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낟알비처럼 당신의 진심이 삶에 깊이 '배어듭니다'
[우리문화신문=이창수 기자] 그림 속 풍경이 참으로 평온하고도 뭉클합니다. 보랏빛과 귤빛이 은은하게 섞인 아침 하늘 아래, 보슬보슬 내리는 마지막 봄비가 온 대지를 촉촉이 적시고 있습니다. 우산을 쓰고 지팡이를 짚은 채 밭둑에 선 저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등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은 어쩌면 고단한 하루의 무게일지도, 혹은 내일의 풍요를 기다리는 설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언덕 너머로날아가는 새들과 이제 막 고개를 내민 어린 싹들이 비를 맞으며 숨을 고르는 이 시간, 우리도 잠시 그 풍경 속에 머물며 마음을 씻어내 봅니다. 깊이 스며들어 우리 것이 되는 '배다' 비록 비가 내리지는 않지만 오늘은 봄의 마지막 절기이자, 모든 곡식이 잠에서 깨어난다는 '곡우'입니다. 저희 토박이말바라기에서는 이 아름다운 날을 '낟알비'라고 다듬어 부르고 있어요. '껍질을 벗기지 아니한 곡식의 알'을 가리키는 '낟알'에 '비'를 더해 만든 만든 말입니다. 이름만 들어도 포슬포슬 내리는 비가 논밭의 낟알들을 포근히 감싸 안는 풍경이 그려지지 않는가요?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토박이말은 바로 '배다'입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배다'를 단순히 물기가 스며들거나 스며 나오는 것뿐만 아니라, '버릇이 되어 익숙해지거나', '생각 따위가 깊이 느껴지고 오래 남아 있는 것'이라 풀이합니다. 낟알비(곡우) 무렵에 내리는 비는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그저 흙먼지를 잠재우고 겉면만 적시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땅속 깊이 스며들어 자리를 잡고, 씨앗과 낟알 속에 생기를 가득 채워 줍니다. 땅속 깊은 곳까지 차분히 흘러 들어가 비와 기운이 땅과 곡식에 온전히 '배어드는 때', 그것이 바로 낟알비의 참뜻입니다. 겉으로 요란하게 드러나지 않아도, 소리 없이 스며든 빗물이 식물의 속살까지 닿아 단단한 생명력을 만들어내는 그 묵직한 정성을 떠올려 봅니다. 당신의 노력이 삶에 스며들고 있어요 논밭을 일구는 사람처럼, 우리의 삶도 이 '낟알비'를 닮았습니다. 날마다 되풀이되는 고된 나날이 때로는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어느덧 '일이 손에 배고', 당신만의 귀한 '정서가 삶에 배어'나게 됩니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화려한 결과가 없다고 해서 조급해하지 마세요. 낟알비가 소리 없이 씨앗을 깨우듯, 당신이 묵묵히 견뎌온 모든 순간은 이미 당신의 인격과 삶 속에 깊이 배어들어 있습니다. 그렇게 속까지 깊이 배어든 기운은 세상 그 무엇보다 단단하고 아름다운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를 채워가며 내일을 준비하는 당신의 오늘을 온 마음 다해 응원합니다. [마음 나누기] 소리 없이 내리는 낟알비처럼, 요즘 당신의 손이나 마음결에 기분 좋게 '배어들고' 있는 익숙함이나 기운은 무엇인가요? [한 줄 생각] "비는 보이지 않는 곳에 스며들어, 당신의 귀한 삶을 단단하게 배어들게 합니다." [오늘의 토박이말] ▶ 낟알비: '곡우'를 다듬은 토박이말로, 곡식을 깨우고 낟알이 잘 여물게 하는 비라는 뜻입니다. ▶ 배다 뜻: 1. 스며들거나 스며 나오다. 보기: 옷에 땀이 배다. 2. 버릇이 되어 익숙해지다. 보기: 일이 손에 배다. 3. 느낌, 생각 따위가 깊이 느껴지거나 오래 남아 있다. 보기: 농악에는 우리 민족의 정서가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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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든 생명을 깨우는 고요한 합창, 아지랑이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겨울의 묵직한 외투를 벗어 던진 대지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쉴 때, 지표면 어디쯤에선가 투명한 아지랑이가 일렁이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대지가 겨우내 품어온 뜨거운 생동감이 밖으로 터져 나오는 봄의 지문(指紋)이자, 잠든 생명을 깨우는 고요한 합창입니다. 아지랑이는 형체도 없고 색깔도 없지만, 세상의 풍경을 가장 아름답게 흔들어 놓습니다. 메마른 논둑길 위로, 혹은 보리밭 사잇길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면 딱딱했던 세상의 경계는 이내 부드러워집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깝지만, 다가가면 신기루처럼 멀어지는 그 움직임은 마치 대지가 추는 느릿한 춤사위와 같습니다. 아지랑이 너머로 보이는 원경(遠景)은 마치 덜 마른 수채화처럼 번져 나가고, 그 일렁임 속에서 세상은 잠시 현실의 무게를 잊은 채 몽환적인 꿈을 꿉니다. 아지랑이는 단순히 공기의 밀도 차이가 만들어낸 현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차가운 흙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려 애쓰는 씨앗들의 거친 호흡이며, 얼어붙었던 강물이 풀리며 숨 쉬는 안도감입니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는 것은, 땅속 깊은 곳에서 이미 봄의 맥박이 힘차게 뛰기 시작했다는 증거입니다. 햇살이 지면을 애무할 때마다 땅은 그 온기를 머금었다가 다시 하늘로 되돌려 보냅니다. 이 순환의 과정에서 생겨나는 아지랑이는 대지가 하늘에 보내는 가장 다정한 답장이기도 합니다. 바쁘게 걸음을 옮길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가만히 멈추어 서서 시선을 낮출 때 비로소 선명해집니다. 아지랑이는 우리에게 서두르지 말고 잠시 멈추어 보라고 권합니다. 가물가물 피어오르는 그 아련한 불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겨우내 웅크렸던 우리의 마음도 함께 일렁이며 따뜻한 봄기운으로 채워집니다. 아지랑이 피는 들판 끝을 바라보며 삶에도 기분 좋은 일렁임이 시작되기를 바랍니다. 무거운 고민은 저 아지랑이 너머로 가볍게 날려 보내고, 오직 봄이 주는 생명의 찬란함을 온몸으로 맞이하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