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不二禪蘭(불이선란) 不作蘭畵二十年(부작난화이십년) 난초를 그리지 않은 지 20년이나 偶然寫出性中天(우연사출성중천) 우연히 그리고 싶은 마음이 솟구치네 閉門覓覓尋尋處(폐문멱멱심심처) 문 닫아걸고 찾고 또 찾은 곳 此是維摩不二禪(차시유마불이선) 이것이 유마의 불이선이로구나 若有人强要爲口實(약유인강요위구실) 만약 누군가 억지로 설명하라 한다면 又當以毘耶無言謝之(우당이비야무언사지) 당연히 유마거사처럼 말없이 사양하리 추사 김정희 선생이 자신이 그린 ‘不二禪蘭’이라는 난초 그림의 왼쪽 위 여백에 쓴 글입니다. 조선의 선비들은 문인화를 그리면 대개 그림 여백에 화의(畵意, 그림을 그리려는 마음)를 써 놓지요. 추사는 한동안 난(蘭)을 그리지 않다가 20년 만에 어떤 계기가 있어 난초를 그리게 되었나 봅니다. 그림 왼쪽 아래 여백에 ‘始爲達俊放筆, 只可有一, 不可有二(시위달준방필, 지가유일, 불가유이 : 애초 달준이를 위해 아무렇게나 그렸으니, 단지 한 번만 가능하고 두 번은 불가하다)’라고 쓴 것으로 보아, 추사는 달준이를 위해 이 난초 그림을 그렸나 봅니다. 달준은 추사 말년에 추사를 시중들던 시동(侍童)입니다. 불이선란도는 과천의 추사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태평양 전쟁 때 일본군이 난징 대학살을 자행하고, 조선의 소녀들을 위안부로 끌고 간 것을 보면 일본군이 포로에 대한 제네바 협약인들 제대로 지켰겠습니까? 박태석 변호사는 《일본의 노예》에서 일본군의 포로 학대에 관해서도 쓰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바탄 죽음의 행진’에 대해 말하렵니다. 일본군은 필리핀을 점령한 뒤 1942. 4. 9. 약 8만 명에 이르는 미군과 필리핀 포로들을 루손섬의 마리블레스와 바각에서 바탄의 필라까지 도보로 이동시킵니다. 그리고 여기서 합류한 포로들을 북쪽 산페르난도로 행군시킨 뒤, 산페르난도역에서 기차에 싣고 카파스까지 이동합니다. 기차에서 내린 후에는 마지막으로 캠프 오도넬까지 이동시키는데, 포로들이 보두 걸은 거리는 96.6km에서 112km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포로들이 캠프 오도넬까지 이동하는 동안 많은 포로가 죽어 나갔기에, 이를 바탄 죽음의 행진이라고 합니다. 일본군은 행군 도중 포로들에게 음식이나 물을 제대로 제공하지 않아, 많은 포로가 죽어 나갔습니다. 그런데 햇볕 치료는 해주었답니다. 햇볕 치료라고 하니까, ‘그래도 최소한의 치료는 해주었나 보다’라고 생각하시겠지요? 아닙니다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일본의 노예》라는 책을 보았다. 지난해 12월에 나온 책으로,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진실을 파헤친 책이다. 보통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다룬 책들은 주로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사실을 발굴, 분석하여 다룬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은 그뿐만 아니라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 대해 좀 더 거슬러 올라가 에도 막부 시대의 가라유키상, 또 거기서 좀 더 거슬러 올라가 일본 전국 시대의 인신매매인 인취와 난취까지 다루고 있다. 여기서 ‘가라유키상’이란 외국인을 상대로 한 윤락녀를 말하고, ‘인취(人取)’란 전쟁터에서 사람을 전리품으로 납치해가는 것을 말하며, ‘난취(亂取)’란 전국시대 병사들에게 사람과 물건을 약취할 수 있도록 한 것을 얘기한다. 이렇게 말하면 저자는 당연히 역사를 전공한 학자로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 박태석은 검사로 20년, 변호사로 15년을 살아온 평범한 법조인이다. 그런데도 박 변호사는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피상적으로만 언급한 것이 아니라, 여러 역사 서적들과 자료들을 탐독하고 심층 분석하여 글을 쓰고 있다. 어떻게 평범한 법조인이 이런 책을 쓸 수 있는지, 책을 읽으면서 연신 감탄하게 된다. 저자는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우리나라 성씨에는 외국에서 온 성씨가 많습니다. 아무래도 가장 많은 것이 중국에서 온 성씨지요. 그리고 고려 때, 원나라 지배를 받으면서 몽골인을 선조로 하는 연안 인씨 등이 있으며, 임진왜란 때 귀순한 김충선(사야가)을 시조로 하는 김해 김씨처럼 일본에서 들어온 성씨도 있구요. 그런가 하면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공을 세운 이지란(쿠란투란티무르, 청해 이씨)처럼 여진족에서 들어온 성씨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성씨와는 별로 관계가 없을 것 같은 서양인의 피가 들어간 성씨도 있습니다. 덕수 장 씨의 시조 장순룡은 원나라 때, 고려에 정착한 회회족입니다. 원나라는 중앙아시아의 회회족을 제2계급으로 하여 자기들 통치에 이용하였는데, 소위 말하는 ‘색목인(色目人)’이 이들입니다. 그리고 하멜 일행이 조선에 표착하였을 때 하멜과 함께 탈출하지 않고 강진군 병영면에 주저앉은 네덜란드 선원들이 있는데, 이들을 시조로 하는 병영 남씨도 있습니다. 병영 남씨는 한국에 정착한 지 400년이 안 되어 이목구비를 보면 아직도 어딘가 서양인의 흔적이 남아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외에 고려 말에 베트남 왕족이 고려로 귀순해 와 성씨를 받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박노해 시인의 사진에세이 4집 《내 작은 방》이 나왔습니다. 이번에도 라 카페 갤러리(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10길 28)에서 사진전도 겸합니다. 그동안 박시인이 평화나눔 활동으로 중동, 남아시아, 남미를 순례하면서 찍은 사진 중에 37점을 엄선하여 내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진에세이집 제목이 왜 ‘내 작은 방’일까요? 박 시인의 말을 직접 들어보지요. “우리 모두는 어머니 자궁의 방, 세상에서 가장 작지만 가장 위대한 방에서 태어났다. 그리하여 기쁨과 슬픔으로, 사랑하고 이별하고, 성취하고 저물어가면서 마침내 우리는 대지의 어머니, 땅속 한 평의 방으로 돌아간다. 살아있는 동안 한 인간인 나를 감싸주는 것은 내 작은 방이다. 지친 나를 쉬게 하고 치유하고 성찰하고 사유하면서 하루하루 나를 생성하고 빚어내는 내 작은 방. 우리는 내 작은 방에서 하루의 생을 시작해 내 작은 방으로 돌아와 하루를 정리하고 앞을 내다본다. 그곳에서 나는 끊임없이 새롭게 재구성되고 있다. 광대한 우주의 별들 사이를 전속력으로 돌아나가는 지구의 한 모퉁이에서, 이 격변하는 세계의 숨 가쁨 속에서 깊은 숨을 쉴 나만의 안식처인 내 작은 방. 여기가 나의 시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한국예술종합대학 직전 총장이었던 김봉렬 교수가 《건축의 시간, 영원한 현재》라는 책을 냈습니다. 이 책은 김 교수가 서울신문에 ‘김봉렬과 함께 하는 건축 시간여행’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을 모은 것입니다. 연재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김 교수가 시간을 거슬러 석기 시대까지 우리를 데리고 가, 고인돌부터 시작하여 최근의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까지 시간을 따라가며 각 시대의 주요한 건축물을 소개하고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김 교수는 글이나 강단에서만 건축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답사팀을 이끌고 건축물이 있는 현장도 찾아가, 현장에서 생생한 건축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단순히 건축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지요. 그 건축의 시대적 배경, 그 건축이 나오기까지의 역사, 다른 건축과의 비교 등등을 구수한 이야기로 풀어나가지요. 게다가 유머도 곁들이니, 열심히 듣고 있던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기도 합니다. 저는 김 교수의 답사를 여러 번 따라다녔습니다. 처음 김 교수의 답사를 따라갔던 때가 생각납니다. 고교동기인 김 교수의 답사여행 소문을 듣고 2006년 9월에 나도 따라가기로 하였었지요. 당시 여기저기서 김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빈섬 이상국 아주경제 논설실장이 《저녁의 참사람》이라는 제목의 다석 유영모(1890~1981) 선생 평전을 냈습니다. 제가 10여 년 전에 월간중앙에 <양승국 변호사가 산에서 만난 사람>을 연재할 때, 중앙일보 기자였던 빈섬은 월간중앙에 <미인별곡>을 연재하였지요. 그 당시 김광수 월간중앙 대표를 통해 빈섬을 알게 되어 가끔 식사도 하면서 소식을 이어왔기에, 얼마 전에 빈섬이 낸 다석 평전을 사 보았습니다. 2008년에 제22회 세계철학자대회가 한국에서 열렸습니다. 빈섬의 말에 따르면 당시 우리 철학계에서는 조선 시대의 이황, 이이, 송시열, 정약용과 현대의 류영모, 함석헌을 한국의 철학자로 내세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세계에 내놓을 만한 독창적인 사상적 심화를 이뤄낸 사람으로 꼽힐 사람은 다석 류영모뿐이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다석이 그렇게 뛰어난 철학자였단 말인가?’ 하며 놀라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아니! 다석 자체에 대해서도 ‘그런 철학자가 있었나?’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만큼 다석은 그의 심오한 사상체계에 견줘 우리에게 덜 알려진 인물이지요. 사실 다석이 1981년 2월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그의 눈에 띄일 때가 됐지 나도 죽음을 볼 수 있는 나이가 됐거든 어머니 주위에는 늘 있어 어느 때는 등 굽고 조그마해진 어머니를 업고 있어 나를 본 그가 네가 먼저 가고 싶니 농담인 게지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지 마치 마저 써야 할 시가 좀 더 있다는 듯 장석 시인의 세 번째 시집 《해변에 엎드려 있는 아이에게》에 나오는 시 ‘죽음에 관한 농담’입니다. 장 시인은 제 고교 동기로, 고등학교 때도 화동문학상을 탄 문재(文材)였습니다. 고교 졸업 뒤에도 서울대 국문과를 나와 198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였지요. 그렇지만 본격적인 문인의 길을 걷지 않고, 가업을 이어받아 경남 통영에서 오랫동안 바다의 시어(詩語)를 차곡차곡 가슴에 쌓아두기만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2020년에 오랜 침묵을 깨고 시집 《사랑은 이제 막 태어난 것이니》와 《우리 별의 봄》을 연달아 냈었지요. 그리고 세 번째 시집을 작년 11월에 냈고요. 40년 동안 장 시인의 가슴 속에 익을 대로 익은 시어가 쏟아져나오기 시작하니, 2년 사이에 3권의 시집을 냈네요. 이번 시집에서 저에게는 이 시가 먼저 제 눈에 들어옵니다. 저도 이제는 노년층에 들어섰으니, 저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고교 11년 선배인 양삼승 변호사가 《다섯 판사 이야기》라는 책을 내셨습니다. 작년에 《멋진 세상 스키로 활강하다》라는 제목으로 전 세계 스키장을 돌아보시고 – 심지어는 헬리스키까지 하시고 – 재미있는 스키 이야기를 책으로 내시더니, 이번에는 판사 이야기를 책으로 내셨군요. 그런데 책 표지에 ‘양삼승 장편소설’이라고 쓰여있네요. 소설이라고 하니 허구의 이야기가 먼저 연상되나, 실제 판사의 실제 이야기를 쓰신 것입니다. 소설로 쓴 이유에 대해 선배님은 책머리의 ‘작가의 변(辯)’에서 논문에는 감동이 없지만, 이야기에는 감동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겠지요. 메마르게 판사 이야기만 사실적으로 쓰기보다는 여기에 소설적 색깔을 더하면 이야기가 훨씬 재미있고 감동이 있겠지요. 책에 나오는 다섯 판사는 양회경, 이영구, 양병호, 양삼승, X. Z. Yang 판사입니다. 제가 읽어보니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는 소설적 색깔만 입혔을 뿐 거의 다 사실로 보입니다. 마지막 X. Z. Yang 판사 이야기만 빼놓고요. 양 선배는 X. Z. Yang 판사 이야기는 절반 정도만 사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름도 앞의 판사들과는 달리 영어로 그것도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장충식 총장님께서 – 총장을 그만두신 지 오래되셨지만, 저는 지금도 총장님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 《학연가연》이라는 책을 내셨습니다. 1967년에 36살의 나이에 전국 최연소 대학 총장이 되어 평생을 단국대 부흥을 위해 애쓰셨던 총장님께서 2018년 7월부터 1년 반 동안 학교 누리집을 통해 연재했던 글을 책으로 내신 것입니다. 《학연가연(學緣佳緣)》이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평생을 교육자로 사시며 맺은 인연 가운데 아름다운 인연을 글로 쓰신 것이지요. 글을 쓰게 된 동기를 총장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일선에서 물러나 세월의 무게를 더욱 실감하면서 나의 옛일을 반추하는 시간이 잦아졌다. 그 시간 속에서 나와 배움터이자 삶터인 대학에서 맺은 인연을 정리해 보자는 생각을 했다. 대학에서 맺은 인연들 가운데 선하고 좋은 매듭을 맺은 일들을 정리한 글이니 《학연가연(學緣佳緣)》으로 연재 제목을 정했다." 총장님께서 이 책을 제게 보내신 것도 제가 총장님과 한국예술종합대 최고지도자과정(CAP) 8기를 같이 다닌 인연이니, 저도 일종의 학연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책에서 총장님은 모두 20꼭지의 글로 사람들과의 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