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리창수 기자] [뜻] 오래 내버려 두어 거칠어진 밭 [보기월] 묵정밭이 된 우리말을 새로 일구는 마음으로 이 일을 꾸준히 해야겠습니다. 후두둑 후두룩 떨어지는 빗소리에 놀라서 문을 닫느라 한바탕 부지런을 떨었습니다. 날래게 움직여서 비가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러고 나니 이처럼 좀 더 날래게 우리 삶과 말을 챙겼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더욱 크게 느껴졌습니다. 나라 안팎으로 다니느라 보름 가까이 토박이말을 맛보여 드리지 못했습니다. 언제든 어디서든 맛보여 드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럴 겨를이 없었습니다. 제가 토박이말을 맛보여 드리지 못하는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고 사람들은 그런 일들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방아 글방아를 찧는 걸 듣보았습니다. 마음 아프고 답답한 일들을 보면서 기운이 빠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왜 토박이말을 맛보여 주지 않느냐 무슨 일이 있느냐 물어 주는 분들이 있어 사는 맛도 나고 기운이 났습니다. 묻지 않았다고 해서 토박이말을 기다리지 않았던 것은 아니라는 걸 잘 압니다. 그러니 그리 묻지 않으신 분들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많은 걱정과 풀거리들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지만 저마다의 자리에서
[그린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세종은 어느 날 이렇게 말했다. 사형 집행에 대한 법 판결문을 이두문자로 쓴다면, 글의 뜻을 알지 못하는 백성이 한 글자의 착오로도 원통함을 당할 수도 있으나, 이제 그 말을 언문(훈민정음)으로 직접 써서 읽거나 정확히 듣게 하면,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모두 다 쉽게 알아들어서 억울함을 품을 자가 없을 것이다. 세종이 이 말을 정확히 언제 얘기했는지 모르지만 1444년 2월 20일에 최만리 등이 올린 갑자 상소문에서 세종의 말이라고 인용되어 있다. 실제로 가장 중요한 훈민정음 창제의 핵심 동기가 바로 이러한 소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세종은 자신이 직접 쓴 《훈민정음(해례본)》서문에서 그런 점을 밝히기도 했다.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끝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라고 하였는데 바로 재판 과정에서 한자 사용으로 인한 불소통 문제를 정곡으로 찌른 것이다. ▲ 훈민정음 언해본 어제 서문 통치자가 죄인과 관련된 문서나 판결문에 쓰인 문자까지 고민하고 배려한 사례는 세계사적으로도 없는 일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겨우 일어선 현대조선이 쓰러질 수도 있는 위기였다. 그러자 정주영은 다른 위기에서 그랬듯이 또 다시 역발상을 한다. 그까짓 거 만들어 놓은 배를 가져가지 않으면, 우리가 그 배로 직접 사업을 하자. 무수히 시련을 당했던 정주영. 그러나 그때마다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톡톡 튀는 기발한 생각으로 헤쳐 나오던 그였다. 정주영은 1976년 3월 골칫거리였던 해약당한 초대형 유조선 3척으로 아세아상선을 설립해 해운업에 나섰다. 우리나라에 수입해 쓰는 기름을 우리가 우리 유조선으로 운반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동안은 남의 나라 배로 기름을 실어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업이든지 그에게 호락호락한 것은 없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 기름을 실어 날랐던 외국 선박회사들은 수송권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1400만 달러를 달라고 했다. 그야말로 칼만 안든 강도였다. 그동안 우리나라에 유조선이 없어 자기네 배를 돈 주고 빌려 썼지만 이제 배가 생겼는데 당연히 우리 배로 실어 날라야 하는 것 아닌가? 이제부턴 우리나라 배로 우리나라 기름을 운반해 쓸 것이므로 그에 다른 조건이 있을 수 없다.며 거절했다. 버티던 아세아상선은 결국 그들에게 돈 한 푼
[그린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1418년 세종이 임금 자리에 오른 지 네 달 정도밖에 안 된 12월 25일(음력) 어느 날이었다. 신하들과 함께 경연을 하다가 세종이 이렇게 말했다. 《고려사》를 보니 공민왕 때부터의 역사 기록은 정도전이 들은 바에 많이 의존하다보니 어떤 것은 더 쓰고 어떤 것은 줄이고 하여, 역사 기록을 맡은 사관들의 처음 원고와 같지 않은 곳이 매우 많으니, 어찌 뒷세상에 기쁘게 전할 수 있으랴. 차라리 이런 역사책은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니라. 라고 말하였다. 고려 공민왕 이하의 역사 기록이 정도전 등 개국공신들로 말미암아 왜곡되어 실제 기록과 다름을 알고 지적한 것이다. 변계량과 정초도 임금의 말에 공감하여 함께 아뢰기를 만약 역사의 진실을 기록하여 세상에 전하지 않는다면, 뒷세상에서 누가 전하께서 정도전의 역사 기록을 바로잡고자 하는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문신에게 명하여 고쳐 짓도록 하소서.라고 하였다. ▲ 그림 오수민 그 다음 해인 1419년 9월 20일에 세종은 변계량 등에게 《고려사》를 고쳐 쓰도록 지시하였다. 이렇게 하여 고려사를 바로 쓰는 대사업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세종이 임금이 되자마자 역사바로잡기에
[그린경제/얼레빗=김동규 음악칼럼니스트] 매월 마지막 주 일요일 오후 4시 경. 서울 남산 중턱에 자리 잡은 남산도서관 버스정류장 앞에 이색적으로 가슴에 안중근의사의 유묵을 어깨띠로 두른 대학생들이 등장한다. 내 동지들이다. K-문화독립군 청소년들이 K-문화독립운동을 위하여 안중근의사기념관 상설문화공연을 안내하는 것이다. ▲ K-문화독립군으로 나선 청소년 로타렉트3650 학창 시절 내 별명 중에 하나가 돈키호테였었다. 친구들은 내 이름 김 동규를 변형하여 동큐호테=돈키호테라고 불렀었다. 그런데 요즘은 내가정말로 돈키호테가 된 느낌이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진해서 기사도를 발휘하며 남산에자리 잡은안중근의사기념관을 돕기 위하여 한가지 좋은 일을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중근의사기념관과 내가 인연을 맺는 것은 지난 3월 26일 안의사 서거일에 내가 작곡하여 부부가 함께 부르는 안중근 의사의 옥중편지 아들아 아들아(Dear My Son)를 순국기념식에서 노래하면서이다. 그날 기념식에는 여러 방송들이 취재를 나왔고 우리 노래를 방송에 내보내겠다고 미리 저작권 허락을 구하는 전화까지 주고받았었다. 그런데 당일 우리가 노래를 부를 때 그만 무선마이크에 방해전파
[그린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1441년 4월 어느 날이었다. 충청도 어느 시골 장터 옆 큰길가에서는 사람들이 길 위로 지나가는 뭔가를 보기 위해 서로 밀치며 난리굿이었다. 뒤쪽에서 볼 수 없는 사람들은 한 마디씩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도대체 뭐가 지나가기에 이리 난리여. 나라님이라도 지나가는 거유 나라님보다 더 인기가 있는 걸. ▲ 세종 때 발명한 반자동 거리 측정 장치 기리고차(記里鼓車), 장영실이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 (그림 오수민) 자세히 보니 기리고차라는 괴상한 마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마차 위에는 북이 징이 있었고 일정한 거리마다 징과 북을 치고 있었다. 징과 북을 사람이 치나 했더니 그것이 아니라 마치 로봇 같은 나무 인형이 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신기해하다가도 놀랍고 재미있어서인지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고는 연신 비명이었다. 이 사업 역시 세종 임금이 직접 관여하는 국책 사업이었다. 온나라 땅을 과학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기계인 기리고차를 만들어 전국의 지리를 체계 있게 정리하여 과학적인 지리서를 만들기 위해 나무인형이 북 또는 징을 쳐서 거리를 알려주는 반자동 거리 측정 장치를 개발하여 측량하던 참이었다. 마치 택시 요금 측정기나 마
[그린경제/얼레빗=김리박 시조시인} 외 반딧불 무엇을 떨궜다고 빛 잃은 반딧불아 이제는 고이 가서 다음 해에 넘겨야지 논에는 여기저기를 누렁 이삭 고요하니 ▲ 무주반딧불축제 한 장면(무주반딧불축제위원회 제공) ** 김리박 : 대한민국 한글학회 일본 간사이지회 회장 재일본한국문인협회 회장 대한민국 문화관광부선정 한국어어문 지킴이 (황금상) 2006년 일본 히라가타시 교육위원회 조선어강좌 특별강사 일본용곡대학(龍谷大學) 한국어강좌 강사 일본관서대학(關西大學)비교지역문화강좌 강사 누리편지 ribak@hera.eonet.ne.jp
[그린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1421년 3월 24일, 세종이 임금으로 나라를 다스린 지 3년째 되던 해였다. 지금의 충무로 지역에 있던 인쇄 관청인 주자소가 왁자지껄하였다. 세종 임금이 친히 보낸 술 120병이 도착하였기 때문이다. 임금 심부름으로 온 내시는 주자소 관원들에게 술병의 의미를 설명하였다. 어명이오. 그대들 애쓴 탓에 인쇄 속도가 빨라져 더 많은 책을 빨리 찍어낼 수 있게 되었다고 임금님께서는 더없이 기뻐 하셨소. 그동안 고생 많았으니 오늘은 맘껏 쉬며 술을 마시고 회포를 풀라는 어명이오. ▲ 서울지하철 4호선 충무로역 5번 출구 극동빌딩 앞 화단 안 주자소터 표지석 세종은 인쇄술을 끊임없이 개량하여 문화의 꽃인 출판문화를 크게 드높이게 하였다. 인쇄 개량 전에는 글자를 구리판에 새겨 놓고 사이사이 납을 끓여 부어, 단단히 굳은 뒤에 찍었기 때문에 납이 많이 들고, 하루에 찍어내는 것이 두어 장에 불과하였다. 이때에 세종이 이천과 남급으로 하여금 구리판을 다시 주조하여 글자의 모양과 꼭 맞게 만들었더니, 납을 녹여 붓지 아니하여도 글자가 이동하지 아니하고 더 정확하여 하루에 수십 장에서 백장까지 찍어낼 수 있었다. 《자치통감강목》 같은
[그린경제/얼레빗 =김슬옹 교수] 1433년 9월 초, 강원도 어느 농촌, 가난한 시골 마을이었다. 한 아주머니가 이웃집 아저씨가 몹시 아프다는 말을 듣고 병문안을 하러 왔다. 아저씨는 어디가 아프대유? 어제부터 식은땀이 멈추질 않아요? 그럼 어서 의원님께 보이지 않구. 하루하루 벌어먹기 힘든데 그럴 형편이 되나유. 그럼 최좌수 댁에 《향약집성방》이라는 민간치료법을 모아 놓은 책이 있다고 하니, 그 집 가서 물어봄세. 두 아낙이 최좌수 댁에 가니 마을 어른 구실을 톡톡히 하는 최좌수가 《향약집성방》이라는 책에서 실제 그 병세에 해당하는 처방을 친절하게 일러 주었다. 책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밀 쭉정이 적당한 양을 세지도 약하지도 않은 불에서 보드랗게 가루 내어 한번에 두 숟가락씩 미음에 타서 자주 먹는다. 묵은 밀을 마른 대추와 같이 달여 먹어도 좋다. 실제로 이와 같이 하니 식은땀이 멈췄다. 이렇게 어려울 때 《향약집성방》이란 책이 무척 요긴하게 의원 구실을 하였다. 마침 세종이 1433년 8월 27일에 향약집성방을 전라도와 강원도에 나누어 인쇄할 것을 명했기에 강원도 농촌에까지 이 책이 들어올 수 있었다. 동네에 한두 권뿐이었지만 급할 때 응급조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기자]김원국 (1873-1910) 선생은 아우와 함께 광주 무등산에서 거의하여 전남 중서부 지역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다 영광 불갑산 전투에서 체포되어 교수형으로 순국하였고, 김원범 선생은 전해산과 대동창의단을 조직하여 중군장으로 활동하다 일본군과 교전 중 체포되어 자결 순국하였다. 1907년 7월 고종의 강제퇴위와 정미7조약의 체결, 그리고 이어진 군대해산 조치로 일제의 식민지화가 본격화 되자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났고 곳곳에서 교전이 끊이지 않았다. 그중 특히 전라도 지역은 1908년 이후 후기의병의 절반이상을 차지할 만큼 수많은 의병부대가 활약한 곳이었다. 김원국, 김원범은 전라도 광주 출신의 형제 의병장이다. 형 김원국은 1905년 광산군 송정리에서 일본군을 타살한 후 이듬해 3월 무등산에서 300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고, 동생 김원범은 그 선봉장이 되었다. 1907년 9월에는 호남의병장의 거목인 기삼연 의병부대에 합류하였고, 이어 12월 김준과 합진하여 일본군 4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 김원국 의병장(형) 아우 김원범은 1908년 7월 전해산 의병장과 함께 대동창의단을 조직하여 중군장으로서