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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돌 토박이말 노래 누가 누가 잘하나
[우리문화신문=이창수 기자] 우리말, 토박이말 살리기에 앞장서고 있는 사단법인 토박이말바라기가 세움 열 돌을 맞아 이를 기리는 자리이자 ‘토박이말 노래 누가 누가 잘하나’가 세 돌을 맞아 함께 뜻깊은 잔치를 열었다. 사단법인 토박이말바라기(으뜸빛 강병환)와 경상남도교육청(교육감 박종훈)이 함께 마련하고 경상남도, 경상국립대학교, 경상남도의회, 진주시, 진주교육지원청, 진주시의회와 여러 일터의 도움을 받아 지난 11월 8일 낮 2시 30분부터 한국토지주택공사 본사 대강당에서 펼쳐졌다. 전국에서 예선을 거쳐 올라온 열 모둠(열개 팀)이 치룬 열매뽑기(결선)이었다. 잔치를 열기 앞서 여는 마당으로 ‘말꽃이 피다’ 음악극이 펼쳐졌는데 하춘란 배우, 정가온 배우와 함께 가야금 이명옥, 바이올린 김예지님이 함께해 음악과 극이 멋지게 어우러졌다. 이어 토박이말바라기 세움 열 돌을 기리는 기림치레(기념식)에서 강병환 으뜸빛은 토박이말바라기를 세우는 데 뜻을 함께했던 마름빛(이사)들과 자리를 빛내 주러 오신 손님들을 소개하고 잔치에 함께한 모든 사람들에게 고마운 말을 전했다. 이어 토박이말바라기가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뜻으로 안순화 마름빛(이사)가 나아짐돈(발전기금) 100만원을 이어주는 이어줌치레(전달식)을 갖고 토박이말바라기를 많이 사랑해 달라는 바람의 말도 남겼다. 이어 열매뽑기 결선에 올라온 열 모둠이 저마다의 빛깔로 소리꽃을 피웠고 듣는 분들로부터 많은 손뼉을 받기도 했다. 열 모둠의 솜씨 뽐내기가 끝나고 기쁨 마당(축하무대)가 이어졌는데 지난해 으뜸보람(대상)을 받은 ‘김하진(무지개초 3)’ 배움이와 ‘더 비보’, 꼲음이(심사위원)인 바리톤 지광윤, 성기현 님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큰 손뼉을 받았고 끝으로 노래 잔치에 나온 열 모둠 모든 사람들과 함께 ‘토박이말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마무리를 했다. 지광윤 심사위원장은 심사평에서 “다들 너무 잘해서 순위를 가리기가 참으로 힘들었는데 노래 솜씨는 말할 것도 없고 예쁜 춤과 함께 무대를 즐기는 모습이 참 보기가 좋았다”는 심사평을 해 주었다. 노래 잔치 열매(결과) 으뜸보람 대상은 김해주촌초등학교 ‘꿈동이 중창단’ 이 받았는데 경상남도지사 상장과 트로피 그리고 상금 100만 원을 받았다. 그리고 버금보람 최우수상은 둘이었는데 하나는 통영 도산초등학교 박규림, 김민지, 여지호 배움이가 함께한 ‘도담도담 마루소리’가 받았는데 경상남도교육감 상장과 트로피상금을 받았고 하나는 진주 무지개초등학교 4학년 김세하 배움이가 받았으며 경상국립대학교 총장 상장과 트로피 상금 50만 원을 받았다. 다른 일곱 모둠은 경상남도의회의장상, 진주시장, 진주시의회 의장상, 진주교육지원청 교육장 상장과 트로피 상금 20만 원을 받았다. 그리고 으뜸보람 대상을 받은 ‘꿈동이 중창단’을 가르친 서필상 님은 상금 30만 원을 받았다. 한편 이 노래 잔치에서 부른 토박이말 노래는 토박이말을 배우고 익힌 아이들이 손수 쓴 노랫말에 염경아 작곡가가 가락을 붙인 곡들이라는 것이 특징이었다. 잔치를 마련한 사단법인 토박이말바라기 강병환 으뜸빛은 “앞으로 새로운 토박이말 노래가 만들어지고 더 많은 배움이들이 함께하게 될 다음 잔치에 많은 분들이 자리해 주기를 바라며 잔치를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모든 분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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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뢰우(風雲雷雨 : 바람ㆍ구름ㆍ우레ㆍ비)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조선왕조실록>에 풍운뢰우(風雲雷雨)는 87번이나 등장한다. 이후 문장은 기우제나 산천제와 연결되는 문장이다. * (풍운뢰우제에 쓸 향과 축문을 전하다) 임금이 풍운뢰우제(風雲雷雨祭)에 쓸 향과 축문을 친히 전하였다. (⟪세종실록⟫6/2/3) ‘기우제(祈雨祭)’란 낱말은 모두 822건 등장하는데 세종 때 92건, 숙종ㆍ영조 때도 90여 건이 된다. 세종 때 가뭄이 심한 탓도 있었겠지만 단지 비만의 문제가 아니라 비에 대비한 간척, 저수지, 수로 문제 등 여러 일과 연결되어 있으며, 세종 때 농사에 관해 관심이 컸다는 방증도 되겠다. 세종 때를 중심으로 비에 관한 기사들을 보자. * (풍우 재앙이 심한 영춘ㆍ단양에 조세를 면제하다) 충청도 도관찰사 이종선(李種善)이 계하기를, "영춘(永春)ㆍ단양(丹陽)에 풍우(風雨)의 재앙이 다른 고을보다 배나 되어, 손실(損失)이 8, 9분에 이르렀으니, 원하옵건대, 금년 조세(租稅)는 한 섬[石] 이하의 것은 면제하여 주기를 비옵나이다." 하여,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4/10/5) * (장마가 계속될 것 같아 밀·보리가 성숙하는 대로 재촉하여 베게 하다) 경기 감사에게 전지하기를, 이제 흙비[霾雨]가 내릴 듯하니, 밀ㆍ보리가 성숙하는 즉시 재촉하여 베게 하라." 하였다." (⟪세종실록⟫7/5/29) * (산릉에 돌을 운반할 때 손상된 곡식의 싹을 배상하도록 하다) 의정부에서 호조에서 올리는 문서에 따라 아뢰기를, "산과 언덕에 돌을 운반할 때 백성의 밭을 짓밟아 곡식의 싹을 많이 훼손했으니, 그 훼손된 것을 계산하여 종자를 주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30/3/5) *(교제 외의 다른 기우제를 행하라고 전지하다) 명 내리기를, "교제(郊祭, 나라 제사) 외에 다른 비오기를 빌기 위하여 행할 만한 일들이 있으면 때를 맞추어 시행하라." 하였다. (⟪세종실록⟫7/7/22) *(햇무리 지고 우박이 오다) 햇무리 지었는데, 귀고리가 달리었다. 우박이 왔는데, 둘레의 직경이 어떤 것은 한 치가 넘었다. (⟪세종실록⟫10/윤4/21) *(수해의 가능성에 있는 곳에 대한 방비를 충실히 하라 하다) 서울과 지방의 무지한 백성들이 낮은 곳에 살아, 큰비로 인하여 떠내려가거나 익사하는 사람이 많은 까닭으로, 영락(永樂,중국 명나라 성조(成祖)의 연호(1403~1424) 15년 8월 26일의 임금의 명에, ‘무릇 낮은 지대나 물가에 사는 사람을 모두 〈다른 곳으로〉 옮겨 두게 하라.’라고 하였다. (⟪세종실록⟫11/4/25) * (조치에게 강원도의 올 농사의 작황에 관해 물어 보다) 총제(摠制, 정2품 무관직) 조치(曹致)가 대답하기를, "올해는 흙비가 너무 심하여 밭곡식은 거의 결실이 잘되지 않았사오나, 논곡식만은 풍년이 더할 수 없게 들었습니다." (⟪세종실록⟫12/7/27) * 진해현(鎭海縣)에 우박雨雹이 왔다. (⟪세종실록⟫14/5/6) *(평안도 성천에 폭우가 내려 산이 무너지매 남녀 4명이 압사하다) 평안도 성천(成川)에 큰비가 와서 산이 무너지매, 남녀 합계 4명이 깔려 죽었다. (⟪세종실록⟫18/6/15) *(평안도 감사에게 도절제사의 행락을 자세히 조사하여 아뢰도록 하다) 평안도 감사에게 임금의 명을 전하기를, "이미 도절제사가 장맛비가 내리기 전에 강계에 부방(赴防, 다른 도-道의 군대가 서북 변경에 파견하는 일)할 법을 세웠다. (⟪세종실록⟫19/5/13) *(큰비와 우박이 내리다) 큰비가 내리며 우레와 번개가 치고, 저녁때에 이르러서는 큰 밤[大栗]만한 우박(雨雹)이 내렸다. (⟪세종실록⟫280/5/26) 이러다가 세종 후기에 마침내 측우기가 나타나게 된다. *(호조에서 서운관(천문, 날씨 등을 맡아보던 기관)에 측우기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다) 호조에서 아뢰기를, "각도 감사(監司)가 비가 내린 양을 임금에게 보고하도록 하는 법이 이미 있사오니, 흙이 바싹 마름과 축축이 젖지 아니하고, 흙 속으로 스며든 얕음과 깊음도 역시 알기 어렵사오니, 청하옵건대, 서운관(書雲觀)에 대(臺)를 짓고 쇠로 그릇을 부어 만들되, 길이는 2척이 되게 하고 지름은 8촌이 되게 하여, 대(臺) 위에 올려놓고 비를 받아, 관원에게 얕음과 깊음을 척량(尺量)하여 보고하게 하소서. 또 마전교(馬前橋, 종로 5가와 중구 방산동을 잇는 위치에 놓인 다리) 서쪽 물속에다 박석(薄石, 넓적하고 얇은 돌)을 놓고, 돌 위를 파고서 받침돌 둘을 세워 가운데에 방목주(方木柱, 단면이 네모반듯한 기둥)를 세우고, 쇠갈구리로 부석을 고정시켜 척(尺)ㆍ촌(寸)ㆍ분수(分數)를 기둥 위에 새기고, 본 조정의 낭청(郞廳, 중앙 관청에서 실무를 담당하던 하급 관원)이 빗물의 매우 높거나 깊음을 살펴서 보고하게 하고, 또 한강변(漢江邊)의 암석(巖石) 위에 푯말[標]을 세우고 척ㆍ촌ㆍ분수를 새겨, 도승(渡丞, 조선시대 한강 변의 관리책임자)이 이것으로 물의 깊고 얕음을 측량하여 본 조정에 보고하여 아뢰게 하라. 또 지방 각 고을에도 서울 안의 주기례(鑄器例)에 의하여, 혹은 자기(磁器)를 사용하던가, 혹은 와기(瓦器, 진흙으로 만들어 잿물을 올리지 않고 구운 그릇)를 사용하여 관청 뜰 가운데에 놓고, 수령이 역시 물의 깊고 얕음을 재어서 감사(監司)에게 보고하게 하고, 감사가 아뢰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23/8/18) 이어 우량 측정에 나선다. *(호조에서 우량을 측정하는 일에 관해 아뢰다) 호조에서 아뢰기를, "우량(雨量)을 측정(測定)하는 일에 대해서는 일찍이 벌써 명령을 받았사오나, 아직 다하지 못한 곳이 있으므로 다시 갖추어 조목별로 열기(列記)합니다. 1. 서울에서는 쇠를 주조(鑄造)하여 기구(器具)를 만들어 명칭을 ‘측우기(測雨器)’라 하니, 길이가 1척(尺) 5촌(寸)이고 지름이 7촌입니다. 자를 사용하여 서운관(書雲觀)에 대(臺)를 만들어 측우기를 대(臺) 위에 두고 언제든지 비가 온 뒤에는 본관(本觀, 서운관)의 관원이 친히 비가 내린 상황을 보고는, 주척(周尺)으로써 물의 깊고 얕은 것을 측량하여 비가 내린 것과 비 오고 갠 일시(日時)와 물 깊이의 척ㆍ촌ㆍ분(尺寸分)의 수(數)를 상세히 써서 뒤따라 즉시 아뢰고 기록해 둘 것이며, 1. 외방(外方)에서는 쇠로써 주조(鑄造)한 측우기(測雨器)와 주척(周尺) 하나씩을 각 도에 보내어, 각 고을이 한결같이 위 측우기의 체제(體制)에 따라 혹은 사기그릇이든지 혹은 토기든지 적당한 데에 따라 구워 만들고, 객사(客舍)의 뜰 가운데에 대(臺)를 만들어 측우기를 대(臺) 위에 두도록 하며, 주척(周尺)도 또한 상항(上項)의 체제(體制)에 따라 혹은 대나무로 하든지 혹은 나무로 하든지 미리 먼저 만들어 두었다가, 매양 비가 온 후에는 수령(守令)이 친히 비가 내린 상황을 살펴보고는 자로 물의 깊고 얕은 것을 측량(測量)하여 비가 내린 것과 비 오고 갠 일시(日時)와 물 깊이의 척ㆍ촌ㆍ분(尺寸分)의 수(數)를 상세히 써서 뒤따라 아뢰게 하고 기록해 두어서, 후일의 참고에 출처로 삼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24/5/8) 이후 보다 더 긍정적으로 농민을 보호하는 정책도 나온다. 이전에도 행렬들이 지나며, 해친 곡식들을 보상한 일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공사에서도 민간 일들을 보살피고 있다. *(산릉에 돌을 운반할 때 손상된 곡식의 싹을 배상하도록 하다) 정부에서 호조의 정문(呈文)에 따라 아뢰기를, "산릉(山陵)에 돌을 운반할 때 백성의 밭을 짓밟아 곡식의 싹을 많이 손상시켰으니, 그 손해된 것을 계산하여 씨앗을 주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30/3/5) 세종의 큰 업적 가운데 하나는 측우기를 만든 일이라 할 수 있다. 농업이 산업 곧 당시 먹고 사는 일의 근본인 때 농업은 산업의 기반이고 중심이었다. 그리고 나라 행정의 기반도 자연히 농업의 흉작에 따라 국가가 거두어들이는 세금과도 직결될 일이었다. 곧 이렇듯 비란 간접적으로 국가 재정과 직결되어 있었고 측우기가 나타남으로 토지의 비옥도와 지역의 흉년, 풍년 여부 그리고 그에 따른 과세도 함께 더욱 합리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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