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중국 북경 김영조 기자] 춘추시대(BC 770~ BC 443)부터 북쪽 변방에 부분적으로 성벽이 건축되었다가 통일 왕국인 진나라가 들어서면서 북쪽의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이들 성벽을 연결하고 증축했다는 만리장성. 지구촌에 건설된 수많은 인공 구조물 가운데 가장 크다는 만리장성. 만리장성은 팔달령, 거용관, 사마대, 금산령 등 4곳이 있는데 그 가운데 우리 단원들은 가장 인기 있는 그리고 유일하게 케이블카가 설치돼 있어 오르기가 편한 팔달령 만리장성(八達嶺 萬里長城)에 올랐다. 만리장성에 오른 우리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할 만큼 그 규모는 거대했다. 그리고 이를 보려고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룬 사람들로 오르내리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만리장성은 만리무덤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고 아직도 아랫부분을 파보면 해골이 나온다는 비극이 서린 구조물이다. 그를 생각하면 결코 규모에 입만 벌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 우스개 소리로 달나라에서 중국의 만리장성이 보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거대한 팔달령 만리장성 ▲ 끝없는 만리장성의 모습 ▲ 중국의 상징 만리장성은 사시사철 방문객들로 늘 북새통이 된다.
[그린경제/얼레빗=북경 김영조 기자]어제는 연길에서 비행기를 타고 북경에 입성했다. 그리고 첫 답사지로 자금성을 돌아보았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자금성. 정식 명칭은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이지만 자금성(紫禁城)이라는 옛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황제가 사는 궁으로 아무도 들어올 수 없다.는 뜻으로 지어진 자금성. 엄청난 크기, 엄격한 대칭, 깎아지른 직선으로 지어진 자금성은 이름처럼 삼엄하다. 하지만 답답하다. ▲ 자금성으로 들어가는 입구 중 하나이며, 중요한 정치적 사건의 현장이었던 천안문 앞에서 ▲ 자금성 가운데 황제가 집무하던 태화전(太和殿) ▲ 태화전 오르는 곳에 세워진 대석조(大石雕), 길이 16.76m, 폭 3.07m, 깊이 1.7m, 무게 약 220톤의 어마어마한 돌에 9마리 용이 새겨져 황제를 상징한다. 자금성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경복궁을 생각한다. 경복궁은 전통적인 조선인의 미관과 세계관을 조화롭게 표현한 건축물로 검소하면서도 부족하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하지 않은 궁궐이다. 또 경복궁은 열린 구조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자연을 궁궐로 이끌어오고, 어디에서나 문을 열면 그 문을 통해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걸어놓은 듯한 느낌을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토교에서 정씨(정현숙 애국지사를 말하며 오광선 장군의 부인)는 홀로 삼남매를 키우느라 늘 궁색한 처지로 형편 필 날이 없었고 백범은 오광선의 가족들이 그렇게 고생하는 것을 안쓰럽게 생각하여 늘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중략) 영걸어머니(정현숙 애국지사)는 고생이 심했다. 내가 다른 이들보다 특히 열걸 어머니에 정을 쏟고 희영이나(큰따님) 희옥에게(작은 따님) 좀 더 잘해주려 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영걸어머니는 만주에서 농사 경험도 있고 몸도 건강해서 내 밭일을 많이 도와주었으며 나는 그 대신 그 집 삼남매의 옷가지 손질이며 이부자리 등 주로 바느질일을 도왔다. 이 말은 정정화 애국지사의 《장강일기》에 나오는 정현숙 애국지사에 대한 이야기다. 생존해 계시는 오희옥(88살) 애국지사는 아버지와 중국에서 오랜 세월 떨어져 지냈다고 했는데 아버지 오광선 장군은 만주쪽에 남아 활동하였고 가족들은 임시정부를 따라 상해에서부터 중경에 이르는 노정으로 이동하는 고난의 생활을 했던 것이다. ▲ 북만주 흑룡강성에서 바라본 소련땅으로 이 도시 북쪽의 얄롁셰프스크(자유시)에서 참변이 일어났다. (사진 한국근현대사사전 제공
[그린경제/얼레빗=중국 연길 김영조 기자] ▲ 백두산 들머리에서 일단 셔틀버스를 탔다가 다시 곡예운전을 하는 봉고차를 타고 백두산에 올라야 한다. ▲ 안개가 짙게 낀 백두산 오르는 길. 산 곳곳엔 들꽃이 피어있다. ▲ 천지는 10m 앞도 분간하지 못할만큼 안개가 짙게 서려있다. 그저 안개천지, 사람천지일뿐이다. ▲ 아쉬운 마음에 건너가지 말라는 팻말을 기념으로 비옷을 입은 채 사진을 찍었다 ▲ 장백폭포 올라가는 길엔 사람들이 그득하다. ▲ 천지에선 못 찍고 장백폭포 올라가는 길에서 모두가 함께 ▲ 웅장한 장백폭포 모습 1 ▲ 웅장한 장백폭포 모습 2 우리 겨레의 신령스러운 영산(靈山) 백두산(白頭山)! 북한 양강도(량강도) 삼지연군과 중국 지린성(吉林省)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배달겨레라면 꼭 올라야 할 산이다. 그 산마루에는 천지(천지)가 있는데 용왕담(龍王潭)이라고도 한다. 면적 9.17㎢, 둘레 14.4km, 최대너비 3.6km, 평균 깊이 213.3m, 최대 깊이 384m, 수면 고도는 2,257m이다. 북한의 천연기념물 제351호(지리 부문)로 지정되어 있다. 연길시에서 4시간 걸려 백두산 아래 마을 이도백하(二道白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나라현 아스카지방의 한 구릉지에 있는 용개사(지금은 강사岡寺로 부름)는 백제출신 의연(義淵, 643~728)스님이 지은 절이다. 의연스님은 일본 법상종(法相宗)의 시조이며 수제자로는 나라 동대사(東大寺) 초대 주지 양변(良弁) 스님과 살아있는 보살로 추앙 받는 행기(行基) 스님을 비롯하여 현방(玄昉), 도자(道慈), 도경(道鏡), 도장(道場) 스님 등 쟁쟁한 분들이 많다. ▲ 용개사를 창건한 백제 의연승정 (국보) 특히 행기스님은 몸소 제자들과 함께 일본 곳곳에 다리와 제방을 쌓아 백성들의 삶 속에서 실천불교를 전파한 분으로 유명하며 그가 지은 절만도 오사카와 교토 등에 49개사가 현존하고 있을 정도로 고대불교계에 추앙받는 스님으로 일본에서 행기스님을 모르면 일간첩이라 할 정도로 이름난 스님이다. 의연스님은 이렇게 일본불교계에 쟁쟁한 제자들을 둔 분이다. 그래서인지 출생부터 남다르다. 《곤자쿠이야기》설화집에 전해지는 의연스님의 탄생설화 곧 강보에 싸인 갓난아기를 천황이 손수 궁중으로 불러들여 자신의 왕자와 함께 키웠다는 부분은 의연스님이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인물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당시 천지왕(626-672)은 왕
[그린경제/얼레빗=중국 연길 김영조 기자] 연변에서 사흘째다. 오늘은 느긋했던 어제와 달리 조금 서둘러 조선족예술단원 들을 만나러 나섰다. 조선족예술단은 전통예술을 직업으로 삼는 프로들이라고 한다. 이 조선족예술단은 예전 전통음악학회 일행이 처음 들른 때에 견주면 많이 발전했다고 서한범 회장은 회고한다. 조선족예술단에 들어서니 비교적 젊은 단장과 부단장이 반갑게 맞는다. 역시 한국전통음악학회는 조선족예술단에 거문고와 장구 그리고 단원들이 정성어린 성금을 모아 기탁했다. ▲ 조선족예술단 강대화 외 17명의 화려한 군무 무운(舞韻) ▲ 여성독창 도라지 연가를 부르는 조선족예술단 김소연 ▲ 조선족예술단 개량해금(채련화), 25현가야금(장위령), 고음젓대(안예화)의 민악3중주 그렇게 간단한 사전 행사가 끝난 뒤 조선족예술단과 한국전통음악학회의 전통예술교류가 시작되었다. 먼저 조선족예술단 단원들의 순서다. 강대화 외 17명이 화려한 군무를 펼친다. 무운(舞韻)의 이름으로 펼치는 무용 공연에 한국서 온 청중들은 눈을 떼지 못한다. 이어서 고운 한복 차림의 김소연 씨가 나와 여성독창 도라지 연가를 불렀다. 맑고 청아한 목소리에 한동안 넋을 잃는데 이번엔
[그린경제/얼레빗=중국 연길 김영조 기자] 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를 회장으로 한 한국전통음악학회는 중국 연변의 민족음악인들과 함께 끈끈한 교류를 무려 23해나 이어왔다. 1990년 한ㆍ중 수교가 이뤄지지 않았던 아주 어려운 여건에서 민족의 전통소리를 배우고자 한국 《국립국악원》으로 유학을 온 연변예술대학 전화자 교수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시작된 한중전통음악교류는 이제 2014년 제16회를 맞는다.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에 있는 연변대학교 예술대학 공연장에서는 어제 6월 25일 오후 3시 30분 드디어 제16회 행사가 시작되었다. 먼저 연변예술대학 김성삼 교수의 사회로 열린 여는 행사는 연변대학교 예술학원(한국의 단과대학) 신호 원장의 따뜻한 환영사가 있었고, 이어서 한국전통음악학회 서한범 회장의 축사 그리고 연변에술대학 전화자 교수의 축사가 있었다. ▲ 환영사를 하는 연변예술대 신호 원장, 인사말씀을 하는 한국전통음악학회 서한범 회장, 축사를 하는 연변예술대 전화자 교수(왼쪽부터) ▲ 한국에서 간 교류단은 가야금,거문고, 장구, 피리 등을 연변예술대에 기증했다. 인사말 순서가 끝난 뒤 특별한 행사가 있었다. 한국에서 정성껏 마련한 선물을 예
[그린경제/얼레빗 = 중국 연길 김영조 기자] 중국 연길 공항에 도착해 밖으로 나오니 열기가 확 느껴진다. 서울에서는 아직 본격적인 더위가느껴지지 않았는데 연길은 한여름 같다. 한국전통음악회(회장 서한범)회원 50여명은 2014년 한중 학술 및 실연(實演) 교류회를 위해 5박 6일간의 일정으로 중국 연길을 찾았다. 올해로 23년째 한중 전통음악교류를 맡아오고 있는 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는 한중 수교 이전인 1991년 7월부터 시작되어 2000년부터는 해마다 교류회를 가져왔다. 지금도 생생한 기억은 장시 죽의장막이라는 휘장을 뚫고 중국연길 길림예술학원 연변분원과 교류의 물꼬를 텄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감회가 새롭다 고 했다. ▲ 한국전통음악회 한중교류회 공연과 학술회의를 위해 연길공항에 내린 단원들과 연길에서 마중나온 사람들 이번 전통음악교류회 팀의 연길 방문은 방문 이틀째날 배뱅이굿의 서도소리 박준영, 방아타령 가야금 병창 정경옥, 임종복 등의 공연과 창작국악극의 활성화를 위한 제언 서한범 교수, 단소 취법 향상 조성보 교수 등 학술교류 등을 열 계획이며 백두산 등정도 포함되어 있다. 일정은 24일부터 한국전통음악학회 공연을 시작하여 30일 귀국 예정이
[그린경제/얼레빗 = 양승국 변호사 ] 지하철 2호선 을지로 입구 역을 나와서 외환은행 본점 옆을 지나 명동으로 올라가는데, 웬 동상이 하나 서 있습니다. 나석주 열사의 동상입니다. 나열사라면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열사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에 왜 동상이 서 있을까요? 여기가 동양척식회사 자리인가? 설명을 보니 포탄 투척 후 일본 경찰과 총격전 중 자결한 곳이라네요. 1926년 12월 26일 나열사는 마중덕이라는 중국인으로 행세하며 인천항을 통하여 고국으로 들어옵니다. 의열단원으로서 백범 김구와 심산 김창숙 선생의 밀명을 받고 귀국한 것이지요. 이틀 뒤 오후 2시 5분 나열사는 식산은행으로 들어가 폭탄을 던졌는데, 폭발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불발인 거죠. 나열사는 다시 동척(동양척식회사)으로 들어가 일인들을 향하여 총을 쏘며 2층으로 올라가 폭탄을 던집니다. 아! 이번에도 불발입니다. 나열사가 밖으로 나와 황금정 2정목(지금의 을지로 1가)에 이르렀을 때, 일제의 포위망은 완전히 좁혀졌습니다. 나열사는 일경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마지막 한발을 자신을 향하여 쏘고 자결합니다. 나열사는 자결하기 전 주위에서 숨죽이며 이를 보고 있을 대한 동포를 향하여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100년 편지에 대하여..... 100년 편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100년(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입니다. 내가 안중근의사에게 편지를 쓰거나 내가 김구가 되어 편지를 쓸 수 있습니다. 10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역사와 상상이 조우하고 회동하는 100년 편지는 편지이자 편지로 쓰는 칼럼입니다. 100년 편지는 2010년 4월 13일에 시작해서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됩니다. 독자 여러분도 100년 편지에 동참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매주 화요일 100년 편지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문의: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02-3210-0411 선생님을 처음 만난 곳은 대전교도소 15사 상층 37번 방이었답니다. 1986년 겨울, 저는 구미유학생 간첩단 조작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감옥생활 중이었어요. 비전향을 선택하고 절망과 죽음을 마주하던 힘겨운 시절이었어요. 그 때 읽은 ≪김창숙≫(한길사, 심산사상연구회 편, 1981)은 약해지고 폭력에 굴복하려는 제게 용기와 힘을 주었지요. 심산 김창숙 김창숙 선생(1879~1962)은 유림단 사건과 나석주 의사 폭탄 사건의 배후로 1927년 6월 14일, 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