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무소불위의 철권을 휘두르던 고대 제국의 임금들은 자기 마음먹은 대로 하지 않습니까? 고대 페르시아 대제국을 건설한 아케메네스 왕조의 캄뷔세스 임금의 행위 가운데 살벌한 일화 하나 소개할까 합니다. 캄뷔세스 임금의 신하 중 시삼네스라는 재판관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뇌물을 받고 부정한 판결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를 알게 된 캄뷔세스 임금은 그 재판관을 산 채로 가죽을 벗겨내도록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벗겨낸 가죽으로 가죽끈을 만들어 시삼네스가 판결할 때 앉던 의자에 두르게 합니다. 그리고 시삼네스의 아들을 후임 재판관으로 임명합니다. 잔인하군요. 재판할 때마다 자기 아버지의 가죽으로 만든 끈으로 두른 의자에 앉아 재판하는 아들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정신이 버쩍 들어 뇌물의 ‘뇌’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킬까요? 네덜란드 화가 제라드 다비드(1460?~1523)가 이를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다비드는 자신의 고향인 브뤼헤의 ‘정의의 홀’의 위촉을 받아 이 그림을 그렸답니다. 그림을 의뢰한 측에서는 당시 부패한 법관들이 많은 것을 탄식하여 이런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는군요. 아마 이렇게 그린 그림을 법정에 걸어놓으려고 하지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영화 <암살>에 보면 배우 전지현이 독립군 저격수 안윤옥으로 나오지요? 안윤옥의 실제 모델은 독립투사 남자현(1872~1933)입니다. 남자현 지사에 대해서는 제가 전에 한 번 누리편지를 보냈고, 제 블로그에도 올려놓았지요. https://blog.naver.com/yangaram1/80164059226 그러므로 여기서는 남자현 지사가 안윤옥의 모델로 나오게 된 활동상황에 대해서만 언급해보려 합니다. 남자현 지사는 3ㆍ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아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서로군정서에 가입합니다. 그리고 1925년에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암살하기 위해 국내에 잠입하였다가, 여의치 않아 돌아갑니다. 또한 1932년 9월 국제연맹조사단이 일본의 침략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일제의 만행을 조사단에 호소합니다. 단지 말로만 호소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왼손 무명지 2절을 잘라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쓰고, 자신이 자른 손가락 마디와 함께 조사단에 전달한 것이지요. 안중근 의사도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썼는데, 여자 독립군에서는 남자현 지사가 그렇게 했군요. 자신의 손가락을 자른다... 할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우리가 잘 알다시피 백범은 1949년 6월 26일 육군 소위 안두희의 총탄에 암살당하였지요? 안두희가 입을 열지 않고 저 세상으로 가 아쉽게도 암살의 배후는 끝내 미궁으로 남아있고요. 그런데 백범은 그 이전에도 암살범의 총에 맞았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적이 있습니다. 바로 1938년 5월 6일의 일이지요. 당시 3당(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이 호남성 장사의 남목청에 모여 3당의 통일 문제를 논의하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운환이 백범을 저격하였습니다. 백범이 총에 맞아 의식불명의 상태로 상아의원에 도착했을 때, 의사는 백범의 상태를 보고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의사는 백범을 입원시키지도 않고 문간에 방치해놓았는데, 세 시간이 넘도록 백범의 숨이 붙어있자 그때서야 부랴부랴 치료에 들어갑니다. 그때는 이미 백범이 숨이 넘어갔다고 알려져 백범의 맏아들 김인이 홍콩에서 전보를 받고 아버지 장례를 치르려고 장사로 달려오고 있을 때였지요. 뒤늦은 수술 끝에 백범은 살아납니다. 아직 민족을 위해 할 일이 많은 백범을 하느님께서는 다시 돌려보내신 모양입니다. 당시 같이 저격당한 현익철, 유동열, 지청천 중 현익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백범 김구 선생이 이운환에게 저격당하여 장사의 상아의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을 때입니다. 하루는 간호사가 슬그머니 들어오더니 편지 한 통을 두고 사라집니다. 발신인은 상덕포로수용소 신정숙(일명 신봉빈)입니다. 신정숙이 자신은 중국 유격대에 붙잡혀 수감되어 있다며 석방시켜달라며 청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정숙은 백범과 일면식도 없는 여자입니다. 어떻게 모르는 여인이 그것도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는 여인이 백범에게 편지를 보낸 것일까요? 자세한 경위는 알 수 없으나, 신정숙은 산동에 볼 일 보러 갔다가 중국 유격대에 붙잡혔습니다. 중국 유격대는 신정숙이 일본 식민지 백성이니 적국인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포로수용소에 수감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신정숙이 자신을 차별하는 일본 포로에 항의하며 적개심을 드러내는 것을 보고 이상하다싶었는지 조사를 합니다. 내막을 알게 된 신문관이 한국인 가운데 친숙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니, 신정숙은 백범의 이름을 댑니다. 백범과 일면식도 없지만 평소 존경하던 백범의 이름을 댄 것이지요. 마침 신문관이 장사 사람이었고, 신문관은 백범이 상아의원에 입원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요. 신정숙은 신문관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학생 동지들! 죽은 물고기는 물이 흐르는 대로 둥둥 떠내려갑니다. 그러나 산 물고기는 아무리 급류일지라도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물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죽은 물고기는 목적이 없고, 산 물고기는 목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목적을 갖고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살아 있는 물고기가 되기 바랍니다." 1949년 백범이 어느 청년 단체의 수양 강좌에서 한 연설입니다.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 역수어(逆水魚)! 짧은 연설문에서 광복 산하의 조국에서 청년들이 역수어가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백범은 1919년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나라가 살아나려면 교육밖에 없다며 오로지 교육에 매진하던 분입니다. 시대적 상황이 백범으로 하여금 독립운동으로 이끌었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백범은 교육계에서도 큰 빛을 발하셨을 것입니다. '역수어(逆水魚)’하니까 ‘등용문(登龍門)’도 생각이 나네요. 황하 상류에 있는 용문(龍門)은 물살이 빠른 급류라 웬만한 물고기는 이를 타고 넘지 못한다지요. 그런데 이런 험한 급류를 타고 넘으면 그 물고기는 용으로 승천할 수 있다고 하여 등용문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등용문’이라는 이름을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많이 들어본 가사지요? 예!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 가요이자, 한글로 기록된 가장 오래된 가요인 정읍사(井邑詞)입니다. 요즘에도 실려있는지 모르겠으나, 제가 학교 다닐 때는 교과서에 실려 달달 외우던 백제가요입니다. 왜 갑자기 백제가요 이야기를 하느냐고요? 얼마 전 집에 배달된 신세게 백화점 잡지 <SHINSEGAE> 9월호에 최정동 중앙일보 기자가 이에 대해 쓴 글이 실려 보았습니다. 제 아내가 신세계 백화점 회원이라 매달 이 잡지가 집에 옵니다. 그런데 대부분 자기네가 알리고픈 패션, 골프상품, 음식 등에 관한 내용이라, 보통 때는 화장실에서 한 번 휘~ 훑어보고 맙니다. 참! 화장실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저는 일반 독서와 화장실 독서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신문, 잡지류는 화장실 독서로 소화시키고 있는 것이지요. 최 기자가 쓴 글 제목은 <궁(宮)으로 간 남녀상열지사 수제천(壽齊川)>입니다. 정읍사가 조선시대에 궁중음악 수제천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녀상열지사’라니요?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는 ‘남녀 사이의 사랑을 읊은 노래’라는 말 아닙니까? 주로 조선의 유학자들이 고려가요가 남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화석정을 떠나 자유로로 올라타면서 ‘이젠 곧장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멀리 통일전망대가 보이면서 딴 생각을 가진 녀석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애초 너는 돌아가면서 파주 장릉도 보고 갈 생각이 아니었느냐? 그까짓 차 걱정 때문에 이 좋은 기회를 버린단 말이냐? 성동나들목에서 나가면 불과 6~7분밖에 안 걸리는데?” 햐아~ 이거 어쩐다? 결국 흔들리던 내 마음은 성동나들목이 보이자 끝내 제 손목으로 하여금 성동나들목으로 핸들을 돌리게 하였습니다. 장릉(長陵)에 도착하였습니다. 참! ‘장릉이 누구 무덤이지?’라고 하실 분이 있겠군요. 장릉은 인조와 인조의 첫 번째 왕비인 인열왕후 한 씨의 합장릉입니다. 한자는 틀리지만 김포에도 장릉(章陵)이 있는데, 이는 인조의 아버지 원종과 인종의 어머니인 인헌왕후 구씨의 쌍릉입니다. 그런데 인조의 아버지가 원종이라면 인조 아버지도 임금이었단 말인가요? 아닙니다. 선조의 5번째 아들이라 대군(大君)으로는 불리었지만 죽을 때(1619)까지도 임금으로 불린 적은 없습니다. 인조가 쿠데타(1623)에 성공하니까, 죽은 자기 아버지를 추존왕으로 모신 것이고, 따라서 원종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칠중성에서 후퇴하여 오면서 율곡이 오르곤 하였다는 화석정에 들렀습니다. 차가 기어가 들어가는 것이 영 빡빡한 것이 빨리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화석정을 빠뜨리고 갈 수는 없었습니다. 5년 전에 파주의 율곡 유적지를 돌면서 화석정만 빠뜨렸기에, 이번에도 그냥 지나치면 또 언제 보러 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좁은 길을 돌아 오르니, 임진강가의 언덕 위에 정자 하나가 서 있습니다. 율곡은 저 정자 위에서 바로 앞의 임진강을 내려다보며 편안한 휴식의 시간도 가졌을 것이고, 또 책을 보며 학문의 시간도 가졌었겠지요. 저도 율곡의 그러한 느낌을 가져보려는데, 그 때와 달라진 환경이 그런 느낌을 갖는 시간을 방해합니다. 임진강이 유유히 흐르는 것은 그대로이지만, 강변에는 4차선의 37번 국도 위로 연신 차들이 지나고 있는 것입니다. 정자 옆에는 선조의 피난길 이야기를 써놓았습니다. 율곡이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하인들에게 틈날 때마다 들기름에 젖은 걸레로 정자 마루와 기둥을 닦으라고 하였습니다. 율곡의 예견대로 1592년 임진왜란은 일어나고야 말았고, 율곡의 경고를 무시하던 선조는 허겁지겁 북으로 피난길을 떠납니다.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백범이 치하포 사건으로 인천 감옥에서 수감 중 탈옥하여 전국을 떠돌 때, 백범은 잠시 마곡사에서 승려로 출가하기도 합니다. 불교에 대한 뜻도 있었겠지만, 몸을 숨기기 좋다는 것도 계산에 넣었겠지요. 백범의 법명은 원종(圓宗)입니다. 백범에게 공손하게 출가를 권유하던 하은당 스님은 백범이 일단 머리를 깎자, 태도가 180도 돌변하여 백범을 구박하기 시작합니다. 백범이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욕을 하고, 장작 패고 물 길어오는 온갖 궂은일을 시킵니다. 백범은 6달 만에 마곡사를 떠납니다. 당장 환속한 것은 아니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좀 더 공부를 하겠다는 구실로 마곡사를 떠난 것이지요. 백범이 떠난 뒤 하은당 스님은 사고로 죽습니다. 석유통 속의 기름이 질이 좋은지 나쁜지 알아본다며 불붙인 막대를 석유통에 넣었는데, 아! 글쎄! 석유통이 폭발하는 바람에 곁에 있던 보경당 스님, 포봉담 스님과 함께 저 세상으로 간 것이지요. 저런! 그렇게 하더라도 부처님이 보호해주실 것으로 믿었나? 세 스님이 함께 저 세상으로 가자 마곡사는 총회를 열어 사찰 재산을 관리하고 법통을 이어갈 스님으로 원종 스님을 뽑습니다. 원종 스님이라고 하니까 금방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蓮花蓮葉覆紅欄(연화연엽복홍란) 연꽃잎은 붉은 난간 뒤엎고 綺閣依然泛木蘭(기각의연범목란) 단청 좋은 정자에 놀잇배 떠있네 潑潑游魚偏戱劇(발발유어편희극) 펄펄뛰는 고기는 연못이 놀이마당 有時跳上錄荷盤(유시도상녹하반) 때때로 연잎위로 솟구친다네. 천안 광덕산을 오르다가 발견한 시비(詩碑)에 적힌 시의 앞부분이다. 19세기 전반의 여류시인 운초(雲楚) 김부용(金芙蓉, 1813 ~ ?)의 시다. 시비를 지나 좀 더 오르다보면 운초의 무덤도 볼 수 있다. 평안남도 성천 기생의 무덤이 왜 광덕산에 있을까? 지금부터 그 궁금증을 풀어보자. 운초는 원래 양반집 딸로 태어났으나 어려서 부모를 잃고 퇴기(退妓)의 수양딸로 들어간다. 퇴기가 괜히 수양딸을 받겠는가? 퇴기는 운초가 방년(芳年)의 나이가 되자 운초를 성천 기적(妓籍)에 넣는다. 운초는 기생이 되자 금방 뭇사내들의 뜨거운 눈길을 받는 기생이 된다. 단순히 용모가 아름답다고 하여 뭇사내들이 찾고 싶은 기생이었던 것은 아니고, 운초의 매력은 가무음률은 물론 뛰어난 그녀의 시문(詩文)에 있었다. 어느 해에 유관준이 신관사또로 성천에 온다. 유관준은 운초라는 명기(名妓)를 자신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