 글을 읽으면서 왜 별명을 자야라고 지었을까 궁금해 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하루는 자야가 함흥 시내 백화점에 갔다가 책방에서 평소 애독하던 잡지 《문예춘추》와 《여원》을 사가지고 돌아서는데, 문득 자야오가(子夜吳歌)라는 《당시선집(唐詩選集)》이 눈에 들어오더랍니다. 자야는 그 타이틀이 너무도 아름답고 또 낭만적인 느낌이 들어서 대뜸 사가지고 와서 백석에게 보였답니다. 백석은 시집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다가, 갑자기 눈빛을 반짝거리며 자야를 바라보더니, 말합니다. 나 당신에게 아호(雅號)를 하나 지어줄 거야. 이제부터 자야라고 합시다! ▲ 산에는 꽃 피고 ⓒ 운곡 강장원 한국화가 자야는 당시선집에 들어있던 이태백의 시 자야오가에 나오는 중국 동진 시절의 여인입니다. 당시 중국은 북방에서 중국을 엿보는 북방민족(흉노, 선비 등) 때문에 백성들을 돌아가면서 징병하여 변방을 지키게 하였는데, 자야의 남편도 이렇게 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