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창수 기자] 온다고 했던 비가 왔습니다. 장마가 온다고 하더니 장마가 비롯되었나 봅니다. 저는 더위 가운데 가장 견디기 어려운 더위가 무더위라고 생각합니다. 끈끈하면서 사람 기분까지 나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요즘 아이들끼리 다툼뿐만 아니라 어른들이 욱하는 바람에 싸움으로 번지는 일이 많다고 합니다. 더위를 막을 수는 없지만 식힐 수는 있을 것입니다. 찬바람틀에만 기대지 않고 시원한 생각과 기분으로 더위를 식히며 살아야겠습니다. 어제 밤에 토박이말 갈배움 닦음(교수학습 연수) 자리는 시원하면서도 따뜻했습니다. 찬바람틀이 세게 돌아가서 앞에 앉은 저는 춥게 느껴질 만큼 시원했지만 나눈 이야기는 참 따뜻했거든요. 김수업 선생님께서 그동안 말씀하셨던 것을 간추려 주셔서 도움이 되었고 토박이말 뜻을 풀어 보기도 하고, 토박이말 뜻을 갈라 보기도 하면서 서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길을 내다'와 '길을 들이다'가 어떻게 다른 것인지를 함께 생각해서 알게 되어 참 기뻤습니다. 혼자서는 어렵고 힘들었을 텐데 여럿이 슬기를 모아 쉽게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고 나와 오늘과 같이 낱말을 가지고 서로 느낌과 생각을 나누는
[우리문화신문=김수업 명예교수] 사람을 몸으로만 보면 누리 안에 잠시 머무는 한낱 먼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야 옳다. 그러나 사람은 온 누리를 모두 받아들여 갈무리하고도 남을 만한 크고 넓고 깊고 높은 마음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사람은 태어나는 그날부터 몸으로 온 누리를 받아들여 마음에 갈무리하면서 끝없이 자란다. 그러고는 스스로 ‘작은 누리(소우주)’라 뽐내기를 서슴지 않는다. 사람이 누리를 받아들이는 몸의 창문을 다섯 가지로 꼽는다. 얼굴에 자리 잡은 네 구멍 곧 눈과 귀와 코와 입에다 온몸을 덮고 있는 살갗 하나를 더해서 다섯이다. 이들 다섯 가지 창문이 누리를 받아들일 적이면 눈은 ‘보다’, 귀는 ‘듣다’, 코는 ‘맡다’, 입은 ‘맛보다’, 살갗은 ‘느끼다’ 같은 노릇을 한다. 이들 가운데서도 ‘보다’는 가장 많은 것을 받아들이는 창문이라는 사실을 세상 학자들이 두루 밝혀 놓았다. 게다가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 하는 속담은 ‘보다’가 가장 또렷하고 알뜰하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표준국어대사전》을 열어 보면 움직씨 ‘보다’의 뜻풀이를 스물여덟 가지나 내놓았다. 게다가 ‘보다’가 다른 움직씨를 돕는 도움움직씨로
[우리문화신문=이창수 기자] [토박이말 맛보기]쫍치다 / (사)토박이말바라기 두루빛 이창수 [오늘 토박이말] 쫍치다 [뜻] 1)너그럽지 못하고 좁게 만들다[보기월] 눈 앞에 보이는 꽉 막힌 길이 저를 더쫍치는 것 같았습니다. 어제는 가람고을 하동에 있는 하동초등학교에 다녀왔습니다. 그곳 어버이, 배움이(학생), 갈침이(교사)와 함께 토박이말 놀배움 이야기를 하고 왔습니다. 이춘호 교장 선생님께서 토박이말을 남달리 생각하고 계시다 보니 그곳 갈침이님들 가운데 함께하시는 분들이 나게 된 것이지요. 아이들이 토박이말을 많이 알고 있어서 놀랐고 제가 이야기하고자 한 바를 미리 잘 알고 있어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다만 제가 모자라서 좀 더 재미있고 알찬 이야기를 해드리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뿌리고 온 토박이말 놀배움 씨앗이 잘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보다 큽니다.^^ 이야기를 마치고 맛있는 낮밥을 먹자마자 서둘러 길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길이 막힌다는 알림을 보았습니다. 쉬지 않고 달려 가도 겨우 뒤낮 배움(오후 수업) 때에 맞춰 갈 수 있다 싶었는데 걱정이 되었습니다. 눈 앞에 보이는 꽉 막힌 길이 저를 더쫍치는것 같
[우리문화신문=이창수 기자] 우리한글박물관 과학공부6-1/조르개, 눈알 / (사)토박이말바라기 두루빛 이창수오늘은4284해(1951년)만든‘과학공부6-1’의32쪽부터35쪽까지 보고 캐낸 토박이말을 보여드립니다. 32쪽에 보면‘조르개’라는 말이 있습니다.우리는‘조리개’로 알고 있고 말모이(사전)에도‘조리개’의 잘못이라고 해 놓고 있습니다.그런데 배움책 풀이를 보면‘조르개’라고 하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듭니다.이것이 하는 일이 조르거나 늦추면서 빛을 적게 또는 많이 들어오게 하니 말입니다.앞으로 여럿이 머리를 맞대고 따져 볼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33쪽에는‘눈알’이 있습니다. ‘안구’라는 말을 많이 쓰면서 말을 할 때나 글을 쓸 때 안 써야 될 말처럼 여기게 된 말이기도 합니다.이 배움책을 만든 분들이나 그때 사람들은 이 말을 오늘날 우리처럼 여기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한글박물관 과학공부 6-1/골, 풀이하다 / (사)토박이말바라기 두루빛 이창수 34쪽에는‘골’이 있습니다. ‘뇌’라는 말에 밀려서 잘 쓰지 않는 말입니다. ‘큰골’, ‘작은골이‘대뇌’, ‘소뇌’가 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35쪽에는‘풀이하다’가 나옵니다. “우리가 보
[우리문화신문=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1955년부터 1956년 8월까지의 국사편찬위원회 소관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가 첫 해 3차에 걸친 조사결과로 윤치호가 유력하나 확정을 하지 못했다. 위원회에서 표결결과 11:2로 만장일치가 되지못해 윤치호로 확정을 하지 못했다. 이는 일면 신중을 기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역사적 사실문제를 학술적 결론이 아닌 거수로 결정하려했다는 것은 첫 단추부터 잘 못 꿴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듬해 8월 국사편찬위원회는 결론을 내렸다. 그 결과는 ‘윤치호가 작사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동안 안창호가 작사했다는 오해가 있게 된 것인가? 그것은 안창호가 1907년 귀국하여 국가(國歌), 국기(國旗), 국화(國花) 같은 국가상징의 필요성을 강연을 통해 표하고 나름의 ‘애국가’를 작사한 것에 따른 것이다. 다음은 귀국한 다음 달 의무균명학교에서 ‘애국가’의 기능을 설하고 지어 제창할 것을 강조한 기록이다. “西署萬里峴義務均明學校에서 去番 歸國하였던 美國 留學生 안창호씨가 生徒에게 對하여 勸勉한 內開에 美國 各種 學校에서는 愛國思想으로 每日 上학 前에 國旗에 禮拜하고 愛國歌를 唱함을 見한 즉 其開明模
[우리문화신문=이창수 기자] [토박이말 맛보기]얼뚱아기 / (사)토박이말바라기 두루빛 이창수 [오늘 토박이말] 얼뚱아기 [뜻] 둥둥 얼러 주고 싶을 만큼 예쁘고 귀여운 아기[보기월] 다들 저마다 집에서는얼뚱아기였을 텐데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 안타깝습니다. 그제 밤에 잠이 들무렵 쏴아 하는 소리와 함께 시원하게 오던 비가 자고 나니 그쳐 있었습니다. 뒤낮(오후)에 비가 올 거라며 비받이(우산)를 챙겨 가라는 말을 깜빡 잊고 배곳(학교)으로 왔습니다. 그래서 언제 얼마나 올까 궁금했는데 낮밥(점심)을 먹고 조금 있으니 비가 왔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오다가 그야말로 빗발이 보이는 발비가 내렸습니다. 하도 시원하게 오기에 그것을 움직그림으로 담아 올렸더니 다른 고장에 사시는 분들도 시원하다고 글갚음을 해 주셨습니다. 저만 보기 아까워 그랬는데 올린 보람이 있는 것 같아 저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요즘 마음 써야 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닌데 옆에 있는 가온배곳(중학교) 아이들까지 여러 가지로 애를 먹입니다. 밤에는 말할 것도 없고 낮에도 울타리를 넘어 오기도 하고 지나치다 싶을 만큼 장난을 치고 있습니다. 웬만큼 헤살을 부리면 봐 줄 수도 있는데 나이드신 어
[우리문화신문=김명호 시인] 태 극 기 너 운명의 고리여! 늘 우리라는 이름으로 나를 울린다. 너로 하여금 긍지와 너로 하여금 슬픔과 너로 하여금 기쁨을 함께 하노니 얼마나 많은 생명이 너의 아래에서 죽어가고 살아나고 얼마나 많은 희로애락을 겪게 하는가. 멀어질수록 더욱 가까워지고야 마는 너는 피할 수 없는 천형.
[우리문화신문=김리박 시조시인] 뜨거움으로 더위를 이겨내다(이열치열) 불더위 다스리며 무더위 족치고 이래서 울 한겨레 닷 즈믄 해 살아 왔네 두어라 골 해를 이겨 깨끗시원 살리라 * 닷 즈믄 해 : 5천년 * 골 해 : 만년 * 깨끗시원 : 깨끗하고 시원하게
[우리문화신문=이창수 기자] [토박이말 맛보기]쇠굳다 / (사)토박이말바라기 두루빛 이창수 [오늘 토박이말] 쇠굳다 [뜻] 쇠처럼 바뀌지 않고 단단하다(굳세다)[보기월] 아버지께서쇠굳은마음으로 사시지 않았더라면 제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난 닷날 많은 아이들이 들려준 어울림 소리가 제 귀를 맑혀 주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함께했던 모든 분들도 저와 같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하는 것을 봐 왔기 때문에 다른 배곳 아이들이 어떻게 지냈는지 안 봐도 압니다. 날마다 남들보다 일찍 나와 갈고 닦은 솜씨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 자리를 펼치는 데에 도움도 주고 들을 수 있어 참 기뻤습니다. 엿날 저녁에는 건건이 몇 가지를 챙겨서 시골집에 갔었습니다. 어김없이 집 앞에는 한뎃잠을 자러 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저녁 밥을 먹는데 노래 자랑을 하는지 여러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더군요. 남들은 일부러 짐을 싸 와서 돈을 주고 잠을 자고 싶어하는 곳에 집이 있는 것이 참 좋다 싶어 콧노래가 절로 나왔습니다. 저녁을 드시고 아버지께서 옛날 어릴 적에 겪었던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제가 처음 듣는 이야기였는데 오른쪽, 왼쪽으로 나뉘어
[우리문화신문=전수희 기자] 남쪽지방 모두 도적 칼에 빼앗겨 고깃덩이 된 백성 그 참상 어떠하랴 임금 수레 사령을 넘은 뒤 10년의 선창(禪窓)에서 가슴만 치다 이는 ‘임진년 여름’이란 시로 인오선사(印悟禪師, 1548~1623)가 임진왜란 때 지은 노래다. 인오선사는 32살 때 묘향산에서 서산대사를 모셨다. 때마침 왕명으로 서산대사가 의병을 모으자 인오선사도 승병장이 되어 3년 동안 공을 세웠다. 경(經)을 봄이 참 깨달음이 아니요 잠잠히 지킴도 헛된 수고 가을하늘 바다처럼 맑으면 둥구렷 달무리 외로워 인오선사는 어디에도 집착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국난을 보고 가슴만 칠 수가 없어 몸소 전란에 뛰어 든 것이다. 호가 청매(靑梅)인 인오선사는 《청매집》을 남겼는데 그 서문은 조선 중기의 대문장가 이정구(李廷龜, 1564~ 1635) 선생이 썼다. 월사 이정구 선생은 인오선사를 처음 본 인상을 다음과 같이 썼다. “월명사는 산 북쪽 제일 높은 곳에 있었다. 인오 노스님이 나를 절로 인도하여 함께 갔다. 거처나 책상, 향로 등이 너무도 청초하여 속세를 떠난 듯 바로 서천세계로구나 하고 놀랐다. 서가에 가득한 경전들의 앞면에 쓴 제목 글씨가 모두 자신의 친필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